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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문화

윤두서의《자화상(自畵像)》

작성자김인선|작성시간14.02.08|조회수556 목록 댓글 0

 

윤두서의《자화상(自畵像)》

 

 

 

 미완성의 걸작 초상화

 

여기 마흔을 넘긴 한 남자의 초상화가 있다. 그것도 자기 얼굴을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공제(恭齋) 윤두서(尹斗緖) 이분의 눈매는 상당히 매서워 첫인상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또 활활 타오르는 듯한 수염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보는 이를 압도한다. 또 활활 타오르는 듯 한 수염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기(氣)를 발산하는 듯하다. 그렇게 작품을 계속 바라보노라면 점차 으스스한 느낌이 들고 결국은 어느 순간 섬칫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무인(武人)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용력이 남달랐으며 일찍이 출중한 무예를 갖추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던 냉엄한 성품의 장군이었는지도 모른다. 첫인상은 이렇게 보는 이의 기억 속에 강렬한 에너지의 낙익을 찍어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천만 가지 상념의 뿌리가 된다. 그러나 첫인상은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경우도 많다. 인상이 반드시 그 인물로부터 나오고 또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입은 옷이며 그를 둘러싼 주위 배경이라든가 그 장소가 독특했던 빛의 흐름 등등 여러 가지 외적 요소가 거기에 더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자화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런 선입관이나 편견을 갖지 않고서 말이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좌우대칭의 정면상은 입체감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 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옥에 갇혀 칼을 쓴 인물처럼 머리만 따로 허공에 들려 있는 듯하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려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며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이 작품에 대해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도대체 작품 속의 인물이 윤두서라는 사실은 누가 어떻게 확인한 것인가? 화면상에는 이분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글씨가 한 자도 없다. 윤두서에게는 아들 윤덕히(尹德熙), 손자 윤용(尹榕) 등 그림을 잘 그렸던 자손들이 있었다. 만약 현 작품이 다만 후손들의 입을 통해서만 공재 초상이라고 전해져 내려왔다면 그 전문은 혹시라도 무정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작품에는 가로접힌 금이 같은 간격으로 열일곱 줄이나 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종이를 둘둘 말아둔 상태에서 그대로 납작하게 눌려서 생긴 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론 족자로 표구되지도 않았다. 갑자기 작업이 중단된 채 오랜 동안 여러 종이 뭉치 속에 섞여 있다가 뒤늦게야 후손들이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의 의문점들은 먼저 《자화상》을 꼼꼼히 살펴보고, 또 옛분들이 남긴 윤두서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대조해봄으로써 풀어 나갈 수 있다. 먼저 윤두서와 절친했던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라는 분의 글. 「윤두서가 그린 작은 자화상에 붙이는 찬문(尹孝彦自寫小眞贊)」을 살펴보기로 한다. 효언(孝彦)은 윤두서의 자이다.

 

