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년∼1943년)
일본제국 해군제독으로, 일본제국해군연합함대 사령장관이다.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국방무관 근무 경력이 있는 미국 유학파로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알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만 공습을 입안 및 성공시켜 일약 영웅이 된다. 이후 약 2년간 일본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및 기타 여러 해상전과 공중전을 지휘했다.
1943년 4월 18일,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항공기로 이동하던 중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이 출동시킨 전투기에 의해 부건빌 섬 상공에서 격추당해 전사했다.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낳았다고 하여 56을 뜻하는 이소로쿠(五十六)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高野五十六)이다. 이후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로 개명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문화를 조사하다가, 일본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소로쿠라는 이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는데,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 기술력과 교육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히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識字率)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구도 1억 1천만을 돌파하여 러시아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 더 무서운 건 농노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와는 다르게, 미국은 이렇게 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루머로 디트로이트의 광활한 공장지대, 애팔레치아의 크고 아름다운 광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 심지어 야마모토가 타고 가다가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아줌마가 뚝딱 고쳐내던 경험에 의해 반대를 한 것이고,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 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충격이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적어도 자동차 고치는 아낙네 이야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이 대위로 육군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 한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라 할 수 있다. 에드윈 팔머 호잇(Edwin P.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했으며, 이 시절 야마모토는 “머리가 굳은 거함거포주의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항공대가 실적을 올려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 제군은 더욱 더 훈련과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항공주병론자(航空主兵論者)들을 격려하는 한편,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부잣집 도코노마는 훌륭한 장식품이다. 그 자체로는 실용적인 가치는 낮지만, 그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로서의 무형적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함은 실용적인 가치는 하락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전함주병사상이 강해 국제적으로 해군력의 상징으로서의 큰 영향력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함을 도코노마의 인형이다라고 생각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하지는 마라.”라는 훈시를 하기도 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 ‘포격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함은 항공기들의 공격에 격침당할 것이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戰)의 일환이었고, 항모전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 같은 해군 조종사들에게도 대차게 비판받기도 했다.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전함 야마토의 건조가 한창이던 구레 해군 공창을 방문했을 때 설계자인 후쿠다 케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만 자넨 조만간 실직할 거야, 이제 우리 해군도 항공 전력이 중요하지 거함거포 같은 건 필요가 없게 될 거다.” 라고 말했고, 여기에 후쿠다는 “불침함은 무리라도, 침몰시키기 어려운 배를 만들겠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심하게 대립했다. 이때 하도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제독의 집 앞에는 상시 육군 헌병들과 해군 육전대의 장갑차가 경호를 위해 대기했고,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해군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고, 나치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질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지 6∼12개월간은 승리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 전략으로서 점감요격작전과 남방작전을 상정해온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킨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 전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 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일본도 전쟁 전에 항모 건조 계획이 있어서 개장할 배를 미리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제는 생산력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은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 깊다.
요미우리 기자 : 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 기반이 동부에 집중돼 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테니 이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 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 승리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 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 항모 4척이 모두 격침되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 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한편 미드웨이 해전 때 나구모 기동부대의 300해리 후방에 있었던 일로 항모 아카기의 전투기대 대장인 이타야 시게루 소좌에게 ‘전쟁 구경이라도 할 참인가.’라며 비판당했다.
목재와 종이로 지어진 일본의 도시들은 쉽게 타버릴 것이다. 육군은 허풍을 떨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해 공습이 일어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군기들이 충돌해서 해상에 기름이 뿌려졌을 때 물 위에서 기름이 어떻게 타는지 본 적 있는가?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943년 1월말에서 2월초,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난 뒤,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은 과달카날뿐만 아니라 뉴기니지역에서도 맥아더의 공세(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밀려서 동부뉴기니의 동남부 일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일대와 뉴기니지역에서의 주도권은 연합군이 가져갔으며, 뉴기니지역의 일본군에겐 동부뉴기니 북쪽 내륙과 해안지대의 방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동부뉴기니를 잃어버리면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동부 뉴기니방면에 병력증원을 기도 했지만, 이 시도를 알아차리고 단단히 준비한 연합군에 의해 수송선단이 증발하고 증원 병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가 1943년 3월 3일.
수송선단의 끔찍한 피해도 피해였거니와 이때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설 조짐이 보이자 야마모토는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렸다. 조급해진 야마모토는 지상기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산타크루즈 해전 이래 재건 중이던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부대들까지 총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의 연합군 지역에 대해 대규모 항공 공격을 가했다.(이호작전 : 1943년 4월 7일∼4월 16일) 야마모토는 4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선을 격침 또는 파괴하고, 180대에 가까운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 또는 파괴하였다는 작전결과를 보고 받고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이 전과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군이 보고한 것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실상 연합군의 전투력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그 당시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본군 최전선 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 행차를 최종 결심한다. 부건빌 섬의 바로 코앞에는 동남쪽으로 솔로몬 제도가 이어져 있었고, 제도의 남쪽지역엔 이젠 미군의 핵심 작전기지가 된 과달카날이 있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예정대로 부건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미 해군 군사정보대 하와이 기지가 4월 14일 대본영이 관계 지역에 타전한 야마모토 시찰 스케줄을 감청하였던 것이다. 일차로 해독한 암호는 전체 내용 중 15%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도착 시각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작전)”으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 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단, 이 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시간 정황상 니미츠 제독이 홀시 제독의 일차적인 작전 컨설팅을 받고 녹스 장관은 니미츠 제독의 결정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 문건 NTF131755은 1943년 4월 14일에 발신 되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작전을 승인한 것이 1943년 4월 17일로 3일간의 갭에 킹 제독->녹스 장관->루스벨트 대통령의 각료회의까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건빌 섬 부인(Buin) 일대의 비행장 상공은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미군 전투기들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함대 참모들은 부건빌 시찰을 계속 만류했으나, 야마모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찰 계획이 확정된 뒤엔 현지 항공대 지휘관이 호위기를 더 배치하자고 하였으나 야마모토 본인과 참모진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아군 기지에 가는데 그렇게 유세부릴 거 있냐는 이유였다.
이외에도 호위기 세력을 적게 가져간 데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후반부부터 솔로몬 제도의 미군 항공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지만 솔로몬 제도에서 본격적인 공세 작전, 특히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가동한 부건빌 남부지역 일대의 비행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수행하기에는, 이 당시의 미군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일단, 1943년 3월 시점에서 솔로몬 일대 양측의 항공 전력은 아직 미
군이 숫적으로 열세였다.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결과에 놀란 일본 육군이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일대에 배치한 육군항공대 전력 200대를 전부 철수시켜서 뉴기니로 돌려버리면서 숫적 우세가 바뀌었지만,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투기 전력의 경우, 미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제로센에 성능적으로 열세인 F4F, P-40, P-39가 주력이었고, 제로센에 성능상 우위를 가진 F4U, P-38은 배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숫자가 부족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만 따져보면 숫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미군 전투기의 행동반경은 과달카날에서 부건빌까지의 직선 코스로 비행할 때 가능한 행동반경이었으며, 이 코스는 솔로몬제도 한복판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과달카날을 제외한 솔로몬제도와 그 일대 해역 대부분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발견되기 딱 좋았으며, 이들의 조기경보를 받은 부건빌의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리 요격에 나설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당시 부건빌보다 먼 라바울에서 출격하여 행동반경 끝에 있던 과달카날에서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던 일본군이 처했던 상황이, 이 당시 부건빌을 노리던 미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실제로 미군은 1943년 2월에 당대 최신형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과 F4U 콜세어의 호위하에 부건빌에 대한 폭격을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지상 및 해상에서의 조기경보로 인해 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한 바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이호작전으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미군 항공 전력이 대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분간 미군이 항공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호작전 당시에도 미군이 출격시킨 항공 전력은 일본군이 투입한 전력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폭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가 아니었다면 상술한 과장된 전과 보고가 상당 부분 실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이 시점에서 부건빌 상공의 방공작전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였으므로, 설령 ‘이호작전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미군 전투기들의 위협이 있다 해도 부건빌보다 먼 곳에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호작전의 ‘대전과’와는 별개로 솔로몬 일대의 일본군 항공 전력도 피해를 입어서 재정비 중이었던 데다가 이호작전을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들도 모두 원대 복귀해서 전체 전력이 줄어든 사정에 지휘관 순시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기엔 부담스러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호작전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적어서 미군의 항공 전력이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던 데다가, P-38 라이트닝이 당시 P-38용으로 막 개발되어 배치되던 신형 대용량 보조 연료탱크까지 가득 채울 경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솔로몬 제도를 우회한 경로를 취해도 부건빌 상공을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 이하 일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복수작전”으로 명명한 이 계획을 육군항공대가 맡도록 지시하고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격 임무는 P-38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육항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가 담당하였다. 마크 미처 제독과 현장지휘관 소령 존 미첼은 339 대대를 포함하여 당시 과달카날에서 P-38을 운용하던 3개 전투 비행대대들로부터 최상의 기체들과 조종사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대의 P-38를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대의 P-38이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조기경보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 남서쪽 50마일까지 저공으로 비행한 후 부건빌 방향으로 이동하고 부건빌 근처에 도달하면 부인 비행장 방면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부건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멀리 돌아서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비행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신형 대용량 보조탱크를 동원해도 부건빌 인근 상공에서 P-38이 매복할 수 있는 시간은 10∼15분 남짓이 전부였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또는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기함 무사시에서 출발하여 라바울로 이동하여 육군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때 라바울 지역 지휘관 또한 연합함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부건빌로 가는 일정의 취소를 요청했으나 야마모토는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사실, 일정강행이 잘못된 게 아닌 것이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부건빌 일대의 제공권은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암호체계가 변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339비행대장 존 미첼 소령의 지휘하에 18대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공격조에 속했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고, 공격조는 2대만 남게 되었다(토마스 랜피어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이 때문에 예비조의 2대(베스비 홈즈 중위, 레이먼드 하인 중위)가 공격조에 편성되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때 예비조의 P-38중 1대(홈즈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하인 중위와 함께 이탈하여, 최초 교전한 P-38은 14대(호위기 상대 12대 + 수송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토마스 란피어의 P-38이 호위기를 가로막는 사이 렉스 바버 대위가 2대의 폭격기를 뒤쫓았다. 2대의 폭격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폭격기인 G4M으로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했던 1대의 G4M이 P-38의 집중사격을 받고 밀림에 바로 추락하였다.(탑승인원 11명 전원 사망)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이 탑승한 나머지 1대의 G4M은 최초 교전 시작 당시 이탈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합류한 예비조 P-38 2대 및 1번기 격추 후에 달려온 바버 중위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전원이 전사, 우가키 탑승기에선 우가키 제독을 포함
한 3명이 격추 직후 달려온 단정에 구조되었다. 우가키 제독은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회복했다.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 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 육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에 달려든 예비조의 P-38 중 1대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 피격된 기체의 조종사 레이먼드 하인(Raymond K. Hine) 육군 중위도 전사했으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육군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일본 해군 측 손실은 1식육상공격기 2대를 격추했다. 폭격기 2대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작전은 대성공 이었다.
