02. 관도전투(官渡大戰, 200년)
관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는 순전히 조조가 원소의 침공군을 저지했던 것으로서, 적벽대전에서 유비, 손권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멸망 위기에 몰렸던 조조의 세력이 운신할 여유를 확보했다는 것으로 한정해야 타당할 것이다. 또한 당시까지 '협천자'를 명분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조조가 강대한 군벌인 원소를 이김으로서 조조의 명성은 이 승리를 밑바탕으로 해서 빠르게 치솟게 된다.
관도대전 이후의 세력 구도는 원소가 사망하기 이전에는 본인의 세력권과 가신들은 큰 소모 없이 유지되었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 사후 원소의 세력을 정리하려다가 패배하여, ‘지금까지는 전투에서 져도 처벌을 안했는데 앞으로는 전투에서 지면 처벌할 것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부분이 조위정통론을 내세우는 진수가 고의로 조조의 패배를 누락함으로서 팬덤에서는 조조가 ‘원씨 세력? 그냥 냅두면 알아서 후계자 싸움으로 자멸할거 같아.’라고 쿨하게 물러난 것으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며 실제로는 조조는 원소 사후 원소 후계자를 정리하려다가 패배하여 어쩔 수 없이 물러난 것이다. 실제로 진수의 삼국지를 제외한 당대의 모든 역사서에서 조조의 패배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조는 승리해놓고도 본인과 가신들이 원소의 파워를 잔뜩 의식하고 있었다. 조조가 획득한 명성과 제후는 아직 완전히 역전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원소 사후 후계자 내전과 합쳐지면서 이후 조조가 역전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조의 진정한 승리는 원소가 죽고도 시간이 걸린다.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였으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질이 거만하고 괴팍하며 스스로 높여서 선행을 하는 데는 모자랐다. 이런 까닭으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원소는 질래야 질 수 없게 완벽한 판을 짜는 능력까지는 여전히 뛰어났으나, 결국 침공에 실패하여 후세에도 두고두고 비난과 조소를 당한다. 대다수의 삼국지 작품에서는 관도대전 하나로 원소의 캐릭터를 잡고 부당할 정도로 까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의 중대한 실책들을 원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나타난 판단력 저하의 일부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나이부터 완벽에 가까운 정치책략으로 세력을 키웠던 원소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혹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21세기에는 원소가 무능력으로 져서 홧병에 걸려 죽었다는 조조 중심의 해석보다는, 원소가 과로사하기 몇 년 전부터 보인 몇 가지 단점들이 결합된 모습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워털루 전투 당시에 환상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인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병으로 지휘를 놓은 사이 전황이 바뀐 것을 생각하면 아예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다. 실제 중국사학계의 거두인 장쯔위안 선생도 저서를 통해 이러한 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도부의 부패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현대의 독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삼국지연의 이래로 지나치게 영웅주의 중심으로 단순화 되어버린 원소의 실책이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인 정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가깝다. 거기에 원소는 조조, 손권, 입촉 후의 유비 등 다른 거대 군벌들처럼 참모진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유대를 보여준 바가 없다. 원소는 사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체제의 문제로 돌리기엔 동시대에 원소 이외에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드니 변명으로 삼기엔 빈약하다지만, 엄밀히 따져 참모 간에 내분과 음해로 보면 말년의 손권(손제리)라는 원소보다도 더한 인간이 있으니 이걸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결국 유력군벌 가운데 그런 체제를 돌린 게 원소뿐이고 결국 그 체제로 인해 무너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체제의 문제라면 군주의 카리스마가 붕괴가 곧 그 세력이 와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원소 사후의 원가가 딱 그런 식으로 무너졌다.
원소 이상으로 부하들의 인선과 후계자 문제에서 중대한 실책을 계속 저질렀던 손권은 자기가 죽고 나서 나라가 심각한 내분으로 완전히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사후에 세력이 바로 와해되지는 않았다. 원소가 죽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원소가 있는 한 어쨌거나 바로 무너지지는 않는 체제였으니까. 이렇게 보면 원소를 너무 띄워줄 필요도, 그렇다고 너무 폄하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를 누르고 하북 4주를 순식간에 아우른 것도 원소고 그걸 결국 유지하지 못한 것도 원소인 만큼 원소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건 딱 거기까지만 평가하면 될 일이다.
