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十常侍)
후한(後漢) 말기에 어린 황제를 조종해 부패한 정치를 행한 환관 집단으로 영제및 하진 일파와 함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던 후한 말기를 아예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버린 인물들. 이들의 영향력은 나쁜 의미로 굉장해서 넓게 잡으면 400년 이상까지 중국이 난세를 겪도록 만들었다.
간신이자 탐관오리로 《삼국지연의》 초반부부터 상당히 사악한 포스(?)를 뿜어댄다. 하지만 역사상 십상시의 난으로 순식간에 몰살당해서 허무함도 안겨주었다. 일종의 페이크 최종 보스. 이런 이미지가 전해져 오늘날에도 간신, 사악한 환관의 대명사로 꼽히게 되었다.
정사와 연의에서 구성원이 다르다. 《후한서》에서는 장균이 처음 십상시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12명이 나열되고, 《삼국지연의》에서는 구성원이 바뀌고 이름에 딱 맞추어서 10명이 되었다. 정사와 연의에서 구성원이 중복된 경우는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의 5명뿐이다. 수장은 장양, 부수장은 조충.
정사 구성원: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 손장, 필람, 율숭, 고망, 장공, 한리, 송전
연의 구성원: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 건석, 봉서, 정광, 조절, 후람
상술했듯 이들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외척 세력인 하진 일파를 상대로도 꺾이지 않을 정도로 큰 세력을 일궜다. 그럼에도 유독 조조에겐 약한 면모를 보였는데, 이는 조조의 의조부인 조등이 이들을 키워준 스승이자 조등 현역 시절 이들 일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십상시 입장에서 조조는 (현재는 은퇴했다해도)자신들의 은사이자 수장이면서 후원자이자 어찌보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엄청난 인물의 손자였던 것.
후한은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일이 잦다보니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이 많았다. 황제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전권을 휘두르는 외척을 숙청하려고 했는데, 황제는 곁에서 모시는 환관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이를 실현했다. 나름 환관들이 황제의 친위세력이 된 것이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비대해져 환관은 환관 나름대로 황제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황제가 요절하면 또 다시 어린 황제가 즉위해 외척들이 다시 반격을 가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후한의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대체로 외척 세력은 황제가 교체되면 급격히 약화되기 마련이지만, 황제한테 엄마가 없는 게 아닌 이상, 없어질 수는 없었다.
다만 후한 특유의 환관-외척 득세 현상을 덮어놓고 '막장과 악순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나라는 당시의 시대적, 기술적 배경과 지배하는 강역의 넓이에 비해선 놀라울 정도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이처럼 군주(황제)가 권위와 실권을 가지는 중앙집권 지향체제를 유지하려면, 황제를 보호하고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며 황권을 지탱할 친위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근현대와 같은 체계적으로 잘 정비된 관료조직을 기대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친위세력은 황제가 신뢰할 수 있고 황제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들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친위세력은 어떤 세력을 기반으로 해야 할까? 전근대 기준으로 이런 친위세력은 보통 권력자(군주)의 친인척을 기반으로 탄생하지만…창업 직후도 아니고,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온 황실에서 황족들이란 곧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황제를 위협할 수도 있는 세력이므로 친위세력의 기반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물론 황실 자체는 번성할수록 황제의 튼튼한 권위를 뒷받침할 기반이 되지만, 동시에 황족 인사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재위 중인 황제 개인에게는 위협이 될 가능성도 상당했다. 