육공기의 추락 소식을 전달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추락 다음날 함대 참모 와타나베가 비행정에 탑승해 추락 현장을 확인하고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수색대는 추락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후 육군에 연락하여 6사단 소속 보병 포중대를 추락 현장에 파견하였다. 지휘관 하마쓰나 대위는 신원 확인을 시도했지만 죄다 불타버려 식별이 불가능 했고, 간신히 비행화에 적힌 이름으로만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조종사 좌석에 앉은 야마모토의 시신을 확보하여 연합함대에 인도하였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그 즉시 추락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폭격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의 범위 바깥의 나무 아래에 의자채로 튕겨져 나와 폭격기를 등진 채 군도(도검)를 꼭 쥐고 앉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일본군이 야마모토의 사망을 발표할 당시 일본군의 공식 발표로는 왼쪽 어깨 아래 등으로 들어간 관통상 하나, 그리고 왼쪽 턱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눈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 하나가 있어서 후방에서 가해진 총격(혹은 그것에 의한 파편)이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이대로라면 전투기 총격 직후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내에서 엇갈린 기록이 있어서 후대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마모토의 시신은 현지에서 4월 21일 화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전함 무사시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 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 우려하여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1달 후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6월 5일에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 칭호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 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제도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다마 레이엔(多磨靈園)에 위치한다.
한편 미국은 암호감청 및 해독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작전의 실체를 속였다.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실시한 브리핑에서는 암호 감청 및 해독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연합군 해안 감시원들의 보고에 의해 야마모토의 행방을 파악했다고 얘기했다. 작전이 끝난 뒤엔 야마모토 탑승기의 격추와 관련된 조종사들의 보고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냥 침묵만 지킨 게 아니라 해당 작전이 통상적인 작전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다. 작전 2일 뒤에 미군의 대일본 선전 방송은 “부건빌 인근에서 전투기가 호위중이던 폭격기들을 발견하여 폭격기 2대와 전투기 2대를 격추하였다.”라고 수많은 전과 선전 사이에 짤막하게 방송하였다. 거기에다 이 작전 이후에도 전투기들을 부건빌 상공으로 계속 보내서 마치 암살 작전이 있었던 그날부터 미군이 부건빌 상공에서 통상적인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이 기만작전에서 배제되었다. 혹여나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 작전의 내용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1달 후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였지만, 6월 17일에 미국 방송이 앞서의 선전 방송과 별 다를 거 없는 브리핑을 내놨을 뿐,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은 암호 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 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미국이 야마모토를 죽인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好戰性)’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미 본토를 점령해서 백악관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본영이나 야마모토의 발언의 진의는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진주만 이후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항전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장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약한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부러 양쪽 모두 야마모토의 호전성을 부각하는 형태로 프로파간다(宣傳)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급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 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마모토 사살 이후 미군 내에서는 전공을 두고 지리(支離)한 논쟁이 이어졌다. 시작은 G4M 공격조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랜피어였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며 떠들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은 극비였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 존 미첼과 공격조의 렉스 바버를 비롯한 특별 공격 대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크게 당황해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전공과는 별개로 기밀 사항의 누설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한다.
어찌 되었던 공격대의 일원 중 누군가는 야마모토를 처치한 건 확실하였으므로 미군은 공격대 총지휘관 존 미첼, 공격조의 토마스 랜피어, 렉스 바버, 베스비 홈즈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였지만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랜피어가 있었다. 랜피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법정까지 갈 정도로 논쟁이 이어지자 1984년에 야마모토 격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교차검증에 나선다. 그 와중에 토마스 랜피어는 1985년에, 작전 당시 전체 지휘를 맡았던 존 미첼이 1994년에 죽었다. 미군은 랜피어 사후에 야마모토 격추의 전공을 렉스 바버와 토마스 랜피어의 공동 격추로 기록하여 논란을 봉합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위원회는 두 당사자의 주장 및 관련 기록들, 격추당한 G4M에 대한 현장 조사, 야마모토에 대한 부검 보고서, 작전 당시 일본군 호위기 조종사의 증언 등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차검증을 하였고, 1997년에 그 결과를 미국 전투기 에이스 협회에 제출하였다. 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는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건 렉스 바버라는 것이었다. 렉스 바버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야마모토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공식 발표는 총격 직후 전사였다. 이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자면 격추 이후 하루가 지난 뒤에 발견된 시신 상태는 여러모로 끔찍했을 것이다. 전투기의 총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었을 것이며, 설령 총상이 아닌 파편상이라 해도 덥고 습한 열대지역에서 시신은 금방 부패된다. 그러나 일본군 수색대를 지휘한 하마스나 육군 소위의 발견 보고에선 시신에 심각한 손상이 없어서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으며 구더기가 발견되거나 부패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야마모토 제독이 추락 이후에도 생존한 상태였고, 사망시간은 시신 발견 당일 오전 6시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건빌 현지에서 최초로 시신을 부검했던 현지 군의관 나나가와 중위는 시신엔 턱 외상이나 구강 내 출혈이 없고, 사망 원인을 전신타박상 또는 내장 출혈로 인한 쇼크사라고 기록했으며, 야마모토는 당초 생존해 있었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19일 새벽쯤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의 죽음을 각색하기 위해 최초 부검 이후에 시신을 일부러 훼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의 수장이 아군 지역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만으로도 문책감인데, 사정이 어찌되었건 간에 발견이 늦어져서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못 살렸다는 얘기마저 나돌게 된다면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추궁당하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군(自軍)의 패전, 졸전에 대해 은폐, 기만, 책임 떠넘기기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사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전함 무사시의 빈소에서 와타나베 대좌(아마 상술된 함대 참모로 보임)라는 자는 “탑승객들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내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장관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권총으로 자결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마모토 사망 직후 현지 부대 내지 관할군대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각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의 사망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입막음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패전 소식을 숨기기 위해, 살아 돌아온 항모기동부대원들을 외부와 차단한 채 격리, 연금시키고 대다수는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야마모토 사망이 미드웨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이 의혹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모토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사건 이후 호위 임무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자 최일선 비행장으로 자진해서 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자원을 가장한 강제 전출 또는 일선으로의 자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이들 중 4명은 이 사건 이후 3개월 이내에 전사하였고, 다른 1명은 1943년 중 계속 이어진 솔로몬 제도에서의 항공전 와중에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 종전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명 또한 1943년의 격전 중에 오른손을 잃었다. 하마스나 소위 및 그 휘하 수색 인원들도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마스나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쟁 중 전사했다. 최초 부검의인 니나가와 중위 역시 일선에 계속 있다가 전쟁 후반기에 전사하였다. 하마스나 소위의 경우, 야마모토 추락 지점 발견의 공으로 일본 본토로 전출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의혹이 진짜라면 실상은 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해 해전 항목의 후반부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모토 사후 2달을 갓 넘긴 1943년 6월 하순부터 미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서 11월 초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시찰을 갔던 부건빌 섬에 미군이 들이닥치고, 미처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월 말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출발했던 라바울 코앞까지 미군이 육박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 전출이 아니래도 남태평양 전선에 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에 의해 사살될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전투복인 사관용 ‘3종 군장’을 생애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사관용 ‘2종 군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 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진주만 공습이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 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로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 못 한 항모의 집중 운용 전술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일본의 전술을 보고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 미국의 사료를 보면 전쟁 초 상황이 매우 긴박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타임 리미트로 잡은 약 6개월∼1년동안 태평양 방면에서 정면에서 맞대응할 정도로 운용할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 척 안 남은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최소한 고착 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 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의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 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 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 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km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 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 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 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부대의 톱으로서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안전한 전함에 타 후방으로 빠져 있었고, 이것은 연합함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마저 깨는 계기가 된다. 아예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豊田 副武, 1885년∼1957년)는 연합함대에 사실상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후방에 빠져있었고, 이것은 미 육군 수송선단 격파라는 목적달성에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다.