지구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훗날 삼국정립을 이룬 조조, 유비, 손권 역시 이런저런 문제는 있었고 특히 원소 뺨치는 참모진 분열을 대놓고 조장한 손권도 있긴 하지만, 원소의 경우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원소는 이 시대 거대군벌 가운데 확장속도가 제일 빨랐다. 기주에서 제대로 세력을 불려 하북 4주를 모조리 제패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7∼8년 정도인데, 관도대전 당시는 전풍의 말대로 급속한 확장 이후 그걸 제대로 정비해야 할 때에 가까웠다. 원소가 선택한 체제적 한계를 생각하면 더 그랬는데 원소는 공손찬이라는 거대군벌을 완전히 정리하자마자, 비록 본인보다야 약하다지만 조조라는 거대군벌과 다시 충돌한다는 무리한 결정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결국 내부적 모순이 터져나오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 관도대전의 대패라고 할 수 있으니, 원소는 중요한 위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원소가 조조를 먼저 치면 몰라도 조조가 원소를 먼저 친다는 건 세력구도상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원소가 몇 년간 내부를 다지고 후계 구도를 잡아도 괜찮았다는 것이 관도대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도 부합한다는. 이 의견은 조조는 하북 4주라는 땅을 흡수하면서 위나라의 형태를 거의 완성했는데, 그도 잦은 원정을 하긴 했지만 본거지를 하북의 중심지 업으로 두고 하북을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만드는데 주력했으니 이 점에서는 둘이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북출신들이 지구전을 주장했다고 원소를 재평가 하는 차원으로 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거나, 단순히 조조의 협천자 논리에 굴복했다거나, 또는 천하통일보다 하북의 이득을 앞세웠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으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애초부터 이각, 곽사 혼란 때 원소에게 누 차례 협천자 옹립을 권했던 전풍, 저수 등이 하북 출신들이었고 조조에 대한 전략 또한 조조가 원술, 장수, 유표, 여포 등과 싸울때 조조의 뒤를 치고 천자를 차지할것을 강력히 원소에게 권했을 정도로 오히려 군웅할거 초반에는 오히려 매파에 가까웠다. 반면 그 시절 땐 오히려 원소를 비롯한 외부출신들이 조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풍과 저수의 예측대로 협천자를 방치한 결과는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황하 이남의 군벌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고 한 황실의 위세를 높히니 (표면적이나마) 비록 힘으로는 원소가 앞서지만 명분으로는 딸리는 형국이었고 관도대전 바로 직전 시기 하북 호족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애초부터 (협천자)를 하랄 때 하지 않고 지금 와서 난리를 피운다'라는 일종의 군주(원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시 전풍, 저수가 우려한 대로 일찍이 조조를 손봐주지 않음으로 급성장을 한 조조가 청주, 하내에서 협천자의 이점을 살려 원소세력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조조의 흔들기에 넘어간 선우보 같은 케이스를 보면 원소가 협천자와 조조를 방치한 판단이 미스였다는 점이 적나라게 드러난 셈이고 원소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게 됐다. 조조의 관직 뿌리기가 하북에 생각보다 동요를 일으켰다는 정리가 될 것이다. 실제로 어정쩡한 군벌들은 조조가 하북 입성하자마자 조조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소세력의 구심점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타개책은 군사적인 성과였고 원소입장에서는 이제는 관도대전을 속히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이 말대로 조조는 황제를 끼는 데 성공했고 당시만 해도 조조 세력은 후한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다.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정의 영수격이 되었으며, 이에 맞서 후한 조정을 전면 부정하고 독자적인 칭제건원으로 대응하던 원술을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원술은 비록 회남에서 재기하며 자리잡은 기반이 아직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후한 조정이 조조를 중심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진 여전히 내전기의 핵심 군벌 중 하나였다. 원술이 조조와 손잡은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연달아 참패하면서 유동적이었던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에 따라 통치력이 확고히 미치진 못했으나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펼치던 세력권이 공중분해되었는데, 비록 조조는 같은 시기에 형주에서 할거하며 대립하고 있던 유표를 제압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조정의 영수로서 각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나라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구호를 내걸던 조조의 위상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즉, 조조가 받드는 한실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당대의 유력자들은 게임에서처럼 제각기 자기 주군이 천하를 통일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내전기라는 인세에 강림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라는 대안을 훨씬 설득력있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실제 조조의 협천자와 원술의 몰락 과정을 전후해 한실의 힘이 복구되었다고 여겨지자 예주와 형주 북부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을 갖추고 있던 이들이 조조에게 귀부한다. 조조의 협천자와 이에 대응하던 원술의 몰락을 기점으로 시대적 패러다임이 점차 '내전기의 영웅' 원소가 아닌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를 주도하는 '한나라 조정의 수장' 조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소에게 대장군 주는건 그 체제 내에서의 지위 인정일 뿐이지 결국 원소는 부차적 입지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합법 정부니까 군벌들을 꼬드길 때 훨씬 유리하고 실제로 조조가 원소가 장악한 기주와 병주에서 관직 돌리면서 세력 이탈 꼬드긴 흔적은 꽤 발견된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황제권을 쥔 조조가 펼치는 장기적인 후한의 정상화, 애매한 군벌 끌어들이기 효과로 대표적인 거대군벌인 유표는 실제로 관도 전에 한번 세력이 조각난다. 휘하의 장선이 후한 정부인 조조 세력에 붙겠다고 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거기에 한숭 같은 인사를 보면 조조한테 나 보내면 나는 한의 신하지 유표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는 판이라 유표가 못 죽이는 상황도 발생한다. 유표 끄나풀 노릇하던 누규, 장수-가후 라인은 아예 조조 쪽으로 이탈한다. 물론 유표도 마냥 호구는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긴 하고, 헌제가 황제처럼 구는 유표를 보면서 힘이 없어 그냥 이를 가는 상황도 발생하긴 했지만 정작 유표도 한실의 권위 앞에서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을 보면 조조가 끼고 상황이 안정된 후한 조정의 후광은 마냥 약하지가 않았으며,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아직 역적의 대명사 망탁조의의 멤버가 아니다. 조조는 반동탁연합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탁을 공격한 인사 중 하나였기에, 조조가 한실에 충성하는 자라고 순욱이 믿었듯이 한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즉, 이때까지 조조는 후한 구해낸 대영웅 코스프레 하는 상태고 그게 또 어떻게 먹히는 상태였다.
