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2. 과달카날 전역(Battle of Guadalcanal, 1942년∼1943년)
11월 12일 일본의 상륙을 대비하여 아베 히로아키 소장이 지휘하는 제11전대가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출항하는데, 당시 과달카날 근해에는 미군의 증원부대를 수송하기 위한 선단과 이들을 호위하기 위한 함대가 있었다. 일본군이 비행장 포격을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 함대가 출동하여 11월 13일 새벽 첫 번째 야간 해전(1차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의 11전대가 전함 기리시마와 히에이를 보유했던 반면 미 해군 호위함대는 중순양함 위주로 비교적 약체였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체인 미 해군이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한 아베 제독은 그만 허를 찔렸다. 미군 역시 전투에서 경험부족을 드러내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뒤섞인 가운데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캘러헌 제독과 스코트 제독이 전사하는 등 미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꼬리를 말고 물러난 건 일본 함대였다. 일본 함대 지휘관이었던 아베 제독은 자신이 승좌한 히에이가 전투 시작과 동시에 난타전의 한복판에 휘말려버리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의를 잃고 휘하 함대를 철수 시켜버렸다. 결국 11전대는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2척을 잃은 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홀시 제독은 순양함 전대가 타격을 입어 해역이 텅 비게 되자, 전함 전대를 이끌고 있던 윌리스 A 리 소장에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 중이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과 미국의 최신예 전함인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네임쉽 사우스다코타를 이끌고서 연료를 가장 넉넉하게 실은 4척의 구축함들과 함께 제64임무부대로 재편성하여 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미 해군 함대는 북상하면서도 항공 작전을 위해 동남쪽으로 반복적으로 기동한 탓에 생각보다 과달카날에서 멀어져있었고 그래서 수상함 함대는 14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비행장 공격부대의 작전 실패로 상륙부대는 작전을 일단 취소했지만, 11월 14일 새벽 상륙부대를 호위하던 미카와 중장의 함대가 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중순양함의 8인치 함포로는 위력이 부족해서 약간의 피해를 입힐 뿐, 미군이 우려했던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날이 밝자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핸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들에게 반격을 받아, 중순양함 키누가사와 6척의 수송함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곤도 제독이 지휘하는 2함대가 1차전에서 살아남은 11전대의 잔존 세력 및 미군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송함 4척과 구축함 5척과 함께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날 밤 리 제독이 이끄는 제64임무부대가 곤도 제독의 함대와 조우했는데, 일본 해군 정찰기가 미국의 전함을 못 보던 함종의 중순양함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곤도 제독이 미 해군의 전력을 얕보게 만들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 구축함들은 거의 전멸 당했지만 그 대신 위협적인 93식 어뢰를 거의 다 소모시킨 덕분에 전함들은 안심하고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우스타코타는 전력계통에 문제가 생겨서 키리시마한테 두들겨 맞게 됐지만 버티고 있었고, 거꾸로 워싱턴 쪽에서 반격하여 사우스다코다에 정신이 팔렸던 키리시마를 격침시킨다. 남은 일본 중순양함들과 구축함들이 워싱턴에게 반격을 가했지만 제64임무부대는 결국 일본 함대를 따돌렸고, 결국 곤도 함대는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지 못했지만, 수송 선단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만한 미 해군 세력이 없다는 판단하에 철수하게 된다.(2차 과달카날 해전)
하지만 아침이 밝자 캑터스 항공부대와 미해병대의 포병들이 합작으로 일본군 수송선단을 전멸시켰고 결국 일본군은 6천 명의 전사자와 함께 화포와 식량, 탄약 등을 포함한 보급품 1만톤 중에서 단 5톤만을 건지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일본 육군 역시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1942년 12월 27일
(전략)
이 무렵, 오스텐 산에는 이상한 ‘생명판단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계점에 접근하고 있는 육체의 지탱가능일수의 통계결과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비과학적인 이 생명판단학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의 수명은 30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인간은 3주일.
누운채 일어설 수 없는 인간은 1주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인간은 3일.
말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은 2일.
눈을 깜박이지 못하는 인간은 1일.
아아, 인생 50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제 22세로 끝장이 나려는가?