사령장관직을 걸고 벌인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본토의 기함 나가토에서 머물러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정작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로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전함을 트럭섬 정박지로 끌고 오면서 피 같은 석유와 물자를 낭비한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는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자주 시찰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건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싸움을 피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전선을 시찰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시찰계획, 즉 특급군사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역시 상술한 대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사실은 평판에 거품이 대단히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해군선옥론(陸軍船玉論)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에 책임을 물으면서 일본 해군에는 관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야마모토의 주도로 인한 실책조차 육군 측에 떠넘겨지는 식으로 미화된 사례도 존재한다.
1. 폭격기 만능주의는 야마모토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야마모토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1936년)에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지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미 육군 항공대도 폭격기 만능주의의 영향으로 B-17이 호위기도 없이 무리한 주간 폭격을 했다가 수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한 전적이 있다. 오히려 1936년의 시점에서 폭격기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호위 전투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면 줄리오 두헤(Giulio Douhet, 1869년∼1930년)의 사상을 박살낸 항공전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부분은 비판할 거리가 맞다.
2. 진주만 공습에서 야마모토는 타란토 공습(Battle of Taranto)을 참고해서 야간에 뇌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입장이었으나 겐다 미노루 중좌가 정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주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후 2차 세계대전의 해전을 들여다봐도, 야간에 육군 폭격기들이 활동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해군의 전투기와 급폭기, 뇌격기가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야간기습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 3차 공습을 단념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야간 착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3. 진주만 공습은 단지 소거법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도 다소 미묘. 일단 불가능한 방법들을 골라내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고 그렇게 골라내서 그래도 쓸 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은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정한 것은 야마모토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목한 것은 겐다 미노루와 오니시 중장이었다.
4. 진주만 공습의 효과에 대해서도 초반에 다수의 전함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한동안 미 해군의 작전에 제약을 가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을 탈탈 털어먹고도 야간에 후퇴해야 했던 이유가,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 미군의 기본 전술방향마저 바꿔놓은 진주만 공습이 보잘 것 없는 전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5. 해군 장군인 야마모토가 육군이 주둔한 과달카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까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과달카날의 문제가 해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지만, 과달카날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인데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시찰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다소 부적절한 것이, 과달카날에는 미 육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 해병대 또한 주둔하고 있었고 니미츠의 경우 태평양 해역의 해군, 해병대, 육군을 전부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이건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33년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 시절, ‘적 공격기의 선회기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개발/훈련해야 한다.’라는 시바타 타케오의 진언을 “제국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육박필중(肉薄必中)의 전통정신이 있었다. 향후 1미터라도 사정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말로 일축한 일까지 있다.
군사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단점으로는 카와이 치요코(河合千代子)라는 첩과의 관계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틀 전에도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애교였고, 심지어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작전기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달했었다. 이런 치요코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야마모토의 평판에 금이 갈 것은 분명했기에 야마모토 사후 몇몇 장교들이 자살을 권유할 정도였다. 치요코는 자살 대신 대부분의 편지를 군부에 넘겼으나 몇 장은 숨기고 있었으며, 그 남은 일부의 편지가 그 모양이었다.
또한 심각한 도박중독자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질이 작전지휘에서 드러난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문제는 그런 기질이 나와서 제대로 말아먹은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이후 일본군이 제대로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야마모토의 도박 중독자로서의 면모는 전투지휘 자체보다는 그 이외에서 드러나는데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의 출격 이후 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일화도 남겼고 해군 내에서 포커로는 야마모토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기 링크된 지휘관 좌담의 증언을 보면 블러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어쩌다 이겼을 때 고수처럼 보이는 것뿐이고 실제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평화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함대파(艦隊派)에게 강경하게 반응해서 조약파가 쓸려나갈 때 커리어가 끝날 번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후시미노미야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일본군에서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 1로 벌어질 것이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3국 동맹에도 불만을 가졌고 진주만 공습 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국 해군제독으로, 일본제국해군연합함대 사령장관이다.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국방무관 근무 경력이 있는 미국 유학파로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알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만 공습을 입안 및 성공시켜 일약 영웅이 된다. 이후 약 2년간 일본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및 기타 여러 해상전과 공중전을 지휘했다.
1943년 4월 18일,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항공기로 이동하던 중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이 출동시킨 전투기에 의해 부건빌 섬 상공에서 격추당해 전사했다.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낳았다고 하여 56을 뜻하는 이소로쿠(五十六)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高野五十六)이다. 이후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로 개명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문화를 조사하다가, 일본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소로쿠라는 이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는데,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 기술력과 교육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히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識字率)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구도 1억 1천만을 돌파하여 러시아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 더 무서운 건 농노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와는 다르게, 미국은 이렇게 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루머로 디트로이트의 광활한 공장지대, 애팔레치아의 크고 아름다운 광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 심지어 야마모토가 타고 가다가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아줌마가 뚝딱 고쳐내던 경험에 의해 반대를 한 것이고,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 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충격이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적어도 자동차 고치는 아낙네 이야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이 대위로 육군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 한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라 할 수 있다. 에드윈 팔머 호잇(Edwin P.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했으며, 이 시절 야마모토는 “머리가 굳은 거함거포주의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항공대가 실적을 올려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 제군은 더욱 더 훈련과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항공주병론자(航空主兵論者)들을 격려하는 한편,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부잣집 도코노마는 훌륭한 장식품이다. 그 자체로는 실용적인 가치는 낮지만, 그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로서의 무형적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함은 실용적인 가치는 하락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전함주병사상이 강해 국제적으로 해군력의 상징으로서의 큰 영향력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함을 도코노마의 인형이다라고 생각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하지는 마라.”라는 훈시를 하기도 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 ‘포격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함은 항공기들의 공격에 격침당할 것이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戰)의 일환이었고, 항모전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 같은 해군 조종사들에게도 대차게 비판받기도 했다.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전함 야마토의 건조가 한창이던 구레 해군 공창을 방문했을 때 설계자인 후쿠다 케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만 자넨 조만간 실직할 거야, 이제 우리 해군도 항공 전력이 중요하지 거함거포 같은 건 필요가 없게 될 거다.” 라고 말했고, 여기에 후쿠다는 “불침함은 무리라도, 침몰시키기 어려운 배를 만들겠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심하게 대립했다. 이때 하도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제독의 집 앞에는 상시 육군 헌병들과 해군 육전대의 장갑차가 경호를 위해 대기했고,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해군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고, 나치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질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지 6∼12개월간은 승리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 전략으로서 점감요격작전과 남방작전을 상정해온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킨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 전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 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일본도 전쟁 전에 항모 건조 계획이 있어서 개장할 배를 미리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제는 생산력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은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 깊다.
요미우리 기자 : 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 기반이 동부에 집중돼 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테니 이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 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 승리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 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 항모 4척이 모두 격침되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 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한편 미드웨이 해전 때 나구모 기동부대의 300해리 후방에 있었던 일로 항모 아카기의 전투기대 대장인 이타야 시게루 소좌에게 ‘전쟁 구경이라도 할 참인가.’라며 비판당했다.