이런 점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고 위세가 절정에 달해 교만해지자 일방적으로 공물을 끊고 황제를 꿈꿨다는 진수의 해석은 세력면으로만 따지면 그렇지 오히려 협천자라는 압도적인 명분을 등에 업은 조조의 원소에 대한 기선제압 시도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원소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소는 더이상 이를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힘만 믿고 이미 명분을 쥔 조조를 공략하기에는 전풍과 저수가 지적한대로 상당히 까다로워서 오히려 공손찬을 깨뜨리고 북중국을 통합한 상승세가 무의미로 흘러갈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도대전이 일어난 200년, 원소가 그토록 원하고 절실히 필요했던,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그대로 뒤집어 엎는 사태가 발생한다. 헌제가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암살지시를 내린 반 조조 친위쿠데타 의대조 사건이 실패하고 그 사건 주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가 서주를 거쳐 하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반 조조의 명분덩어리 유비를 몇백 리까지 나가 친히 맞이해 기회를 잡은 원소가 휘하 세력이 더 이탈하기 전에 빨리 일을 벌여버린 것이다. 원소가 유비를 받아들이고 돌린 격주군문만 봐도 자기가 핍박받는 헌제 구하는 충의지사 코스프레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는 역적 동탁 Mk2고. 격주군문에는 절반이 조조 개인사를 까는거고 절반이 조조가 황실을 능멸한다고 까고 있다. 원소는 유우 추대 실패 이후 가짜 황제라고 까던 헌제에 충성하는 충신행세를 하는 정치철새인 인간이니 이런 뻔뻔함도 보였을 것이다.
후일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유비와 손권이 극복했던 이유가 반 조조 세력의 거두 유비가 나서서 일개 지방 토후에 불과했던 손권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각각 한중 공방전/조비의 남정에서 승리하여 자신들의 독립성, 적어도 촉과 장강 이남에서는 독립세력으로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차 입증해냈기에 촉한과 손오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뚜렷한 명분이 없었던 원소에게는 유비가 바친 명분으로 인해 비로소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조조와 원소의 대결이 바로 관도대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구전으로 가면 원소만 내정 회복하는 게 아니라 조조의 경우도 시간을 주면 파괴된 서주, 예주, 연주의 빈 농지에 사람들 데려가서 농사시키고. 농사시켜서 사람들 먹이면서 내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 당연히 초기에는 투자대비 아웃풋이 높지만 농지에 사람들이 어느정도 차게되면 투자된 자원대비 효율은 낮아지다가, 회복이 절정에 이르면 더이상 자원이 투자되더라도 추가이득은 0이 되는 시점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빈 땅도 결국 관리하기 편하고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부터 사람들 채워넣을 텐데 조조의 파괴된 땅들인 서주, 연주, 예주의 경우엔 이런 식으로 남아도는 비옥한 땅에 사람들을 정착시켜 회복이 빠를 수 있지만 원소 세력의 핵심지 기주의 경우, 전란의 데미지 적게 받았다는 가정 안에서는 이미 그런 땅들은 어느 정도 차서 관리되는 상태일 테니까, 기주는 그런 극적인 효과까지는 못 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오히려 조조의 회복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직 군사적인 우위를 확실히 점하고 또한 의대조 사건으로 어느정도 명분을 회복한 원소에게는 혹시라도 있을 조조의 세력 회복의 여지를 주지 않고 박살내겠다는 전략은 마냥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원소는 이각, 곽사의 내분 기회를 놓치고, 조조가 장수/유표에게 고전했을 때 전풍, 저수 등 기주 인사들의 조조의 뒤를 치고 천자를 확보하라는 진언을 무시함으로써 원래 자신과 비교해 세력이 미약했던 조조가 협천자를 통해 본인과 견줄 정도까지 성장하는 것을 방치했고, 그런 이유로 사실 원소는 조조를 물리칠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이미 놓쳤다. 그 실책을 만회하고자 1인 독재체제를 확고히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하북인사-외부인사의 분쟁을 부추기고 후계싸움을 스스로 유도한 결과, 관도대전 당시 내부적으로 원소의 지휘부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원소는 본인의 유일한 강점인 세력 우위를 100 퍼센트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5.3. 전풍과 저수를 무시해 진 전투인가?
