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Lend-Lease, 1941년∼1945년)
해군 쪽으로는 오마하급 경순양함, 타코마급 호위함, PT 보트와 각종 상륙정과 상륙함을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만주작전 과정에서 북한 지역의 나진과 청진은 물론이고 쿠릴 열도에 상륙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 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 트럭들이 꽉 잡았다.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트럭과 지프 40만 9526대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 이미지와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트럭 숫자는 병력 수에 비해 정말 턱없이 적었으며 보급 운반을 트럭이 아닌 말로 했다. 스튜드베이커 트럭은 디트로이트 공업단지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툭하면 험지에서 퍼졌던 소련의 GAZ 트럭보다 좋았고 소련군 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다. 또한 야포 수송이 가능해져 빠른 공세 전환, 기동방어, 긴급 화력 지원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로와 기관차 1860량, 화차와 객차 1만 1181량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이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 생산은 거의 없었고, 기존에 있던 차량과 시설을 보수할 목적으로 가뭄에 콩 나듯 조금 생산한 것이 전부였다. 거기다가 미군의 구형 M1 포병용 중트랙터 8276대도 제공되어 소련군의 야전포병 수송을 담당했다. 덤으로 석유도 259만 9천 톤을 지급해서 모처럼 받은 수송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막았다.
공군에서는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만 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항공기를 생산, 수리할 수 있게 많은 부품을 지원했다. 항공기 엔진 1만 4902개도 지원했다.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 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미가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부대인 방공군 소속이었으며, 실제 알려진 전과도 엄청난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미제 전투기로 올린 최다 격추수 보유자들도 소련 파일럿 들이다.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 장비를 소련에 대량 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미국 금속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 엔진을 달고 미국이 지원해 준 항공유로 띄워,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 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격퇴했다.
그리고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된 물자 중 본국에서는 성능이 떨어졌다며 크게 저평가 받는 병기도 의외로 호평인 경우가 많았다. 일단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만 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다. 야포 및 박격포 또한 9만 6천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다. 물론 기관총 13만 1600정과 포탄 32만 5784톤도 함께 왔다. 기존 소련 포탄은 규격이 다르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 역시 전반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밸런타인 전차의 경우 소련 요청으로 추가 생산을 했을 정도이고, 일부 영국산 전차를 제외하면 자국산 전차에 비해 거주성이 좋고 화력 역시 소련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처칠도 장갑이 튼튼하다는 점, KV-1과 대등한 위력의 주포를 갖추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나쁘지 않은 평을 했다. M4 셔먼 전차도 소련군은 ‘장갑 괜찮고 속도도 나름대로 빨라 추격전에 좋고 고장도 잘 안 나고 화력도 좋다’고 후한 평가를 했다.
덤으로 의자에 쓰인 인조가죽의 재질이 훌륭하여 셔먼 전차병들은 전차가 격파되면 의자 가죽부터 뜯어냈다고 한다. 반면 차체 높이가 너무 높아 넓은 평지에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 궤도 폭이 협소해 험지돌파 능력이 모자랐단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소련 병사들이 서방 전차를 매우 좋아했던 이유는 기계적 신뢰성과 편의성이 높았고 대구경 화포를 중시하느라 편의성 따윈 엿 바꿔먹은 소련 전차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저구경이라 중요도가 낮은 전장으로 보내지거나 대전차전 등에 투입되지 않았다.
소련군은 셔먼 전차를 대전 말기까지 베를린 포위전, 빈 포위전 등 독일 본토 공략에 요긴하게 써 먹었다. 그냥 셔먼 쓰던 부대에 계속 보급해준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소련 지휘부도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쓸 만한 장비니까 계속 보급했을 것이다. 서부전선의 미군은 셔먼 전차로 독일군의 6호 전차 티거와 5호 전차 판터에도 맞서야 했으니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퍼싱 좀 보내주세요.’하고 징징거렸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 등에 맞설 전차로 자국산의 IS-2 같은 중전차나 ISU-152등의 고화력 자주포들이 있었기에 셔먼의 장갑과 화력에 만족했다.
일부 소련제 무기가 미국에서 생산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모신나강 소총이 미국에서 생산되어 배를 타고 건너가 러시아제 모신나강들과 섞여 배치되었다. 우랄 산맥으로 급히 이주시킨 상황에서 품질이 나쁜 모신나강들에 비해서 상당히 쓰기 편했단 이야기가 있다. 이 때 생산된 모신나강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미국 서플러스 총포시장에 3∼400달러에 팔렸다.
