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쇼와 천왕(昭和 天皇, 1901년∼1989년)과 군국주의(軍國主義)
쇼와 천황(昭和天皇, 1901년 4월 29일∼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재위 : 1926년 12월 25일∼1989년 1월 7일)이다.
본명은 히로히토(일본어: 裕仁)이며, 어릴 적에 쓰이던 궁호는 미치노미야(일본어: 迪宮)이다. 또, 쇼와 천황이 사용하던 오시루시는 어린 대나무를 상징했다. 다이쇼 천황과 구조 공작가의 당주 구조 미치타카의 딸 데이메이 황후의 맏아들이다.
메이지 천황이 확립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에 따라 재위기간 동안 쓴 연호는 쇼와(昭和)이다.
히로히토는 1928년 다이쇼 천황에 뒤이어 천황 자리에 올랐다. 당시 아시아 유수의 강대국이던 일본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침체가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제국주의의 팽창론이 세력을 크게 불려 1930년대 후반에는 결국 천황을 비호(庇護)하고 정부를 장악한 군부가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후 일본제국은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쇼와 천황은 전범 기소와 황위 박탈은 면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군국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쇼와 천황 및 앞으로의 천황들에게서 정치적 실권은 빼앗기게 된다.
정치적 실권을 잃은 쇼와 천황은 이후 해양생물학 연구에 매진하는 등 개인적인 삶을 살다가 1989년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장남 아키히토가 천황 직위를 후계하였다.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의 아오야마 어소에서 당시 요시히토 황태자였던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관례를 맡은 이들은 황자에게 궁호는 ‘덕을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미치노미야’를, 이름은 중국의 고서인 《상서(尙書)》에 등장하는 격언 ‘유내이민녕(裕乃以民寧)’에서 딴 ‘히로히토(裕仁)’를 붙여주었다. 히로히토의 아래로는 1902년에 태어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1905년에 태어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1915년에 태어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있었다. 히로히토가 태어나기 전, 메이지 천황과 측근들은 근친혼이 아이의 요절이나 병약한 아이의 출산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족이 아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구조 미치타카 공작의 넷째 딸인 구조 사다코를 황태자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시종들을 대동하여 몇 차례 만난 후 1900년 봄에 결혼하였다.
메이지 천황은 요시히토, 황태자비 사다코의 의견을 물은 끝에 히로히토를 군인이 가르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히로히토를 교육시킬 후견인이 될 군인은 결혼한 육군ㆍ해군 장교여야 했으며 ‘군인적인 모습’을 히로히토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했다. 메이지 천황은 오야마 이와오 제국 육군 참모총장에게 히로히토를 맡기려 했으나 오야마는 이를 사양했다. 이 때문에 메이지 천황은 옛 사쓰마 번 출신의 번벌(藩閥)이자 해군중장과 해군경을 지낸 가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히로히토의 양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가와무라는 유학을 배웠으며, 황태자비 사다코와는 먼 인척 관계였다. 히로히토를 맡은 가와무라는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교육시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가와무라가 세상을 떠난 1904년 11월까지 가와무라의 저택에서 지냈으며, 그 후 동생 지치부노미야와 함께 요시히토와 사다코 아래서 자라게 됐다. 처음에는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의 황실 별장에서, 나중에는 아오야마 어소의 황손어전에서 살았다. 히로히토 형제의 직접적인 양육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신임 시종장 기도 다카마사가 맡았다가 나중에 전담 시종과 궁녀들이 그 일을 맡게 됐다. 히로히토를 돌본 궁녀들 중, 일본의 항복 직전 마지막 총리대신을 지낸 스즈키 간타로의 부인이 된 아다치 다카는 둘째 지치부노미야와는 달리 히로히토가 조용하고 신중한 아이였다고 평가했다.
히로히토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와는 어소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했지만 아다치의 말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히로히토를 비롯한 손자들을 만나는 것을 매우 꺼려했으며 손자들의 생일날에 손자들을 만날 때에도 군복 차림으로 앉아 권위적인 인사치레만 받았다고 한다.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히로히토는 아우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도쿄의 중심부를 자주 돌아다녔으며, 러일전쟁의 군사 지도자들이나 메이지 시대의 내각 관료들이 히로히토가 있는 황손어전을 찾기도 했다.
1908년 봄부터 히로히토는 도쿄 요쓰야에 있는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들어갔다. 메이지 천황은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를 제10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해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손들의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노기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유학 사상, 선(禪)을 강조하였으며, 황손들을 엄격하게 대했다. 또 노기는 히로히토의 건강을 고려하여, 교사진들에게 체육 교육과 건강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도록 하였으며, 노기 자신은 히로히토에게 자신이 미래의 제왕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검소(儉素), 근면(勤勉), 인내(忍耐), 남자다움(Manliness), 의무(義務)에 대한 헌신(獻身) 등을 강조했다.