관도대전은 저수와 전풍의 발언이 인상이 강해서 '원소가 충신들 조언 안 받아서 망했다'는 인상이 강하고 초전부터 원소군의 명장인 안량, 문추 죽은거 보면 실제로도 그런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조조가 전 전선에서 죄다 밀리는 흐름이고 조조를 결과적으로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주는 다 들고 일어나고, 안량이 죽은 것도 관우가 미친 듯한 하드캐리로 놀라운 전과를 보인 탓이고, 문추가 죽은 건 확실히 원소군의 실책이긴 한데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전선은 여전히 죽죽 조조가 밀리고 관도에 틀어박히기 직전에도 합전에서 불리했다는 묘사가 나오고 나중엔 조조 병력이 만명도 안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나 부상자가 3할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나...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 보면 원소가 조조랑 술래잡기 끝에 조조 본대를 한번 맞붙었고 격파했다는 그림이 나온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관측 가능한 전쟁 진행사항으로만 보면 원소 측이 이기는 판이다. 그리고 막판에는 조조군 군량미가 고갈난 상태에서 쫄쫄 굶은 조조군을 관도에 가두어 놔두고 잠시 지구전으로 상황을 유지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소 전투에서 원소의 판단 미스와 정치질이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오소에 경기병 외 지원군 더 보내자는 장합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설령 오소에서 이겼더라도 조조는 소수의 별동대 가지고 간신히 혈전 끝에 순우경을 이겨놓고 원소 세력 한 가운데서 곧장 압도적인 원소 본군과 마주해서 그냥 인생 종치는 거였다. 그리고 오소 전투에서 패하긴 했어도 아직 원소군이 와해된 것도 아닌데 원소의 정치질로 과도한 총애를 받는 곽도가 오소 패전에서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장합을 모함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장합이 군영에 불지르고 배신해서 군대가 혼란에 빠지고 이 와중에 원소가 10만 명 놔두고 튀는 일 없었으면 오소가 불탔다고 조조 진영의 식량난이 당장 해소되는 게 아니니 어쨌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원소가 이길 판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원래 역사처럼 대패할 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관도대전이 전풍, 저수의 조언 때문에 지구전과 대비되는 '속공' 취급을 받는데 오히려 관도대전은 지구전에 가까웠다, 관도대전은 절대로 그렇게 짧은 전투가 아니다. 관도대전은 도하거점 하나씩 먹으면서 천천히 진군하고, 현지 반란 엄호하고 조조군 후방거점으로 병력도 보내서(혹은 일어난 반란에 관직 줘서 이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보급 막아가면서, 병력으로 조조군을 압도하여 공격해 부상자를 속출시키고 관도에 고립되게 만드는 등 할건 다 하면서 간 싸움으로 실제로 조조군의 보급이 막혔던 건 이런 적극적인 후방 사보타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조조군의 군량이 부족해진 게 1차적으로는 유비와 유벽이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많은 군현의 호응을 받아 다수의 무리를 모아 허도를 노리며 돌아다니고 거기다 예주 전역이 거의 다 조조에게 돌아서서이고, 2차적으로는 각지의 도적들이 보급을 노리고 관도에 갇혀있는 상황상 본영에 군량이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서인데 막상 관도에서 원소군이 붕괴하고 조조가 이겨서 추격하는 시점에선 원소군 잔당 소탕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지속적인 작전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후방에서 하후연이 군량 보급을 무난하게 해주어 작전에 무리가 없었다. 창정전투를 거쳐 하북까지 쭉 가는걸 보면 결국 세력 내 물자가 제대로 분배될 수 없던 상황인 거지 물자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봐야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서의 표현과 달리 관도대전은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아예 무시하고 원소가 독단적으로 치른 전투가 아니었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서 전풍과 저수가 했던 발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지금은 피폐하니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이게 안 통하면 조조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黎陽)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河南)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을 초략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2, 3년 안에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저 조언과 관도대전의 실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양에 주둔하면서 차츰 하남에 군영을 짓는다?