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동아시아 이야기

84. 마닐라 대학살(The Manila massacre)

작성자管韻|작성시간23.02.22|조회수124 목록 댓글 0

84. 마닐라 대학살(The Manila massacr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탈환전이 시작되자 저항하던 일본군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난징 대학살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또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끔찍한 사건이다.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필리핀의 독립법을 성립하여 앞으로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에 독립준비정부가 발족하여 마누엘 케손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그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개시했고, 1941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을 몰아내고 마닐라가 있는 본섬을 점령했다. 결국 1942년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케손 대통령은 미 해군 잠수함 편으로 중앙은행의 금괴 및 주요 각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2년 4월 바탄 반도의 미군이 항복했고 5월엔 코레히도르 섬에서 맥아더의 대행으로 총괄 지휘했던 웨인라이트 장군의 수비군이 항복하면서 필리핀에서의 미군의 저항은 멈췄으나 항복하지 않은 소수의 미군/필리핀군이 주축이 되어 게릴라 조직들이 생겨났고 곧, 지역별로 유력하거나 명망 높은 필리핀인 인사들도 자체 조직을 세워서 비정규전으로 일본군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게다가 구관이 명관이라고, 일제의 탁상행정과 폭정에 염증을 느낀 필리핀인들은 대개 지역별로 현지의 게릴라 조직에 가입, 활동하여 일본군을 괴롭혔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필리핀에서 수천km 떨어진 연합군에 무전 접촉이 성공하여 미군 잠수함을 통한 교류로 인력 후송과 물자 및 인적지원을 받아서 장기간 연명이 가능했다.

 

일본군 또한 이들 게릴라 조직의 성장을 매우 경계했고 곳곳을 순찰하면서 토벌을 벌였다. 전파추적장치를 장착한 선박을 기동시켜 곳곳 섬들의 게릴라들의 무선기지를 찾아내고 내부 첩자를 심어두거나, 본보기로 활동 가능성이 높았던 지역의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잡힌 게릴라 남, 녀 포로들에게 잔인한 고문과 살해를 가하는 등 보복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에 마닐라가 있는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2월 3일에 미 육군 제1기병사단과 제37보병사단이 마닐라로 돌입했다.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 대장은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는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육군 제14방면군과 함께 현지 부대였던 일본 해군 제31특별근거지대 사령관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해군소장과 대본영은 마닐라 사수를 고집했기에 마닐라 해군방위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와부치 제독이 지휘하는 육해군 혼성부대가 마닐라에 남아 미 육군과 3주 이상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은 초기엔 심리전을 통해 일본군의 항복 및 철수를 권고했고 일부 구역에선 성과를 거두었다. 시가전 초기의 어느 거점에 일본군이 억류중인 3천명의 미국인(대다수는 전쟁 전부터 체류했던 민간인들...)이 있었는데 제1기병사단 소속 장교 또는 지휘관이었던 브레디 중령은 해당 거점의 일본군과 교섭하여 일본군의 무사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민간인 포로들을 무사히 넘겨받은 사례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거점이 이런 해피엔딩은 아니었고 대개 미군의 교섭시도를 무시했다. 시가지 중심부의 어느 거점에선 일본군이 마닐라 시민 수천 명을 인질로 삼아 저항 중이었는데 미군측 전선 총지휘관 제14군단장 그리즈월드 장군이 일선으로 나와 직접 확성기로 설득을 외쳤으나 무반응이었고 오히려 학살의 조짐이 보이자 대기중이던 미군 야포들이 수천 발을 몇 시간동안 퍼부은 결과 과반수의 인질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건 양반이자 시작에 불과했고, 미군은 마닐라 내부로 진입할수록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영거리 포격으로 건물들을 하나하나 박살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마닐라 시민들이 건물과 함께 죽어나갔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던 일본군들이 이를 목격한 미군에 의해 즉결처형 되기도 했다.

 

여기까지야 시가전 공방 과정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민간인 처형 또한 일선 장병들이 흥분해 멋대로 벌인 짓이고 즉결처형까지 됐으니 큰 문제는 없었으나 시가전 도중에 취합된 정보 및 해당 전투가 종결된 3월 3일을 전후로 사후 조사를 하면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희생자 대다수가 시가전 과정에서 발생된 포격, 폭격,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보다 일본 육해군의 마구잡이식 방화와 냉병기에 찔려 죽은 게 더 많았던 것. 당시 마닐라 시내에 있던 약 70만 명의 시민들 중 대략 10만명이 이렇게 희생됐으며, 이는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에서도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미군의 화력에 쫓겨 가는 와중에도 마닐라 시민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해서 살인과 파괴를 일삼았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었죠. 한편으론 엘리베이터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사건의 가장 큰 책임자인 이와부치 제독은 마닐라 함락 직전인 1945년 2월 26일, 마닐라의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 건물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했으나 시신 훼손이 심각해 이와부치 제독의 시신은 식별이 극히 힘들었다고 한다. 사후 중장으로 1계급 특진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학살에 가담하기는커녕 오히려 대민 지원을 한 부대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삼대오물로 유명한 어둠의 독립군 도미나가 교지 장군이 이끄는 육군 제4항공군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주둔지 인근에 일본 육해군 부대의 민간인 학살 시도에 대해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아군이라 해도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저지했다.