(후략)
- 미 해병대 1사단과 대치한 일본 육군 제38사단 가와구치 지대 보병 제124연대 기수 오비 야스오 소위의 일기
과달카날 해전에 맞춰서 미 해병대는 1개 대대를 투입해서 서쪽 공세를 시작했다. 그동안 헨더슨 비행장과 그 주변 방어에만 집중하던 것을 벗어나서 일본군에 대한 공세로 전환한 것이다. 11월 12일 처음 교전한 공격부대는 12월 3일 헨더슨 비행장이 보이는 고지까지 진격해서 과달카날 동쪽의 일본군을 소탕했으며 다른 부대는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서 일본군의 주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2만 명 정도가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야간에 구축함들이 물자가 들어있는 드럼통을 약속된 장소에 내려놓고 가는 식(일명 쥐 수송)으로 보급 받고 있었다.
쥐 수송을 방해할 작전은 처음에는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킨케이드 제독이 북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부사령관인 라이트 소장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구축함 위주로 편성된 일본 해군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단종진을 형성하여 먼저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라이트 소장의 착오로 대처를 제대로 못하는 동안 일본군 구축함이 근접해서 일제어뢰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일본 해군에게 또다시 발렸다.(타사파롱가 해전)
이 전투에서 중순양함을 투입하고도 호되게 데인 미 해군은 일본 수상함대의 전투력을 경계하게 되었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의 쥐 수송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어뢰정과 캑터스 비행부대의 항공기를 투입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구축함을 이용한 일본군의 쥐 수송은 한동안 미 해군에겐 골칫거리이자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훗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경순양함을 투입하여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만(블랙켓 해협 해전), 이후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쿨라만 해전, 콜룸방가라 해전), 항공기와 어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동안 해상전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구축함이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 했으며, 이들 구축함이 일본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된 것은 레이더의 성능이 개선되고, 알레이버크 제독이 새 전술을 개발하고 나서부터이다.(벨라만 해전)
일본 해군은 12월 3일부터 11일까지 구축함을 이용한 물자보급을 시도했는데, 낮에는 캑터스 항공부대의 항공기들이 날아와서 구축함들을 위협했으며 밤에는 어뢰정들이 불쑥 나타나서 기관총과 어뢰를 난사하는 형태로 보급을 방해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물자를 내려놓지 못했다. 심지어 미군 어뢰정의 기습으로 구축함이 격침당하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그만 구축함을 이용한 보급작전 자체를 취소해버렸다.
그 뒤로는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작전(일명 두더지 수송)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잠수함 바깥에 드럼통을 매달아놓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다 위로 떠올라서 내려놓는 식이었지만 이걸 파악한 미군에게 드럼통을 내려놓으려고 부상한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던 어뢰정에게 격침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것도 중단됐다.
결국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서 드럼통을 자동으로 떼어내거나 작약(포탄이나 어뢰, 지뢰 등에 충전되어 그것을 폭발시키는 화약)을 제거한 어뢰에 보급품을 싣고 약속된 장소로 발사하는 식의 보급을 시도했는데 이 경우에는 오발이나 기타 몇 가지 변수로 인해 보급품들이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 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게다가 얼마 안 되는 물자 보급을 위해 비싼 어뢰를 쓰는 것도 문제였다. 고로 이 작전도 중지되었다.
결국 충분한 보급품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기본적인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되었고, 동시에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11월 29일, 과달카날 전투 초기부터 작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1사단은 휴식과 재정비를 위하여 호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12월 9일, 밴디그리프트 소장과 해병 1사단은 호주로 떠났고 아메리칼 사단의 알렉산더 패치 소장이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1943년 1월까지 꾸준한 병력 증강을 받았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항공 작전을 수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뒤늦게 깨닫고 뉴 조지아섬(New Georgia Island) 문다(Munda)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미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활주로 한복판에 일부러 나무를 심는 등 철저하게 위장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려 하였지만, 12월 5일 미군이 이를 파악하고 다음날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그래도 악착같이 비행장 건설을 진행하여 12월 말에 완성시키고 34대의 제로기를 배치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대규모 공습을 받아 26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보고 남은 제로기들을 철수시키면서 비행장 역할을 상실해버렸다. 후일 이 비행장은 반년 후 수레바퀴 작전의 일환으로 뉴 조지아섬에 침공한 미군에게 점령되고 비행장을 보수하고 난뒤 솔로몬 항공 사령부까지 옮겨오면서 솔로몬 제도에서 가장 많은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최대의 항공기지가 된다.