목재와 종이로 지어진 일본의 도시들은 쉽게 타버릴 것이다. 육군은 허풍을 떨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해 공습이 일어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군기들이 충돌해서 해상에 기름이 뿌려졌을 때 물 위에서 기름이 어떻게 타는지 본 적 있는가?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943년 1월말에서 2월초,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난 뒤,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은 과달카날뿐만 아니라 뉴기니지역에서도 맥아더의 공세(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밀려서 동부뉴기니의 동남부 일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일대와 뉴기니지역에서의 주도권은 연합군이 가져갔으며, 뉴기니지역의 일본군에겐 동부뉴기니 북쪽 내륙과 해안지대의 방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동부뉴기니를 잃어버리면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동부 뉴기니방면에 병력증원을 기도 했지만, 이 시도를 알아차리고 단단히 준비한 연합군에 의해 수송선단이 증발하고 증원 병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가 1943년 3월 3일.
수송선단의 끔찍한 피해도 피해였거니와 이때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설 조짐이 보이자 야마모토는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렸다. 조급해진 야마모토는 지상기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산타크루즈 해전 이래 재건 중이던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부대들까지 총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의 연합군 지역에 대해 대규모 항공 공격을 가했다.(이호작전 : 1943년 4월 7일∼4월 16일) 야마모토는 4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선을 격침 또는 파괴하고, 180대에 가까운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 또는 파괴하였다는 작전결과를 보고 받고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이 전과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군이 보고한 것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실상 연합군의 전투력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그 당시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본군 최전선 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 행차를 최종 결심한다. 부건빌 섬의 바로 코앞에는 동남쪽으로 솔로몬 제도가 이어져 있었고, 제도의 남쪽지역엔 이젠 미군의 핵심 작전기지가 된 과달카날이 있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예정대로 부건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미 해군 군사정보대 하와이 기지가 4월 14일 대본영이 관계 지역에 타전한 야마모토 시찰 스케줄을 감청하였던 것이다. 일차로 해독한 암호는 전체 내용 중 15%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도착 시각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작전)”으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 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단, 이 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시간 정황상 니미츠 제독이 홀시 제독의 일차적인 작전 컨설팅을 받고 녹스 장관은 니미츠 제독의 결정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 문건 NTF131755은 1943년 4월 14일에 발신 되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작전을 승인한 것이 1943년 4월 17일로 3일간의 갭에 킹 제독->녹스 장관->루스벨트 대통령의 각료회의까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건빌 섬 부인(Buin) 일대의 비행장 상공은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미군 전투기들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함대 참모들은 부건빌 시찰을 계속 만류했으나, 야마모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찰 계획이 확정된 뒤엔 현지 항공대 지휘관이 호위기를 더 배치하자고 하였으나 야마모토 본인과 참모진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아군 기지에 가는데 그렇게 유세부릴 거 있냐는 이유였다.
이외에도 호위기 세력을 적게 가져간 데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후반부부터 솔로몬 제도의 미군 항공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지만 솔로몬 제도에서 본격적인 공세 작전, 특히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가동한 부건빌 남부지역 일대의 비행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수행하기에는, 이 당시의 미군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일단, 1943년 3월 시점에서 솔로몬 일대 양측의 항공 전력은 아직 미
군이 숫적으로 열세였다.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결과에 놀란 일본 육군이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일대에 배치한 육군항공대 전력 200대를 전부 철수시켜서 뉴기니로 돌려버리면서 숫적 우세가 바뀌었지만,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투기 전력의 경우, 미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제로센에 성능적으로 열세인 F4F, P-40, P-39가 주력이었고, 제로센에 성능상 우위를 가진 F4U, P-38은 배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숫자가 부족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만 따져보면 숫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미군 전투기의 행동반경은 과달카날에서 부건빌까지의 직선 코스로 비행할 때 가능한 행동반경이었으며, 이 코스는 솔로몬제도 한복판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과달카날을 제외한 솔로몬제도와 그 일대 해역 대부분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발견되기 딱 좋았으며, 이들의 조기경보를 받은 부건빌의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리 요격에 나설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당시 부건빌보다 먼 라바울에서 출격하여 행동반경 끝에 있던 과달카날에서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던 일본군이 처했던 상황이, 이 당시 부건빌을 노리던 미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실제로 미군은 1943년 2월에 당대 최신형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과 F4U 콜세어의 호위하에 부건빌에 대한 폭격을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지상 및 해상에서의 조기경보로 인해 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한 바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이호작전으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미군 항공 전력이 대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분간 미군이 항공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호작전 당시에도 미군이 출격시킨 항공 전력은 일본군이 투입한 전력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폭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가 아니었다면 상술한 과장된 전과 보고가 상당 부분 실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이 시점에서 부건빌 상공의 방공작전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였으므로, 설령 ‘이호작전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미군 전투기들의 위협이 있다 해도 부건빌보다 먼 곳에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호작전의 ‘대전과’와는 별개로 솔로몬 일대의 일본군 항공 전력도 피해를 입어서 재정비 중이었던 데다가 이호작전을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들도 모두 원대 복귀해서 전체 전력이 줄어든 사정에 지휘관 순시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기엔 부담스러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호작전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적어서 미군의 항공 전력이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던 데다가, P-38 라이트닝이 당시 P-38용으로 막 개발되어 배치되던 신형 대용량 보조 연료탱크까지 가득 채울 경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솔로몬 제도를 우회한 경로를 취해도 부건빌 상공을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 이하 일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복수작전”으로 명명한 이 계획을 육군항공대가 맡도록 지시하고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격 임무는 P-38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육항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가 담당하였다. 마크 미처 제독과 현장지휘관 소령 존 미첼은 339 대대를 포함하여 당시 과달카날에서 P-38을 운용하던 3개 전투 비행대대들로부터 최상의 기체들과 조종사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대의 P-38를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대의 P-38이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조기경보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 남서쪽 50마일까지 저공으로 비행한 후 부건빌 방향으로 이동하고 부건빌 근처에 도달하면 부인 비행장 방면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부건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멀리 돌아서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비행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신형 대용량 보조탱크를 동원해도 부건빌 인근 상공에서 P-38이 매복할 수 있는 시간은 10∼15분 남짓이 전부였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또는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기함 무사시에서 출발하여 라바울로 이동하여 육군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때 라바울 지역 지휘관 또한 연합함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부건빌로 가는 일정의 취소를 요청했으나 야마모토는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사실, 일정강행이 잘못된 게 아닌 것이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부건빌 일대의 제공권은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암호체계가 변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339비행대장 존 미첼 소령의 지휘하에 18대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공격조에 속했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고, 공격조는 2대만 남게 되었다(토마스 랜피어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이 때문에 예비조의 2대(베스비 홈즈 중위, 레이먼드 하인 중위)가 공격조에 편성되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때 예비조의 P-38중 1대(홈즈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하인 중위와 함께 이탈하여, 최초 교전한 P-38은 14대(호위기 상대 12대 + 수송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토마스 란피어의 P-38이 호위기를 가로막는 사이 렉스 바버 대위가 2대의 폭격기를 뒤쫓았다. 2대의 폭격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폭격기인 G4M으로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했던 1대의 G4M이 P-38의 집중사격을 받고 밀림에 바로 추락하였다.(탑승인원 11명 전원 사망)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이 탑승한 나머지 1대의 G4M은 최초 교전 시작 당시 이탈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합류한 예비조 P-38 2대 및 1번기 격추 후에 달려온 바버 중위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전원이 전사, 우가키 탑승기에선 우가키 제독을 포함
한 3명이 격추 직후 달려온 단정에 구조되었다. 우가키 제독은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회복했다.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 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 육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에 달려든 예비조의 P-38 중 1대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 피격된 기체의 조종사 레이먼드 하인(Raymond K. Hine) 육군 중위도 전사했으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육군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일본 해군 측 손실은 1식육상공격기 2대를 격추했다. 폭격기 2대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작전은 대성공 이었다.
육공기의 추락 소식을 전달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추락 다음날 함대 참모 와타나베가 비행정에 탑승해 추락 현장을 확인하고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수색대는 추락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후 육군에 연락하여 6사단 소속 보병 포중대를 추락 현장에 파견하였다. 지휘관 하마쓰나 대위는 신원 확인을 시도했지만 죄다 불타버려 식별이 불가능 했고, 간신히 비행화에 적힌 이름으로만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조종사 좌석에 앉은 야마모토의 시신을 확보하여 연합함대에 인도하였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그 즉시 추락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폭격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의 범위 바깥의 나무 아래에 의자채로 튕겨져 나와 폭격기를 등진 채 군도(도검)를 꼭 쥐고 앉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일본군이 야마모토의 사망을 발표할 당시 일본군의 공식 발표로는 왼쪽 어깨 아래 등으로 들어간 관통상 하나, 그리고 왼쪽 턱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눈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 하나가 있어서 후방에서 가해진 총격(혹은 그것에 의한 파편)이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이대로라면 전투기 총격 직후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내에서 엇갈린 기록이 있어서 후대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마모토의 시신은 현지에서 4월 21일 화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전함 무사시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 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 우려하여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1달 후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6월 5일에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 칭호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 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제도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다마 레이엔(多磨靈園)에 위치한다.
