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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74. 수당시대의 도교(道敎)

작성자管韻|작성시간22.07.08|조회수86 목록 댓글 0

74. 수당시대의 도교(道敎)

 

 

 

 

도교(道敎)는 기원후 2세기경에 형성되어 지속적으로 발전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종교 중 하나이다. 표면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에 창립된 도가사상(道家思想)을 기반으로 하되, 그 내면에는 무격신앙(巫覡信仰: 샤머니즘)과 신선사상, 그리고 여러 주술적인 측면 등이 습합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현세기복(現世祈福)의 성향이 강한 것 또한 도교의 대표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특징은 어떠한 한 명의 교주로부터 독자적으로 창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세기경부터 몇몇 개의 교파로 나누어왔던 도교의 조직은 이후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 불교에 대응할 수 있는 종교원리로 주목받았고, 이후 수당시대의 황권에 의한 비호를 통해 본격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송원시대에는 내부의 이론적인 완성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명청시기 서민문화의 완성과 함께 민간으로의 유입에 성공하면서 점차 현재와 같은 도교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도교의 주요 범위는 기복적인 양상을 바라는 유형과 여러 주술적인 측면 및 의학적, 약리적인 측면들도 있고, 또한 실제 수련을 통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양생법(養生法), 내단법(內丹法) 등의 광범위한 여러 유형들이 있다.

 

도교사상의 밑바탕 중 하나인 도가(道家)의 원리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의 성질을 지니기 보다는 이세상의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자세로 일관했다. 즉 도가사상가들의 이러한 모습은 종교라기보다는 인생철학이나 현세를 살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도교의 이러한 현세기복, 현실을 중시하는 관념은 바로 이러한 처세술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민간에서 기원한 무격신앙(巫覡信仰)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노장사상(老莊思想)에 결합되고, 또한 한대 유학의 참위설(讖緯說)이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그리고 연단술(煉丹術)과 같은 양태가 뒤섞이게 되면서 초기 도교가 시작되었다.

 

또한 후한(後漢) 이후에 중국에 유입된 불교(佛敎)와, 송대 이후에 탄생된 삼교합일의 성격을 가진 성리학(性理學), 그리고 송대에 시작되어 명청시대에 완성되는 서민문화의 발전은 이후에 계속될 도교의 성장에 여러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면서 도교의 완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오두미도의 창시자 장도릉(張道陵)

그가 세운 오두미도는 이후 정일교(正一敎) 또는 천사도(天師道)의 모태가 되어, 중국 최대의 도교조직 중 하나가 된다. 초기도교는 무격신앙에 의한 주술적인 측면과 그 표면에 도가사상의 인물들을 접목시키는 등의 정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관리들과는 무관한 민간도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한 곳에서 일원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다원적으로 일어났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현실 정치와 관여되는 특징을 보이게 된다.

 

최초의 종교적, 정치적 조직으로서의 최초의 도교단체는 서기 106년 장도릉(張道陵)에 의하여 수립 되었다. 장도릉이 세운 이 단체의 이름을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하는데, 그 이름은 입교를 할 때 쌀 다섯 되를 바치게 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용호산(龍虎山)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던 그는, 교도들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암송토록 하였으며, 질병을 부적을 태운 물로 치료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 이를 계기로 그에게서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장도릉은 그들에게 그 반대급부로 일정한 양의 곡물을 바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장도릉은 정치적 세력을 가진 대중운동이 될 만큼 많은 추종자를 끌어 모으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강서성을 떠나 험난한 순례 끝에, 사천성과 섬서성 변경인 한중(漢中) 일대에서 종교왕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장도릉의 사후, 그의 종교적, 정치적인 지도자의 위치는 대를 이어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가 계승했다. 이들의 정치조직은 서기 215년, 오두미도가 위나라에 종속된 이후 소멸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종교적 지도자로서 지속적인 숭앙과 세력을 누렸다. 이후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어, 조조가 다스리는 북방지역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두미도 외의 초기도교인물과 그 단체로는 우길(于吉)과 그의 저서인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에 바탕을 둔 태평도(太平道)가 있었다. 우길이 『태평청령서』를 저술한 이래, 후한 순제(順帝) 때 우길의 제자인 궁숭(宮崇)이 이 책을 황제에게 진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어서 환제(桓帝) 때 양해(襄楷)가 다시 이 책을 진상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민간에서 이 책은 계속 읽히게 되었고, 마침내 기원후 184년(甲子年), 『태평청령서』에 기반하여 창립된 태평도(太平道)가 대대적인 농민혁명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주모자는 하북성(河北省) 거록(巨鹿) 출신인 장각(張角)과 그의 형제들로, 이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 창천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이 마땅히 일어설 것이네.) 라는 구호를 내어걸고 투쟁했다.

