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조용조(租庸調) 세법
조용조(租庸調)는 북위에서 시작한 조조(租調) 세제가 발전하면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에 정립된 조세 제도이다. 균전법(均田法)과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에 따라 농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균전제가 맨 처음 실시된 북위시대(北魏時代)에는 아직 조용조의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였으며, 제도로서 정비되기는 수(隨)ㆍ당(唐) 때에 이르러서였다. ❮당육전❯(唐六典)에 “부역(賦役) 제도에 넷이 있으니, 첫째를 조(租), 둘째는 조(調), 셋째를 역(役), 넷째를 잡요(雜徭)라고 한다.”라는 조문이 있었다. 여기에서 조(租)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곡물의 부과(賦課)를, 조(調)는 호(戶)를 대상으로 하는 토산물의 부과를, 역(役)은 중앙에 대한 노동력의 부과를 각각 청하였으며, 실제 역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대신 물납(物納), 특히 비단과 면포로 대납하는 것을 용(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서 잡요는 지방에서 필요에 따라 부과하던 노동력의 봉사였다. 그러므로 이 세제의 근본은 토지에 대해서 조(租), 사람에 대해서 용(庸), 호(戶)에 대해서 조(調)를 부과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당唐나라 중기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안사의 난(安史의亂, 755년∼763년)은 가까스로 진정되었지만 그 후의 당나라는 이미 이전의 당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안사의 난의 주모자는 주멸되었으나 거기서 분파된 군단은 하북을 중심으로 잔류해서, 표면상으로는 조정에 귀순했지만 사실은 절도사란 명칭을 갖는 군벌로서 할거를 계속했습니다.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위구르 원군에 의하여 뤄양, 장안 양경兩京은 황폐되고 영화를 자랑하던 도시 건축물과 문화재는 대부분 회신灰燼되어 구문화의 전통과, 문화담당자였던 귀족들은 괴멸의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난의 평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종래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무너져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특히 화북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염전매(鹽專賣)의 급증으로 당나라 왕조 전기의 체제가 붕괴되어 균전제하의 조용조 세법은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귀족세력은 타격을 받고 토호(土豪)와 상인들이 번진(藩鎭) 무력세력과 결합하여 정치적, 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게 되자 중국 고대의 율령지배 체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전의 당나라는 무천진 군벌 계통을 잇는 무력국가였습니다. 무력을 근간으로 삼아 무력에 의해 치안을 유지하며 법제를 시행하고 조세를 징수해 국가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환의 사이에 화폐가 개재하는 국면은 몹시 적었으며, 정부는 인민을 아무런 중개 없이 직접 군사 역역力役에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데 안사의 난에 직면해 정부는 이 같은 조직은 이미 완전히 시대에 뒤처져 있음을 발견하고 시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인민으로부터는 오로지 조세만 징수하고 그 조세에 의해 군대를 양성한다는 방법입니다.
숙종(肅宗)이 즉위한 지 3년(758) 만에 당나라 정부는 안사의 난 때 산둥(山東)지방의 반란군을 무찔러 잃은 땅을 회복함으로써 황제의 신임을 얻고, 강회조용사(江淮租庸使), 각도 탁지사(度支使), 염철사(鹽鐵使), 호부시랑(戶部侍郞) 등 재정(財政)의 요직을 맡은 제오기(第五琦, 729년∼799년)의 건의에 따라 각염법(榷鹽法), 즉 소금 전매제를 실시했습니다. 소금 전매는 일찍이 한나라 무제 대에 시행된 적이 있고 그 후에는 때로는 중단하고 때로는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 이래로 이것이 역대 정부에 답습되어 거의 중국의 국시國是인 듯한 양상을 드러냈습니다. 더욱이 그 목적이 군사비 충당에 있었으므로 세율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최초에는 소금 한 말을 원가 10전의 열 배인 100전을 부가해 110전에 팔았습니다. 이것도 엄청난 고가인데, 시대가 내려옴과 함께 정부의 재정난이 가중되어서 이에 따라 소금 가격도 올라서 310전, 또 370전이 되었습니다. 바로 원가의 37배인데, 당나라 이후의 각 왕조도 대체로 이 정도의 세율을 유지해 청조 말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매이지유신 이후 일본인이 중국에 건너갔을 때 소금이 사탕보다도 비싼 것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전매는 소금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소금과 거의 동시에 술의 전매가 시작되었는데, 이쪽은 실시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시행되고 때로는 중지되었습니다. 곧 차(茶)의 전매, 고아산세, 나루터세 등도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릇 세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백방으로 찾아내서 다 거두어들였던 것입니다.
숙종 다음 대종(代宗) 즉위 초에 양세법(兩稅法)이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균전법(均田法)의 폐지를 의미하며, 농민은 공전(公田)에 대해서도 토지 소유가 인정되고, 종래의 과역(課役), 즉 조(租), 용(庸), 조(調) 대신에 봄, 가을 두 계절에 세전(稅錢)을 상납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조(租)는 토지를 대상으로 거두는 곡물, 조(調)는 호(戶)를 대상으로 거두는 토산물, 중앙에 대한 노동력의 제공하는 역에 실제 종사하지 않고 대신 물납(物納)하는 것을 용(庸)이라 했습니다. 조, 용, 조 제도는 당나라 중기 이후 소농민의 파산, 균전법의 붕괴 등으로 인해 운영상의 문제가 거듭되자, 덕종 1년인 780년에 토지를 주된 부과 대상으로 삼는 양세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미 각종 상품의 전매법이 시행되고 정부가 금전 수입을 중심으로 재정을 운용하게 된 이상 토지세 또한 동전으로 납부하는 전납화(錢納化)가 되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던 것입니다. 다만 조세 부담자가 현금 수입원을 갖지 못한 농민이었기 때문에 동전으로 납부하는 방법은 실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비단과 곡물로 환산해서 납부하는 편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양세법의 첫 취지는 정부가 매년 예산을 세우고 예산에 따라 세금을 계상해 필요한 액수만을 징수할 예정이었지만 장기간 세입을 계산해 세출을 절제한다는 방식에 익숙해온 관료에게는 이것을 완전히 반대 방식으로 행할 적응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에 정한 세액은 그대로 언제까지나 답습되고, 부족해지면 그 부분만큼 증액하여 징수한다는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는 수단이 취해졌습니다. 그리고 토지 이용 상황의 변화 등에 대응해 새로운 토지대장을 바꿔 만드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과세가 불공평해지기 쉬웠습니다.
숙종으로부터 덕종(德宗)에 이르는 동안에 시작된 일련의 신경제 정책은 당나라란 국가의 성질을 일변시켰습니다. 여태까지의 무력국가(武力國家)는 이에 이르러 재정국가(財政國家)로 변질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재정을 우위에 두고 세입을 증가시켜 재정을 풍부하게 하면 평화도, 문화도 그것으로 산다는 생각입니다. 국내에 반란이 일어나면 금전을 주고 이민족의 군대를 고용해 사용하고, 다음에 이민족 국가로부터 침입을 받으면 금전을 주고 이와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재정국가 방식은 나중의 송나라 왕조에게 선례를 보여준 것이며, 또한 이것은 중국에 한한 것이 아니라 서아시아 문명의 오랜 나라들에서도 자주 실행된 정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