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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02.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12.07|조회수422 목록 댓글 0

 

02.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베이핑과 톈진의 함락

 

 

725일에 전화선 수리를 명목으로 불법 월경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726일 일본군 1개 대대가 베이핑의 광안먼으로 쳐들어왔다. 725일 전투에선 중국군이 일본군 항공대의 가세에 참패했으나 광안먼 전투에선 일본군이 중국군 경비대의 포위 공격에 전멸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쑹저위안은 급히 공격을 중지하여 이들을 살려주었다. 쑹저위안의 부하들이 쑹저위안의 태도에 반발하기 시작했지만 쑹저위안은 일본에 계속 양보했다. 하지만 일본은 726일 저녁, 지난 충돌을 핑계로 베이징 교외의 모든 중국군을 융딩강 서쪽으로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시한으로 내건 28일 정오도 되지 않은 1937728일 오전 8시에 대대적인 공격에 착수했다. 3만명의 일본군이 몰려오자 쑹저위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뒤늦게 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바오딩의 쑨롄중, 완푸린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너무 늦은 조치였다.

 

728일 오전 8, 베이핑, 톈진, 탕구에 걸친 저역에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난위안, 펑타이, 시위안이 잇달아 함락됐고 펑즈안의 중국군 37사단과 장쯔중의 38사단은 일본군의 공세에 패퇴했다. 톈진과 다구에서 중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전함과 항공기를 비롯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 의해 모두 제압되었다. 중국군 방어선을 모두 분쇄한 일본군은 5사단, 6사단, 10사단 등 3개 사단을 동원하여 베이핑을 공격했고 730일 밤에 베이핑과 톈진을 함락시켰다. 16천명의 피해를 낸 중국군은 철도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6백명에 불과했다.

 

 

2차 국공합작과 중국의 전쟁 태세

 

 

193782일 중화민국 주석 린썬이 대국민 성명을 통해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 항전에 임하라'며 대일 항전을 선포했다. 87일 주더, 저우언라이, 예젠잉을 비롯한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까지 참석하여 국민당 임시전국대표회의가 열렸고 공식적으로 항일 전쟁을 결의했다. 장제스는 항일을 위하여 서안 사건 이후 교전을 중단한 공산당과도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루산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난징 정부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소비에트 정권과 적화 통일을 포기하며 난징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819일 공산군은 제8로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공식적으로 합류했고 주더가 총사령관에 펑더화이가 부사령관에 예젠잉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옌시산의 제2전구에 배속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그 외에 화중, 화남의 산재한 공산군 게릴라 13천명도 공산당 중앙의 설득으로 신4군으로 개편되어 유격 활동을 맡았다.

 

811일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되어 군사위원장 장제스가 주석이 되었고 행정원장인 왕징웨이가 부주석이 되었다. 815일 국가총동원령이 선포되었고 820일 중국 동부 최전선을 5개 전구로 구분했다. 화북과 장강 이북의 제1전구와 5전구는 장제스가 맡았고 서북쪽인 산시는 2전구는 옌시산, 난징과 상하이가 포함된 중국의 중심인 장강 하류인 3전구는 펑위샹이 맡았다. 푸젠, 광둥을 비롯한 화남의 4전구는 허잉친이 맡았다. 쓰촨, 윈난, 구이저우 등 주국 서부는 후방 유격구로 편성되었다. 이후 전구는 전선이 확대되면서 12개로 늘게 된다.

 

 

베이핑 탈환전

 

 

일본군 입장에선 이번 침략은 만주사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일본군의 목표는 만주국을 만들었을 때처럼 화북 지역 5개성 정도를 점령해서 새로운 괴뢰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일전쟁은 차치하더라도 지난 사건, 만주 사변, 러허 사변, 상하이 사변 등으로 번번이 일본군의 침략 야욕에 시달리며 번번이 영토를 할양해야 했던 중국 입장에선 일본군의 침략에 더 이상 맥없이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도발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던 난징 정부가 전쟁 선포를 비롯한 강경대응으로 맞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국군은 핑한 철도를 따라 중앙군을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북상시켜 쑹저위안의 패잔병 1만여명과 합류했고 여기에 중국 공군까지 합류했다. 차하얼 성에서는 푸쭤이의 7집단군이 동쪽으로 진격했다. 반격의 중심인 탕언보 장군이 지휘하는 13군은 베이핑 서북쪽 난커우까지 진격하여 베이핑을 위협했다. 이에 일본군은 바오딩 공략을 멈추고 811일엔 난커우의 탕언보 군을, 814일엔 장자커우를 공격했다. 탕언보는 일본군의 포위 섬멸 시도에 잘 저항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고 이에 장제스는 류즈, 웨이리황의 병력을 북상시키고 푸쭤이에게 가세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의 대규모 반격이 있기 전에 825일 쥐융관을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돌파했으며 웨이리황, 류즈, 옌시산의 반격도 모두 격퇴했다. 결국 탕언보는 26천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고 겁을 먹은 군벌군들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탕언보는 차하얼 성으로 후퇴했으나 일본군은 차하얼 성까지 추격했고 탕언보 군을 다시 한 번 패주시킨 다음에 827일에 차하얼의 성도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탕언보는 맹렬히 저항했지만 군벌들의 이기적인 적전도주로 인해 결국 측면을 내주어 패퇴해야 했고 중국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2차 상하이 사변

 

 

한편 허베이에 국한되어 있던 전황은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도발을 감행함에 따라 화중으로 확대되었다. 장제스는 80여만 대군을 상하이에 급파하여 일본군의 도발에 맹렬히 맞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지만 결국 전략적인 실수로 인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고 항저우 만의 배후 공격을 용인하면서 패퇴하고 만다.