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 지역을 다 공략한다? 그것을 실제로 벌인 게 관도대전이다. 그러니까 전풍, 저수안은 가만히 잘 살펴보면, 적어도 관도대전 내부 경과에 한정해선, (원소가 말을 안 들어서 망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 실린 이들의 지구전안에서는 농사짓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과 하남 진출과 동시에 후방 사보타주를 진행하는 안이 별도다. 이 안건과 실제 관도대전의 차이라고 하면 이들은 허도 주변을 공략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초략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황건적 유벽이 조조에게 반란해 원소에 호응했고 파견된 유비와 현지의 유벽이 같이 돌아다니면서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유비가 여남을 중심으로 예주 은강현 등 허도 남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무리를 호응하게 해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들에게 군현 다수가 호응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이런 유비와 유벽의 활약과 더불어 예주가 거의 다 원소에게 호응했다는 실제 상황이 오히려 전풍, 저수안보다 더 성공적이고 원소 쪽으로 민심을 확실히 사로잡는 사보타주였다는 차이점이 있고, 예주 공략 당시 기병을 썼냐 안 썼냐는 확인이 안 되는 부분 정도다. 또 어차피 하남에 도하해서 군영 짓는 순간에 그게 대규모 도하작전이 되는 건 피할 수가 없다. 실제 관도대전이랑 비교해보면 원소 본대의 조조 압박이 명시되었냐 안 되었냐 정도 차이지 나머지는 다 했다. 한 마디로 전풍, 저수의 제안과 실제 관도대전이 진행된 대략적인 전개방식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여기서 분명히 실제 역사와 전풍, 저수의 안건이 결정적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관도 압박'의 존재유무 뿐이고 그나마도 이들이 그거 하지 말라고 명시해서 아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풍과 저수가 직접 발언을 안 했다는 것에 불과한데 어차피 하남에 군영 차리고 군사활동 하는 건 똑같으니 다를 게 없던 것이다.
그리고 전풍과 저수의 의견 중에선 굳이 원소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도 존재했기에 원소가 겉으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존재한다. 일단 이들은 조조의 군사가 더 강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조조를 띄워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조조는 안량, 문추 등 원소의 상장들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원소 본대와의 합전에서는 대패했다는 정황 증거가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이후, 허유가 배신하면서 오소가 함락되기 전 원소군은 조조군을 궤멸 직전의 상태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딱히 조조군이 더 강하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가 없다.
또, 실제로 원소는 저수와 전풍의 방안을 채택하면서도 그들의 의견대로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허도 일대 예주를 약탈하기보단 유비, 유벽을 이용해서 오히려 현지 호응을 얻고 민심을 얻는 방향을 사용했다. 즉, 원소는 적당히 필요한 부분은 듣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는 기록은 뭘까? 그것은 우선 원소 특유의 정치스타일에서 기인한다. 참모의 단물만 빼먹은 다음 은근히 견제하고 무시하고 내분 조장하는 그 스타일 말이다. 한마디로 원소가 두 사람 계획안의 알맹이만 쏙 빼먹고 전풍이랑 저수를 엿먹인 뒤 견제질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말은 다 들을 거면서 정치질 하느라 면전서는 개무시하고 면박준 꼴이고 거기다 더해져 조조는 이기고 나서 그걸 뭐 어마무시한 사실인 마냥 언플해서 원소를 멍청한 군주로 만든 것이고 사서에 이게 그대로 적히면서 실존하지 않았던 '완벽한 조언과 이를 완벽히 무시한 원소' 흐름이 된 것이다.
