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1. 만주 전략 공세 작전(滿洲戰略攻勢作戰)
1945년 8월 9일부터 시작된 소련-일본 전쟁의 주요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이다. 간단하게 “만주 작전(Маньчжурск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약칭으로도 부른다.
이미 만주 작전 이전부터 관동군은 약체가 된지 오래였다. 대일전 참전 이전까지는 소련이 대일 중립 노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을 상대하면서 부족한 전력은 만주에서 다 빼내고 빼내, 소련이 만주를 침공할 1945년 8월 당시의 관동군은 중일전쟁 당시의 관동군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를 정도로 약화돼 있었다. 과거 할힌골 전투에서 부족한 중장비로도 교환비 1:1 이상을 찍으며 소련군에 더한 인명 손실을 강요했던 초기의 관동군이 더 이상 아니었다. 정예사단들은 전부 남방으로 빠지고 남아있던 부대는 2선급이다. 거기다가 일본 자체적으로도 조사에서 관동군 전체 전력은 미군 4개 사단도 안 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최후 국면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함께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최후의 저항의지와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은 사건이다. 만주사변 이래 괴뢰국 만주국을 15년간 점령하고 있던 이미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은 이로써 해체되었다.
소련에 있어서 일본 제국은 가상적국이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했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 또한 ‘남방자원지대’라 부르던 동남아 지역이 중요했기에 소련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해서 1941년 4월 소-일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 일본은 안중에 없었고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소련은 안중에 없었다. 독일은 먼저 불가침조약을 깨고 초기에 소련군을 밀어붙여서 어느 정도 점령하면 일본이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외교 채널을 통해 대소전 참전을 요구했다. 독소전쟁 개전 당시 독일이 소련을 과소평가했다지만 혹독한 시베리아에서 단련된 소련 정예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독소전쟁을 조기에 독일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일본이 소련의 극동을 공격해 양면전선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소련에 눈을 돌리던 1941년 5월 만주의 관동군은 일본 최정예 육군으로 이름을 날렸고 일본 연합함대 역시 막강한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일본군이 충분히 소련군을 상대로 선전해 줄 수 있을 정도라고 과대평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제대로 된 전쟁을 안 겪은 것이 독이 되었고 전쟁이 나자마자 일부 일본군 장성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돌격전술을 고집해서 정예 병력과 징집병력들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의 공업기술은 독일의 공업기술보다 질이 떨어졌다. 일본 대본영 내부에도 이전부터 뒤통수 쳐달란 메시지를 보내오던 독일에 호응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북방작전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긴 했으나 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관동군 특종연습’이란 명목으로 병력을 100만 명까지 증강하고 대대적인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이 독일과 호응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공격할 것을 우려했지만 도쿄에 파견된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의 보고에 따라 관동군이 침공해 올 일이 없다고 파악하여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에 있는 병력 중 다수를 유럽 전선방면으로 차출했다. 그리고 그 결과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나치의 진격을 막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에 참패를 안겼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년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눈앞의 최대 주적을 제거한 소련은 이제 미국에 의해 패전 직전인 일본 제국의 만주에서 정예사단은 다 빠진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참전을 기획했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을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몰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100만 명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적 손실이 예상된 마당이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다만 친소적이었던 루스벨트가 죽고 강경한 반공주의자 트루먼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계 내에도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의 피해가 피해인지라 소련 정부는 처음에 크게 내켜하진 않았으나 미국의 요구와 유럽전선의 종결, 스탈린의 야심이 서로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를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결국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침공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프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실시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소련의 공세계획을 앞당겼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이미 소련의 공세는 8월 9일에 시작하기로 3달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으며, 소련측은 종전 전인 얄타 회담에서 독소전쟁이 끝난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는 미국에게 약속을 했고, 독소전쟁이 5월 9일에 끝났으므로 8월 9일은 정확히 이로부터 3달 후였다.