 

 

일본의 강화 제의

 

 

상하이 사변에서의 판단 미스로 중국군은 모든 전력을 소진해버렸고 난징을 지킬 수단을 상실해 버렸다. 중국 국제연맹 대표 구웨이쥔은 일찍이 830일에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지만 이탈리아의 반대로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가 부결되었고 미국의 반대로 석유 금수조치도 부결되었다. 한편 일본의 목표는 상하이가 아니라 허베이이었고 허베이가 손아귀에 들어오자 고노에 내각은 삼국방공협정 때문에 악화된 소련과의 관계와 히로히토의 조속한 종전 요구를 의식하여 중국에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이는 육군의 반대를 의식한 비밀 회담이었고 여기에 독일이 중재에 나섰다.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일본의 타협안을 장제스에 전달했다.

 

 

1. 내몽골에 자치정부 수립

 

2. 만주국 국경으로부터 텐진, 베이핑 남방까지 비무장 지대 확대.

 

3. 상하이의 비무장 지대 확대.

 

4. 항일정책 중단.

 

5. 일본에 대한 관세 인하.

 

사실상 화북을 그냥 다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화파인 왕징웨이, 허잉친은 말할 것도 없고 강경파였던 바이충시, 구주퉁조차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장제스는 여기서 일본에 굴복한다면 중국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떤 타협도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일본 외상 히로타는 우리의 요구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난징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은 전선을 확대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본국의 명령을 씹고 난징을 향해 몰려들었다.

 

 

난징 함락

 

"모두가 반대하니 당신과 나, 둘 중 하나가 난징을 지켜야하오."

"위원장님을 어찌 이곳에 남게 하겠습니까?"

-난징에서의 군사위원회 회의 도중 탕성즈와 장제스의 대화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자 중국군은 난징을 사수하기 위해 타이후 호를 기점으로 15, 19, 21군으로 구성된 좌익군과 8, 10, 23군으로 구성된 우익군을 조직하여 젝트 라인에 배치했지만 이들은 신병과 패잔병으로 구성되어 사기도 질도 형편없었다. 일본군은 푸산-쑤저우-우장-자싱을 연결하는 중국군 제1방어선에서 중국군 토치카에 막혀 다시 고전해야 했지만 1118일 창수를 점령했고 19일 쑤저우, 자싱을 돌파했다. 타이후 호 북방 방어선이 뚫리면서 1127일 우시, 1128일에 창저우가 함락되었다. 남방 방어선도 뚫려 1124일 후저우, 1130일 안후이 성의 광더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군이 수송수단을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렸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군은 보급문제도 해결할겸 중국인들을 공격해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했다. 1119일 쑤저우에선 35만 쑤저우 시민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장제스는 난징이 위태로워지자 군사위원회와 참모회의를 열었다. 평야지대인 난징을 지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난징은 전략적인 가치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버린다는 것은 국제적인 위신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였고 누군가가 난징을 수비해야했고 이에 후난 군벌이자 군사참의원장인 탕성즈가 난징을 지키겠다고 자진하여 나섰다.

 

하지만 모두가 반대하니 수도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주력부대는 우한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트라우트만 대사를 통해 122일 만약 일본이 중국의 화북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해준다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참모본부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청했지만 고노에 수상과 히로타 외상은 패배자 주제에 조건을 붙이는 것은 주제넘다고 반대했다. 고노에는 강화를 받아들이면 중국과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군부를 질타했다. 군부의 강경파인 타다 하야오 중장조차 '참모본부와 내각의 입장이 바뀌었다. 내각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탕성즈는 난징 교외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난징 성에 병력을 모았는데 성곽은 항공기와 야포를 막기엔 너무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탕성즈는 교량과 배를 모두 없애는 등 배수진을 쳤지만 덕분에 50만에 달하는 난징 시민들의 피난길도 막아버렸다. 126일 일본군이 난징에 도달했다. 일본 해군과 폭격기들이 난징을 강타했고 중국 공군이 맞섰다. 이때 미 해군 함선 파나이 호와 파나이 호를 구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가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여 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국은 영미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미국과 영국 모두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다.

 

일본군은 탕성즈가 배치한 중국군 2개군,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최외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난징을 포위했다. 마쓰이 대장은 1210일 오전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탕성즈는 거부하고 성문을 모두 막았다. 1210일 오후 1시가 되자 4개 사단, 10만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1212일까지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12일 오후에 일본군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을 폭파시키면서 일본군은 난징 시내로 몰려들었다. 일본 언론들은 난징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쳤고 일본 전체가 좋아 날뛰었지만 사실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문을 폭파시킨 데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졌고 중국군은 시내로 철수하면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파견했던 구나사키 지대가 중국군이 양쯔강 너머로 철수할 거점인 푸커우를 함락해 중국군은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오후 8, 탕성즈는 군사위원회에서 후퇴 허가를 받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통신선이 끊어진 관계로 후퇴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탕성즈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탕성즈가 달아났단 소식에 중국군은 동요하여 무너져 내렸다. 1213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오후 4시에 난징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중국군은 무너져 내려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한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실권을 쥐지 못했고 국공내전 중에 공산당에 전향해서 후난성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중에 숙청되어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처럼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난징 대학살

 

이 학살로 최소 수만에서 최대 30만이 넘은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살육되었으며 수 만명의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 이 와중에 욘 라베와 같은 위인들의 분투로 20만명의 중국인들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40년의 일본 제국의 확장

 

공간으로 시간을 벌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앞으로 진군해야만 한다. 항복은 틀림없이 전 국가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장제스

 

한편 화북을 지키던 펑위샹 휘하 40만 대군은 너무 다양한 계파의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훈련도 장비도 부족했다. 한편 일본군의 수는 무려 37만에 달했는데 차하얼 성과 쑤이위안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바오딩을 점령하고 산둥 성을 공격했다. 산둥 성의 성도 지난이 함락되었고 칭다오엔 일본군 육전대가 상륙했다. 군벌 한푸쥐, 쑹저위안, 쑨롄중은 적을 앞에두고 도주했다. 결국 황허 강 이북 전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펑위샹의 6전구가 폐지되었으며 펑위샹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한편 일본군 5사단은 그들답게도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산시 성을 쳤다. 산시 성은 옌시산의 영지였는데 핑싱관 전투에서 옌시산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핑싱관과 신커우전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에 일본군이 대거 산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한푸쥐에게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란 명령을 내렸지만 한푸쥐는 또 달아났다. 결국 산시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옌시산은 남은 영지에 틀어박혀서 일본군과 비밀리에 협상했다.