한편 미 지상군은 12월 17일부터 제132연대를 동원하고 75mm, 105mm, 155mm 곡사포와 캑터스 항공부대 소속 폭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오스텐 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작 600명뿐이던 일본군 수비대는 1월 초까지 미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1월 14일 고립된 일본군에게 철수명령이 떨어졌지만 대부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죽기로 결정했고 오카 대좌가 이끄는 소수만이 탈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탈출한 이들은 경계 중이던 미군 병력한테 걸려서 전멸 당했고 23일에는 나머지 병력도 전멸 당했다.
1월 16일 당시 과달카날에는 아메리칼 사단, 육군 제25사단, 해병 제2사단 총 4만 8천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패치 소장은 미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부 병력을 일본군 후방에 상륙시켜 퇴로를 차단시키는 한편 압도적인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서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1월 23일, 일본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코컴부나가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 제17군은 패치 소장이 지휘하는 미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대대적인 해상철수작전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모두 포로가 되거나 전멸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사실 일본군은 12월 31일 어전회의를 통해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1월 9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지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에게 1월 28일부터 철수가 완료되는 2월 초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철수작전을 기만하기 위하여 야노 중좌의 1개 대대를 파견하여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미 해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이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대규모 수송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새로 교체된 육군 부대가 나타나서 역습을 가했다는 보고를 듣자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 해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였다. 이에 따라 증원군이 급파되었으며, 이들을 호위하고 일본 수송선단을 저지하기 위해 기펜 소장에게 호위항공모함 2척이 포함된 함대를 주어 과달카날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대서양에서 대잠작전만 수행해왔던 기펜 제독은 태평양전쟁이 항공력 위주의 싸움이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중간에 예정보다 늦어질 것 같자 느려터진 호위항공모함을 떼어내고 다른 수상함들만 거느리고 과달카날로 급행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일본 해군 항공기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으며 최초로 야간공습을 당한 부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까지 남겼다. 그래도 피해는 두들겨 맞은 것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아서 중순양함 시카고 1척을 잃고 구축함 1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렌넬 섬 해전) 하지만 굳이 상실할 이유가 없었던 전력인 중순양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의 뚜껑이 제대로 열렸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일본군이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패치 소장에게는 일본군의 대공세를 대비하여 현 지점을 사수할 수 있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미군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 일본 제 17군은 약속된 지점에서 구축함에 승선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철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철수는 3번 반복되었고, 그 사이 미군이 눈치 챌 수 없도록 조명탄을 터뜨려 가면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리고 2월 7일 모든 일본군이 철수했다.
한편 분위기를 봐서는 쳐들어올 때가 됐는데 상황이 너무 잠잠하게 전개되자 미군은 당황하였으며, 조심조심 전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과달카날의 서쪽 끝에 도달한 미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보고서야 일본군이 그 동안 왜 그 난리를 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모든 보고를 받은 패치 소장은 2월 9일 오후 4시 25분, 홀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이 났다.
또 같은 시기에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도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부나-고나 전투 동시에 이뤄진 2개의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전과 보고를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는 미군이 지상에서 일본을 맞아서 올린 최초의 승전”이라고 치하했다.
한편 대본영에서는 이런 패배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다며 패배를 은폐하며 다음과 같은 대국민 전과발표를 행했다.
과달카날에서 아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 세력을 맞아 심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군은 과달카날을 발판으로 삼아 한층 전진하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데 급급한 행동이었고 그 결과 일본 국민들은 현실파악이 힘들게 되었다. 대본영은 이후에도 이어지는 패전을 승전했다며 감추기에 급급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벌이던 때, 뉴기니 전역에서도 연합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격퇴(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하여 일본군을 동부뉴기니 북쪽지역으로 몰아냈다. 유럽 전선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독-소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의 승리가 확정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판단한 연합국 수뇌부들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게 된다. 이 회담에서 태평양전선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비록 기존의 유럽 우선 정책이 재확인되긴 했으나, 태평양전선도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 이후로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은 일본의 공세를 막는데서 그치지 않고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걸맞은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평양전선의 연합군에게 물자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던 시점이다.