소련이 전차나 항공기를 생산하지 못하던 국가는 아니었다. 스탈린의 급격한 중공업 정책 덕분에 전쟁 직전 중공업 부분에선 나치 독일과 2∼3위를 다투던 국가였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료 이전까지 싸우던 소련군의 전차들은 모두 소련 내 생산품이었다. 주력 전투기 엔진은 소련 엔진을 가져다 썼고 렌드리스로 받은 항공기에 소련 엔진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는 소음이 상대적으로 크고, 기계적 신뢰성이 부족해서 렌드리스 받은 전차들을 무고장이라면서 좋아했다. 미국제 전차에는 소련제 전차에는 없는 사용자를 배려하는 세심함이 있었으므로, 무기대여법으로 받은 전차의 일부 구성품이나 콘셉트를 그대로 베껴서 자기네들 전차에 적용하기도 했다. 항공기의 경우도 엔진의 환상적인 성능과 빈약한 기체 강도로 질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사용자에 대한 배려도 심하게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영국과 미국이 전투기로는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한 P-39를 제공전투기로 열심히 굴려먹었다.
소련은 대전 내내 물자 더 보내라고 미국에 요청했고 심지어는 미국도 소련이 원하는 물량을 보내지 못한 것도 많았는데, 소련이 요구한 것 중에는 핵무기 개발용 우라늄과 수소폭탄 개발용 중수까지 있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법으로 온 원조품들,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를 통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군사, 산업 부분에 써먹었다. 소련 관리와 기술자들 1만 5천 명이 미국의 공장과 군사시설을 방문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독일 영토 내로 진입해 1945년 5월에 베를린을 함락하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기는 것은 실현 불가능했다.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 육군의 기동과 보급을 해결해줬으며 사실상 소련 공군을 건설해냈고, 소련군 육해공 전체의 고질적인 문제인 야전 통신의 미비까지 해결해 제병협동과 대규모 기동이 가능한 군대로 환골탈태(換骨奪胎)가 가능케 한 물자를 책임지고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소련의 식량 위기를 해결해냈으며 수많은 특수 자원들을 지원해주었으며 소련에게 지원한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상당히 높았다.
또한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2.2억 톤, 구리 2억 톤, 황동 3억 톤, 니켈, 몰리브데넘, 크로뮴 등 각종 금속과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싣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부수기재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하나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 부족으로 78옥탄가 밖에 안 되는 저질등급 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옥탄가의 고급등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했으며 나중엔 아예 4개의 플랜트 시설을 제공했다. 그것도 철로나 연료탱크 같은 부수기재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었다.
상기 언급한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로서만 아니라 소련 석탄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던 돈바스 지역 같은 핵심 광업 및 공업의 중추이기도 했다. 이런 알짜배기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넘겨버린 소련이 말 그대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인 우랄 산맥에서 자력으로 독일의 공세를 막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차트를 보면 대전 중 물자 생산량은 연료를 제외하면 석탄, 철광석, 알루미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련이 독일보다 열세했다. 그런데도 병기 생산량이 밀리는 것은 무기대여법과 나치 독일의 형편없는 생산관리 역량이 공업 효율을 크게 저해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안다. 사실 그 전이나 후나 러시아인이 영어를 잘 아는 편은 아닌데, 영어가 로마자를 쓰는 것과 달리 러시아어는 키릴 문자를 쓰고, 러시아어 자체도 영어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으며, 로마자를 읽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선 프랑스어도 많이 쓰던 귀족=장교들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으로 많은 수가 죽고 쫓겨났으며 일부 공산당을 지지한 구 귀족 출신 소련군 장교들도 곧 등장한 강철의 대원수에게 대숙청으로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퍼주면서 포장 박스, 사용설명 매뉴얼까지는 러시아어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배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에서 쓰려고 제조한 물자를 수출도 아니고 말 그대로 공짜로 퍼 주는 상황이었으니 포장을 바꾸는데 또 돈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니 당시 러시아인들은 받은 엄청난 물자를 뭔지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 잘못 사용하다가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기 때문이다.