 

항저우, 지난 등의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함락되자 가장 강경파였던 펑위샹조차 중국이 반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절망했다. 일본은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의 점령지를 모두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쿵샹시는 난징 대학살을 비난하며 일본의 강화 제의를 빙자한 말 같지도 않은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전황이 절망적이었던 터라 왕징웨이 등은 빨리 일본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고 외교부장 왕충후이는 일본에게 협상의사를 전달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굴복만 있을 뿐 타협은 없다면서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비난하고 주중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이에 중국도 대사 쉬스잉을 소환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국민정부의 부정'를 선언했으며 해당 선언은 4일 후에 부정이란 무시가 아니라 '말살을 의미한다. 라는 보충설명까지 달았다. 이것은 곧 국민정부를 붕괴시키고 그 대신 일본의 괴뢰정부를 세워 전쟁을 종식시키는 계획을 꾸몄다. 관동군이 19371114일 베이핑에서 북양 군벌 정권의 전 재정총장 왕커민을 내세워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중지나 방면군은 난징에서 19383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하고 역시 북양 군벌 정부에서 일했던 량훙즈를 수괴로 세웠다. 하지만 일본이 내세운 괴뢰정부의 이름하에 행해진 학정으로 중국인들은 항일의 기치에 더욱 견고히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우한으로 이동한 국방최고회의는 193841일 국방최고위원회를 건설해 전쟁 수행에 집중하게 된다.(이후 19392월에 장제스가 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게 된다.) 또한 중국은 소련, 미국, 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비록 일본군이 엄청난 영토를 점령했지만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긴 해안선은 일본군의 힘으로 단속하긴 너무 길었고 홍콩,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무기들이 수입되어 중국군을 무장시켰다. 양측이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상호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텐진 시는 일본군이 점령했으되 톈진 세관은 중화민국이 관할하면서 텐진의 관세를 충칭으로 송금하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런 점을 이용, 일본군 점령지의 조계지를 이용한 원장 루트를 개설하여 무기를 수입했고 부패한 일본군과 괴뢰 관료들을 매수하였다. 이러한 원장 루트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야 차단되었고 양국은 1941129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는 자살행위를 저질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에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타이얼좡 전투

 

"항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리쭝런

 

허베이 전선이 붕괴된 이후 장제스는 산둥 군벌 한푸쥐를 비롯, 41명의 여단장급 이상 고위 장성들을 체포하여 1938124일 모조리 총살했고 이후로도 부패한 관료와 장군들을 총살시켰고 덕분에 중국군의 규율은 상당히 회복되었다. 이 와중에 중국에게 날아온 승전보는 전국적인 경사가 되었다.

 

산둥 성과 장쑤 성을 관할하는 제 5전구는 광시 군벌 리쭝런 휘하 35만 대군이 수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쓰촨, 허베이 군벌, 장제스 중앙군이 잡다하게 섞여 있었다. 산둥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북의 점령지와 화중의 점령지를 잇기 위해서 교통의 요충지인 쉬저우를 노리고 공세를 취했다. 이에 장제스는 명장 바이충시를 참모장으로 급파하였고 탕언보 휘하의 중앙군을 증원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도록 했다. 원래 일본군 대본영은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도록 방침을 내린 터였지만 대본영의 방침이 칼같이 준수됐다면 애초에 전쟁이 안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지나방면군 제2군 사령관인 니시오 도시조 중장을 비롯한 일본의 호전적인 일선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쉬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쉬저우 방어의 중핵인 타이얼좡의 주민들을 소개한 다음 2집단군, 22집단군과 59군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꾸렸다. 일본군 세야 지대는 80대의 전차를 앞세워 맹공을 퍼부어 중국군 방어선을 꾸렸고 22집단군 산하 122사단은 사단장 왕밍장 이하 전원이 일본군의 공격에 용맹하게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린 현을 점령한 일본군은 타이얼좡 북쪽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일본군 2대대와 야전중포병 1개 대대가 타이얼좡을 공격했다. 이때 타이얼좡에는 무려 중국군 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은 무턱대고 2개 대대로 3개 사단을 공격했고 타이얼좡 성내로 손쉽게 진입했지만 곧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다. 일본군은 급히 1개 대대를 증파했지만 역시 포위되었다. 이에 본대인 세야 지대 소속 5천 명이 일제히 타이얼좡에 진입했다.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중국군도 병력의 삼분의 이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타이얼좡 북쪽의 린이에서는 장쯔중이 지휘하는 59군과 사카모토 슌 소장 휘하의 사카모토 지대가 충돌하던 중이었는데 사카모토 지대는 세야 지대가 포위당했단 소식에 철수했다. 리쭝런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20군을 투입하여 사카모토 지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결국 사카모토 지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이에 중국군은 43일부터 총 반격에 나섰다. 세야 지대는 전멸 직전까지 몰렸고 사령관인 센야 소장은 결국 후퇴를 결심했다. 사카모토 지대도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일본군이 참패한 것이다. 중국군은 일본군 뒤를 맹추격하여 린이 등을 탈환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지레짐작으로 타이얼좡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치다가 뒤늦게 통신 혼선으로 오해가 있었다고 변명해야 하는 등 망신을 당했다. 이 싸움에서 중국군은 일본군 5사단과 10사단의 주력을 분쇄하여 2만명 이상의 피해를 주었고 1만 정의 소총과 77문의 보병포, 전차 40, 대포 50여문을 노획했고 7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선전했다. 일본군이 인정한 피해도 12천에 달했다. 중국군의 피해는 2만명에 달했는데 쑨롄중의 2집단군에 피해가 몰려 있었다.