한편, 1910년에 메이지 천황은 황실 남자들에게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을 내려 군사 훈련을 받고 군무를 맡도록 강제했지만 어린 히로히토에게 주어진 군사 훈련은 승마 훈련과 ‘특별히 뽑힌 학우’ 몇 명과 벌이는 전쟁놀이 뿐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히로히토는 궁내성 장전부(掌典部)의 궁정 귀족으로부터 신토식(神道式) 제사의식을 익혔는데 이는 천황이 신토의 최고 신관(神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이 되면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육군ㆍ해군 소위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이와 동시에 히로히토가 머무는 황손어전은 동궁어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 해에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년∼1912년)는 동궁어소(東宮御所)를 찾아 히로히토에게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년∼1685년)가 쓴 《중조사실(中朝事實)》과 미야케 간란(三宅観瀾, 1674년∼1718년)이 쓴 《중흥감언(中興鑑言)》을 선물한 뒤 자살했다. 노기를 뒤이어 히로히토의 남은 초등과 2년 과정은 러일전쟁 때 활약한 해군 제독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년∼1934년)와 해군대좌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 1867년∼1958년) 자작이 가르치게 됐다. 초등과 과정을 마친 히로히토는 어학문소에서 특별히 선발된 다섯 학우와 함께 군사와 일반교양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도고는 이 어학문소의 교장을 맡았고, 오가사와라는 어학문소(御學問所)의 교사진을 선발하고 감독했다. 오가사와라는 군인과 도쿄 제국대학을 나온 학계의 권위 있는 교수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군사교육은 노기의 후임으로 가쿠슈인 대학(學習院大學, Gakushuin University) 원장이 된 오사코 나오하루(大迫尚敏, 1844년∼1927년), 해군대장 사토 데쓰타로( 佐藤 鐡太郎, 1866년∼1942년), 독일 제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伏見宮博恭王, 1875년∼1946년), 육군 소장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1868년∼1956년)와 나라 다케지(奈良 武次, 1868년∼1962년)를 비롯한 2명 등이 맡았다. 이들은 러일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히로히토에게 군대에서의 무사도를 강조하고 강력한 대함대를 중심으로 한 전투와 백병전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한편으로 도고와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어학문소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했다.
제왕수업을 받던 시절에 히로히토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는 스기우라 주고(杉浦 重剛, 1855년∼1924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 庫吉, 1865년∼1942년), 시미즈 도루(清水 澄, 1868년∼1947년)가 있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국수주의자였던 스기우라는 히로히토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國粹主義)와 제국주의(帝國主義)를 옹호하고, 표트르 1세와 빌헬름 2세보다 유능한 측근이 많은 일본의 천황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기우라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시혜(施惠)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권위주의(權威主義)를 정당화한 반면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과 시민의 저항권을 주장한 계몽주의자(啓蒙主義者)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1778년)에 대해선 “국가와 정부를 저주한다.”며 깎아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스기우라는 “서양인들이 황화(黃化)를 두려워하는 반면, 우리는 백화(白化)를 한탄한다.”고 말하면서 통속적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에 입각해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립 중심으로 가르쳤다. 한편 독일 유학파 출신인 시라토리는 중국의 요(堯), 순(舜), 우(虞)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비난했으며, 히로히토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할 유일한 나라이며, 한국을 침략한 것은 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는데 유익한 것”이라고 미화했다. 마지막으로 시미즈 도루는 히로히토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메이지 천황을 ‘완벽한 군주상’으로 포장했다.
히로히토는 1919년 5월, 만 18세의 나이로 성년식을 치렀다. 1917년에는 히로히토의 비가 될 이를 고르게 됐는데 어학문소에서 히로히토의 교육을 책임졌던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가 여기에 관여하였다.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신부감으로 왕녀 세 명의 이름을 데이메이 황후(다이쇼의 비, 구조 사다코)에게 올렸고, 데이메이 황후는 이들 세 명 중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의 딸인 나가코(良子)를 신부로 간택했다.
이 때, 히로히토의 결혼문제를 두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전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황실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나가코의 어머니 쪽인 시마즈 씨가 대대로 색각 이상(色覺 異常, dyschromatopsia)을 앓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파혼을 주장했으며 히로히토를 당분간 해외로 여행을 보내고자 “황태자비 간택 절차를 철저히 밟지 않았다”는 구실로 하타노를 궁내대신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면서 야마가타는 새로운 궁내대신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한 육군중장 나카무라 유지로를 추천했다.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은 야마가타를 지지하였는데, 하라는 다이쇼 천황의 지병이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으며 이번 일을 계기로 야마가타와 좋은 관계를 맺어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장인이 될 구니노미야는 황후 사다코와 스기우라 주고를 끌어들여 야마가타의 행보에 반격했다.