필연적으로 황제의 친위세력은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황제 개인을 배신할 수 없는, 즉 '지금 이 황제가 아니면 자신의 입지가 보장되지 않는' 집단을 기반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황족이 아니지만 황제 개인과 혈연이 있는 외척, 황제 개인의 신임과 총애를 입지와 권력의 기반으로 하기에 황제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환관 세력이 자연스럽게 친위세력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결국 후한의 외척과 환관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사유화하여 전횡을 일삼는' 간신이라는 통념과 달리, 황제의 권위와 중앙집권체제의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기반으로 중앙정계를 주도하는 환관 및 외척에 비해, 각 지방의 명사들과 선비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호족 사대부 세력은 중앙정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하지만 호족 사대부는 한나라 사회지도층 대부분을 포괄하는 엄청난 규모가 곧 저력이었고, 각 지방의 토호와 명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특성상 수도와 중앙정계를 벗어난 각 지방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이 있었다. 또 일단은 효렴 등을 비롯한 절차로 어느 정도 검증을 거쳐 등용된 이상 실질적으로 실무진의 주축을 차지하는 부류 역시 이들이었다. 따라서 외척과 환관들이라 해도 호족 출신 사대부들과 협력 없이는 제국을 경영할 수 없었다. 결국 후한의 정치체제는 이들 세 집단의 상호견제와 알력, 그리고 사안에 따른 협력이라는 균형 위에서 성립되어 수백 년에 걸쳐 제국을 지탱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어린 황제가 즉위한 직후에는 외척이 득세하였다가 장성한 뒤에는 외척을 쳐내고, 측근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친정 체제를 정비하는 것 자체는, 통상적인 국가 운영상의 권력 균형 이동으로 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 집단간의 상호 견제라는 순효과도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요절하기를 반복하면서 권력구도가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만 이동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제대로 국정을 장악할 만큼 유능한 황제가 장기간 나오지 않자, 실질적으로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외척 및 환관 세력에게만 권력이 쏠렸다. 호족 사대부 계층이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세력간 균형이 무너졌고, 환제 이후 외척까지 몰락하면서 환관 세력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어 극도로 부패하면서 정치적 균형이 깨져버렸다. '십상시'는 말하자면 이런 불균형에 의해 탄생한 일종의 정치적 괴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외척 두씨(竇氏) - 화제가 환관(정중)들과 손잡고 숙청.
제5대 상제 & 제6대 안제
외척 등씨(鄧氏) - 외척 염씨가 환관(이윤, 강경)들과 손잡고 숙청.
제7대 전소제
외척 염씨(閻氏) - 환관(손정, 왕강, 왕국 등 19명)들이 숙청하고 순제 옹립.
제9대 충제 & 제10대 질제 & 제11대 환제
외척 양씨(梁氏) - 환제가 환관(당형, 단초, 서황, 구원, 좌관 등)들과 손잡고 숙청.
외척 복씨 - 환관 조등의 양손자인 권신 조조가 숙청.
외척 조씨(曹氏) - 복씨를 숙청한 다음 자기 딸을 황후로 삼고, 이후 조조의 뒤를 이은 위왕 조비에 의해서 후한 멸망.
특히 가장 강력한 외척 간신이었던 양기를 무찌르는 과정 이후, 환제 이후로는 환관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잡은 듯 보였다. 사실 환제 자체가 환관들의 우두머리격에 해당되는 인물인 조등에 의해 즉위된 황제였으니 이 시기의 환관들이 득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외척 세력은 몇 차례나 환관 세력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환관 세력에게 숙청당했다. 환관이 권력을 잡은지 수십년이 지나자 그 부정부패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 결과 호족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반(反) 환관 세력인 청류파가 등장하는데 환관들은 당고의 금 사건으로 이들을 탄압하여 내쫓고 관직에 나설 기회를 영영 박탈해버렸다.
십상시는 《삼국지》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에도 이미 만악의 근원이었다. 그때는 대장군이자 두황후(두묘)의 아버지인 두무와 태위 진번이 십상시들의 전횡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끝에 십상시와 맞섰으나 건석이 선수쳐서 두무와 진번을 사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환제 시절 그나마 십상시들과 대립했던 외척 두무와 진번을 살해하는 데에 성공하자 십상시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어졌다.