 

일본군은 타이얼좡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쉬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북지나방면군의 5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 중지나방면군의 3개 사단과 2개 독립지대, 해군 육전대, 임시 항공병단까지 총 20만의 대군이 쉬저우로 몰려들었다. 장제스는 쉬저우를 사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주었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약한 중지나 방면군을 우선적으로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5전구엔 무려 중국군 60만 대군이 집결했다.

 

북지나 방면군의 신임 사령관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중장은 4195사단과 10사단을 지휘해 린이 성을 점령하고 이허 강을 도하하여 맹공을 퍼부었지만 2개 사단 모두 곧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다. 히가시쿠니 중장은 57일에 허겁지겁 16사단을 증원하여 중국군을 밀어냈다. 한편 뒤늦게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대장의 9사단과 13사단이 북상하기 시작했고 북지나 방면군 제1군이 카이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진군이 늦어진 것은 일본군의 열악한 병참 때문이었다. 리쭝런은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보내려 했지만 북지나 방면군 제2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일본군 13사단은 중국군 후방을 맹공하였고 난징에 주둔한 3사단도 북상했다. 푸닝과 루저우가 점령당했고 일본군 14사단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제5전구 전체가 포위섬멸 될 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제스는 즉각 퇴각 명령을 내렸고 리쭝런은 부대를 다섯개로 나눠서 철수했다. 상하이에서 무턱대고 퇴각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장제스는 계획적인 철수 계획을 입안하였고 그 덕분에 주전력의 손실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중국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공을 놓고 싸우느라 밥상을 엎고 말았으며 여기에 중국군의 저항 또한 완강했다.

 

한편 일본군 14사단은 과거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쉐웨가 지휘하는 12개 사단에게 포위당했다. 장제스가 전멸시키라고 독촉했음에도 쉐웨는 일본 16사단의 개입으로 철수해야 했다. 일본 대본영도 이러한 행태는 참을 수 없었는지 1군 사령관 가쓰기 기요시를 해임했다. 어쨌거나 일본군의 대공세는 승리로 이어졌고 519일 쉬저우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주력을 보전하여 퇴각한 후였다. 대본영은 더 이상 중국군을 추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일본군은 어김없이 상부의 명령을 씹었다. 일본군 14사단은 카이펑을 점령하고 정저우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장제스는 황허 강 제방을 폭파시켜 대규모 수공을 가했고 일본군 16사단과 14사단이 휩쓸렸다(하지만 홍수로 1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중국도 뼈아픈 희생을 치러야했다). 쉬저우에서 중국군은 5~6만의 병력을 잃었고 일본군은 43천명을 잃었다. 과거 만주에 주둔한 장쉐량의 수십만 대군이 15천명의 관동군에게 탈탈 털렸던 일이나 상하이에서 80만 대군이 사실상 붕괴되었던 전례를 생각하면 중국군의 발전은 놀라웠다.

 

중국과 급격히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황허 제방 폭파를 두고 게르니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행이라고 비난했다. 그때까지 장제스를 옆에서 보조하던 트라우트만 대사와 팔켄하우젠 고문 등도 본국의 명령으로 모두 철수해야 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을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나치는 떠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팔켄하우젠은 1938627일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석한 연후 홍콩으로 떠났다.

 

나치 독일을 대신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25천만 달러의 원조 자금을 제공했고 바실리 추이코프를 비롯한 군사고문, 2천명의 병력, 3천명의 고문, 900대의 비행기, 82대의 전차, 2000문의 화포, 1만정의 기관총, 5만정의 소총, 2000대의 차량을 제공해주었다. 소련에서 보낸 보급물자들이 도착하는 란저우에는 소련인들이 터질 듯이 넘쳤다.’ 또한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장구펑에서 일본군의 도발을 크게 무찔렀다.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크게 기뻐하여 소련이 일본의 후방을 치길 원했지만 블류헤르는 장구펑을 탈환하진 않았고 스탈린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소일 국경의 총성은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블류헤르는 대숙청 와중에 일본 스파이로 몰려서 극심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으며 장제스는 뒤늦게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된다.

 

우한, 광저우 함락

 

우창, 한양, 한커우 3개 지구로 구성된 우한은 군수 산업과 교통의 요충지로 국민정부는 우한에 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천청을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리쭝런은 허난, 안후이, 후베이를 나누는 270킬로미터 길이의 다볘 산맥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한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었다. 장제스는 우한을 9전구를 편성하고 천청에게 그 자리를 겸하게 했다. 우한을 지키기 위해 120개 사단, 100만 대군이 집결했고 200대의 항공기와 30척의 군함도 동원되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잇달은 전투로 인해 매우 지쳐 있었고 무기도 매우 부족했다. 또한 여러 군벌 부대를 긁어모은 부대라 지휘와 통신에 애로사항이 겹쳐 대규모 작전을 지휘하는데 미숙했다. 이 와중에 히로히토 천황은 우한 공격을 위해 독가스탄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

 

일본은 193841일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고 10개 사단을 추가 편성하여 2개 사단을 관동군에, 8개 사단을 중지나 방면군에 편성했다. 19388월에는 중국에 주둔한 병력이 자그마치 80만에 이르게 되었고 우한 공략을 위해 40만 대군이 동원되었다. 일본은 우한을 함락시키면 중국의 항전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중국군의 포위 섬멸보단 우한 점령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중국의 전투의지를 고려하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일본군이 우한을 공격하는 이유는 중국의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는데 우한을 점령한데도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지 않으면 중국과 계속 싸워야 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간과했다. 각설하고 3사단, 10사단, 13사단, 16사단으로 구성된 일본군 중지나 방면군 제2군의 17만 대군이 쉬저우에서 화이허 강을 도하하여 루저우에 집결했다. 6사단, 9사단, 101사단, 106사단으로 구성된 제11군의 20만 대군은 난징에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북과 동에서 동시에 우한을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11군의 선두인 6사단은 612일 안칭을 점령하고 726일 주장을 점령함으로 우한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중국군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일본 3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격렬히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우한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 공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주장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곳에서도 대규모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다.