한편 미국은 암호감청 및 해독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작전의 실체를 속였다.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실시한 브리핑에서는 암호 감청 및 해독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연합군 해안 감시원들의 보고에 의해 야마모토의 행방을 파악했다고 얘기했다. 작전이 끝난 뒤엔 야마모토 탑승기의 격추와 관련된 조종사들의 보고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냥 침묵만 지킨 게 아니라 해당 작전이 통상적인 작전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다. 작전 2일 뒤에 미군의 대일본 선전 방송은 “부건빌 인근에서 전투기가 호위중이던 폭격기들을 발견하여 폭격기 2대와 전투기 2대를 격추하였다.”라고 수많은 전과 선전 사이에 짤막하게 방송하였다. 거기에다 이 작전 이후에도 전투기들을 부건빌 상공으로 계속 보내서 마치 암살 작전이 있었던 그날부터 미군이 부건빌 상공에서 통상적인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이 기만작전에서 배제되었다. 혹여나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 작전의 내용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1달 후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였지만, 6월 17일에 미국 방송이 앞서의 선전 방송과 별 다를 거 없는 브리핑을 내놨을 뿐,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은 암호 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 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미국이 야마모토를 죽인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好戰性)’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미 본토를 점령해서 백악관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본영이나 야마모토의 발언의 진의는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진주만 이후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항전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장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약한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부러 양쪽 모두 야마모토의 호전성을 부각하는 형태로 프로파간다(宣傳)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급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 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마모토 사살 이후 미군 내에서는 전공을 두고 지리(支離)한 논쟁이 이어졌다. 시작은 G4M 공격조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랜피어였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며 떠들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은 극비였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 존 미첼과 공격조의 렉스 바버를 비롯한 특별 공격 대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크게 당황해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전공과는 별개로 기밀 사항의 누설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한다.
어찌 되었던 공격대의 일원 중 누군가는 야마모토를 처치한 건 확실하였으므로 미군은 공격대 총지휘관 존 미첼, 공격조의 토마스 랜피어, 렉스 바버, 베스비 홈즈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였지만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랜피어가 있었다. 랜피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법정까지 갈 정도로 논쟁이 이어지자 1984년에 야마모토 격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교차검증에 나선다. 그 와중에 토마스 랜피어는 1985년에, 작전 당시 전체 지휘를 맡았던 존 미첼이 1994년에 죽었다. 미군은 랜피어 사후에 야마모토 격추의 전공을 렉스 바버와 토마스 랜피어의 공동 격추로 기록하여 논란을 봉합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위원회는 두 당사자의 주장 및 관련 기록들, 격추당한 G4M에 대한 현장 조사, 야마모토에 대한 부검 보고서, 작전 당시 일본군 호위기 조종사의 증언 등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차검증을 하였고, 1997년에 그 결과를 미국 전투기 에이스 협회에 제출하였다. 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는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건 렉스 바버라는 것이었다. 렉스 바버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야마모토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공식 발표는 총격 직후 전사였다. 이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자면 격추 이후 하루가 지난 뒤에 발견된 시신 상태는 여러모로 끔찍했을 것이다. 전투기의 총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었을 것이며, 설령 총상이 아닌 파편상이라 해도 덥고 습한 열대지역에서 시신은 금방 부패된다. 그러나 일본군 수색대를 지휘한 하마스나 육군 소위의 발견 보고에선 시신에 심각한 손상이 없어서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으며 구더기가 발견되거나 부패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야마모토 제독이 추락 이후에도 생존한 상태였고, 사망시간은 시신 발견 당일 오전 6시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건빌 현지에서 최초로 시신을 부검했던 현지 군의관 나나가와 중위는 시신엔 턱 외상이나 구강 내 출혈이 없고, 사망 원인을 전신타박상 또는 내장 출혈로 인한 쇼크사라고 기록했으며, 야마모토는 당초 생존해 있었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19일 새벽쯤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의 죽음을 각색하기 위해 최초 부검 이후에 시신을 일부러 훼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의 수장이 아군 지역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만으로도 문책감인데, 사정이 어찌되었건 간에 발견이 늦어져서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못 살렸다는 얘기마저 나돌게 된다면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추궁당하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군(自軍)의 패전, 졸전에 대해 은폐, 기만, 책임 떠넘기기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사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전함 무사시의 빈소에서 와타나베 대좌(아마 상술된 함대 참모로 보임)라는 자는 “탑승객들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내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장관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권총으로 자결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마모토 사망 직후 현지 부대 내지 관할군대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각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의 사망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입막음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패전 소식을 숨기기 위해, 살아 돌아온 항모기동부대원들을 외부와 차단한 채 격리, 연금시키고 대다수는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야마모토 사망이 미드웨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이 의혹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모토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사건 이후 호위 임무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자 최일선 비행장으로 자진해서 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자원을 가장한 강제 전출 또는 일선으로의 자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이들 중 4명은 이 사건 이후 3개월 이내에 전사하였고, 다른 1명은 1943년 중 계속 이어진 솔로몬 제도에서의 항공전 와중에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 종전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명 또한 1943년의 격전 중에 오른손을 잃었다. 하마스나 소위 및 그 휘하 수색 인원들도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마스나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쟁 중 전사했다. 최초 부검의인 니나가와 중위 역시 일선에 계속 있다가 전쟁 후반기에 전사하였다. 하마스나 소위의 경우, 야마모토 추락 지점 발견의 공으로 일본 본토로 전출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의혹이 진짜라면 실상은 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해 해전 항목의 후반부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모토 사후 2달을 갓 넘긴 1943년 6월 하순부터 미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서 11월 초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시찰을 갔던 부건빌 섬에 미군이 들이닥치고, 미처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월 말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출발했던 라바울 코앞까지 미군이 육박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 전출이 아니래도 남태평양 전선에 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에 의해 사살될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전투복인 사관용 ‘3종 군장’을 생애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사관용 ‘2종 군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 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진주만 공습이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 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로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 못 한 항모의 집중 운용 전술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일본의 전술을 보고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 미국의 사료를 보면 전쟁 초 상황이 매우 긴박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타임 리미트로 잡은 약 6개월∼1년동안 태평양 방면에서 정면에서 맞대응할 정도로 운용할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 척 안 남은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최소한 고착 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 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의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 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 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 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km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 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 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 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부대의 톱으로서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안전한 전함에 타 후방으로 빠져 있었고, 이것은 연합함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마저 깨는 계기가 된다. 아예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豊田 副武, 1885년∼1957년)는 연합함대에 사실상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후방에 빠져있었고, 이것은 미 육군 수송선단 격파라는 목적달성에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다.
사령장관직을 걸고 벌인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본토의 기함 나가토에서 머물러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정작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로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전함을 트럭섬 정박지로 끌고 오면서 피 같은 석유와 물자를 낭비한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는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자주 시찰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건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싸움을 피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전선을 시찰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시찰계획, 즉 특급군사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역시 상술한 대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사실은 평판에 거품이 대단히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해군선옥론(陸軍船玉論)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에 책임을 물으면서 일본 해군에는 관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야마모토의 주도로 인한 실책조차 육군 측에 떠넘겨지는 식으로 미화된 사례도 존재한다.
1. 폭격기 만능주의는 야마모토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야마모토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1936년)에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지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미 육군 항공대도 폭격기 만능주의의 영향으로 B-17이 호위기도 없이 무리한 주간 폭격을 했다가 수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한 전적이 있다. 오히려 1936년의 시점에서 폭격기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호위 전투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면 줄리오 두헤(Giulio Douhet, 1869년∼1930년)의 사상을 박살낸 항공전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부분은 비판할 거리가 맞다.
2. 진주만 공습에서 야마모토는 타란토 공습(Battle of Taranto)을 참고해서 야간에 뇌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입장이었으나 겐다 미노루 중좌가 정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주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후 2차 세계대전의 해전을 들여다봐도, 야간에 육군 폭격기들이 활동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해군의 전투기와 급폭기, 뇌격기가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야간기습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 3차 공습을 단념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야간 착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3. 진주만 공습은 단지 소거법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도 다소 미묘. 일단 불가능한 방법들을 골라내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고 그렇게 골라내서 그래도 쓸 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은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정한 것은 야마모토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목한 것은 겐다 미노루와 오니시 중장이었다.
4. 진주만 공습의 효과에 대해서도 초반에 다수의 전함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한동안 미 해군의 작전에 제약을 가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을 탈탈 털어먹고도 야간에 후퇴해야 했던 이유가,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 미군의 기본 전술방향마저 바꿔놓은 진주만 공습이 보잘 것 없는 전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5. 해군 장군인 야마모토가 육군이 주둔한 과달카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까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과달카날의 문제가 해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지만, 과달카날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인데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시찰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다소 부적절한 것이, 과달카날에는 미 육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 해병대 또한 주둔하고 있었고 니미츠의 경우 태평양 해역의 해군, 해병대, 육군을 전부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이건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33년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 시절, ‘적 공격기의 선회기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개발/훈련해야 한다.’라는 시바타 타케오의 진언을 “제국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육박필중(肉薄必中)의 전통정신이 있었다. 향후 1미터라도 사정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말로 일축한 일까지 있다.