 

당시의 정치는 환관들의 농단과 호족들의 강성함으로 인해 민중들이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번 태평도가 들고일어나자 수십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8주(州)에 걸쳐서 들불처럼 봉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도의 이러한 정치운동은, 이들을 진압하여 자신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지방 호족들의 군웅할거에 따라 진압 당했고, 이후 남은 황건적의 무리들은 산동(山東) 일대를 전전하다가 또 다른 군웅 중 한 명인 조조(曹操)에게 흡수되어 청주병(淸州兵)이라 일컬어지며 그의 세력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도교의 역사-즉 오두미도와 우길, 태평도를 살펴보면, 삼자 모두가 민간도교적인 측면을 띠고 있었고, 또한 무격신앙의 요소를 기저에 깔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주술적인 도교 외에도, 실제 수련을 통한 수련도교의 양태도 이 시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춘추전국시기부터 있어왔던 방사(方士)와 신선사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연단술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연단술 중에서는 수은 등 광물질을 정련하여 복용하는 외단(外丹)이 있었고, 실제 수련을 통해 몸속에 단(丹)을 형성하는 내단법(內丹法)이 있었다.

 

이 중에서 한나라 때 내단법과 관련한 저작이 간행되었으니, 위백양(魏伯陽)이 저술한 『참동계(參同契)』가 그것이다. 또한 방사들을 통해 제왕의 장생을 위해 만들어지던 외단은, 삼국시대나 위진 남북조 시기와 같은 난세의 혼란기 때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삶의 불안정성과 연계되어 유행하기도 한다. 오석산(五石散)이나 한식산(寒食散)과 같은 류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러한 초기도교가 점차 성숙하기 시작하여, 현실 정치권력에 본격적으로 관여되기 시작한 시점이 위진 남북조 때였다. 이 시기에 빈발한 수많은 내전과 끊임없는 외부 침략들은 사람들에게 삶의 불확실성을 자각하게 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현세를 중시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많은 종교들이 번성했고, 그 흐름에 불교와 도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도교에서는 여러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동시에 불교의 유입과 유행에 따라 도교 교단의 자각이 일어났으며, 정치적인 측면에도 이용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점차 도교는 정형화된 종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도교와 불교는 정치 및 이론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 투쟁하기도 했지만, 각각 서로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발전하기도 했고, 특히 이론적인 토대가 부족하던 도교로서는 불교의 이론들을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세력을 성장하였다.

 