 

8월에 접어들자 장제스는 정부 부서들과 민간인 50만명을 충칭으로 소개하였다. 822일 일본 대본영은 대륙명 188호를 통해 우한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중지나 방면군 2군은 갑군과 을군으로 나뉘어 진군하기 시작했다. 갑군은 루안, 광저우를 점령하고 뤄산을 돌파했지만 중국군의 치열한 저항으로 수천명의 피해를 냈으며 1달이나 소요하였다. 일부 연대는 75%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뤄산 뒤의 신양에서도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을군도 리쭝런의 저항에 부딪혀 많은 사상자와 병자를 냈다. 11군은 루산과 마안산의 중국군 방어선에 부딪혀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쉐웨의 반격에 전멸 위기를 겪으면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결국 11군은 수천명을 잃고 마안산 대신에 마터우전을 공격했다. 마터우전은 일주일간의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3함대와 해군육전대까지 동원한 일본군은 광지를 점령하고 톈자전까지 밀고 들어갔다.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내긴 했으나 우한 방어의 중핵을 모두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19381010일에 건국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장제스는 우한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우한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장제스는 우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려 10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시키고 전 전선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1026일 일본군은 한커우와 우창을 점령했고 27일에 한양까지 점령하면서 우한 삼진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일본인들은 치열하게 저항한 중국인들을 오랑우탄이라고 비하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놀랍게도 난징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율을 보여주면서 살육 행위를 자제했다. 약탈은 행해졌지만 대량 강간과 학살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일본군의 상태를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일본군은 113일 명치절을 우한에서 성대하게 기념했고 11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1111일 일본군은 퉁청과 웨저우를 점령함으로 우한 작전을 종료하고 후베이 성을 거의 함락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위해서 6만 명 이상의 전사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1만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이질에 걸려 죽은 일본군만 해도 12천명에 달했다. 중국군의 분투는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했고 우한 함락을 6개월이나 지연했다. 일본군은 대외적으로 선전한 ‘201의 교환비를 자랑하는 수월한 정복에 누를 끼칠까봐 불구가 된 아군 중상자들을 함부로 다뤄서 죽게 방치했다.

 

193811월 장제스는 회의를 열고 드디어 16개월 간의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장제스는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징병령을 내리고 군관과 사병 훈련 계획을 세웠다. 사기진작을 위한 정치교육을 위해 공산당원들도 대거 초빙되었다. 바이충시는 일본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패망한 것처럼 패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장제스는 일찍이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추격하면서 쓰촨, 윈난, 구이저우을 국가재건의 기지로 지목하면서 장기 항전의 중심지로 본 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중심은 상하이, 난징을 비롯한 근대화된 연안 대도시에 있다고 봐서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여겨졌지만 일본이 중국 깊숙이 전진해온 순간 이제는 서남 오지만이 중국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97일부터 중국 남부의 대도시인 광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광저우는 매우 근대화되고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쑨원이 국민당의 기치를 든, 국민당에게 있어 의미가 깊은 도시였고 또한 군수물자의 80%를 수입하는 주요 통로였다. 광저우는 허잉친의 4전구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실질적 지휘관은 광둥 성 주석인 위한머우였다. 군사위원회는 우한과 광저우가 동시에 공격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광저우의 병력을 대거 우한으로 이동하여 광저우엔 11만 명의 수비군만 있었다. 9195사단, 18사단, 104사단, 4항공단으로 구성된 일본군 217만명이 편성되어 광저우로 진격했다. 1012일 일본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으며 바이예스만에 상륙했다. 장제스는 광저우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위한머우는 적전도주했다. 결국 1021일 광저우는 매우 쉽게 함락되었고 1025일에는 후먼 요새도 함락되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광저우가 너무 쉽게 함락되는 통에 위한머우가 일본에게 매수되었단 소문까지 돌았고 영국에선 국민당의 작전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결국 위한머우는 당 주석 자리에서 사임했고 장파쿠이를 신임 광둥 성 주석 겸 4전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어찌되었건 광저우의 함락으로 중국은 매우 뼈아픈 타격을 입었지만 장제스는 즉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를 개설하여 다시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왕징웨이의 배신

 

한편 우한 함락 이후로 국민정부가 붕괴하리라 짐작한 일본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는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국민정부는 건재했으며 각지의 군벌은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1938116'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고 일본과 진정으로 제휴가 가능한 신흥지나정권과 공존할것 '을 천명했고 2일 후에는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ignore)가 아니라 말살을 의미한다.'''라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국제법상 유례가 없는 발언인 이것은 국민당의 내부분열을 시도한 것이며 이것은 왕징웨이의 탈주로 실제로 일어났다.