군사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단점으로는 카와이 치요코(河合千代子)라는 첩과의 관계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틀 전에도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애교였고, 심지어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작전기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달했었다. 이런 치요코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야마모토의 평판에 금이 갈 것은 분명했기에 야마모토 사후 몇몇 장교들이 자살을 권유할 정도였다. 치요코는 자살 대신 대부분의 편지를 군부에 넘겼으나 몇 장은 숨기고 있었으며, 그 남은 일부의 편지가 그 모양이었다.
또한 심각한 도박중독자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질이 작전지휘에서 드러난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문제는 그런 기질이 나와서 제대로 말아먹은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이후 일본군이 제대로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야마모토의 도박 중독자로서의 면모는 전투지휘 자체보다는 그 이외에서 드러나는데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의 출격 이후 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일화도 남겼고 해군 내에서 포커로는 야마모토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기 링크된 지휘관 좌담의 증언을 보면 블러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어쩌다 이겼을 때 고수처럼 보이는 것뿐이고 실제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평화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함대파(艦隊派)에게 강경하게 반응해서 조약파가 쓸려나갈 때 커리어가 끝날 번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후시미노미야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일본군에서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 1로 벌어질 것이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3국 동맹에도 불만을 가졌고 진주만 공습 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국 해군제독으로, 일본제국해군연합함대 사령장관이다. 미국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국방무관 근무 경력이 있는 미국 유학파로 미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알고 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만 공습을 입안 및 성공시켜 일약 영웅이 된다. 이후 약 2년간 일본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및 기타 여러 해상전과 공중전을 지휘했다.
1943년 4월 18일,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항공기로 이동하던 중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이 출동시킨 전투기에 의해 부건빌 섬 상공에서 격추당해 전사했다.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낳았다고 하여 56을 뜻하는 이소로쿠(五十六)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高野五十六)이다. 이후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로 개명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문화를 조사하다가, 일본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소로쿠라는 이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는데,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 풍부한 물적/인적 자원, 기술력과 교육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히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識字率)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구도 1억 1천만을 돌파하여 러시아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 더 무서운 건 농노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와는 다르게, 미국은 이렇게 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루머로 디트로이트의 광활한 공장지대, 애팔레치아의 크고 아름다운 광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 심지어 야마모토가 타고 가다가 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아줌마가 뚝딱 고쳐내던 경험에 의해 반대를 한 것이고,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 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충격이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 적어도 자동차 고치는 아낙네 이야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이 대위로 육군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 한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라 할 수 있다. 에드윈 팔머 호잇(Edwin P.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했으며, 이 시절 야마모토는 “머리가 굳은 거함거포주의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항공대가 실적을 올려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 제군은 더욱 더 훈련과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항공주병론자(航空主兵論者)들을 격려하는 한편,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부잣집 도코노마는 훌륭한 장식품이다. 그 자체로는 실용적인 가치는 낮지만, 그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로서의 무형적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함은 실용적인 가치는 하락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전함주병사상이 강해 국제적으로 해군력의 상징으로서의 큰 영향력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함을 도코노마의 인형이다라고 생각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하지는 마라.”라는 훈시를 하기도 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 ‘포격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함은 항공기들의 공격에 격침당할 것이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戰)의 일환이었고, 항모전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 같은 해군 조종사들에게도 대차게 비판받기도 했다.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전함 야마토의 건조가 한창이던 구레 해군 공창을 방문했을 때 설계자인 후쿠다 케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만 자넨 조만간 실직할 거야, 이제 우리 해군도 항공 전력이 중요하지 거함거포 같은 건 필요가 없게 될 거다.” 라고 말했고, 여기에 후쿠다는 “불침함은 무리라도, 침몰시키기 어려운 배를 만들겠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심하게 대립했다. 이때 하도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제독의 집 앞에는 상시 육군 헌병들과 해군 육전대의 장갑차가 경호를 위해 대기했고,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해군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고, 나치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질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지 6∼12개월간은 승리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 전략으로서 점감요격작전과 남방작전을 상정해온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킨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 전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 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일본도 전쟁 전에 항모 건조 계획이 있어서 개장할 배를 미리 만들어두기도 했다. 문제는 생산력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은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 깊다.
요미우리 기자 : 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 기반이 동부에 집중돼 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테니 이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 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 승리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 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 항모 4척이 모두 격침되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 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한편 미드웨이 해전 때 나구모 기동부대의 300해리 후방에 있었던 일로 항모 아카기의 전투기대 대장인 이타야 시게루 소좌에게 ‘전쟁 구경이라도 할 참인가.’라며 비판당했다.
목재와 종이로 지어진 일본의 도시들은 쉽게 타버릴 것이다. 육군은 허풍을 떨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해 공습이 일어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군기들이 충돌해서 해상에 기름이 뿌려졌을 때 물 위에서 기름이 어떻게 타는지 본 적 있는가?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943년 1월말에서 2월초, 과달카날 전역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난 뒤,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군은 과달카날뿐만 아니라 뉴기니지역에서도 맥아더의 공세(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에 밀려서 동부뉴기니의 동남부 일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일대와 뉴기니지역에서의 주도권은 연합군이 가져갔으며, 뉴기니지역의 일본군에겐 동부뉴기니 북쪽 내륙과 해안지대의 방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동부뉴기니를 잃어버리면 남태평양의 핵심 거점인 라바울이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동부 뉴기니방면에 병력증원을 기도 했지만, 이 시도를 알아차리고 단단히 준비한 연합군에 의해 수송선단이 증발하고 증원 병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가 1943년 3월 3일.
수송선단의 끔찍한 피해도 피해였거니와 이때를 기점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설 조짐이 보이자 야마모토는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렸다. 조급해진 야마모토는 지상기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산타크루즈 해전 이래 재건 중이던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부대들까지 총동원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의 연합군 지역에 대해 대규모 항공 공격을 가했다.(이호작전 : 1943년 4월 7일∼4월 16일) 야마모토는 4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선을 격침 또는 파괴하고, 180대에 가까운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 또는 파괴하였다는 작전결과를 보고 받고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이 전과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일본군이 보고한 것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실상 연합군의 전투력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그 당시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본군 최전선 기지가 있던 부건빌 섬 행차를 최종 결심한다. 부건빌 섬의 바로 코앞에는 동남쪽으로 솔로몬 제도가 이어져 있었고, 제도의 남쪽지역엔 이젠 미군의 핵심 작전기지가 된 과달카날이 있었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예정대로 부건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다. 문제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미 해군 군사정보대 하와이 기지가 4월 14일 대본영이 관계 지역에 타전한 야마모토 시찰 스케줄을 감청하였던 것이다. 일차로 해독한 암호는 전체 내용 중 15%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적힌 것은 야마모토의 방문지와 도착 시각이었다.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작전)”으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다.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 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단, 이 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며, 시간 정황상 니미츠 제독이 홀시 제독의 일차적인 작전 컨설팅을 받고 녹스 장관은 니미츠 제독의 결정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 문건 NTF131755은 1943년 4월 14일에 발신 되었으며 니미츠 제독이 작전을 승인한 것이 1943년 4월 17일로 3일간의 갭에 킹 제독->녹스 장관->루스벨트 대통령의 각료회의까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건빌 섬 부인(Buin) 일대의 비행장 상공은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미군 전투기들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이를 우려한 연합함대 참모들은 부건빌 시찰을 계속 만류했으나, 야마모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찰 계획이 확정된 뒤엔 현지 항공대 지휘관이 호위기를 더 배치하자고 하였으나 야마모토 본인과 참모진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아군 기지에 가는데 그렇게 유세부릴 거 있냐는 이유였다.
