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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01. 오초 칠국의 난(吳楚七國의 亂)

작성자관운|작성시간14.11.29|조회수113 목록 댓글 0

 

01. 오초 칠국의 난(吳楚七國)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

 

(, 혹은 은())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한 주()는 봉건제를 통치 제도로 삼았다. 왕이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충성 및 군사적인 조력, 또는 일정한 세금을 상납 받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이 서양의 'Feudalism'와 다른 점은 서양의 경우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 주종 구도였던것이 비해 주나라는 혈연 관계를 기반으로 "모두 우리편" 같은 형태였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즉 왕과 제후들이 핏줄과 혼인으로 이어지고 제후의 임명에 관해서도 기존의 봉지로 부임시키는것이 아닌, 허허벌판으로 파견을 시켜 점령을 하고 그곳을 개발해서 살게했다는 점이다. 주나라가 건국된것이 BC 1046년이고 동주(東周) 시대가 된것은 BC 771년이라는것을 생각하자. 이때는 말 그대로 고대였다.

 

주나라가 제후들을 보내는 형태는 다음과 같다. 하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아들인 천자(天子)가 제후에게 책명(策命)이라는 의식을 거행한다. 여기서 읍토(邑土)와 백성을 수여한다는 내용의 임명서인 간책(簡策)이 수여되고, 동시에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서 이기(彛器:청동제의 제기)와 거마구(車馬具), 의복과 금옥의 장식, 깃발들이 주어진다. 제후는 그것들을 받고 떠나 적과 싸우고 땅을 점령하여 읍들을 만들고, 혈족들을 경대부(卿大夫)라고 말하는 경과 대부로 나뉘며 정치를 직접 담당하는 고위 벼슬아치로 재책명(再冊命)하여 관리로 만들고 지방을 다스리게 한다. 이렇게 하면 천자부터 제후, 경대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혈족이 되는 것이다.

 

주나라 조정은 이봉(移封)이라고 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리고 제후들은 지역의 특산물을 공납으로 바쳐야만 했다. 또한 조근(朝覲)이라고 하여 일정 시기에 따라 조정으로 와서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의무도 있었다. 주나라 천자는 틈이 나면 봉지를 둘러보면서 현지 사정을 보고 제후들에게 무력 시위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을 순수(巡狩)라고 했다.

 

이렇게 봉건제를 하면서 안전장치를 갖추어 놓은 이유는 사실 주나라도 봉건제를 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자기가 직접 자신의 땅을 다스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다가 주나라 또한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반란을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봉건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은나라에 대한 반란시에도 세력이 약해서 주변 제후국의 군대를 모아 연합군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끝에 승리하였으며, 은나라의 잔여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은나라의 왕족 중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제후로 삼아서 송나라를 만들어 분봉할 정도의 상황에서는 군현제 따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봉건제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문명 수준과 그에 따른 통치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넓은 영토를 직접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봉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두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점점 약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동주(東周) 시대에 접어들면서 원래 수도였던 호경이 서융에게 개박살이 나서 낙양으로 도망쳐서 새로 나라을 일으킨 주 왕실의 권위와 힘이 떨어지자 제후들을 감시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제후들은 겉으로는 여전히 주나라 천자에게 복종했지만 실상은 천자와 다름없는 행세를 하며 서로 다툼을 일삼았다. 이것이 춘추시대(春秋時代)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면 기어코 주나라는 그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세상의 주인이 된 진()은 낡은 봉건제를 폐기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시켰는데 이것이 군현제(郡縣制)였다.

 

진나라 36개 군

 

군현제의 기초적인 모습은 춘추시대때도 존재했지만 제대로 된 형태로 나타난것은 BC 350년의 일로 진() 효공(孝公)때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한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군현제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관리들이 임지로 떠나 중앙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에 비해 황제의 의중을 정치에 좀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여섯개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받아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이 군현제를 제대로 시행해 보기도 전에 여러 실책과 악재가 겹치며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의 군국제(郡國制)

 

군국제와 군현제를 나타낸 그림. 다만 한나라의 군국제는 왼쪽의 그림에 비해서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부분이 크다.

 

항우(項羽)는 거록대전에서 장한을 격파하고 황제 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나라와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동맹 세력과 수하들에게 보답을 해 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 등 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항우에 의해 한중왕이 된 유방은 항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항우와 격돌하다 수수전투에서 패배해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장량과 역이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때 역이기는 멸망한 6국의 후예에게 봉토를 내려 공격하자며 봉건제를 주장하여 유방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장량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봉건제도를 쓰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독립적인 군단을 이끌고 있던 한신은 결국 원하는 대로 왕으로 봉해줬다.