 

국민당의 초창기 멤버이자 거물인 왕징웨이가 충칭을 떠나 일본에 붙은 것이다. 고노에 내각이 장제스와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이후 왕징웨이는 심복을 홍콩으로 보내 일본과 물밑에서 접촉하고 있었다. 왕징웨이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장제스의 지연전을 중국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는 일본과 협상하여 그들의 선처를 얻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가오중우를 홍콩에 보내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하기 시작했다. 가오중우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주권을 인정한다면 항전을 중지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사를 전달했다. 중일이 양국 대사를 소환한 이후에 중일의 유일한 대화창구는 예문연구회였는데 가오중우는 예문연구회의 수장이었다. 가오중우는 이미 19382월 심복인 둥다오닝을 일본에 보내 일본 수뇌부와 접촉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나쁜 과거를 잊고 정성으로 서로를 대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을 보인 바가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본측이 화평 해결이 조급하다고 평가하고 더 이상의 화평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왕징웨이는 7월 즈음에는 자신의 주화론에서 장제스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왕징웨이에게 전국을 해결하자며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 내각은 712일 중국의 일류 인물을 선별하여 반장제스, 반공산당, 반전을 표방하는 신정부를 건립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8월에 홍콩에서 다시 회담이 열렸고 왕징웨이의 심복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이후 신정부 수립에 대해 처음으로 논의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윈난, 광둥의 반장제스 군벌들이 합류하리라 믿었다. 10월에 이르러선 왕징웨이가 기자들 앞에서 독자적 대일 협상의 가능성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11월 상하이의 중광당회담에서 일본과 왕징웨이는 중일 간의 방공협정, 만주국 승인, 중국 내부 일본인 거주, 영업 허가와 일본 조계, 치외법권 폐지 고려, 화북 5개성의 중일 합작 개발, 일본의 내몽골 주둔, 내몽골 이외 지역의 일본군의 즉각적 철수를 교섭 사항으로 내세웠다. 일본은 기존 괴뢰정부인 베이핑의 임시정부와 상하이 유신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 정부에 합치자고 하였고 왕징웨이의 편에 설 것으로 예상된 윈난, 광둥 군벌군을 일본군이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가 우려한 내정간섭 분야에 있어서 화북, 난징, 상하이, 항저우 지역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키고 고문 파견을 통한 영향력 행사를 명시함으로 중국 침탈을 계속할 것을 드러냈다.

 

허나 왕징웨이는 일본의 뜻을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는 몰라도 1218일 청두로 강의하러 간단 핑계로 부인과 측근들을 데리고 쿤밍으로 떠났으며 19일 하노이로 떠났다. 193911일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국민당 당적을 삭제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며 왕징웨이의 배신과 정부 정책을 멸시한 죄를 물을 것이라 이를 갈았다. 하노이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평화회담을 호소했지만 장제스는 남의사 요원들을 보내 그에게 총알을 퍼붓는 걸로 대답했다. 왕징웨이는 살았으나 그의 비서 부부는 사망했다. 왕징웨이는 일본 화물선에 숨어 상하이에 도착했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와의 중광당 밀약에서 약속한 일본군 철수와 중국 주권 보장에 대해선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왕징웨이는 또 다른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왕징웨이는 주석대리 겸 행정원장, 저우포하이는 부주석 겸 행정원 부원장, 천궁보는 입법원 원장, 량훙즈는 감찰원 원장, 왕커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때 중국의 북방을 지배한 대군벌 우페이푸도 일본의 제안을 받았고 그는 이에 ''일본군이 먼저 철군한다는 전제'를 붙이는 사실상의 거부로 답했다. 이후 그는 얼마 못가 급사했는데 이에 대해서 일본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도 왕징웨이도 왕징웨이 주도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반장제스 군벌들이 대거 왕징웨이에게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파쿠이나 룽윈을 비롯한 반장제스 군벌들은 왕징웨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장제스의 권위만 확인되었다. 장제스는 두웨성을 시켜서 가오중우 등 왕징웨이의 측근 일부를 홍콩으로 망명시킨 다음 왕징웨이와 일본이 체결한 밀약 내용을 폭로하였다. 이에 온 중국이 분노하였고 왕징웨이는 과거의 혁명가에서 역적이자 한간으로 떨어졌다. 그는 1944년 골수암으로 일본에서 사망했고 중국이 승리한 이후 장제스는 그의 무덤을 폭파시켜버렸다.

 

교착화되는 전쟁

 

처음 15개월 간의 전쟁 동안 중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차하얼, 쑤이위안, 허베이, 산둥, 산시, 장쑤, 안후이가 함락되었으며 허난, 후베이, 장시, 광둥에도 일본군이 들어왔다. 중국은 관세수입의 91%, 공업능력의 94%, 전력 생산의 96%, 방직 공업의 75%를 상실했으며 주요 철도, 항만 시설을 잃었고 무기를 수입할 통로와 근대화된 도시들을 거의 다 잃었다. 이전 항목에서 일부 설명한 것처럼 엄청난 인구가 후방에 몰리면서 식량과 조세를 조달하기도 어려워졌다. 전사자는 81만 명에 달한다고 선전되었는데 이는 항일 정신 고취를 위해 과장된 숫자로 실제로는 이것보단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엄청난 손실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의 강경파인 하타 슌로쿠 장군은 중국이 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에 이르렀으니 이젠 무력이 아니라 지략으로 중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일본군이 중국군 포위 섬멸에 실패하면서 장제스는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수백만에 달하는 주력을 온전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권위도 재확립했다. 충칭의 장제스는 무려 82개의 직책을 겸임하여 고고한 철권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반역을 두려워하여 누구에게도 자신의 권력을 나눠주지 않았고 업무 효율성보단 안전을 추구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유격전과 군대 재건이었다.

 

중국의 주력이 보존되긴 하였으나 중국군의 질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피해가 막중했으며 엄청난 양의 장비를 손실했다. 장교들의 25%만이 정규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충성심이 의심되었다. 수많은 군벌들은 장제스에 맞서 반역한 경력이 있었다. 물자 부족으로 군대를 제대로 무장시키도 어려웠고 징집된 청년들 역시 기근으로 인하여 형편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부패는 끊임없이 벌어졌고 힘없는 농민들은 국민당의 신병 사냥에 끌려가야 했다. 장제스는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 열강의 식민지인 하노이와 버마를 통해 무기를 수입했다. 이 중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과하는 하노이 루트가 제일 비중이 컸다.