스기우라는 파혼이 황실사에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며, 황태자 히로히토의 앞길에도 흠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궁내성 관료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스기우라는 구니노미야의 인척인 시마즈 씨 출신의 화족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와 하라가 황실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성에 밀려 궁내 여론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으로 사쓰마 파의 중심 인사 중 하나였던 마키노 노부아키가 파리에서 평화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 스기우라의 제자이자 야하타 제철소의 장관이었던 시라니 다케시가 마키노를 설득하려 했지만 원하는 언질을 받아내지 못했고 야마모토 곤노효에도 스기우라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스기우라는 겐요샤의 대두였던 도야마 미쓰루에게 접근했다. 도야마는 흑룡회(黑龍會)와 낭인회(浪人會) 등에 속한 동지들, 오카와 슈메이나 기타 잇키와 같은 대아시아주의자들과 함께 반야마가타 투쟁에 참여했다. 결국 1921년 2월 초에 야마가타는 혼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철회했다. 2월 10일에는 궁내성과 내무성이 히로히토의 결혼은 예정대로 거행할 것이며, 궁내대신 나카무라 유지로와 차관 이시하라 겐조가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2월 15일에 하라 내각은 히로히토가 유럽을 다녀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혼인과는 달리 히로히토의 유럽 여행은 스기우라와 도야마 등 우익 세력이 반대했던 것이었다. 히로히토의 혼례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일련의 권력 투쟁은 요미우리 신문 등 전국구 언론을 중심으로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宮中某重大事件)”으로 은폐됐다.
한편, 히로히토가 유럽으로 떠날 때의 공식 명목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끝나가던 1918년에 일본의 황실을 찾은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년∼1942년)를 답방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랫동안 병상에 있는 다이쇼 천황을 통해 국민들이 품은 황실에 대한 나쁜 여론을 히로히토의 해외여행을 통해 무마하는 것에 있었다. 처음에 황실은 히로히토의 안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며, 입헌국민당, 헌정회 등의 의원들,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등의 극우계 거물들도 반대했다. 특히 극우파는 출발 전 몇 주 동안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아버지가 병상에 있을 때 일본을 떠나 여행하는 것은 불효”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에 원로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데이메이 황후에게 “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유럽의 정세를 (조만간 섭정을 맡을) 황태자가 살피는 것은 앞으로 통치를 위해 중요하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황후의 마음을 돌렸고 반대 여론은 차차 수그러들었다. 해외순방 일정은 다이쇼 천황의 유고에 대비해 최대한 서둘러 실행해야 했다. 때문에 정부와 궁내 관료들은 히로히토가 찾을 나라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바티칸 교황청과 이탈리아로 한정했다. 미국의 워렌 하딩 정부도 히로히토의 방문에 관심을 가졌으나 히로히토와 미국 기자들 사이의 소통 문제를 우려한 워싱턴 D.C.의 주미 일본 대사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언(進言)으로 미국은 방문 국가에서 제외됐다.
1921년 3월 3일에 히로히토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진다 스테미 백작, 나라 다케지 육군중장과 수행원 34명이 도쿄역을 출발하여 해외 순방길에 올랐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가토리 호를 타고 5월 7일에 영국에 도착했으며, 그 후로 영국에서 24일간, 프랑스에서 26일간,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각각 5일간, 이탈리아에서 8일간 머물렀다. 히로히토는 순방 중에 영국 왕세자 웨일스 공과 국왕 조지 5세, 벨기에 왕 알베르 1세,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교황 베네딕토 15세 등을 만났으며 7월 18일에 유럽을 떠나 9월 2일 지바현 다테야마를 거쳐 다음날인 3일에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게 됐고 따라서 칭호도 셋쇼노미야(摂政宮, 섭정궁)가 됐다. 전 내대신 히라타 도스케와 궁내대신이 된 마키노 노부아키는 대리청정을 맡은 히로히토를 고위급 궁내관 회의에 참여시켜 회의가 끝난 뒤 회의의 요점을 묻게 하는 등 정치적인 수완을 가르치려 노력했지만 고령이었던 히라타가 몸져 눕게 되자 마키노가 직접 궁정 규칙과 정치학을 히로히토에게 강론하게 됐다. 그 후, 식부성(式部省) 장관 이노우에 가쓰노스케와 장전(掌典)의 우두머리인 구조 미치자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데릴사위이자 양자인 사이온지 하치로가 히로히토에게 궁중제례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경제학자 야마자키 가쿠지로와 전 일본은행 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경제학을, 시미즈 도오루가 헌법학을, 다치 사쿠타로가 국제법을 ‘정례 강의’로 히로히토에게 번갈아 가르쳤다.