생존에 당장 필요한 물자뿐 아니라 인형, 영사기(무성, 유성), 축음기, 놀이터용 기구, 피아노와 각종 악기, 손목시계, 화장품과 보석, 장신구 등을 소규모로 보내주기도 했다. 해당 품목들은 공식적으로 현재의 국방에 관련된 물품만 보낸다는 무기대여법의 조항을 위반하는 것으로, 이를 누가 보냈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민간인들이 물자들을 수송할 때에 같이 배에 실어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보내주는 입장에서는 전후 소련이 제대로 복구되고 일상을 되찾기를 바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중화민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심각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과 불신 등으로 지원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 초의 국부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고문관들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하고, 30개 사단 중 8개만 무장이 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편제에 맞게 구식 무기들로 채웠는데, 그나마 이 8개도 포병, 공병, 화학 장비와 군마,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들조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 게 당시의 영국령 인도에서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이었다. B-29의 초기 작전의 상당수 소티(Sortie, 항공기의 단독 출격횟수)가 폭격임무가 아닌 중국을 향한 무기 수송에 할당되었다. 폭탄 적재함에 폭탄 대신 구호품/군수품을 적재한 것. 또한 중국에 배치된 미군부대(주로 공군)에 대한 군수품 수송에도 할당했다.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기술적으로 수십 톤짜리의 주력 전차를 공군의 전략 수송기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된 것도 베트남 전쟁 이후이고, 그것도 1회에 고작 1∼2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종류 정도 조금 줄 수 있었고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 다 주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에베레스트 산으로 인식되는 티베트 고원의 첩첩산중(疊疊山中)의 험악했던 수천m의 산들과 악명 높은 계절환경에서 많은 불시착이 발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은 전후에 버뮤다 삼각지대에 버금가는 불가사의(不可思議)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날름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조지프 스틸웰(Joseph Warren Stilwell, 1883년∼1946년)이나 클레어 셰놀트(Claire Lee Chennault, 1893년∼1958년)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 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 중 셰놀트는 장제스와 매우 원만한 관계였고 중국군에 협조적이었지만, 스틸웰이 문제였다. 그는 중국군 전체에 대한 통수권을 넘기라는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고 심지어 중국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며 시종일관 장제스에게 잔소리나 해대며 떽떽거리던 무능한 양반이었다. 스틸웰과 그의 군사고문단은 중일전쟁의 양상이나 중국군의 전술 및 적인 일본군의 능력은 무조건 폄하하면서 보급 받은 것을 자기 휘하 부대에 꿍쳐놓고 버마(미얀마) 탈환 준비에나 힘썼다. 이 때문에 열 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은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 수백만 명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반면에 미군 안에서는 국부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라고 중국을 깔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미국/영국은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대표적 실책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의 대만 공격론이 쑥 들어가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무능하고 오만방자한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럽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 명을 저세상에 보냈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전에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군의 웨이브를 맞고 백기를 들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 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쩌둥은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정작 장제스는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대중선동선전)를 퍼뜨렸고, 국민당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를 불편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임인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이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은 데다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심지어 베트민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베트민의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을 상대해야 했다.
반대로 미국이 지원국으로부터 받는 것도 있었는데, 주로 영국으로부터 받았다. 영국제 오스턴 K2/Y 구급차량과 B-17에서 사용되는 항공 점화 플러그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영국제 정찰기 버전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경폭격기, 캐나다에서 만든 페어마일 B 대잠박격포, 인도에서 만든 석유화학제품이 미국에 공여되었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는 미군을 위한 식량을 지원을 했다.
자원이 풍부한 소련은 미국에 30만 톤의 크롬 광석, 3만 2000톤의 망간 광석, 대량의 백금, 금, 목재 등의 자원을 지원했다. 소련에도 고무 공장을 세워준 대가로서 고무를 공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대미 지원액은 미국의 대연합국 지원액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라서 큰 의미는 없다.