 

마침내 항우를 패배시킨 유방은 이제 한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하여야 했다. 봉건제를 쓸 마음이 없었던 유방이지만 자신을 따라 싸운 공신과 동맹 세력들을 푸대접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에 있던 7왕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삼아 1개 현()을 단위로 한 봉읍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와 후국(侯國)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본받아 다스렸다. 이리하여 봉건제와 군현제가 섞인 통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국제였다.

 

하지만 봉건제를 채택할 마음이 없었던 유방은 성씨가 다른 공신과 동맹들이 왕이 된 것을 불안해 했다. 얼마 전까지도 난세였다보니 언제 자신의 자리를 탐하여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제후왕들도 원래는 자신과 동급인 왕이었다가 황제가 된 유방을 경계했고, 결국 연왕 장도의 반란을 시작으로 유방과 제후왕들은 점차 대립 관계로 돌아섰다. 유방은 팽월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제거했고, 남은 왕들은 팽월 꼴이 될 것을 염려해 차례차례 유방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제거됐다. 제거된 왕들의 자리는 유방의 아들들이 대신했다. 유방 사후 여후는 더 악랄한 수법으로 왕들을 자신과 성씨가 같은 친척들로 바꿨지만 여후 자신이 죽은 후 이 여씨 왕들은 기존 공신들과 남은 왕들의 반격에 패하여, 유씨 일가의 인물들이 도로 왕위를 장악했다.

 

BC 177년 제북왕 유흥거(劉興居)의 반란

 

하지만 동성(同姓) 왕들, 즉 유방의 형제와 조카들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막강한 세력을 가지게 됨으로서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독자적인 힘과 세력을 가진 이들은 중앙 정부에 언제든지 도전할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황제와 성이 같기 때문에 이성 제후들과는 달리 황제에게 대적하더라도 일단 승리만 하면 역성혁명이 아니라 황족 내부의 권력다툼정도로 인정되어 쉽게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중앙정부에 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미 제후왕을 지내던 문제가 황제로 즉위한 사례를 만들었고.

 

유흥거는 여후의 일족을 제거하고 한문제가 즉위하는데 공을 세워 양나라 왕이 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유흥거가 본래 자신이 아닌 자기 형 제애왕(齊哀王) 유양(劉揚)을 황제로 삼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제나라 두개 군을 떼어 명목상의 왕 노릇을 하게 했다. 이에 유흥거는 불만이 생겼다.

 

BC 177년인 문제 3년의 5, 흉노의 군대가 노략질을 일삼자 문제는 8만의 대군을 관영에게 주어 적을 물리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태원으로 떠났다. 흉노의 침입으로 군대도, 황제도 떠나자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유흥거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문제는 재빠르게 시무(柴武)를 대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적을 막게 했다. 그리고 수도로 돌아와 "유흥거와 관련이 있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 모두, 항복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명령을 내린다. 유흥거는 패배했고 반란은 이렇게 진압 당했다.

 

BC 174년 회남왕 유장(劉長)의 반란

 

유장은 유방의 막내아들로 모친은 조나라 왕의 후궁이었다. 그녀는 유방을 모시다가 임신을 했는데 조나라가 반란에 연루되며 같이 잡혀가게 되었다. 황제의 핏줄을 임신한것을 알면 구함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여후는 질투 때문에 일부러 유방에게 알리지 않았고 유장을 낳은 어머니는 화가 나서 자결하였다. 후에 유장은 여후의 손에 길러지게 되면서 회남왕이 되었다.

 

성장 배경이 이러하니 유장이 바른 아이가 되기는 힘들었다. 유장은 문제가 즉위한 뒤에도 행패를 부리고 다녔는데, 문제는 형제가 모두 죽고 유장만이 남은지라 그래도 안타까워하며 항상 용서해주었다. 유장은 그런 형의 마음은 몰라주고 점점 더 사람됨이 난폭해져갔다.

 

유장은 급기야 각 제후국의 재상과 고급 관리는 황제가 임명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조정의 관리를 쫒아내고 스스로 재상과 관리를 임명하려고 했다. 이건 도를 넘은 행위였지만 문제는 동생을 총애해서 이를 허락했다. 그러자 유장은 대놓고 사람을 죽이고 다녔고, 문제는 편지를 보내 적절하게 타일렀지만 이 망나니 동생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결국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러던 유장은 조기 진압되어 잡혔다. 문제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정말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귀향을 보내어 정신을 차리게 한뒤 다시 왕에 봉하려고 했지만 유장은 제 분을 못참고 자결해버렸다. 문제는 평생 이 때문에 괴로워 하였다. 또한 유장의 아들로 회남왕을 물려받은 유안은 회남자라는 책을 쓸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지만 무제 시절인 말년에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난을 꾸미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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