붉은 군대가 폭풍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일본 정계와 군부는 본토결전을 외치며 광적으로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한편, 뒤에서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명예로운 조건’이 무엇인가 하니 진주만 공습 이래 미국이 요구해온 무조건 항복까지는 이르지 않는 어떤 것을 뜻했다.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44년 여름부터 일본의 외교관들은 일본이 아직 대사관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스웨덴, 스위스, 그리고 소련에서 서방 연합국들과 접촉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강화 탐색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문서에 따르면 소련 내 일본 영사관 직원이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이 조만간 일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보고를 했으나 대본영에서 이를 무시했다. 소련이 이런 식의 간접적인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히자 일본 정부는 경악했다. 소련의 통보에 당황한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이 사임해 버리자 78세의 스즈키 간타로 남작이 수상으로 취임했다. 스즈키 수상은 “우리에게는 싸우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보냈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에게 어떻게든 강화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이런저런 이유로 손발이 계속 맞지 않고 있었다.
5월 초 베를린 전투가 임박하자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인 후지마라 요시지로 중좌는 스위스로 잠행하여, 베른 주재 OSS 책임자인 앨런 덜레스와 강화 협상을 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후지마라가 그의 계획을 도쿄에 보고하자, “적의 계략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고, 후지마라는 그의 계획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5월 12일, 강화 안건이 전쟁지도최고회의에서 공개리에 제출되었다. 그 협의회에서는 속칭 ‘6인 의원’으로 알려진 수상, 외무상, 육해상, 육해군 참모총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의 중반에 이르러 해군상 요나이 미쓰마사 대장은 소련에게 일본과 서방 사이의 교섭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하자고 무뚝뚝하게 제안함으로서, 그의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도고 외상은 요나이의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며, 오히려 곧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해올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은 소련이 미국과 아시아 영토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강력한 일본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쉽게 소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육군상은 환상 속에 빠져서 제안을 했지만, 스즈키 수상은 도고에게 소련에 접근할 정책수립을 위한 메모를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스즈키는 만약 자기가 반대한다면 아나미와 육군이 독자적으로 스탈린과 접촉할 것을 두려워했고, 도고도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5월 14일, 도고는 그의 메모를 최고협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었다.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이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이다. 미국은 장차 소련의 적이 될 것이며, 따라서 소련은 일본이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메모 내용은 결과적으로 한심한 전망이었지만 도고는 뒤에 제법 현실적인 경고를 덧붙였다.
“만약 스탈린이 평화 중개 역할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소련을 통해 강화를 추진하시겠습니까?”
도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인 위원’들은 전원 일치로 그의 진술을 승인했고, 즉시 협상을 개시하도록 그에게 지시했다 .
같은 시기 소련은 일본 전국에 B-29의 폭격이 계속되자 도쿄 주재 소련 대사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 대사관이 위험해지자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는 도쿄에서 110km나 떨어진 한적한 온천지 고라에 머물면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첫 접촉을 지연했다.
6월 3일 전쟁 전 수상이자 전직 소련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는 고라에서 여행하는 도중 우연히 들른 것처럼 꾸며 말리크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만찬을 함께 하면서 히로타는 말리크 대사에게 독일에 대한 소련의 승리를 축하하며, “일본과 소련이 이번 전쟁에서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고키는 계속하여 일본은 진정으로 일-소 불가침조약의 갱신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타는 또한 말리크에게 소련이 일본의 대미 평화 협상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타진했다. 하지만 말리크는 고키와의 만찬부터 그 3주일 후까지 계속된 회합에서, 정중하지만 대단히 애매한 태도로 소련의 중재에 관해 어떤 언질도 주지를 않았다. 이미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일본이 어떤 애원이나 간청을 하든지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버리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전문을 발송했고, 전문에는 “상황 심히 심각함. 신속한 소련의 태도 표명이 요구됨.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한 한층 더한 노력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받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토는 이전부터 소련은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나, 소-일 중립조약의 갱신에 관심이 없다는 암울한 보고만을 보내던 상황이었다. 사토는 이제 더 이상 행운이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도고의 전문에 회신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8월 8일에,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저녁 8시에 사토 대사와 만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건 놀랄만한 일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몰로토프를 비롯한 소련 외교부는 스탈린의 지시 하에 일본에서 오는 면담 요청을 무시하거나 또는 여러 구실을 내세워 그것을 회피해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날 오후 약속시간을 오후 5시로 앞당기자는 소련 외무성의 요청까지 있었다.