대리청정 시작 이후 히로히토는 1922년 겨울에 가나가와현과 시코쿠섬으로 첫 행차를 떠났다. 행차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23년 4월 12일에는 요코스카를 출발해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섬으로 행차를 떠났다. 타이완 행차의 목적은 현재 일본 황실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임을 본국 국민들에게 알리고 타이완에 있던 다수의 비일본인들과 소수의 일본인들 모두에게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임을’ 재확인시키려는 것이었다. 히로히토는 일본이 타이완섬에 세운 신사와 군사 시설, 일본 자본이 개입한 공장 등을 방문하고 무장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15년에 붙잡혔던 535명의 형량을 ‘인애의 상징’이라는 명분으로 줄여주었다. 히로히토는 행차 일정을 모두 마친 후 4월 27일에 섬 북쪽에 위치한 지룽을 떠났다.
도쿄로 돌아온 뒤 히로히토는 불법으로 규정된 일본공산당의 창설이 발각된 일을 접했다. 같은 해 12월 27일에는 의회 개회식장으로 취임 연설을 하러 가던 히로히토에게 아나키스트 난바 다이스케가 총격을 가하는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했지만 동궁 시종장이 다치는 데에서 그치고 히로히토는 무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야마모토 내각이 총사직했으며, 경시총강 유아사 구라헤이와 도라노몬을 관할하던 지역의 일반 경관들까지 모두 면직을 당했다. 1924년 1월 26일에는 나가코와 혼례를 올렸다. 같은 해 8월에는 도치기현의 닛코와 후쿠시마현의 이나와시로호에서 아내와 휴가를 보냈으며 1925년 12월에는 첫 아이이자 장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가 태어났다. 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히로히토는 궁 안에서 항상 지내야 했던 궁녀들에게 통근을 허락했으며, 후궁 제도를 폐지하고 궁녀의 수를 줄이기로 했다.
히로히토가 대리청정을 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히로히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각이 5번이나 바뀌는 등 일본은 정치적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총리들 중 첫 3명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원로들이 천거했지만 1924년 원로들 중 한 사람인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죽자 새로운 총리를 천거하는 일은 사이온지 긴모치가 혼자서 떠맡게 됐다. 사이온지는 정당내각을 반대하던 기요우라 게이고를 천거했고 히로히토는 이를 재가했다. 기요우라는 선거로 뽑힌 중의원 의원들을 무시하고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귀족원 의원들의 의사를 중시했다. 이는 의회 정당들을 자극해 제2차 호헌운동(護憲運動)을 초래했다. 결국 1924년 5월 10일의 총선거에서 호헌파(護憲派)가 크게 이기고, 6월 7일에 기요우라 내각은 총사직했다. 사이온지는 기요우라의 후임으로 호헌 3파 중 하나인 헌정회(憲政會)의 총재 가토 다카아키를 천거했으며, 히로히토는 이를 재가했다. 가토는 호헌 3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의회정당(議會政黨)의 제휴는 1925년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6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가토를 대신해 총리가 된 와카쓰키는 의회 내의 여러 분쟁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우선 헌정회가 마쓰시마 유곽 사건에 연관된 정우회 인사들을 거론하며 와카쓰키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정우회는 1926년 11월 29일에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와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부부의 괴사진을 거론하며 이를 ‘국체문제(國體問題)’로 규탄하면서 와카쓰키 총리가 “국체 관념이 없다”고 비난했다. 국가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국체논쟁’은 히로히토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본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국체’ 논쟁은 ‘천황의 일본 통치는 정당하며 천황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니치렌종(日蓮宗) 등의 주도로 일본의 제국주의(帝國主義)와 천황의 전제 통치를 정당화하는 전체주의(全體主義),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사상이 널리 퍼졌다.