다만 조언에선 일단 농사짓고 백성을 안정시키다가 이게 안 통하면 전략을 시행하자는 것이고 기한이 2년, 3년 정도로 잡혀있기 때문에 관도직접 대치를 지지하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이들이 지구전을 아예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볼 수 있다. 또 안량 혼자 보내지 말라는 저수의 조언같은 경우는 원소전에서는 저수의 진언을 거절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혼자 안 보낸 게 무제기에 너무 명확하게 적혀있기 때문에 '무시하는 척하면서 안건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실제로는 의견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원소가 안량과 같이 보낸 인물들이 곽도, 순우경이라는 거물급 인사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원소의 독단적인 정치질과 함께, 조조 측의 원소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일정 이상 실존했기에 사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다. 바로 앞에 말했듯 맞상대한 조조가 실제 관도대전과 이 제안의 유사함을 모를 수가 없는데 원소랑 나눠서 원소 깔아뭉개고 전풍과 저수 극찬을 하고 있으니까. 한 마디로 원소가 여기서 한 게 속 보이는 정치질이고 왜 기주 출신 박대하는지 모를 일이라 욕먹을 건 맞는데, '원소는 적절한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 쓴 멍청이'라는 조조가 욕한 거/사서에서 욕하는 거와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소가 전풍과 저수 등 참모의 단물만 쪽쪽 빼먹은 '지구전'스타일 압박이 매우 효과적이었고 전황 또한 잘 나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전풍, 저수의 '지구전' 전략과 상반되게 곽도의 조언을 들어 순우경이 군량을 지키는 오소 구원보단 조조의 본진을 격파하는 '속공' 전략으로 바꿨는데, 바로 이것이 치명타가 됐고 결국에는 전풍과 저수의 전략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해서 대패했다고 볼 수 있다. 저수가 애초에 순우경에게만 병량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니, 장기에게 별동대를 인솔하게 하여 수비에 치중하라는 진언을 했으나 원소가 이를 무시했고, 또한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모험적인 공세보다는 이미 우위를 점한 전세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순우경에게 구원병을 보내 수비에 치중해야 된다는 진언 또한 흘러 들으니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한 셈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조조와의 대결 시기를 냉정하게 보면 역시 전풍과 저수의 이각, 곽사 내분 때 조조 대신 천자를 옹립하라는 진언을 무시하여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놓치게 됐고 이것은 명백히 원소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면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안 들어 망했다는 평이 얼추 성립하기는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도대전은 원소와의 전투에서 조조에게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이걸로 결정났다고 주장하는 건 매우 성급한 주장이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의 사후 원소 세력을 우습게 보고 정벌하였다가 원소의 자식들이 힘을 함쳐서 대응하자 대패하여 정벌을 결국 포기하고, 군을 물린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 볼때 관도대전 직후 뿐만 아니라 원소 사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조조의 세력보다 우월 하였으며, 조조는 단독으로 원소세력을 멸할 힘이 없었다.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멸할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관도 대전이 아니라 원소의 자식중 하나인 원담이 조조와 동맹을 맺고, 원상 세력을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시점을 넓혀서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한 것이 대세가 완전히 판가름 난 사건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인 것이 당장 생각해보자, 후한말 황건의 난부터 촉한과 오나라라의 멸망까지 계산하면 대략적으로 이 시대는 한 세기 정도의 시간대가 된다. 관도대전의 타임라인은 황건기의로부터 불과 16년 후의 사건이며 군벌의 난립과 삼국의 정립은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오랜 기간 진행되었다. 혹자는 조조가 하북을 먹었으니 사실상 통일이라고 주장하나,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말대로 천하 9주 중 6주를 먹었다고 해도 온전히 천하를 아우르지 않으면 그런 말은 무색하기 그지 없으며 누구를 정통이라고 칭할 수 없다고 당대부터 후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관도대전 이후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는 무려 한 갑자가 지나간 시간인 63년이 흐른 뒤였고 오나라는 관도대전으로부터 80년이 흐른 후에 망했다. 관도대전으로부터 60∼80여 년 후에야, 그것도 조조 자신이 세운 위가 아니라 그를 찬탈한 진나라에 의해서나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관도대전이 근래 재평가를 받다보니 결정적으로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적벽대전이 폄하받는 경우도 많은데, 단순 스펙상 최강자였던 원소를 무너뜨리고 조조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계기가 관도대전이듯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앞두었던 조조의 야망이 붕괴되고 그 위세 또한 무력화된 계기가 바로 적벽의 싸움이었다. 또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융중대가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다가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한중공방전과 형주공방전은 조조가 직접 천도를 언급할만큼 자칫하면 관도대전의 결과를 무력화시키고 천하의 판세를 뒤엎을 뻔한 사건이었다.
조조가 이렇게 총동원전을 펼친 건 관도, 적벽, 한중, 번성 공방전 정도인데 이 중 모두에 유비가 관련되어 있었고 조조는 결국 유비라는 존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진 덕분에 통일군주가 되는 데 실패했다. 조조의 천통을 저지한 유비라는 인물의 비중이 그만큼 삼국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원소랑 조조랑 붙었던 당시나 유비가 한중 먹었을 때 뒤집힐 확률이나 조조에게 심대한 위협이 된 건 매한가지였고 이후에도 제갈량의 북벌, 제갈각의 북벌, 강유의 북벌 등 위나라를 위협했다.