결국 모스크바 시간으로 8월 8일 17시(일본은 23시) 사토 나오타케가 크렘린에 나타나자 몰로토프는 지체 없이 그를 들어오게 했다. 사토 대사가 러시아식으로 격식 차린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몰로토프는 이를 거부하고 무뚝뚝하게 일본 정부에 대한 소련 국가 명의의 통고문을 전해주기 위해 사토를 불렀다고 했다. 사토가 외상이 권하는 의자에 앉자, 몰로토프 자신은 긴 테이블 위에 앉아서 문서를 읽어나갔다.
“독일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은 아직도 계속하여 전쟁을 주장하는 유일한 강국으로 남아 있다.(이하 동맹국들에 대한 소련의 신성한 의무에 관해 4개 항목에 걸친 설명은 생략)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소련 정부는 내일, 즉 8월 9일(모스크바 기준)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 통고문을 듣고 사토 나오타케는 항의는 이미 아무 소용없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그의 개인적 위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다. 몰로토프는 자신이 사토 대사에게 개인적으로 정중한 배려를 해주겠다는 것과, 대사가 원하는 어떤 무전 송신도 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암호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보장은 해주었다. 하지만 사토가 대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전화가 끊겼고, 무선 통신 장비도 압수당한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상업 통신을 이용하여 보내려 했던 전문도 어찌 된 셈인지, 혹은 오히려 당연하게도 전신국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토가 몰로토프의 사무실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시베리아에서는 자바이칼 전선군의 선봉인 제6근위전차군이 모든 전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본 관동군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이다.
1933년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구 일본 육군 관동군의 XX년도 작전계획은 대소 작전계획으로, XX는 매년 갱신되는 년도다. 당연하게도 전장을 소련 영내로 상정, 우선 동부 만소국경, 그러니까 동가강이나 목단강 방면부터 소련령 연해주를 급속 침공해 보로실로프나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극동 소련군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을 격멸한 후, 개전 이후는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던 서부국경, 다싱안링 산맥 서쪽 외몽고 방면에서 2차 공세를 발동해 소련군에 연속적인 결전을 강요, 이것으로 잔존 극동 소련군을 격파한 후 최종적으로는 바이칼호 방면으로 진격한다라는 것이었다.
연해주를 먼저 침공하는 동부 국경 정면의 공세 발동은 동원 개시로부터 약 2개월 후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정되어 있었는데, 관동군의 작전계획에서는 통상 2개월 이내에 완료하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이 동부 소만국경에서의 제1기 회전과 서부 정면에서의 제2기 회전(호롬바일 평원에서 결전), 바이칼 호수 방면으로 진격이라는 패턴은 1936년도 작전계획까지 계속 인계된다.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은 기동전과 우회, 포위, 연속적인 결전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인데 메이지 이후 일본 육군 대륙작전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좋은 작전계획이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선 개전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동부 국경방향에서부터(보로실로프-블라디보스토크-이만 등 연해주지역의 주요 도시 공략과 우수리 강 도하작전) 항공 격멸전을 먼저 실시해 제공권을 확보, 이후 지상군 주력(약 10∼11개 사단)이 동부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세를 걸어 연해주 소재의 소련 극동군을 격파한다는 게 최초의 상정 목표였다.