사실 이 계획은 공짜가 아니다. 전부 빌려준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지원품을 직접 돌려주던지 아니면 돈으로 환산해서 갚는다. 그리고 쓴 지원품들도 엄연히 공짜가 아니고 다 이자 붙여서 갚아야 했다. 그러나 전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10분의 1 정도 가격에 대량의 지원품을 넘겨주었다. 물론 엄연히 대가가 달린 만큼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보통 이자율 2%에 50년 상환 기한을 주었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이 재건되는 족족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빚을 갚았는데 당시의 금본위제도로 연리 2%면 싼 이자는 아니었다. 심지어 적대국 소련조차도 결국 갚긴 갚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미국이 떼돈은커녕, 제값으로 받은 게 거의 없어서 손해 보는 장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전쟁 피해 복구도 벅찼기에 제값을 받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무기 같은 경우 엄연히 빌려주는 거였던지라 전쟁 끝나고 무기를 돌려받아야 하는데, 전쟁이 끝나서 새로 생산한 무기도 창고에 넘치는 판에 연합군이 쓰던 중고무기는 돌려받을 필요가 없어서 거의 헐값만 받게 된다. 당장 영국부터 군수물자들을 10% 가격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미국 입장에선 원가는커녕 사람들 인건비도 안 나온다.
루스벨트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때 ‘무기를 빌려준 다음 다시 그 무기를 돌려받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때 나온 비유가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번지기 전에 호스를 빌려줘야 한다는 것. 한편 반대편은 이 법안을 ‘호스가 아니라 껌을 빌려주는 것’에 비유해 ‘씹던 껌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비난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이 전후 피폐해질 거라는 걸 감안하면 원금이나 겨우 돌려받아도 다행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원조가 끊기자 미국에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한 게 당시 파운드화로 대략 11억 가까이 됐다. 여기에 무기대여법은 어디까지나 전쟁 끝나고 나서는 다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 빚도 추가 되었다.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비밀창고에 있던 금괴로 땡처리하고 입을 씻었다고 알려졌다. 루머 같지만 사실이다. 1942년 영국의 HMS 에딘버러 호가 미국에 보내는 금괴 4.5톤을 나르는 중 독일 잠수함에 침몰 당했고, 이 금괴는 1981년, 1986년에야 인양되었다. 1948년에 소련이 1.7억 달러로 전부 변제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미국은 전쟁 중 소련에 보낸 물자 값어치 중 전쟁 손실 예상 50%를 공제한 가격의 10분의 1인 13억 달러를 요구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1951년에 8억 달러를 변제하라고 요청하자 소련은 3억 달러만을 변제하겠다고 해서 또 파토가 난다. 결국 1972년에 소련이 7.2억 달러를 갚기로 미국과 최종 합의한다. 그런데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국가,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4월 2일 러시아가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하여 무기대여법 관련 채무는 전부 러시아가 책임지게 되었다. 2000년에 6억 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 21일에 전액을 변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파리 클럽을 통해서 소련 시절 서방에 졌던 빚을 전부 갚은 것이다.
소련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1945년 기준 113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소련에 유상 대여
1947년 미국은 소련에 영국의 가격 조건(원래 가격의 10%)을 적용, 13억 달러(!) 상환 요구.
소련은 1.7억 달러만 상환할 수 있다고 대응.
이후 소련이 30년간 잡아뗀 결과 닉슨 대통령 시기 “7.2억 달러를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7.2억 달러를 3차례에 걸쳐 상환하기로 합의 후 1973년까지 2회에 걸쳐 4.8억 달러 상환.
다시 잡아떼기를 하다가 2006년에 파리 클럽 채무협상을 통해 완납 처리했다.
그래서 2006년 기준 1249억 달러 중 29억만 상환한 후 완납 처리. 어찌 보면 소련이 공짜로 받아먹은 것 같지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 약 870만, 민간인 약 1∼2천만 명의 피를 대가로 치르는 지옥도를 걸어 끝끝내 독일 국회의사당에 깃발을 꽂은 나라이다. 미국도 이런 희생을 감안해 빚을 일부라도 갚은 것으로 치고 소련을 외교적으로 파렴치한 것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냉전 중에도 서로 도와준 이력이 분명해 세간의 인식과 달리 서로 견제하면서도 물밑으로 도울 건 다 도우며 지냈을 정도이다.
중화민국은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쫓겨 나가서 갚을 여력은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미국이 빚 받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미국에 대한 빚은 중국의 동해 진출 야욕을 저지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갚고 있다. 한편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하수인인 국민당이 진 빚 따위 알바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했다.
그 외에도 무기대여를 받은 국가들은 전쟁 이후 물자지원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대금지불 대신으로 미국에게 병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지급하거나, 기지부지 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다. 허나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했다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독일이 선택을 엄청 잘못하는 바람에 최악은 피한 것이다.