십상시는 이 당고 사건이 일어난 영제 시대 때 권력을 잡았던 환관 10여 명을 일컫는다. 이때는 아예 각 관직마다 그에 따르는 정가가 붙고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이 이뤄질 정도로 정치가 막장이었는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본전을 뽑아내기 위해 임지에서 무제한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거기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국가멸망 테크를 타는 중이었다. 영제 유굉이 대놓고 매관매직을 하게 된 경위 역시 십상시였다. 이전까지는 십상시들이 매관매직을 했는데, 영제는 '어차피 근절시키지 못할 매관매직이라면, 십상시가 아닌 내가 돈을 먹기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매관매직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 결과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이 황건적의 난. 《후한서》에 따르면 장균이 십상시를 죽여 만천하에 사죄하면 반란이 저절로 진압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영제는 이를 거절했다.
한편 기어이 대립 관계에 놓인 외척 하진까지 척살하는 위용을 보였으나... 하진을 척살한 건 오히려 패착으로 작용했다. 적절히 우유부단한 하진이 휘하의 군웅들을 통제하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그가 죽으며 군웅들이 더 이상 눈치볼 이유가 없어진 것. 당시 중국의 수많은 군웅 세력들은 하나의 수류탄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진은 이 수류탄의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 안전핀을 제거해버렸으니 이후 벌어질 일이야 뻔했던 것.
하진이 척살되자 그의 부하로 있었던 원소와 원술한테 단 몇 페이지 만에 전원 몰살당했다. 단규와 우두머리인 장양은 그나마 좀 오래 살았다. 한 길어야 10페이지 정도? 근데 얘들도 당시에 소년이었던 소제와 헌제 형제를 데리고 튀다 잡혀 끔살됐다는 정도만 추가되었을 뿐이다.
또한 하진 사후에 군권으로 휘어잡지 못하고 황명만을 믿고 있던 것도 패착이었다. 십상시의 패악질이 이미 도를 넘었고, 군권을 가지고 있던 원소나 조조들도 황명이 황명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이렇게 군웅들이 황명을 무시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 순간부터 이미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십상시가 한 행동중에 유일하게 잘한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방 토호들을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원소 등이 십상시를 죽여버리자 서량 쪽 토호였던 동탁이 조정으로 들어오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결과 동탁 마음대로 소제는 폐위되고 헌제가 옹립되기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조차도 십상시의 공적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십상시가 건재하던 시기에 지방 토호들이 중앙정부, 즉 낙양의 조정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때까지는 조정의 권위와 위력이 어느정도 건재했기에 지방 토호들이 이를 위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의 위세를 지탱한 것이 과연 십상시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는 힘든 것이, 물론 십상시 역시 당시 한나라 조정의 주요한 구성원 중 하나라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하겠으나 이들의 절망적인 실무능력(특히 위기극복능력)을 생각하면 당시 위기로 치닫던 한나라 조정을 지탱하는데 한해서만 특별히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어 보인다. 차라리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균형감각도 상당하던 하진과 그 파벌이 조정의 기둥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기대가 더 현실적이다.
오히려 십상시의 경우는 한나라 조정의 통치명분과 정당성을 저해하는 심각한 도덕적 흠결, 즉 지방 토호들이 중앙정부의 권위를 무시할 때 내세울 수 있는 명분(나쁘게 말하면 핑곗거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무엇보다도 한나라의 중앙권력이 완전히 붕괴수순에 들어가는 첫 계기를 만든 것이 십상시들 자신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원소등이 십상시를 죽여버린 사태'의 원인에는 '십상시가 하진을 죽여버린 사태'가 있다는 것. 즉 동탁과 같은 군벌 (군사력을 가진 지방 토호 세력)이 중앙정부로 진입할 수 있던 것은 궁정반란으로 조정이 사실상 붕괴해버렸기 때문인데, 이 궁정반란을 먼저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십상시인 것이다. 물론 철저히 십상시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어쨌건 십상시가 선수를 쳐서 하진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니, 원소등의 청류파는 한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순순히 모든 권력을 다 빼앗기고 고분고분 몰살당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십상시가 중앙정부를 접수할 뿐 그 권위 자체가 붕괴하는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할수도 있겠으나, 이런 편파적인 해석에 동의할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