과달카날과 뉴기니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연합군은 위와 같이 후방 지원까지 확정되자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작전에 투입되었던 해병들은 말라리아 등 밀림에서 여러모로 고생했기에 재충전 의미로 호주에서 휴식기간을 거쳤다. 그렇게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태평양의 일본군 거점인 라바울을 목표로 한 거대한 반격 작전인 수레바퀴 작전(Operation Cartwheel)이 수립되었으며, 1943년 전반기 동안 전력을 축적한 연합군은 1943년 6월말부터 솔로몬 제도와 동부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서태평양 일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하던 바로 그 때에,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반격을 막고 여차하면 다시 공세에 나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에, 동남아 점령지를 배후에 둔 동부 뉴기니에는 육군 병력을 증원하고, 솔로몬 제도 중부지역에 비행장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였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연합군은 그 피해를 메우고도 남아서 일본군에 대해 점차적으로 전력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미 후방 지원의 한계에 달한 일본군은 피해 복구부터가 어려웠다.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항공전력이 극심한 소모를 겪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항공전력의 손실과 약화는 단기적으로는 과달카날 전투 이후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행동에 큰 제약이 되었다. 일본군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여 남서태평양 해역에서 무리한 요충지 공략을 시도할 때마다 오히려 피해를 입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뉴기니의 와우 공략전,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호 작전 등이 있고 그 와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미군의 항공전투기공격으로 전사하고 만다.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 항공전력 몰락의 가속화로 이어졌다. 과달카날 전투 기간인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 간 일본 해군은 892대의 일선 항공기를 상실했다. 더 큰 문제는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의 손실이었다. 일본군의 승무원 손실은 1,881명에 달했다. 이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입은 승무원 손실 121명의 15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일본군의 항공 전력은 소수정예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과달카날에서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전력 소모는 과달카날 전투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계속된 공방전으로 일본군은 7,000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1943년 후반 즈음에는 미국의 전시공업체제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며 일본은 미군의 본격적인 공세를 맞게 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그간 누적된 손실로 인해 이미 전면적 붕괴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과달카날을 기점으로 미일간 항공전력에서의 격차는 항공기의 수량과 승무원의 기량 양쪽 모두에서 절망적인 수준까지 벌어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활약했던 일본 항모전단은 과달카날 전투 중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쇼카쿠가 대파되고 즈이호는 갑판이 파괴되어 후방으로 후퇴했으며 즈이카쿠와 준요도 누적된 항공기, 승무원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물러나 이어진 43년 내내 뉴기니 해역을 쑤시는 미국 항공기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버로우(Burrow)를 탔다. 이후 수리를 마치고, 44년, 신형항모 다이호와 함께 필리핀 해전에서 다시금 절치부심하여 미 항모전단과 맞붙었지만, 결과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나가토급 전함이나 야마토급 전함이 동원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말이 많은데, 모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기름 문제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속도가 느린 게 더 큰 이유였다.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 엔진을 오버힛 시키면 29노트까지 뽑아낼 수 있었으나 평속은 27노트에 불과했고, 나가토급 전함의 경우는 더욱 처참해서 평속이 25노트에 불과했다. 이들의 느린 속도로는 수뢰전대는커녕 항공모함과도 발을 맞추어 움직일 수 없었고, 실제로 한번 투입되었던 나가토급 전함인 무츠는 속도가 맞지 않아 낙오되어 구축함 3척이 호위를 위해 도로 돌아갔다 오는 삽질을 해야 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배를 보존하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추구했는데, 때문에 헨더슨 비행장 포격에는 느려터진 나가토급이나 야마토급이 아닌 공고와 하루나가 동원되었다.
히요급도 저속이었지만 이들은 함포가 아니라 항공기를 쓰는 항공모함이었기에 느린 속도로도 전역에서 이탈하거나 사정거리까지 닿는데 애로사항이 훨씬 적었고 거의 정규 항공모함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던 개조 항공모함이었기에 투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옳아서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을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회항시키는데 한 몫을 한 항공모함이 바로 이 히요급의 2번인 준요(隼鷹). 다만 11월 12일에 있었던 과달카날 해전 당시엔 엔터프라이즈는 그 전날에 누메아를 출항한지라 도저히 시간 내로 달려올 수 없었기에 이때 나가토급과 야마토급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실수이다.