이 동부국경에서의 공세 발동과 동시에 일본군이 북정면이라고 호칭한 흑하방면의 북부 만소국경에서도 양동작전(4개 사단 투입)을 실시해 소만국경 인근 시베리아 철도를 분단시켜 소련군의 보급과 신속증원을 저지한다. 해당 작전은 1935년도 작전계획부터 반영된다. 이와 함께 동쪽 정면의 작전 성공 후에는 여기서 6개 사단 정도를 병력을 서정면으로, 대흥안령산맥 이서의 서부 소만국경, 즉 하이라얼 방면 전용, 조선군(일본제국)과 내지에서 증파된 병력이 만주에 전개하면 최종적으로 약 18개 사단의 전력으로 호롬바일 평원에서 소련군 주력에 결전을 시도, 이것을 격파한 후 바이칼 호수 부근까지 진격한다라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관동군의 정세 판단에 의하면 소련군의 진짜 주력은 개전과 동시에 서부정면에서, 그러니까 하일라얼 방면에서 역공세를 발동할 확률이 대단히 높기에 만약 서전에서 동정면의 공세가 실패한다면 관동군의 이 시나리오는 파탄,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또한 동정면의 공세가 성공할 때까지 서정면, 대흥안령 이서 일본군의 최대 전략거점인 하일라얼 요새에서 일본군 제8국경수비대가 전선을 지탱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작전계획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소만국경상의 요새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요새화한 곳이 바로 호롬바일 평원 인근의 하일라얼 요새였다. 이곳의 별명은 호롬바일 평원을 지키는 오망성으로, 하일라얼 요새는 반지하 매립식의 거대 성형 요새였다.
하지만 이후 동서 2정면에서의 공세 패턴이 전면 재검토된 것은 1937년도 대소 작전계획부터였다. 이후에는 서정면 결전은 단념, 동정면 결전만이 주로 지향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해주를 노리는 동정면의 작전발동에서는 대공세 전의 초동 작전이 설정되었다. 이것의 요점은 미리 국경지대에 전개시켜둔 기습 병력에 의해 송곳으로 후벼파듯 동부 국경, 극동소련군 연해주 방면군의 소련군 거점의 취약지점을 돌파, 극동 소련군을 교란해 소련군의 대규모 역공세 발동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을 노렸다. 그리고 이 초동작전이 성공하면, 즉각 주력 공세를 실시해 한꺼번에 연해주 방면의 소련군을 격멸한다라는 작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럼 다싱안링 이서 서정면에서의 결전은 어떻게 되었나? 당연히 실시하지 않고 이쪽은 시종 지구전으로 돌아서 그 후의 진격도 단념되었다. 그래서 하이라얼 요새의 대규모 증강/개축도 37년 이후가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이 이렇게 최초 시안에 비해 소극적으로 돌아선 것은 바로 병력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1937년도 작전계획은 그 후 북쪽 정면에 대한, 그러니까 흑하 방면, 브라고베시첸스크 공략으로 시베리아 철도 절단 공세안이 좀 더 비중 있게 바뀌는 등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40년도 작전계획까지 인계되었다.
허나, 이러한 작전안의 소극적 수정에도 불구하고 1935년 이후 극동 소련군 강화에 수반하는 기성 대소 작전계획의 붕괴를 두려워한 일본 육군도 1937년 이후부터는 관동군의 증강에 나서게 된다. 1937년부터 관동군은 그때까지의 4개 사단(+독립수비대 5개 대대) 편제에서 6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이듬해인 38년에는 2배인 8개 사단, 40년에는 12개 사단으로 계속 증강되었다. 그리고 부대의 전개양상도 대폭 변화되었다. 1937년까지는 사단급 이상의 전략군단은 도시 주변에 전개하고 있었지만 1938년 이후는 소만국경 부근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실례로 1937년까지는 국경 인접지구에 대한 사단 배치는 불과 2개 사단 뿐이었지만 1938년부터는 무려 5개 사단으로 증강되고 있었다.
이것은 관동군이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이후부터는 기본적으로 독립수비대나 만주국군, 만주국 경찰 등에 맡긴 것을 의미했고 관동군 자신은 철저히 대소전 준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1938년 말에는 8개의 대규모 국경 요새가 새로이 완성, 관동군에 배속된 사단과는 별도로 약 2만 명의 병력이 국경지대의 거점에 항시 전개하게 되었다.