이외에도 호위기 세력을 적게 가져간 데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후반부부터 솔로몬 제도의 미군 항공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지만 솔로몬 제도에서 본격적인 공세 작전, 특히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쯤 본격적으로 가동한 부건빌 남부지역 일대의 비행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수행하기에는, 이 당시의 미군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일단, 1943년 3월 시점에서 솔로몬 일대 양측의 항공 전력은 아직 미
군이 숫적으로 열세였다. 비스마르크해 해전의 결과에 놀란 일본 육군이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일대에 배치한 육군항공대 전력 200대를 전부 철수시켜서 뉴기니로 돌려버리면서 숫적 우세가 바뀌었지만,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전투기 전력의 경우, 미군의 주력 전투기들은 제로센에 성능적으로 열세인 F4F, P-40, P-39가 주력이었고, 제로센에 성능상 우위를 가진 F4U, P-38은 배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숫자가 부족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본군의 항공 전력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만 따져보면 숫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미군 전투기의 행동반경은 과달카날에서 부건빌까지의 직선 코스로 비행할 때 가능한 행동반경이었으며, 이 코스는 솔로몬제도 한복판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때문에, 과달카날을 제외한 솔로몬제도와 그 일대 해역 대부분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발견되기 딱 좋았으며, 이들의 조기경보를 받은 부건빌의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리 요격에 나설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당시 부건빌보다 먼 라바울에서 출격하여 행동반경 끝에 있던 과달카날에서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던 일본군이 처했던 상황이, 이 당시 부건빌을 노리던 미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실제로 미군은 1943년 2월에 당대 최신형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과 F4U 콜세어의 호위하에 부건빌에 대한 폭격을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지상 및 해상에서의 조기경보로 인해 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한 바 있었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이호작전으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지만) 미군 항공 전력이 대 피해를 입었으므로 당분간 미군이 항공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호작전 당시에도 미군이 출격시킨 항공 전력은 일본군이 투입한 전력보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폭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해군항공대의 질적 저하가 아니었다면 상술한 과장된 전과 보고가 상당 부분 실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이 시점에서 부건빌 상공의 방공작전은 일본군에게 유리하였으므로, 설령 ‘이호작전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진’ 미군 전투기들의 위협이 있다 해도 부건빌보다 먼 곳에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호작전의 ‘대전과’와는 별개로 솔로몬 일대의 일본군 항공 전력도 피해를 입어서 재정비 중이었던 데다가 이호작전을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들도 모두 원대 복귀해서 전체 전력이 줄어든 사정에 지휘관 순시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기엔 부담스러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호작전에서 미군이 입은 피해는 적어서 미군의 항공 전력이 여전히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던 데다가, P-38 라이트닝이 당시 P-38용으로 막 개발되어 배치되던 신형 대용량 보조 연료탱크까지 가득 채울 경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솔로몬 제도를 우회한 경로를 취해도 부건빌 상공을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 이하 일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은 “복수작전”으로 명명한 이 계획을 육군항공대가 맡도록 지시하고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공격 임무는 P-38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육항 347 비행단 소속 339 비행대대가 담당하였다. 마크 미처 제독과 현장지휘관 소령 존 미첼은 339 대대를 포함하여 당시 과달카날에서 P-38을 운용하던 3개 전투 비행대대들로부터 최상의 기체들과 조종사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G4M(베티) 폭격기 2대 + 호위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미군은, 18대의 P-38를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대의 P-38이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조기경보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 남서쪽 50마일까지 저공으로 비행한 후 부건빌 방향으로 이동하고 부건빌 근처에 도달하면 부인 비행장 방면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부건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남쪽 멀리 돌아서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비행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신형 대용량 보조탱크를 동원해도 부건빌 인근 상공에서 P-38이 매복할 수 있는 시간은 10∼15분 남짓이 전부였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또는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야마모토는 기함 무사시에서 출발하여 라바울로 이동하여 육군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때 라바울 지역 지휘관 또한 연합함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부건빌로 가는 일정의 취소를 요청했으나 야마모토는 무시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사실, 일정강행이 잘못된 게 아닌 것이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부건빌 일대의 제공권은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암호체계가 변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설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339비행대장 존 미첼 소령의 지휘하에 18대의 P-38이 이륙하였다. 그러나 공격조에 속했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고, 공격조는 2대만 남게 되었다(토마스 랜피어 대위, 렉스 바버 중위). 이 때문에 예비조의 2대(베스비 홈즈 중위, 레이먼드 하인 중위)가 공격조에 편성되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때 예비조의 P-38중 1대(홈즈 중위)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하인 중위와 함께 이탈하여, 최초 교전한 P-38은 14대(호위기 상대 12대 + 수송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토마스 란피어의 P-38이 호위기를 가로막는 사이 렉스 바버 대위가 2대의 폭격기를 뒤쫓았다. 2대의 폭격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폭격기인 G4M으로서는 작정하고 달려드는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했던 1대의 G4M이 P-38의 집중사격을 받고 밀림에 바로 추락하였다.(탑승인원 11명 전원 사망)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이 탑승한 나머지 1대의 G4M은 최초 교전 시작 당시 이탈했다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합류한 예비조 P-38 2대 및 1번기 격추 후에 달려온 바버 중위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전원이 전사, 우가키 탑승기에선 우가키 제독을 포함
한 3명이 격추 직후 달려온 단정에 구조되었다. 우가키 제독은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 후 회복했다.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 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 육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에 달려든 예비조의 P-38 중 1대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 피격된 기체의 조종사 레이먼드 하인(Raymond K. Hine) 육군 중위도 전사했으나, 렉스 바버(Rex T. Barber) 육군 중위가 G4M를 격추시켰다. 일본 해군 측 손실은 1식육상공격기 2대를 격추했다. 폭격기 2대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작전은 대성공 이었다.
육공기의 추락 소식을 전달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패닉에 빠졌다. 추락 다음날 함대 참모 와타나베가 비행정에 탑승해 추락 현장을 확인하고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수색대는 추락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후 육군에 연락하여 6사단 소속 보병 포중대를 추락 현장에 파견하였다. 지휘관 하마쓰나 대위는 신원 확인을 시도했지만 죄다 불타버려 식별이 불가능 했고, 간신히 비행화에 적힌 이름으로만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조종사 좌석에 앉은 야마모토의 시신을 확보하여 연합함대에 인도하였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을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G4M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G4M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그 즉시 추락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색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폭격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의 범위 바깥의 나무 아래에 의자채로 튕겨져 나와 폭격기를 등진 채 군도(도검)를 꼭 쥐고 앉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일본군이 야마모토의 사망을 발표할 당시 일본군의 공식 발표로는 왼쪽 어깨 아래 등으로 들어간 관통상 하나, 그리고 왼쪽 턱 아래로 들어가 오른쪽 눈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 하나가 있어서 후방에서 가해진 총격(혹은 그것에 의한 파편)이 치명상을 입혔다고 하였다. 이대로라면 전투기 총격 직후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 내에서 엇갈린 기록이 있어서 후대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마모토의 시신은 현지에서 4월 21일 화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전함 무사시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 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 우려하여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1달 후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6월 5일에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원수 칭호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 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제도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야마모토의 유해는 러일전쟁 시절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며,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명사들이 다수 묻힌 도쿄 다마 레이엔(多磨靈園)에 위치한다.
한편 미국은 암호감청 및 해독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작전의 실체를 속였다.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실시한 브리핑에서는 암호 감청 및 해독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연합군 해안 감시원들의 보고에 의해 야마모토의 행방을 파악했다고 얘기했다. 작전이 끝난 뒤엔 야마모토 탑승기의 격추와 관련된 조종사들의 보고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냥 침묵만 지킨 게 아니라 해당 작전이 통상적인 작전 중에 우연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꾸몄다. 작전 2일 뒤에 미군의 대일본 선전 방송은 “부건빌 인근에서 전투기가 호위중이던 폭격기들을 발견하여 폭격기 2대와 전투기 2대를 격추하였다.”라고 수많은 전과 선전 사이에 짤막하게 방송하였다. 거기에다 이 작전 이후에도 전투기들을 부건빌 상공으로 계속 보내서 마치 암살 작전이 있었던 그날부터 미군이 부건빌 상공에서 통상적인 작전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암살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이 기만작전에서 배제되었다. 혹여나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 작전의 내용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1달 후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였지만, 6월 17일에 미국 방송이 앞서의 선전 방송과 별 다를 거 없는 브리핑을 내놨을 뿐, 야마모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군은 암호 해독을 강력히 의심했지만, 그 확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매우 그럴 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기들을 유인함으로써 확인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미군은 이를 철저히 회피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진상 조사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이 작전의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미국이 야마모토를 죽인 이유가 야마모토의 ‘호전성(好戰性)’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게 그 이유.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미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니, 미 본토를 점령해서 백악관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으면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본영이나 야마모토의 발언의 진의는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진주만 이후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항전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장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약한 소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부러 양쪽 모두 야마모토의 호전성을 부각하는 형태로 프로파간다(宣傳)를 했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어차피 전쟁과 전투에서 군인은 기본적으로 ‘살해’의 대상이다. 더구나 야마모토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있어 특히 중요한 고위급장성이었으므로, 제거할 기회가 있으면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면서 + 덤으로 저런 발언까지 한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있어 좀 더 각별한 제거 목표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야마모토 사살 이후 미군 내에서는 전공을 두고 지리(支離)한 논쟁이 이어졌다. 시작은 G4M 공격조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랜피어였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며 떠들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은 극비였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 존 미첼과 공격조의 렉스 바버를 비롯한 특별 공격 대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크게 당황해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전공과는 별개로 기밀 사항의 누설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한다.