 

한편 평소에 유격전의 중요성에 대해 눈여겨 보고 있던 장제스는 전체 병력의 삼분의 일을 일본군 점령지 후방에 투입하여 후방을 교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광둥을 담당하는 장파쿠이의 4전구와 장쑤, 산둥을 관할하는 위세중의 노소전구, 허베이와 차하얼을 관할하는 루중린의 기찰 전구가 유격 전구로 지정되어 유격전을 실시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유격전 전술을 눈여겨보고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여 예젠잉을 비롯한 30명의 교관이 유격전을 가르치게 되었다. 공산당 교관들은 19402월 도로 철수하긴 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유격 교관 양성은 계속되었고 장제스는 80만에 달하는 유격부대를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유격 부대의 활약상은 중일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이난 함락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의 일본군은 소수정예를 추구하여 전군이 30만명 수준이었으나 1939년에 이르면 150만으로 폭증해 있었다. 이중 80만명이 넘는 대군이 중국에 있었으며, 그 결과 일본은 엄청난 인력, 장교,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전선이 무지막지하게 넓어지면서 더 이상 공세를 취하기 어려워졌고 진격 속도 역시 둔화되었다. 전비 지출도 실로 막대하여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일본은 당연히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중국의 물자 수입 루트를 차단하기로 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은 영국령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신장의 소련 국경 쪽에서 물자를 수입했는데 이 중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경유하는 하노이 루트의 비중이 제일 컸으며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서 하이난 섬 점령을 논의했다. 하지만 영불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되었으며 중불 국경 전체를 차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는 보류되었다. 하지만 1939119일 일본 해군이 하이난 공략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대륙명 265호가 발령되어 일본군은 하이난 섬을 공략하게 되었다. 하이난 섬에는 62152사단과 비정규군 2개 여단 및 여러 보안대, 자경단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다 합쳐서 2만 명 정도 되었다. 일본은 타이완 혼성여단 3개 연대와 육전대 3개 대대, 해군 5함대를 동원하여 하이난 섬을 공격했다. 2922시부터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다음날 10시 하이커우 항구를 점령하고 충산에 진출함으로 북부 거점을 만들었다. 214일에는 남쪽의 싼야 항구를 점령함으로 남쪽 거점도 완성되었다. 중국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일본군은 1주일 만에 하이난 섬 대부분을 장악했다. 하지만 동부 산악지대에서 공산당 유격대가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몇차례나 소탕 완료를 선언했으나 게릴라들은 중국 본토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항전했고 이에 분노한 일본군은 하이난의 남성의 삼분의 일을 모두 살육하는 잔혹한 작전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하이난을 완전하게 통제하는 것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 작전으로 일본군은 하이난 섬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열강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는 실질적인 손해를 입었기에 3억 프랑의 예산을 들여 인도차이나의 방위를 강화하고 군대를 증파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물자의 제한을 없애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하이저우와 쉬저우를 잇달아 점령하면서 산둥, 장쑤를 거의 장악했고 이로써 중국의 해안을 사실상 봉쇄하는데는 성공했다. 중국의 경제적 손실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국민정부는 미국과 영국에서 차관을 대출해왔으나 그럼에도 수입은 너무 줄었는데 지출은 더욱 늘어난 상황이었다. 장제스는 아편 전매 주식을 홍콩과 마카오에 팔아치웠고 막대한 양의 화폐를 찍어냈다. 덕분에 엄청난 양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충칭의 식료품 가격은 1년 만에 1400%나 폭등했다. 중국의 후방은 경제위기, 부정부패와 매점매석으로 가히 썩어들어가는 지경이었다.

 

 

짜오양과 창사의 승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기 어려워진 반면에 공산당과 국민당 유격대의 항전으로 인해 점령지 내부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군은 100만에 육박했지만 거대한 중국의 영토에 비하면 그것도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이에 일본군은 치안 유지를 우선순위로 삼고 점령지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본영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도 일본군 현지 사령관들이 그걸 무시하는 상황은 일본군 항목을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일본군 현지 사령관들은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명예욕을 바탕으로 무리하게 확장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우한에 주둔한 일본군 11군이었다. 일본군 11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중장은 중국군에게 세 방향으로 포위된데다 중국 공군의 공습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본군이 다 그렇듯이 허약한 지나군을 얕잡아보고 측면의 위협을 제거한단 구실로 공세를 결정했다. 첫번째 목표는 난창이었다.

 

난창은 3전구와 9전구 경계의 요충지로 6개월 전 일본군 106사단이 무리하게 점령하려 했다가 쉐웨의 중국군 제 1병단의 역습으로 개발살나서 패퇴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106사단의 패배를 잊지 않았고 이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9392611군 산하 6사단, 101사단, 106사단과 전차 1개 대대, 1개 포병 여단, 2개 포병연대, 해군 육전대 1개 대대 12만 명을 동원하여 난창을 쳤다. 일본군은 130대의 전차와 장갑차, 250문의 야포를 비롯한 막대한 양의 중화기를 준비한 상태였는데 일본군이 이렇게 중화기를 잘 준비한 경우은 일본군 전사를 통틀어서 드문 일이었다. 난창은 쉐웨의 9전구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39개 사단,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다. 수적으론 중국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역시 화력, 개인장비, 숙련도에서 일본군에 많이 열세였다. 장제스는 처음에는 기존처럼 난창에서 일본군에게 손실을 강요한 다음에 난창을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동안 중국군이 수비에만 전념했으니 만약 역습을 가한다면 전혀 예상치못한 일본군이 붕괴할 것이란 예측을 하고 쉐웨에게 반격을 가하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명령이 너무 늦게 내려진 관계로 일본군의 공세가 먼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난창에 도달했고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을 돌파하고 327일 난창을 점령했다. 작전 개시 1주일 만이었다. 일본군은 끝이라고 시작했으나 실은 시작이었다.