여섯 자도 되지 않는 몸으로 온 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지녔구나! 긴수염이 나부끼고 안색은 윤택하니, 보는 사람들은 그가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는 역시 홀로 행실을 가다듬은 군자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찬문에 묘사된 인물의 생김생김은 분명 《자화상》 속의 그것과 같다. 그런데 글에서는 ‘홀로 행실을 가다듬는 군자’로서 ‘진실하게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를 보인다고 설명된 윤두서의 《자화상》이 어째서 첫인상이 무섭기까지 하다는 말인가? 일찍이 감식안이 높았던 고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은 윤두서 《자화상》을 처음 대했을 때의 인상을 회고하여 거의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앞서 말한 이 그림의 비정상적인 구도와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생략으로 인한 감상이었다. 그 때문에 《자화상》은 그 놀라운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묘사가 사실적인 만큼 더 욱더, 몽환(夢幻)중에 떠오른 영상처럼 섬짓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작품에서 보이는 충격적인 회화 효과는 결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윤리도덕과 거기에 근거한 당시의 미감(美感)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효경(孝經)』의 첫머리에서 “신체는 터럭과 피부까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고 상하게 할 수 없다. 이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그리고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까지 이름을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할 것이니, 이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고 하였다. 그러므로 귀를 떼어내고 신체를 생략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앞에서 《자화상》의 현상이 작가가 의도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히 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의심을 품고 있던 1995년 가을, 국립박물관에서 개최 예정인 ‘단원 김홍도전’ 전시를 준비하면서 백방으로 관련 자료를 찾던 바쁜 와중에 전연 뜻밖에도 58전 전 윤두서 《자화상》의 옛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책의 제3집 속에 들어 있었다. 옛 사진 속의 윤두서의 모습은 지금 작품과는 크게 달랐다. 그의 몸부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현상태에서 몸 없이 얼굴만 따로 떠있는, 거의 충격적이라 부를 만큼 지나치게 강하기만 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자화상》 속 윤두서의 인상이 원래는 어질어 보이는 얼굴에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띠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선비다. 조선 선비라면 어디까지나 원만하게 중용의 미감을 지켜 나가야 그 학문인 성리학의 정신과 걸맞는다. 윤두서는 옛 사진 속에서 도포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정돈된 옷주름 선은 완만한 굴곡을 갖는 고르고 기품 있는 선으로 이루어졌다. 넓은 깃에 깨끗한 동정을 달았으므로 딱딱한 동정과 부드러운 천 사이에는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 동정과 깃의 턱이 진 이중 구조는 인물을 포근하게 감싸 안 듯이 얼굴을 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아래 좌우 구석에는 주인공이 편안한 자세로 앉았을 때 생기는 자잘한 주름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안면에서 배어나는 인자함이었다. 너무나도 따뜻해 보이는 감성적인 얼굴과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원래 있었던 윤두서 《자화상》 사진 속의 상반신 윤곽선이 그 후 어떻게 해서 감쪽같이 없어졌을까? 비밀은 몸 부분의 유탄(柳炭)으로 그려진 데에 있었다. 유탄이라 요즘의 스케치 연필에 해당하는 것으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가는 숯이다. 이것은 화면에 달라붙는 점착력이 약해서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데생하다가 수정하기에 편리하므로 통상 밑그림을 잡을 때 사용한다. 그런데 자화상의 경우, 중요 부분인 얼굴부터 먹선을 올려 정착시키고 몸체는 우선 유탄으로만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그 몸에 미처 먹선을 올리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 상태로 전해오다가 언젠가 그 부분이 지워져버린 것이다.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아예 지워버리게 된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옛 사진에서는 두드러져 보이는 종이바탕의 꺾여진 자국이 현상태에서는 부드럽게 눅여져 있다. 그렇게 문지르는 동안 원작품이 가졌던 풍부한 질감, 특히 안면의 부드러운 질감이 희생되고 뼈대가 되는 선적인 요소만 남게 된 것이다.

 

이제 지금껏 조선 초상화의 최고 걸작이며 파격적인 구도를 가진 완성작이라고 생각되어온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귀가 없었던 것이다. 또 완벽하게 마무리된 수염에 반하여 눈동자 선이 너무 진하고 약간 생경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작임이 드러났다고 해서 실망할 것은 없다. 작품의 예술성도 미완성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완벽하다.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노예상》을 조각하면서 미처 다 쪼아내지 못한 대리석 조각을 남겼다. 그런데 이 미완성작은 오히려 드물게 보는 걸작이라고 평가된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라는 작품 재질과 그로부터 영혼이 깃듯 형상을 이끌어내려는 작가 의식 사이에 말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자화상》 또한 미완성작 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마지막 손질이 더해지지 않은, 작가 자신에 대한 심오한 상념이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생생한 자기 성찰의 혼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나 윤두서는 어쩌면 똑같이 미완성작 속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전성을 감지하고서 그 이상의 작업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슬픔이 빚어낸 따뜻한 시선

 