이 시기 도교의 특징 중 하나는, 앞서 잠깐 언급한 청담사상(淸談思想)이 위진 남북조 시기의 혼란기 때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청담사상의 경향성은 남조(南朝)의 귀족들에게 특히 유행하여 그에 따른 여러 문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청담사상 외에도, 남조에서는 도교의 여러 이론적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대표적으로 갈홍(葛洪, 283년∼363년)은 『포박자(抱朴子)』 를 편찬하여 초기 도교신앙과 신선사상, 방술 등을 결합시켰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도교의 연단술, 양생법, 장생술 등을 정리하였고, 또한 초기 도교의 여러 사료, 경적들을 기록하면서 도교사상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남조에서는 도사 양희(楊羲)에 의해 『상청경(上淸經)』이 완성되고, 또한 갈홍의 일족들 사이에서 『영보경(靈寶經)』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계열의 경전들을 전수하는 사람들 사이로 여러 파벌이 생겼는데, 대표적인 파벌이 각각 앞서 언급한 『상청경』과 『영보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상청파(上淸派)와 영보파(靈寶派)이다. 하지만 이후의 남조의 도교들은 여러 도교 경전들이 위조되고 혼란스러운 양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육수정(陸修靜, 406년∼477년)이다. 그는 도처에서 도교 경전들을 모았고, 또한 유송(劉宋)의 명제의 도움을 받아 『영보경』과 『상청경』을 정리하여 총 1228권에 달하는 『삼동경서목록(三洞經書目錄)』을 편찬했는데, 그의 이러한 도교경전 정리는 이후에 간행될 『도장(道藏)』의 분류하는 방법에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경전 정리는 도교의 계율과 재초(齋醮)의례를 정리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육수정의 도교학맥은 이후 도홍경(陶弘景, 456년∼536년) 에게로 이어졌는데, 그는 연단법이나 방술, 도인법 등의 수양법 외에도 도교의 여러 신들과 신선들의 계보를 정리하여 포괄적으로 흡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되는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이다. 그는 이 『진령위업도』를 통해 신선과 신들의 등급을 정리하면서 봉건 계급제도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도홍경은 남조에서는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리 우며 남조시기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정권을 잡은 북조(北朝)에서는 도교를 정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그에 따라 북조의 도교는 국가의 비호 아래 발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당시 북조 불교 흥성과 그 과정에서 황제권과의 대립이라는 측면 때문이었다. 처음 북방 유목민족들은 화북 일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불교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불교는 황제권을 보좌하는 호국불교(護國佛敎)적인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불교 세력이 확대되면서 황제권이 어느 정도 도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시기에는 도교를 국교로 만들면서 불교의 확장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사람이 구겸지(寇謙之, 365년∼448년)이다. 그는 민간 도교조직이 점차 지배계층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양상을 띠게 되자, 그는 도교 교단 자체에 손을 대어 유가(儒家)의 예교(禮敎)를 여기에 결합시켜 그 내용을 지배층에 유리하도록 고쳐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415년에 탄생한 구겸지의 교단을 신천사도(新天師道)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구겸지는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통해 지지를 얻고자 했고, 그 결과 그는 북위 태무제(太武帝)의 총신인 최호(崔浩)에게 접근하였다. 본래 독실한 천사도 신자였던 최호는 구겸지에게 도교의 법술을 배우고, 또한 구겸지를 황제에게 알현토록 했다. 황제 태무제는 구겸지를 대폭 후원, 그를 국사로 삼고 446년 도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되며, 또한 그 자신은 구겸지로부터 태평진군(太平眞君)이란 도호를 받게 된다. 또한 구겸지는 도교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폐불(廢佛)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는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측면과도 부합되었으므로, 당시 북위 황제인 태무제는 대규모의 폐불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후에 권신인 최호가 국사필화(國史筆禍)라고 일컫는 사건 때 처형되면서 신천사도(新天師道)의 세력은 힘을 잃고, 다시 불교가 융성하게 된다. 하지만 신천사도는 원시무격의 성격을 띠고 있던 민간도교를 권력자들의 입맛에 부합하게 함으로써 도교의 정치세력화의 기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다.