문제는 함대결전(艦隊決戰, Fleet Decisive Battle)사상과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戰)에 근거한 축차투입으로 제공권 상실을 자초한 것이 바로 일본군 자신들이었다는 것이다. 점감요격작전이 상정한 대로 본토 방위전이었다면 침공군의 항공전력을 일본의 항모전력으로 소모시킨 상황에서 주력 전함부대는 본토의 기지항공대의 지원 하에서 싸울 수 있지만(실제로 과달카날 전역 당시 미국의 항모전력은 일시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 벌어진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점감요격작전식으로 함대를 운용한 결과 정작 전함이 투입될 차례에는 상대방 육상비행장의 제공권이 건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대전 전반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항공주병론자/전함무용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임에도 항모를 보조전력으로 간주하고 전함은 아끼는 이런 모습에서 실제 가장 큰 문제는 높으신 분들의 보신주의였다는 주장마저 있다. 이런 문제는 야마모토의 후임들도 여전해서, 레이테 만 해전 한 달 전 연합함대 사령부는 함대결전을 지휘한다는 명목조차도 내팽개친 채 사령부를 육상으로 이동시킨다는 명목으로 본토로 도주, 사령부가 본토로 도망치는 와중에 미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하라는 명령을 받은 함대의 사기는 높지 못했고 사령부의 작전목적을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것에도 실패, 레이테 만 해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그나마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고 전함을 그 호위로 돌릴 개념은 있었던 오자와 지사부로가 최후의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는 이미 지휘할 함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해군의 경우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2만 톤의 수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전함 4척을 포함한 10만 톤에 달하는 전투함대를 출격시켜 무사히 보급을 마친 사례가 있다. 거기에 신형전함인 리토리오까지 이탈리아군은 과감히 출격시켰다. 이런 사례를 생각해보면 나가토급과 야마토급까지 과감히 출격시켰으면 캘러헌 제독의 함대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고 핸더슨 비행장 또한 10월의 포격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일본군 38사단 또한 무사히 상륙하여 전투가 장기화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워싱턴이 강하다고 해도 야마토, 나가토, 무츠 3척의 전함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에서 일어난 해전의 주역들은 30노트로 속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군함들로, 주간전의 주역은 쇼카쿠급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 경항공모함 즈이호,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개조항공모함 준요였다. 엔터프라이즈에 맞서 싸운 항공모함들이 바로 이들이지만, 최후의 결전인 과달카날 해전에서는 이들 중 누구도 엔터프라이즈를 막을 수 없었다. 쇼카쿠와 즈이호는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멀쩡한 즈이카쿠는 쇼카쿠를 따라 일본으로 튀었으며, 유일하게 전선에 남아있던 준요는 함재기가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야간전의 주역은 일본군 제8함대(기함 초카이)이며, 8함대의 핵심 전력은 구식 중순양함 4척으로 편성된 중순양함 전대인 제6전대였다. 제6전대의 기함은 아오바이고 후루타카, 카코, 키누가사가 소속되었으며, 일본에서 가장 낡은 중순양함들이었지만 미군에게 입힌 피해는 매우 컸다. 전장에서의 비중도 매우 큰데, 과달카날 전역은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제6전대가 사보섬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둠으로서 시작되었고,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하고 키누가사가 침몰하면서 미군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큰 비중의 대가로 제6전대는 미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괴멸되었고, 초카이도 과달카날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의 공격으로 중파 당했다. 결국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배는 중파당한 8함대 기함 초카이, 그리고 대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6전대 기함 아오바 뿐이었다.
공고급 순양전함 4척은 일본군에서도 결전병력에서 제외할 정도로 낡았지만, 30노트를 낼 수 있기에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많은 임무를 수행했으며 핸더슨 비행장을 불바다로 만드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30노트급 전함은 이들밖에 없었기에 사실상의 결전인 과달카날 해전에서도 이들이 선두에 서야 했고, 결국 미군 중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히에이가 박살나고 전함 워싱턴에게 키리시마가 격침되면서 패배했다.
일본군의 수뢰전대는 야간전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이들이 야간전에서 보여준 활약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도 30노트를 낼 수 있었기에 쥐수송에 동원되기도 했고,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상륙함대의 호위를 맡기도 했으며, 타사파롱가 해전에서는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승리하기도 했다.