서정면의 하일라얼 요새와 동정면의 동녕 요새, 후터우 요새, 그리고 북정면의 아이훈 요새는 특히나 견고한 요새로 평가되었는데 평시에도 3,000∼6,000명 이상의 국경수비대를 수용하는 대규모였으며 최대 3m의 콘크리트로 방어된 영구 축성진지였다. 또한 동정면과(후터우 요새) 북정면의(아이훈 요새) 국경요새는 방어만이 아니고 공세작전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왜냐면 이 요새들에는 24cm 유탄포나 30cm 유탄포, 그리고 41cm 열차포 등 일본 육군으로서는 예외적인 대형의 장거리 중포를 다수 장비하고 있어 대소전의 초두에 아웃레인지 포격으로 소련측 군사시설, 철도, 철교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노구교사건과 제2차 상해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1937년 이후), 전선의 확대로 본격적인 동원이 개시되어 일본군은 가파른 병력 증가 추세로 돌아서게 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에서 여전히 골치를 썩이고 있었건만 관동군으로부터의 대규모 병력 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은 관동군에는 정예부대라고 평가되던 전통 있는 상설사단을 우선 배치, 중국전선에는 급조한 특설 사단만을 보냈다. 이것은 육군이 얼마나 대소전 준비를 중시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항공 전력도 동정면으로 집중 배치되었지만 전력 부족으로부터 만약 실제로 대소전을 실시할 때는 해군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1945년 5월 이미 일본 자체적으로 사찰한 결과 관동군 75만 명 전체의 전력은 미국 4개 사단만도 못한 전력이라고 평가했다.
해군에 몰입한 나라인데다가 관동군의 정예사단이나 장비들이 전부 태평양 섬에서 산화한지라 이미 관동군은 중국군이나 중국전선의 일본군보다도 약한 상태였다.
만주군은 중국인, 몽강자치군은 몽골인으로 구성된 괴뢰부대이다. 만주군의 경우 명목상 만주국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예를 들어 조선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의 경우 만주군 제5군관구 소속으로 러허성의 항일독립군 토벌을 담당하며, 제5군관구는 관동군 제3방면군의 작전지휘를 받는다. 전쟁이 끝나고 관동군은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개고생 하였지만, 대부분 중국인으로 구성된 만주군은 무장해제 후 각자 집으로 갔다. 덕분에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 등은 신생 한국군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편제상으로는 괜찮은 전력 같아 보이지만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부대가 껍데기만 남은 채 병력과 장비가 본토 방위를 위해 꾸준히 차출당하고, 신규편성 부대 등으로 그 공백을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관동군의 기본적인 구성 제대는 보병 사단이었는데 사단 당 구성 인력은 소련군 소총병사단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무기는 소련군보다 빈약한 편이었다. 일본군 사단 편제는 2종류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단 편제는 3각 편제였다. 규정상 사단 정원은 20,000명이었지만 45년에는 12,000명에서 16,000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게다가 어떤 사단은 9,000명까지 병력이 줄었다. 3각 편제 보병 사단은 각각 3개 대대로 구성된 3개 연대와 기병대대, 포병 연대, 수송 연대, 공병 연대, 통신 중대와 기타 지원 제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당시 관동군은 31개 사단, 12개 독립혼성여단, 2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19, 107, 117, 63, 39사단만이 1945년 1월 이전부터 만주에 있던 사단들이었다. 나머지 25개 사단의 훈련은 충분하지 못했고 모든 장비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대본영에서는 관동군 전체의 15퍼센트만이 전시에 즉시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관동군에는 1,115대의 전차와 전투 차량이 있었지만 개별 전차의 성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관동군의 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자 대본영은 결국 관동군의 대소전 전략을 바꾸고 말았다. 1944년까지 유지했던 소련군과의 충돌시 소련군에 대한 공세 계획은 전부 취소되었고 전부 방어 계획으로 전환되었다. 관동군은 소련군과 충돌시 국경지대에서 시간을 끌면서 소련군의 예상 공격 방향으로 종심 방어망을 구축할 계획을 세웠다. 관동군의 새로운 방어 계획은 1945년 5월에 시행되었다.