다이쇼 천황은 1926년 12월 25일 새벽, 가나가와 현의 하야마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히로히토는 부황 사망 후 제124대 천황이 되었으며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열린 추밀원(樞密院)은 회의에서 새로운 천황을 위한 연호를 정하게 됐다. 앞서 다이쇼 천황이 사망하기 몇 주 전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1872년)은 황거에서 흘러들어온 풍문을 따라 새 천황 히로히토가 밝은 문화의 창달을 뜻하는 ‘고분(廣文)’이라는 연호를 쓰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추밀원은 천황의 새로운 연호를 ‘쇼와(昭和)’라고 12월 26일에 대외에 공식 발표하였다. 쇼와(昭和)란 ‘밝은 조화’, ‘찬란한 평화’,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됨’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새 천황은 같은 날, 육해군 장병과 와카쓰키 총리, 황실 종친 간인노미야, 사이온지 공작을 불러놓고 모든 국민에 대하여 칙어(勅語)를 내어 자신의 즉위를 선포함과 동시에 칙어를 발표하여 후임 총리 천거는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에게 맡기며, 군부의 특권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28년 11월 10일에는 교토로 행차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히로히토는 이제 정치세계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게 됐으며, 일명 ‘측근’이라 불리는 7명의 인사들이 히로히토를 옆에서 도왔다.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1861년∼1949년),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1868년∼1948년), 무관장 나라 다케지(奈良 武次, 1868년∼1962년), 가와이 야하치(河井彌八), 세키야 데이사부로(關屋貞三郎, 1875년∼?), 식부차장(式部次長) 오카베 나가카게(岡部景長) 자작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편, 천황의 내각총리대신 임명권은 사이온지(西園寺公望, 1849년∼1940년)가 대행했는데 사이온지는 궁내관 선임에도 커다란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1927년 이후에는 궁내의 측근들이 먼저 새 총리 선정을 협의한 뒤 교토(京都)나 오다와라(小田原市), 오키쓰의 별장(坐漁荘)에서 지내던 사이온지에게 사람을 보내 재가를 얻었다.
사이온지와 마키노는 근대 정당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 마키노와 궁중 측근들이 곤란한 정치문제는 천황이 관여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사이온지는 천황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며, 마키노가 극우 정치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내던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 1889년∼1977년) 후작,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년∼1945년) 공작, 하라다 구마오(原田能雄) 남작 등은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가세했다. 사이온지는 궁중의 정책 결정 과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고, 궁중 측근들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 사이온지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 궁중 측근들은 영국, 미국 등의 대사관부터 일선 군부대에서까지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히로히토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맡았으며, 명목상의 입헌군주였던 히로히토의 실질적인 권력행사를 도왔다.
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몇 년 동안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다이쇼가 죽은 뒤 휴회 상태였던 제52차 제국 의회는 1927년 1월 18일에 다시 열렸다. 제국의회에서 쇼와 천황은 궁중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우선 메이지 천황을 경축하여 새 천황 히로히토를 간접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날인 11월 3일을 메이지의 날(일본어: 明治節)로 제정하여 3월 3일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추밀원은 시데하라 외무대신의 대중국 정책을 공격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다. 그 후, 가와이, 진다, 마키노, 이치키 기토쿠로 등이 천황과 상의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1864년∼1929년)를 새 총리로 세웠다. 다나카의 총리 선임 때부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당할 때까지 총리 인선은 궁중 측근을 비롯한 내대신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이온지는 이들의 선택에 재가를 가하는 데 그치게 됐다. 1927년 4월 20일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했다. 쇼와 천황은 마키노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종 정책에 간섭했다.
쇼와 천황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張作霖, 1875년∼1928년)이 제국 육군의 계략으로 기차를 타다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불문에 부쳐 은폐하려 했으며 1929년 7월에 다나카의 후임으로 온건 외교 노선을 표방한 입헌민정당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를 새 총리로 지명했다. 미국ㆍ영국과의 외교적 충돌을 꺼려했던 쇼와 천황과 궁중 측근들은 해군 군비 축소 문제에 대한 가토 히로하루의 의견을 뿌리쳤으며 가토와 육군중장 아라키 사다오, 도고 헤이하치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마구치가 순양함 톤수 비율에 대해 영국, 미국과 타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다나카가 있었던 정우회는 이 일을 두고 하마구치 총리와 마키노, 스즈키, 가와이 등의 측근들을 ‘군주 주변의 간신배’라고 규탄했다.
그 후 1930년 4월 22일, 일본이 영국, 미국과 런던 해군 감축조약을 체결하자, 정우회와 군령부 등은 반대 여론을 부추겼으며 같은 해 11월 14일에 쇼와 천황이 오카야마현에서 육군 특별 대연습을 지휘하던 사이 하마구치 총리를 극우 폭력배이자 애국사 단원인 사고야 도메오가 저격했다. 이 사건은 쇼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 세력과 정당 내각 사이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 4월 14일, 후계자 와카쓰키 레이지(若槻 禮次郞, 1866년∼1949년)로가 다시 내각을 구성했지만, 군비 축소를 둔 육군과 해군의 대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쇼와 천황은 이 만주-사변을 묵인했으며 때때로 관동군의 중국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라 다케지가 1931년 9월 22일에 쓴 일기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하야시의 통수권을 침해한 침략 행위를 묵인했으며, 10월 1일에는 참모총장과 관동군 사령관에게 “육군 형법을 위배했다”며 가벼운 징계만을 내리는데 그쳤다. 쇼와 천황은 10월 8일에 관동군의 진저우 공중 폭격을 재가했다. 진저우 공습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도시 폭격이었다.