마타니카우강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가 지리를 몰라 헨더슨 비행장 남쪽에 새로 만든 예비 활주로에 도착하고 그곳을 헨더슨 비행장이라 착각하여 “헨더슨 비행장 진입”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사령부는 이를 점령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공격 성공을 의미하는 “만세” 암호를 대본영에 타전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쇼와 덴노가 육군을 치하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심지어 라바울의 일본군 기지에서 방송보도반원들을 보내 기념촬영을 하려고 했다! 물론 그들이 탄 비행기는 착륙 코스에 진입하자 일본군이 너무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에 놀란 미군이 가만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갑자기 집중사격을 하는 바람에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나중에 오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미 해군 남태평양 해역사령관 겸 남태평양 군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은 1942년 11월 7일∼9일까지 과달카날 시찰에서 기자들에게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겁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미 해군은 과달카날 전투를 시점으로 VT신관(근접신관)을 일선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생산량이 딸렸던 초기에는 전선에 투입되는 양이 적어 그리 많은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VT신관이 본격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 말기에 들어 일본군이 카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가 되었다.
과달카날 철수 당시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이 누군가의 책임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그냥 전선정리를 위하여 병력을 뺀다는 식으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과달카날의 일본군 수뇌부에게는 철수사실을 전달하였지만, 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는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공격을 위해 재배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일부 부대는 재배치되었는데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1888년∼1966년)가 기다리고 있는 인도 방면 전선이었다.
과달카날 해상철수는 알류샨 열도에 고립된 일본군의 철수 작전(키스카 섬 탈출 작전)과 함께 너무 성공적인 작전이어서 태평양전쟁 양대 미스테리로 불리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보여준 일본 해군의 수준을 봐서는 절대 성공시키지 못할 것 같은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직 미국이 제대로 된 생산력을 보여주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미국과의 소모전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1943년 미국이 쳐갈긴 분노의 쇼미더머니가 Operation CWAL(Can't Wait Any Longer)급 포스를 선보이기 시작하자 그대로 미군의 물량에 짜부라졌다.
이 전투에서 육군 보병으로 싸우다 부상을 입은 제임스 존스(James Jones)는 이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을 집필했고, 이는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은 제빙기를 가지고 있었다. 미 해병대는 이것이 설치된 건물을 ‘도조 제빙 회사’라고 불렀고, 거기에 ‘새 경영진이 운영함’라는 글을 덧붙인 간판을 올렸다.(TOJO ICE CO. UNDER NEW MANAGEMENT)
엔터프라이즈가 결국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수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투입된 것이라, 전투 종결 후 수리 겸 대대적인 개장을 위해 본토로 돌아가게 된다. 다행히 피뢰된 새러토가의 수리가 완료되어 엔터프라이즈의 빈 자리를 메꿨지만, 작전 가능한 항공모함이 한 척이라는 것은 미 해군 입장에서는 불안요소였다. 이 때 영국에서 정규 항공모함의 대여를 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수락,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가 USS 로빈이라는 가명코드네임으로 미 태평양함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에식스급이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 새러토가와 팀을 이뤄 뉴 조지아 상륙 등에서 활약하였고 43년 10월 중순에 태평양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영국 스캐퍼플로(Scapa Flow)로 복귀했다.
전투 도중 핸더슨 비행장(현 호니아라 국제공항)에는 수많은 미 해군 및 해병 항공대의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뇌격기, 수상기들이 적 항공기의 공격 및 이에 맞대응하던 도중에 피격, 과달카날 전역에 산개된 일본 지상군의 포격 등에 의해 박살난 채 버려져 있었는데, 반자동 M1 개런드가 아니라 볼트액션식 스프링필드 M1903 소총을 제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열악한 보급 환경에 놓인 채로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었던 태평양전선 초기 미 해병대는 이런 박살난 전술기들에 후방기총으로 실려 있는 AN/M2를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했다. 그 결과 이 AN/M2에 M1 개런드의 개머리판을 달고 BAR의 양각대와 운반 손잡이까지 장착해 보병 휴대식 경기관총으로 개조한 스팅어(Stinger)라는 현지 개수형 모델이 탄생, 미 해병대에 의해 소수 쓰였다. 비록 현지에서 급조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뒤에도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 기관총을 이오지마 전투에서 사용한 토니 스타인 상병은 해당 전투에서 스팅어로 전장을 들쑤시며 적군에게 큰 피해를 남긴 점과 많은 전우들을 구한 점이 인정되어 사후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앞서 언급된 열악한 보급상황으로 인해 포로를 받아줄 처지가 못 됐던 미 해병대는 암묵적으로 포로는 필요없다를 시전하며 일본군 포로를 학살하거나 항복하더라도 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