5∼6월 동안에 관동군은 소련군의 예상 침공로마다 나름 효과적으로 배치되었고 퉁화 지역의 방어 상황과 응전태세 재정비를 마쳤다.
파비아 전술을 채택한 이 계획에 따르면 제1방면군은 국경 지대에 배치된 소대에서 대대 수준의 병력들이 최대한 지연전을 벌이고 후속한 사단과 여단 본대가 국경 지대 4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팡쳉, 치흐싱, 타치엔창, 롯조커우, 투멘에 방어 거점을 구축하게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배치된 모든 사단의 완전 편제가 끝날 때까지 시행이 미뤄졌다.
제3방면군은 소대와 중대 규모의 제대를 사용해 한다가이에서 우차커우에 이르는 서부 국경 지대를 요새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고 본대는 설정된 주 방어선으로 후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방어선은 신경에서 장춘이고 최후 방어선은 후안젠에서 흐신핀, 장춘을 잇는 요새 지대였다. 제4독립군은 만주 북서쪽 국경 지대에서 지연전을 벌이며 다싱안링 산맥을 지나는 철도를 통해 폭토우, 넨쳉, 페이안 라인을 지키며 후퇴하면서 치치하얼에 도착해 관동군 본대와 합류할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전 제대의 3분의 1이 국경에, 3분의 2가 종심을 갖추고 배치되어야 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만주의 험한 지형, 깊은 종심, 일본군의 지연전으로 인해 만주 중부까지 진격한 소련군의 공세 지속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보급선 유지가 힘들 때에 맞춰서 소련군을 저지시키고 잘 하면 역습도 가해 소련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낼 것도 기대했다. 가장 큰 문제라면 일본군의 방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병력 배치가 아직 미완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약체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100만에 이르는 머릿수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소련군은 45년의 관동군이 1,115대의 전차와 5,360문의 화포, 1,8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만주국군까지 합쳐 8개 사단, 7개 기병사단이 추가되었다고 추산했다. 이에 따라 만주 국경 전체의 소련군과 관동군 비율은 병력은 1.2:1, 일본군만 따지면 2.2:1이 되고 전차와 포의 경우 4.8:1, 항공기는 2:1의 비율이 된다. 소련군이 수적 우위에 있긴 하지만 기갑 전력을 제외하고는 그렇게까지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는 아니다.
게다가 소련군만큼은 아니지만 관동군 또한 야전군 직할로 무시못할 만한 포병 전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창설된 30년대부터 소련과의 충돌 상황을 상정하고 위에서 썼다시피 대대적인 국경 지대 방어선과 요새 건축이 소만 국경에 이루어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독소전쟁에서 3,000만 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피해가 발생한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 벌판이란 말에 익숙해 만주가 그저 거대한 평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 곳이다. 특히 서쪽의 다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오면 더 심해져서 습도, 늪,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는다.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노르망디에서 민스크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만주 침공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이자 자타공인 소련군 최고의 두뇌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극동의 스타프카 대리에 임명해 만주 침공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7월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전략방면군을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만주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프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 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잔뼈가 굵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자바이칼 전선군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2근위군을 지휘해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고,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카르파디아 산맥을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 전선군에는 전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유마셰프 해군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험지에서 오랫동안 싸워 와서 험지 기동의 전문가가 된 메레츠코프와 카르파디아 산맥에서 기동전을 벌인 말리놉스키의 경험은 무척 중요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말리놉스키가 독소전에서 지휘했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와 메레츠코프가 지휘했던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부는 그대로 극동으로 이동했으며 제6근위전차군, 제39군, 제5군, 제53군은 동유럽의 점령지에서 대 이동을 시작했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국가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