10월 24일, 중화민국의 호소로 열린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이사회 특별위원회는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스팀슨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중화민국에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을 발동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군에게 11월 16일까지 만주의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도의적 결의를 가결했다. 해외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으나,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문, 라디오, 연예계, 제국재향군인회, 극우 단체 등이 불안 심리를 조장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관동군을 지지하고 서양과 중화민국을 비난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1931년 11월 6일,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은 장제스 국민정부와의 협상 계획을 파기함을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으며 시차(熙洽)를 비롯한 남만주의 기득권층 등이 일본을 지지했다. 그 후 시데하라는 마키노 노부아키, 사이온지 긴모치, 새로이 조선 총독이 된 우가키 가즈시게에게도 이 방침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한편 쇼와 천황은 11월 5일에 가나야 한조 참모총장에게 위임명령권을 내려 가나야가 관동군의 작전과 용병(用兵)에 관한 것들을 결정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 11월 23일, 시데하라는 미국의 AP 통신에 거짓 성명을 내보내, 만주사변에 발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나라도, 일본군이 만주 북부의 하얼빈과 치치하얼을 점령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나라도 모두 중화민국이라고 밝혔다.
만주에서 진저우 공중 폭격이 벌어진 직후인 10월, 참모본부의 급진 인사인 하시모토 긴고로(橋本 欣五郎, 1890년∼1957년)가 비밀결사 벚꽃회를 이끌고 정권 전복을 기도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시모토는 같은 해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쇼와 천황과 군 상층부는 하시모토 일당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솜방망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제국 육군 안에서 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끼리 두 파벌로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하나는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진자부로, 오바타 도시시로 등을 따르는 청년 장교들이 모인 황도파(皇道派)였고, 다른 하나는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하야시 센주로 등의 고위 장교들과 그들을 따르는 청년 장교들이 모인 통제파(統制派)였다. 이 두 파벌은 모두 ‘천황 아래서’ 군사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일본의 침략 활동을 지지했지만 황도파는 쿠데타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급진파였고, 통제파는 암살이나 협박과 같은 수단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 등의 개정을 통해 정부를 차차 군부 위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는 등 황도파보다는 다소 온건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1931년 12월 23일, 관동군이 내각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저우를 점령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을 9개국 조약을 위반한 행동이라 지적했지만 쇼와 천황은 이에 아랑곳 않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관동군에게 칙어를 내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중국 비적과 맞서 싸워 황군의 위엄을 세계에 드높였다”며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관동군을 치하했다. 3월 9일, 관동군은 만주의 관동군 점령 지역을 떼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명목상의 군주로 옹립했다. 육군은 황족 장로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고, 해군은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의 반대파들을 이끈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친왕을 군령부 총장으로 임명하여 황실과의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려 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사쿠라다문에서 쇼와 천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쇼와 천황은 같은 해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봉창이 던진 폭탄에 암살당할 뻔했으나 살아남았다. 이 때 개각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이누카이 내각은 사직하려고 했으나 쇼와 천황은 이누카이 내각의 유임을 명령했다. 쇼와 천황은 정부의 정책과 각료 인사의 연속성이 지켜지기를 바랐으며, 여러 정당으로부터 황실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각이 자주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이누카이 내각을 향한 비판 여론은 정치적 폭력 행위로까지 번졌다. 비밀 결사단체인 혈맹단의 주도로 2월 9일에는 와카쓰키 내각의 전 대장대신 출신인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3월 5일에는 미쓰이 합명회사 이사장 단 다쿠마 남작이 암살당했다.
5월 15일에는 해군 청년 장교가 이누카이 총리를 총리 관저에서 살해했으며, 정우회 본부와 일본은행, 경시청, 내대신 마키노의 관저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혈맹단은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5ㆍ15 사건 다음 날 이누카이 내각의 남은 각료들은 총사직했으며, 쇼와 천황은 5월 25일에 이누카이의 후임으로 해군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를 지명했다. 사이토는 9월 14일에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만의정서에 조인하였다. 일만의정서의 내용에 따라 일본은 만주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대신 만주에서의 모든 행동이 허용됐다. 사이토 내각의 주도로 일본은 1933년 2월에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관동군은 1933년에 러허 성(熱河省)를 침공한데 이어 허베이성까지 진격했다가 쇼와 천황의 제지로 한동안 산하이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5월 7일 관동군은 다시 허베이 지방으로 진격했다.