 

학살이 정점에 달했던 2월 23일, 어떤 건물에선 방화와 함께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 대서 대략 7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물론 이 정도 규모는 당시 마닐라에서 평범한 수준이라 얼핏 봐서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건물이 다름 아닌 에스파냐국의 영사관, 그러니까 스페인의 외교공관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기까지 당당하게 내걸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록 에스파냐국이 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추축국과 친한 세력이었는데다, 당시 친일적 친독적이던 중립국들도 잇따라 연합국에 가담하던 상황에서 에스파냐는 일본이 가진 정말 몇 안 되는 우호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외교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파냐 영사관은 그야말로 개막장 속에서도 절대로 일본이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피에 취해 있던 일본군에게는 그런 게 없었는지, 몇 안 되는 우호국의 외교 공관까지 쳐들어가 학살하는 희대의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즉, 학살은 적국이든 우방국이든 아주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당시 주필리핀 스페인 대사 호세 델 카스타뇨 박사는 본토의 정치적 상황이 그랬던 만큼 골수 친프랑코, 프랑코 정권 내에서도 친독인사로 유명했던 라몬 수녜르 계열 인사에 이 사건 전만 해도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런 이념적, 지정학적 이유로 추축국이 이길듯했던 대전 초기만하더라도 일본의 힘을 통해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나 고민하던 친일, 반미 성향이었다.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도 못했던 방식으로 우호국으로 생각했던 일본한테 사실 일본 입장에서도 전혀 득 될 거 없는 방식으로 발등 찍힌 에스파냐 측에선 이 학살 소식을 알게 되자 격노했고, 결국 4월 11일에 벌어진 이 학살극으로 인해 에스파냐는 일본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아무튼 일본은 그렇게 유럽에 몇 남지 않은 우호적인 외교 채널을 제 발로 걷어찬 셈이다. 그리고 아무도 의도치 않은 결과지만, 이 학살 이후 공사관 자산과 현지에 남아있고 살아남은 에스파냐 교민들의 재산 등을 복구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미국의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친독 파시스트 색을 뺄 필요가 있었던 에스파냐 측에서 수녜르도 정권 2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갑자기 독일과 관계를 정리하는 등 피상적으로나마 프랑코 정권이 약간이나마 온건하게 누그러지는 나비효과까지 초래했다.

 

당시 마닐라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 통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미국의 한창 태평양 진출 요충지이기도 해서 상당한 외국인 사업자, 노동자 커뮤니티가 형성된 국제도시였는데, 진짜 뭐 학살 과정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었는지 동맹국인 나치 독일의 갈고리십자 깃발이 당당히 걸린 마닐라 독일인 클럽에도 쳐들어가서 당당하게 건물에 불지르고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총살하는 방식으로 800명가량이나 학살했다.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ABC(스페인어) 당시 20여 명 가량의 일본군인들이 독일 클럽 내 여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강간했으며, 소녀 한 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전후 마닐라에서 학살 혐의 책임자로서 야마시타 장군이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에서 시가전이 시작될 시점에는 사령부를 이미 철수했고, 학살을 주도한 건 이와부치 제독 이하 해군 육전대와 이와 함께한 육군 병력 일부를 중심으로 한 패잔병들이었다. 전범재판에서 야마시타 장군은 학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재판에서 인정됐으나 예하부대의 학살에 대한 상급자로서의 책임 소재로, 마쓰이 이와네와 동일한 혐의까지 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책임자였던 이와부치 제독이 자살하여 그 대신 책임을 질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 역시 야마시타 장군의 처형에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파울로 대학에서는 어린이를 포함 994명을 살해, 북부 묘지에서는 2,000명을 처형, 산차고 감옥에서의 집단 살해 등이 극동군사재판에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일본 우익진영에선 마닐라 시민의 죽음은 미군과의 전투시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미군의 폭격과 사살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야마시타 장군은 죽기 전에 자신은 관련이 없다며 모르는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도 직접적인 연관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일본 우익들은 미국이 마닐라 대학살이라는 것을 날조하여 일본에게 대학살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고 주장해가면서, 이 대학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미국 역시 학살의 원인을 자국 탓으로 돌리는 소리에 대해서만큼은 가만히 안 있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면서 으르렁거린다.

 

물론 필리핀에서도 일본 우익의 주장은 당연히 근거가 없다고 본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 정계인사와 장교들은 이 당시 일본군에게 맞서 싸웠고, 이 학살로 가족과 터전을 잃고 증오에 차 항일 게릴라에 가담한 이들도 많았다. 또한 이들은 미군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니 일본 우익이 미국 탓이라고 외치는 소리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을 뿐. 이들이 나중에 필리핀 정계, 군직에 몸담은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다. 의미 없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건 확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단지 이 사건이 우발적 사건이었느냐 계획적 학살이었느냐 에만 논의의 여지가 남아있는 정도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