그래서 조조도 위기감을 크게 가졌던 것이고 사마의가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갈량의 위나라 침입으로 위나라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군권을 사마의에게 몰아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또 직계 황족들이 군권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사마의가 군대 조직을 장악했고, 결정적 순간에 뒤집기 한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여기에는, 조씨 일가의 삽질도 있었고 유비나 손권이 잘한 것도 있었고 제갈량이 잘한 것도, 강유가 분전한 것도 있었다. 물론 유비와 손권도 실수를 했고 그 때문에 결정적인 기회를 잡고도 삼국을 사마씨로의 정권교체에 넘겨 주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아 관도대전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성급한 얘기라는 것, 오의 고질적인 공격전 무능과 제갈량 사후 촉한 수뇌부의 신중론으로 인해 제대로 기회를 잡지는 못했고 기회를 잡았어도 이전 세대보다 지원을 덜 받았음에도 통일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보통 우리가 역사를 판단할 때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건 필연이었다' 라고 자주 말하는데 그건 후세에서 볼 때에나 그렇고 당시에는 필연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여러 변수가 얽히고 섥혀 하나의 가능성이 그저 우연으로 일어났을 뿐. 최소 산업화가 되지 않은 근대까지의 전쟁은 한 차례 대형 회전에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전쟁에서조차 수많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복잡한 세력의 흥망성쇠야 시작하기 전에 한쪽이 이겼다는 말은 옳지 않다. 관도대전도 적벽대전도 한중전도 가능성의 변화라고 보는 게 옳다. 그냥 몇몇 사람들이 고대시대 이야기인 삼국지에 현대적인 상황을 강제로 적용시킨 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대적인 관념을 삼국지가 있던 고대시대의 관념에다가 억지로 적용시켜서 자꾸 이런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요약하면 원소와 조조 간의 관도대전으로 모든 게 종결됐다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후일 발생한 여러 변수를 무시한 결과론에 불과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1200만에 달하는 하북인구에서 정남 10만동원하여 패배하였기 때문에 세력멸망이 되었다는 대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일단 관도대전이 시작하기 전에, 그 유명한 관우의 안량과 문추 참살이 프롤로그로 나오고, 관우가 오관육참장을 거치며 유비에게 돌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유비의 배신에 분노한 원소가 손책과 손잡으려고 했고, 당시 곽가의 "손책은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 운운을 듣고 격분해 있던 손책이 호응하여 성사될 뻔했으나, 손책이 급사하고 뒤를 이은 손권이 사실상 조조에게 회유되면서 전부 물 건너간다. 분노를 견디지 못한 원소는 기주, 청주, 유쥬, 병주 등에서 70만 군사를 일으켜 몸소 허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된다.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무시하고 진격하여, 심배의 지휘 아래 70만 대군의 위용이 펼쳐진다. 원소도 황금빛 투구 및 갑옷과 비단 전포와 옥띠를 두른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장합, 고람, 한맹, 순우경이 뒤를 따르며, 이에 질세라 조조도 허저, 장료, 서황, 이전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온다. 조조는 원소를 대장군에 봉한 은혜를 모르고 모반했다고 욕하고, 원소는 조조를 두고 승상을 자처하는 한나라의 도적이며 죄가 왕망이나 동탁보다 더 심하다고 욕한다. 반동탁연합 이후 조조와 원소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양 진영의 선봉으로 장료와 장합이 나서 4, 50합을 겨루며 조조가 감탄할 정도의 맞승부를 벌이고, 뒤이어 허저와 고람이 나와 싸우며 네 장수의 혼전이 벌어진다. 조조가 하후돈과 이전에게 각각 3천을 데리고 공격하게 하지만 심배가 준비해 둔 포와 쇠뇌와 궁수들에게 쫓겨나고 초전은 조조의 패배로 끝난다.
이후로는 한동안 정사대로 진행된다. 심배가 토산과 땅굴 작전으로 관도를 공격해 보지만 유엽의 계책으로 발석거를 이용해 토산을 파괴하고 땅굴은 참호로 막아낸다. 그리고 군량이 떨어져가서 조조가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지만 순욱이 보낸 만류 편지를 읽고 관도 사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한맹의 보급대를 서황과 사환이 격파한다. 거의 다 정사에 있던 내용이고 발석거를 벽력거라고 불렀다는 내용이나 순욱의 편지 등은 정사를 그대로 인용까지 했다.
그러나 오소 전투부터 정사와 달라지기 시작하며 재미도 급격히 떨어진다. 정사에 없던 내용으로 허유가 붙잡은 전령을 통해 조조가 식량이 떨어진 것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허도와 조조 본진 양쪽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진언하지만 원소가 조조의 속임수라고 단정하며 무시한다. 이때 정사대로 심배가 허유의 횡령을 알아내고 허유의 아들과 조카를 가두었다는 것을 보고하자, 원소가 벌컥 화를 내며 허유를 쫓아내는 탓에 허유가 배신하여 조조에게 오소를 치라고 제안한다. 웃기는 건, 분명히 앞에서 허유가 횡령을 저질렀다고 나왔는데 그건 얼렁뚱땅 넘어가고 어리석은 원소가 허유를 박대하였다는 식으로 서술되며, 허유가 분을 못 참아 자결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를 듣고 마음을 바꾸는 내용까지 넣으며 띄워준다.