1934년 7월, 사이토 내각을 이어 출범한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은 과격파 청년 장교들의 계속되는 갈등 유발과 점령지 주민들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쳤다. 1936년 2월 26일 육군 하급 장교 22명이 제1사단 휘하 3개 연대와 근위보병연대의 무장 병사들 1,400명을 이끌고 도쿄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을 살해하는 2ㆍ26 사건이 일어났다. 또, 이 사건으로 경찰관 5명이 죽었으며,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이 부상을 입었다. 요코스카 진수부에 있던 진수부 사령장관 요나이 미쓰마사, 참모장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도쿄 만에 함대를 집결시켰고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했다. 정부의 발빠른 수습으로 주동자들 중 한 명은 자결하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항복했으며, 병사 대부분이 부대로 돌아갔지만 계엄령은 5개월 넘게 이어졌다.
이 때, 결혼한 지 8년이 흐른 쇼와 천황과 나가코 황후 사이에서는 네 명의 딸 중 세 명이 살아남았고, 나가코가 임신 중이던 다섯째는 1932년에 유산됐다. 그 후 다시 임신한 나가코는 1933년 12월 23일, 지금의 천황이 되는 첫째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다. 쇼와 천황은 2ㆍ26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을 의심했으며, 반란이 이어지는 동안 아오모리의 히로사키에 있는 임지에서 온 지치부노미야를 불러 그가 반란군과 멀리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했다. 2ㆍ26 사건 이후 수립된 히로타 고키 내각과 하야시 센주로 내각은 육군의 허베이 침략 계획을 지지했다. 히로타 내각과 하야시 내각은 쇼와 천황을 안심시키고, 국민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을 시행했는데 1937년 5월 31일에 《국체의 본의(国体の本義)》라는 책 20만 부를 각지 학교에 배포하고 200만 부 이상을 판매한 것이 그 예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생명과 활동의 근원을 항상 천황께 바친다.”는 내용을 담아 천황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충성을 강조했다.
1937년 7월 8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중화민국과의 갈등보다 루거오차오 사건이 일어나기 한 주 전인 6월 30일에 아무르 강의 건차자도(乾岔子島)에 요새를 건설하던 일본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포함 2척을 파괴한 사건으로 인해 소비에트를 자극하는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참모총장이었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를 불러들여 대책을 묻고자 했으나 명확한 언질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쇼와 천황은 “중국과의 전쟁은 두석 달 만에 끝낼 수 있다”고 말한 간인노미야와 스기야마 하지메 신임 육군대신의 말만을 믿고, 고노에 내각의 허베이 파병 결정을 승인하였다. 7월 25일에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보낸 증원 부대가 일본 본토에서 온 3개 사단과 합류한 뒤부터는 베이징과 톈진에서 가까운 몇몇 지역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7월 27일 쇼와 천황은 전쟁을 결판내기 위하여 베이징과 톈진 지방의 중국군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고,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한지 이틀 만에 베이징과 톈진을 모두 점령했다.
쇼와 천황이 내린 어명으로, 일본의 군사적 행동은 중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지키는 것에서 중국을 적극적으로 침략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쇼와 천황은 8월 31일부터 2주일 동안 연이어 병력 동원을 재가했으며, 9월 7일에는 상하이 전선에 3개 사단과 타이완 주둔군을 파견하는 것을 허가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이러한 중국 침략 행위를 ‘사변(事變)’을 해결하는 것이라 부르거나, 성전(聖戰, 성스러운 전쟁)으로 미화했다. 쇼와 천황은 10월 27일에 러일 전쟁 이후 폐지된 대본영을 궁중에 다시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1월 19일에는 내각과 군을 이어주는 ‘대본영정부연락회의’가 조직됐다. 육해군의 결정사항, 요구사항을 다른 정부 부처의 기능 및 정책과 통합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리고 연락회의의 안건들은 쇼와 천황이 직접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이 어전회의는 정부 규정에 따른 것도 아니었고, 헌법 절차와도 무관했다. 어전회의에서 쇼와 천황은 일본과 그 주변국의 운명이 엮인 결정들을 승낙했는데,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재가만 했다.