물론 미국도 가만히 렌드리스를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렌드리스 물자에 대한 협상이 이상하게 꼬이면 렌드리스로 보낸 물자들을 바다에다 죄다 수장시켜 버리는 것으로 대응해서 채권자 지위를 유지할 정도였다.
당시 강대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무기대여법으로 들여온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 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무기를 오래 쓰다 보니 길들여져서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런저런 마찰이 있어서 7.62×51mm NATO 탄과 관련된 삽질 등이 있기는 했다.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자금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했으며, 무기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미국 거시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 모두가 상부상조(相扶相助) 할 수 있었고 정확히는 미국이 조금 더 이득이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기술교류도 이루어졌다.
만약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끝났을까? 나치가 워낙 꽉 막힌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생산력으로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생산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군수공장설비를 포함해서 뜯어갈 수 있는 건 모조리 뜯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공장은 뜯어간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석탄은 탄전에 불을 붙여버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탄전이 수백 년간 지속해서 타기 때문에 인근 지역은 수백 년간 못 쓰는 땅이 된다. 물론 독소전쟁에서의 독일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긴 하지만...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 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 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한다고 주민들을 마구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닥치는 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 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일본도 비숙련공을 동원했는데, 문제는 소련과는 달리 규모의 경제가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숙련공의 노하우에 기대해야 하는 정도가 소련보다 더 큰데다가 결정적으로 숙련공은 전쟁에 밀어 넣고 비숙련공은 공장에 밀어 넣는 맛이 간 방법을 써서 갈수록 질이 좋아지기는커녕 오각형 너트가 나올 정도로 질이 더 형편없어졌다.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에 준하는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리츠 토트(Fritz Todt, 1891년∼1942년)와 알베르트 슈페어(Berthold Konrad Hermann Albert Speer, 1905년∼1981년) 군수장관이 개입해서 생산체제를 혁신하면서 무기생산량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미 연합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긴 1944년에 접어든 시점이라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44년이면 이미 점령지는 다 뺏겨서 지하자원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물자의 운송과 생산이 방해받던 시점인데도 오히려 무기생산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슈페어 군수장관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독일의 군수경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보면 쉰들러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들이 모조리 불합격 판정을 받는데도 계속 생산해서 독일군에 납품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 실제 당시 독일은 품질에 상관없이 모든 군수기업에 일괄적으로 10%의 이윤을 보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시스템이라서 그런 해괴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 당시 독일 경제를 주무르던 재벌들의 환심을 사고 현실적으로 빠른 재무장을 위해선 품질 이전에 일단 대량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도입한 시스템인데 이걸 총력전 상황에서도 계속 끌고 가다가 엉망이 된 것이다.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 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 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폭탄이 줄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 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적인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의 물량에 밀린 독일이 패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 호스를 제때 빌려주어서 우리 집까지 불이 옮겨 붙지 않게 된 셈이다.
추축국의 큰형님인 독일 역시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원유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동계장비는 전쟁 내내 핀란드에서 몽땅 공급했다. 왜 독일이 북유럽으로 올라갔겠는가.
보급선의 경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 준 덕분에 수월한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독소전쟁 초기 독일의 보급선은 동맹국들이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으며 보호해주고 있었다. 독일이 동맹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게도 패전했을 거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제해권도 연합군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급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라프 체펠린(German aircraft carrier Graf Zeppelin, 1938년)을 양도받으려고 했을 때는 독일이 주긴 하겠는데 알아서 가져가라는 식으로 나와서 어떻게 가져올까 머리를 굴리다 결국 포기했고, 티거(Tiger I), 5호 전차 판터, 3호 전차 J1형, 그리고 3호 전차 N형을 구입하려 했을 때도 가져올 방법이 없어서 이미 계산까지 끝내 놓고(독일에게 다시 대여해 준다라는 명목으로 돈을 일부만 도로 받아낸 뒤) 포기했다. 그래도 아주 실패했던 것은 아니어서, Bf 109 E-7, Fw 190 A-5, Ju 87 완성품과 Ju 88, He 162, Me 262, Me 163의 엔진과 설계도 등 전투기 몇 대와 총기류 한줌,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흡착지뢰, 산화우라늄을 잠수함편으로 전해주었고 몇몇 시도는 성공했다. 또한 남방으로 내려간 이유 중 하나가 석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족한 보급을 점령지 및 식민지를 쥐어짜서 충당했는데,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커서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