그리고 정사에서 관도대전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던 오소 전투는 굉장히 싱겁게 진행된다. 조조 군이 원소군으로 위장하니 다들 깃발만 보고 의심을 안 하고 보내주며, 오소에 도착해 불을 지르고 공격하니 원소군은 아주 싱겁게 전멸해 버린다. 심지어 순우경은 술에 취해 자고 있었고 불길을 보고 튀어 나오자마자 포로로 붙잡혀 버린다. 이 와중에 원소는 천문을 보고 오소 방비를 주장하는 저수의 진언을 또 씹으며 찌질함을 보여준다. 정사의 명언으로 꼽히는, 조조가 “적군이 등 뒤에 이르거든 말하라!”라고 한 말도 나오기는 하는데, 조조가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었기에 정사의 극적인 느낌이 없다. 장합이 관도를 공격한 것도, 장합 본인은 오소를 구원할 것을 주장했는데 곽도가 관도를 공격하자고 우겨서 원소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놨다. 오소에는 장기를 보냈는데, 장기 역시 조조 군이 오소의 패잔병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고 지나치다가 장료와 허저에게 순살 당하고, 조조가 장기의 이름으로 '오소에서 조조군을 물리쳤다.'라고 거짓 보고를 보내니 원소는 그걸 또 믿는다. 대체 원소군은 피아식별 체계도 없는 것인지 안 물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장합과 고람은 길목을 지키던 하후돈, 조홍, 조인과 뒤에서 귀환한 조조군에 박살이 나서 도망친다.
순우경은 조조에게 코과 귀와 손가락을 다 잘린채 말 위에 묶여서 원소의 진영으로 보내진다. 순우경이 취해서 졌다는 것을 안 원소는 순우경을 당장 참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 것이 두려웠던 곽도는 장합과 고람이 애초에 투항할 생각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고 간하니까 원소는 그게 사실이라면 둘을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하고, 곽도는 여기에 장합과 고람에게 원소가 그들을 죽이려한다고 몰래 전해서 불안감을 부추긴다. 그 결과 귀환 명령을 전하는 원소의 사자를 고람이 베어죽이고 장합에게 투항을 주장했고, 장합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흔쾌히 받아들여 조조군에 합류한다.
조조의 환영을 받으며 합류한 장합과 고람은 다음 전투에서 선봉을 자처해 원소군의 태반을 궤멸시킨다. 오소에서 전멸한 건 보급대 뿐이니까 원소 군은 아직도 수십만이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그걸 태반을 전멸시켰다는 묘사는 한두 줄로 매우 짤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순유의 계책으로 원소의 본진인 업과 퇴각로인 여양을 동시에 공격한다고 헛소문을 내고, 원소가 여기에 넘어가서 군사를 둘로 쪼개자 조조는 이를 각개격파하여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원소는 갑옷도 못 입고 원상과 함께 도망치고, 이에 장료, 허저, 서황, 우금이 쫓아오자 문서와 의장과 금은보화도 다 내팽개치고 정사대로 800기만 데리고 달아난다.
관도대전 이후로도 조조가 원소를 계속 공격하고, 원소 사후 원담과 원상하고도 삼파전을 벌이며 결국 원소 세력을 전멸시킨다. 이 대목도 특기할 것이라고는 별 거 없고 조조의 계책에 원소와 원담과 원상이 멍청하게 당하면서 군사를 날려먹는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결국 초반부만 스펙타클했지, 정작 하이라이트인 오소 전투를 허무하게 끝내버리고, 정사에도 없는 원소의 추태와 패전을 추가하며 완벽하게 조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만드는 바람에 긴장감이 없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압도적인 세력과 능력을 겸비한 악역으로 자리잡은 상황이고, 원소는 반대로 세력은 크지만 늘상 허당스러운 모습과 실책을 연이어 범하는 덜 떨어진 인물로 그려져 왔기 때문에 누가 봐도 당연히 조조가 이기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라 긴장감이 전혀 살지 않는 것. 연의의 관도대전은 쉽게 말해 잘난 악당이 숫자만 많은 멍청이들을 때려잡는 내용이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독자들은 응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연의에서 관도대전과, 그에 뒤이은 조조의 하북 평정은 인기가 없는 파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의 기반 창작물에서 관도대전을 잘 다루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