난징 대학살을 묵인하다
12월 14일에 난징을 점령한 뒤, 일본군은 아사카노미야의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의 주도로, 비무장 상태로 아직 난징과 그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군 패잔병들을 붙잡아 소년과 성인 남자 약 17,000명 이상을 살해했으며, 17일에는 예정대로 마쓰이와 아사카노미야의 승전 기념 행진이 열렸다. 일본군은 난징 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 석 달이 넘도록 살인, 강간, 약탈, 방화를 자행했으며 일본 육군 소위 두 명이 저지른 ‘중국인 100명 목 베기 시합’은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몇 번이고 게재되기도 했다. 일본군은 난징에서 자행한 범죄 행위의 보도를 금지하고 미화하려 했으며, 통제를 강요당한 일본과 조선의 언론들은 “난징에서 많은 포로가 잡히고 중국인들의 시신이 대량으로 묻혔다”는 식의 보도만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난징의 전쟁 범죄는 미국과 유럽에서 온 소수의 기자들을 중심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욘 라베를 비롯해 아직 난징에 남아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안전지대를 구성해 약 20만∼30만의 피난민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쇼와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과 정부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사카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간인노미야 등은 난징에서 일본군이 범죄를 저지를 때 군의 고위 간부였다. 스기야마 육군대신, 대본영의 장교들, 외무성 등도 알고 있었으며 전시 중 특명전권대사로 난징에 머물렀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난징 점령 당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중국에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허버트 빅스는 당시 일본군의 지휘명령 계통의 정점에 서서 모든 동정을 상세히 쫓고 있었던 쇼와 또한 난징 대학살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군 통수권자로서 군기 붕괴에 관심을 쏟을 의무를 실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쇼와 천황은 군에서 해임되어 도쿄로 돌아온 마쓰이에게 마쓰이의 임무 성공을 치하하는 칙서를 내렸으며 1940년에서야 돌아온 아사카노미야에게는 훈장을 내리는 식으로 난징에서의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
중일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던 1940년 9월, 쇼와 천황은 《대륙명 제458호》를 내려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략을 승낙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일본은 내부 식민지에 대한 탄압도 강화했는데, 1939년부터 이미 창씨개명을 시행해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의 사용을 강요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 8월 10일에는 조선총독부 점령 지역의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모두 폐간했다. 이어 쇼와 천황은 9월 19일 어전회의에서 나치 독일 -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의 추축 동맹을 재가하였으며, 9월 27일 고노에 내각이 보낸 일본 대표단이 베를린에서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협약에 조인했다. 여기에는 루마니아의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도 동참했다. 협약에 따라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럽 지배를,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인정했다.
9월 28일 쇼와 천황은 일본이 삼국 협약을 치렀다는 내용을 담은 조서를 국민들에게 발표하였다. 10월 4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은 교토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이 삼국 협약에 대항한다면 우리 삼국은 과감히 맞서 싸우겠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추축국 가담에 영국은 폐쇄하기로 했던 버마 로드를 다시 열어 장제스 정부를 적극 지원하고,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는 장제스 정부에 소규모의 차관을 제공하고 중국군의 전쟁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위기를 느낀 고노에 총리는 ‘신체제 운동(新体制運動)’을 주창하며, 군부의 힘으로 의회를 강제로 폐쇄하고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라 불리는 단일 정당을 통해 일당 독재 체제를 세웠다.
1941년,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이 사이에 대본영정부연락회의의 심의 장소는 총리 관저에서 쇼와 천황이 있는 고쿄로 옮겨졌다. 연락회의의 최종 결정은 어전회의를 거쳐 공식화되기 때문에, 연락회의가 잦아지자 쇼와 천황이 참여하는 어전회의도 더 잦아지게 됐다. 쇼와 천황은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초순에 일본과 소비에트 연방이 맺은 불가침 조약을 승인했지만 7월 2일에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할 목적으로 ‘관동군 특종 연습’을 은밀히 재가해 북만주에 70만∼80만에 이르는 병력을 집결시켰다가 8월 9일에 철회하는 등 결정을 계속 번복했다. 이 사이에 미국은 일본의 재미 자산을 동결하고, 8월 1일부로 석유와 가솔린의 대일본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일본은 당시 석유 수입량의 약 80%를 미국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이 조치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일본에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열려던 고노에 내각의 계획이 실패한 뒤 미국, 영국, 중화민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하나의 축을 결성해 일본을 압박했다. 군부는 이에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면서 고노에 내각을 압박했다. 결국 고노에 내각은 10월 16일에 총사직하고, 도조 히데키와 함께 후임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친왕을 천거했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황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며 이들의 천거를 각하했으며, 대신 측근 기도 고이치와 중신들의 천거를 받은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지명했다. 10월 17일에 출범한 도조 내각은 가야 오키노리를 대장대신으로,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도조가 주장하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얼마 못가 결국 도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쇼와 천황은 도조에게 전쟁 이후를 대비해 로마 교황 비오 11세와 만나게 했으며, 11월 8일에는 진주만 공격 작전에 대한 보고를, 같은 달 15일에는 계획의 전모와 세부 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