 

장제스는 4163전구와 9전구에 난창을 탈환할 것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국지적인 공세로 일본군의 증원군의 발길을 붙잡고 난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일본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본군은 위기에 몰렸고 421일 중국군은 난창에 진입했다. 결국 당황한 일본군은 독가스를 마구잡이로 살포하면서 발악하여 중국군에 큰 피해를 강요했다. 59일 장제스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중국군은 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희생자도 24천에 달했고 전투의 승리도 전적에 독가스에 의지한 것이었다. 중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1939년을 기해 중국군의 치열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총 18천회에 달하는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정면에선 중국군 주력 대부대를, 후방에선 유격대를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 11군은 리쭝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5전구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우한 탈환을 도모하며 일본군 병참선을 위협했는데 일본군 입장에서 그들이 거슬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일본군 11군 사령관 야마다 중장은 51일 짜오양의 중국군 5전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13천명을 동원했다. 리쭝런의 군세는 25만명이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공세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쑨렌중의 2집단군의 일부를 떼어 5전구에 보내주었고 리쭝런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을 유인하여 협공을 통해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장쯔중의 33집단군과 77군을 격파하고 57일 짜오양을 순조롭게 점령했다. 그들은 5전구의 주력인 11집단군과 31집단군을 포위섬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중일전쟁 전역에 걸친 공통적 문제이지만 이것이 엄청난 패착이 되었다. 중국 영역 깊숙이 들어온 일본군은 당연히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병참에도 애로사항이 많았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이 멈추었단 소식을 듣고 59일 공격 명령을 하달하고 2집단군 병력을 더 증원해주었다.

 

512일 중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구멍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퇴각을 시작했지만, 일본군은 전멸 직전까지 몰렸지만 폭격기와 독가스를 투입하여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중국군은 28천명을 잃었는데 일본군의 손실도 21천명에 달했다. 중국군은 520일까지 일본군을 모두 몰아내었고 곳곳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독가스 살포를 통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무엇보다 참담한 패배를 겪고 말았다. 중국에선 이 전투를 웨베이 대첩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난창에서 물러난 쉐웨의 9전구는 주력 부대를 후난성으로 물려 창사를 지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9전구에도 적절한 지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제스는 궁극적으로 난창과 우한을 다시 탈환하려고 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 11군은 후난 성을 먹기 위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후난 성 장악을 위한 포석으로 일본군은 후베이 성 남부의 중국군을 몰아낸 다음에 창사 북쪽 80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다. 일본군 11군은 예의 우한의 안전을 확보한단 명목으로 창사 공략 및 9전구 섬멸을 건의하였고 대본영은 이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11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공상 작전을 수립하여 4개 사단,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창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장제스는 50개 사단, 30만 명을 보유한 쉐웨에게 역시 일본군을 유인한 다음에 공세할 것을 지시했다. 쉐웨는 3개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에 가축과 식량을 소개하고 도로를 파괴하는 등 청야작전을 펼쳤다.

 

917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해둔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안겨다주었고 진격은 순조롭지 못했다. 가오안, 상가오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일본군은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이 직접 지휘한 신챵허 강 도하 작전도 2차례나 실패했다. 결국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나서야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서도 일본군은 중국군의 콘크리트 기지와 기관총 진지의 공격에 발이 묶였다. 매복한 중국군도 후방에서 일본군을 습격했다. 거기에 더운 날씨와 풍토병이 일본군을 괴롭혔다. 미뤄 강 쪽의 공격에서도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식량과 탄환이 바닥났으며 중국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은 101일 불리한 전황을 인정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역시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850명밖에 안되며 중국군 44천명을 사살했다는 되지도 않는 거짓으로 날조된 선전을 했다. 중국군은 자신들이 일본군 3만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했다. 양쪽 모두 터무니없는 과장이 섞인 결과였지만 어쨌거나 일본군의 공세는 참담하게 실패했고 장제스는 쉐웨를 직접 치하했다.

 

하지만 창사 전투에서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난 성 당국은 창사 밖 30킬로미터 밖에 일본군 기병대가 나타났단 소식에 쌓아둔 인화성 물질에 불을 지를 것을 지시했는데 이 때문에 창사 전체가 닷새동안 불타올랐고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격노한 장제스는 창사로 달려가 창사 수비대장, 경찰국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을 모조리 총살했다.

 

한편 장제스는 특무조직 군사위원회조통계국(BIS) 다이리에게 한간들을 처단할 것을 지시했다. 다이리는 전쟁 이전부터 비밀경찰의 수장이었고 천씨 형제들과 장제스의 총애를 다투던 장제스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시안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이리는 시안으로 달려가서 장제스에게 자신의 충성이 굳건함을 맹세함으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았고 의심 많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제스였건만 다이리 만큼은 그의 앞에서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다. 다이리는 남의사를 자신의 군통 조직에 흡수하여 테러 임무를 수행했다. 다이리는 장제스에게 소금 전매권과 매달 50만 위안의 자금을 받아 청방과 연합하여 상하이 등지에서 친일파들을 암살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41년까지 150명 이상이 처형당했다 한다. 전 상하이 시장 푸샤오안은 실은 다이리가 잠입시킨 첩자였던 요리사의 칼에 찔려 죽었고 왕징웨이 정부의 외교부장, 비서장 등 여러 거물들이 척살되었다. 일본에 협조한 청방 우두머리 장샤오린도 참혹하게 죽었다. 왕징웨이는 최대의 표적으로 수없는 폭탄, 총탄, 독극물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왕징웨이 정부 관료 75명이 한꺼번에 폭사되기도 했다. 이에 친일 경찰들도 끄나풀들을 풀어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중국인들을 죽이는 등 잔혹하게 보복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로는 색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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