 

그밖에 불교와 도교의 지속적인 투쟁과 교류 또한 위진남북조 시기 도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당시 불교의 교리 중 윤회(輪廻)사상은 하층민으로부터 관료들과 왕족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각광받았고, 그 영향으로 6세기에 이르면 불교의 영향력은 절정에 다다라 황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새로이 교단을 정비해가던 도교 교단들에게, 불교는 사상적인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앞서 언급하였던 북위 태무제의 폐불령과 같은 무력적인 탄압이 있었고, 북위가 분열된 이후에 건국된 나라들 사이에서 벌어진 불교와 도교의 사상적 논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불-도 양교는 다툼 속에서도 서로의 교리를 상호 수용, 흡수하는 양상을 보인다.

 

도교는 불교의 계율과 교의를 받고, 불교는 도교의 수련체계를 도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도교는 불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한편, 불교의 부흥에 대응하기 위해 도교신앙의 초월적인 측면을 크게 강조하고, 또한 전통 도가사상의 이념들을 광범위하게 수용, 정리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면서 발전해갔다.

 

이러한 사상 간의 교류와 자기 사상의 정리과정은, 이후에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 벌어질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씨앗을 미리 파종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위진 남북조의 혼란은 약 300여년 후 수나라의 건국으로 일단락된다. 수당시대 도교의 대표적인 특징은 우선 도교가 국가적인 목적에서 보호됨에 따라 가장 그 세력이 극성을 떨쳤다는 점이 그 첫 번째요, 두 번째로는 외단(外丹)의 발전이 극에 이르면서도 내단(內丹)과 같은 새로운 수련방식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수나라 때에는 도교가 국가적으로 보호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위진남북조 시기에 정리된 도교의 양태와 차별화된 측면을 보이지는 못했다.

 

다만 수련도교의 양태에서 기존의 연단술 중 내단법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소원랑(蘇元郞)이다. 그는 위백양 이후 도교의 내단법 이론을 정리함으로써, 이후에 이어지는 당송 시기의 수련도교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수나라는 얼마 못가서 단명하고, 수나라 황실과 인척이며 선비족 출신의 이씨(李氏) 가문에 의해 당나라(唐, 618년∼906년)가 건국된다.

 

당나라 시대는 오랜 평화와 번영, 문화의 부흥 시대였고, 동시에 동-서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벌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는 여러 종교들과 문화가 국제적으로 유입되기도 했고, 또 기존의 종교들도 흥성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 도교는 국가적으로 왕실에 숭앙됨으로써 사상 유래 없는 흥성함을 맞이하게 되고, 또한 불교보다 더욱 비중이 높아지는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 시기의 도교가 불교에 비해 크게 발전된 이유는, 당황실의 선비족이라는 혈통적 콤플렉스를 감춰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당 고조(高祖)는 전국의 도관과 불교사원의 수를 같이 하게 했으며, 또한 국가의 전례 의식에서 3교의 순위를 도교, 유교, 불교 순으로 했다. 이러한 풍조는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특히 고종 때에는 노자에게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칭호가 덧붙여진다.

 

이후 측천무후의 무주(武周) 시기에는 이씨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역으로 불교를 강화시키기도 했지만, 다시 이씨가 당나라의 정권을 잡고 난 뒤인 현종(玄宗: 재위년도 713년∼755년) 때에는 무씨 세력에 대한 진압으로 다시 도교를 옹립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펼친다.

 

그리고 현종 그 자신도 도교에 매우 관심이 깊었으며, 이러한 도교에 대한 숭앙은 이후의 황제들에게도 많은 부분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도교의 이러한 흥성에는 왕실의 영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접어들어, 도교는 개인들의 신앙에 어느 정도 자리매김 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지식인 계층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들에게 많이 유행한 것이 외단이었다.

 

이 외단법에 기인한 단약은 당나라의 대부분의 황제들도 숭앙했으며, 또한 많은 황제들이 단약에 중독되어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유명한 시인들이었던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도 연단을 배우고 또 복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단이 사회에 악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외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약이 연소, 폭발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화약(火藥)의 기원으로, 이후 세계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물질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단약으로 인한 중독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많은 학자들이 의학을 연구함으로써, 이후 연단술은 의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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