어찌 되었던 공격대의 일원 중 누군가는 야마모토를 처치한 건 확실하였으므로 미군은 공격대 총지휘관 존 미첼, 공격조의 토마스 랜피어, 렉스 바버, 베스비 홈즈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였지만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랜피어가 있었다. 랜피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법정까지 갈 정도로 논쟁이 이어지자 1984년에 야마모토 격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교차검증에 나선다. 그 와중에 토마스 랜피어는 1985년에, 작전 당시 전체 지휘를 맡았던 존 미첼이 1994년에 죽었다. 미군은 랜피어 사후에 야마모토 격추의 전공을 렉스 바버와 토마스 랜피어의 공동 격추로 기록하여 논란을 봉합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위원회는 두 당사자의 주장 및 관련 기록들, 격추당한 G4M에 대한 현장 조사, 야마모토에 대한 부검 보고서, 작전 당시 일본군 호위기 조종사의 증언 등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차검증을 하였고, 1997년에 그 결과를 미국 전투기 에이스 협회에 제출하였다. 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는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건 렉스 바버라는 것이었다. 렉스 바버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야마모토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공식 발표는 총격 직후 전사였다. 이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자면 격추 이후 하루가 지난 뒤에 발견된 시신 상태는 여러모로 끔찍했을 것이다. 전투기의 총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었을 것이며, 설령 총상이 아닌 파편상이라 해도 덥고 습한 열대지역에서 시신은 금방 부패된다. 그러나 일본군 수색대를 지휘한 하마스나 육군 소위의 발견 보고에선 시신에 심각한 손상이 없어서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으며 구더기가 발견되거나 부패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야마모토 제독이 추락 이후에도 생존한 상태였고, 사망시간은 시신 발견 당일 오전 6시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건빌 현지에서 최초로 시신을 부검했던 현지 군의관 나나가와 중위는 시신엔 턱 외상이나 구강 내 출혈이 없고, 사망 원인을 전신타박상 또는 내장 출혈로 인한 쇼크사라고 기록했으며, 야마모토는 당초 생존해 있었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19일 새벽쯤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의 죽음을 각색하기 위해 최초 부검 이후에 시신을 일부러 훼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의 수장이 아군 지역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만으로도 문책감인데, 사정이 어찌되었건 간에 발견이 늦어져서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못 살렸다는 얘기마저 나돌게 된다면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추궁당하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군(自軍)의 패전, 졸전에 대해 은폐, 기만, 책임 떠넘기기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사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전함 무사시의 빈소에서 와타나베 대좌(아마 상술된 함대 참모로 보임)라는 자는 “탑승객들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내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장관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권총으로 자결했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마모토 사망 직후 현지 부대 내지 관할군대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각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의 사망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입막음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패전 소식을 숨기기 위해, 살아 돌아온 항모기동부대원들을 외부와 차단한 채 격리, 연금시키고 대다수는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야마모토 사망이 미드웨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이 의혹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모토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사건 이후 호위 임무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자 최일선 비행장으로 자진해서 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자원을 가장한 강제 전출 또는 일선으로의 자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이들 중 4명은 이 사건 이후 3개월 이내에 전사하였고, 다른 1명은 1943년 중 계속 이어진 솔로몬 제도에서의 항공전 와중에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 종전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명 또한 1943년의 격전 중에 오른손을 잃었다. 하마스나 소위 및 그 휘하 수색 인원들도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마스나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쟁 중 전사했다. 최초 부검의인 니나가와 중위 역시 일선에 계속 있다가 전쟁 후반기에 전사하였다. 하마스나 소위의 경우, 야마모토 추락 지점 발견의 공으로 일본 본토로 전출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의혹이 진짜라면 실상은 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해 해전 항목의 후반부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모토 사후 2달을 갓 넘긴 1943년 6월 하순부터 미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서 11월 초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시찰을 갔던 부건빌 섬에 미군이 들이닥치고, 미처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월 말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출발했던 라바울 코앞까지 미군이 육박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 전출이 아니래도 남태평양 전선에 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에 의해 사살될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전투복인 사관용 ‘3종 군장’을 생애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사관용 ‘2종 군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 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진주만 공습이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 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로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 못 한 항모의 집중 운용 전술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일본의 전술을 보고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 미국의 사료를 보면 전쟁 초 상황이 매우 긴박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타임 리미트로 잡은 약 6개월∼1년동안 태평양 방면에서 정면에서 맞대응할 정도로 운용할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 척 안 남은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최소한 고착 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 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의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 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 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 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km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 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 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 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부대의 톱으로서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안전한 전함에 타 후방으로 빠져 있었고, 이것은 연합함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마저 깨는 계기가 된다. 아예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豊田 副武, 1885년∼1957년)는 연합함대에 사실상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후방에 빠져있었고, 이것은 미 육군 수송선단 격파라는 목적달성에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다.
사령장관직을 걸고 벌인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본토의 기함 나가토에서 머물러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정작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로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전함을 트럭섬 정박지로 끌고 오면서 피 같은 석유와 물자를 낭비한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는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자주 시찰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건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싸움을 피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전선을 시찰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시찰계획, 즉 특급군사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역시 상술한 대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사실은 평판에 거품이 대단히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해군선옥론(陸軍船玉論)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에 책임을 물으면서 일본 해군에는 관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야마모토의 주도로 인한 실책조차 육군 측에 떠넘겨지는 식으로 미화된 사례도 존재한다.
1. 폭격기 만능주의는 야마모토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야마모토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1936년)에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지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미 육군 항공대도 폭격기 만능주의의 영향으로 B-17이 호위기도 없이 무리한 주간 폭격을 했다가 수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한 전적이 있다. 오히려 1936년의 시점에서 폭격기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호위 전투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면 줄리오 두헤(Giulio Douhet, 1869년∼1930년)의 사상을 박살낸 항공전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부분은 비판할 거리가 맞다.
2. 진주만 공습에서 야마모토는 타란토 공습(Battle of Taranto)을 참고해서 야간에 뇌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입장이었으나 겐다 미노루 중좌가 정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주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후 2차 세계대전의 해전을 들여다봐도, 야간에 육군 폭격기들이 활동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해군의 전투기와 급폭기, 뇌격기가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야간기습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 3차 공습을 단념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야간 착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3. 진주만 공습은 단지 소거법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도 다소 미묘. 일단 불가능한 방법들을 골라내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고 그렇게 골라내서 그래도 쓸 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은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정한 것은 야마모토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목한 것은 겐다 미노루와 오니시 중장이었다.
4. 진주만 공습의 효과에 대해서도 초반에 다수의 전함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한동안 미 해군의 작전에 제약을 가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을 탈탈 털어먹고도 야간에 후퇴해야 했던 이유가,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 미군의 기본 전술방향마저 바꿔놓은 진주만 공습이 보잘 것 없는 전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5. 해군 장군인 야마모토가 육군이 주둔한 과달카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까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과달카날의 문제가 해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지만, 과달카날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인데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시찰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다소 부적절한 것이, 과달카날에는 미 육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 해병대 또한 주둔하고 있었고 니미츠의 경우 태평양 해역의 해군, 해병대, 육군을 전부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이건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33년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 시절, ‘적 공격기의 선회기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개발/훈련해야 한다.’라는 시바타 타케오의 진언을 “제국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육박필중(肉薄必中)의 전통정신이 있었다. 향후 1미터라도 사정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말로 일축한 일까지 있다.
군사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단점으로는 카와이 치요코(河合千代子)라는 첩과의 관계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틀 전에도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애교였고, 심지어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작전기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달했었다. 이런 치요코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야마모토의 평판에 금이 갈 것은 분명했기에 야마모토 사후 몇몇 장교들이 자살을 권유할 정도였다. 치요코는 자살 대신 대부분의 편지를 군부에 넘겼으나 몇 장은 숨기고 있었으며, 그 남은 일부의 편지가 그 모양이었다.
또한 심각한 도박중독자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질이 작전지휘에서 드러난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문제는 그런 기질이 나와서 제대로 말아먹은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이후 일본군이 제대로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야마모토의 도박 중독자로서의 면모는 전투지휘 자체보다는 그 이외에서 드러나는데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의 출격 이후 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일화도 남겼고 해군 내에서 포커로는 야마모토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기 링크된 지휘관 좌담의 증언을 보면 블러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어쩌다 이겼을 때 고수처럼 보이는 것뿐이고 실제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평화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함대파(艦隊派)에게 강경하게 반응해서 조약파가 쓸려나갈 때 커리어가 끝날 번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후시미노미야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일본군에서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 1로 벌어질 것이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3국 동맹에도 불만을 가졌고 진주만 공습 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고 불만도 있을 것이다. 열 받는 일도 있을 것이고 울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가만히 참아가는 것이 남자의 수행이다.
우리는 진주만을 공습하고 6개월 동안은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