이제 《자화상》에 대한 그릇된 첫 인상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작가의 원래 의도를 따라 작품을 감상할 차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재 윤두서라는 한 선비의 삶과 정신세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화상》은 윤두서의 외형이 아닌 정신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옛 그림에서 초상화를 그린다는 말을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한다. 그 대상의 ‘정신을 전하기’ 위해서 인물을 ‘그대로 베껴 그린다’는 뜻이다. 윤두서의 삶을 관통해온 정신은 그의 호(號) 공재(恭齋)의 뜻 속에 담겨 있다. 자사(子思)는 『중용(中庸)』의 말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군자가 공(恭)을 도탑게 하면 천하가 평온하게 된다(君子篤恭而天下平)”고. “그러므로 이른바 공이란 것은 바로 군자가 시작과 마침을 이루고, 위와 아래에 두루 통하는 도인 것이다(然則所謂恭者 乃君子成始成終 衛上衛下之道也).” 즉 공(恭)이란 바로 ‘군자의 길’이고 공재(恭齋)는 ‘군자의 길을 닦는 공부방’이라는 뜻이다.

 

윤두서는 국문학사상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자로서 해남(海南)의 고산고택(孤山古宅)을 이어가던 윤씨 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일설에 의하면 다산의 실학(實學)은 그 연원이 외할아버지의 윤두서를 거쳐서 그 증조부인 윤선도의 박학다문(博學多聞) 경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한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그의 학문이 얼마나 폭 넓은 것이었던가는 유명한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윤두서를 그리워하며 “이제 공께서 돌아가시니 친구를 사귀는 길이 외롭게 되었고, 그를 좇아 미처 듣지 못했던 새 지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公沒而友道孤矣 無從而聞所未聞矣)”고 한탄한 글에서 실감할 수 있다. 이하 윤덕희가 쓴 윤두서 「행장(行狀)」에서 그의 삶과 인간됨을 간추려 본다.

   

공재 윤두서 공(公)은 십오 세에 결혼하였는데 키가 훤칠하고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다.‥‥ 노복을 부릴 적에 위엄으로 하지 않고 덕스런 얼굴로 대하니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정축년(1697년. 서른 살)에 친아버지를 뵙기 위하여 남쪽 고향(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양어머니께서 시골 장원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고 명하셨다. 공께서 남으로 내려와서 부채 기록을 보니 그 액수가 퍽 많아서 그저 수천 냥 정도가 아니었으며, 그 빚을 진 사람들은 궁핍한 이가 많아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다. 공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 문서를 가져다가 태워버렸다.‥‥

 

학문에 있어서는 경전은 물론이고 군사 관계까지 미쳐서 세상에 전하는 병법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셨으며‥‥ 일찍이 「정의」라는 글 한 편을 지어 장수의 도리를 갖추어 논하기도 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공께서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셨지만 때때로 글 짓고 쓰는 틈틈이 뜻 닿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셨다. 다만 사물의 닮은 점만 위주로 하지 않았으므로 정신과 뜻의 나타남이 완연히 살아 움직이며 드넓고 고상한 운치가 있었다. 오래 공부한 저력이 아니고는 이르지 못할 점이었다.‥‥ 혹 남이 다 아는 선대로부터 혐의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정말 그 사람 자신이 사귈 만하면 툭 터놓고 한계를 넘어 매우 친하고 격의 없게 니냈다.‥‥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받은 재산이 풍족하여 사람들은 벼슬만 없지 제후가 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일찍이 조금도 손대어 불리려 하지 않은 데다가 자식과 조카들이 점차 많아져서 쓰임새가 점차 넓어지게 되었다. 또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남의 급하고 곤궁한 사정을 두루 돌보았는데 마치 필요한 때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 하였다. 친지 가운데 가난한 이가 추위 속에 옷이 없는 것을 보면 비록 자신이 입고 있던 새옷이라도 벗어주어 곤란 중에 내버려두지 않았으니, 그 때문에 재물과 곡식이 부족하여 매번 걱정되었지만 공은 태연자약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심하게 가리는 당파색(黨派色)에 대해서 공은 홀로 마음에 맞고 안 맞음을 두지 않았으며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말도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으셨다.‥‥ 하인들 가운데 비록 가장 어리고 또 천한 종이라 하더라도 이놈 저놈 하고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이름을 부르셨다. 혹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또한 경망스레 큰소리로 꾸짖지 않고 한마디 말로써 가르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형벌보다 엄하였다.‥‥ 용모와 말씨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이 중후하고 존엄해서 자연히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이 일게 하였다.‥‥

 

공은 삼십여 세에 벌써 머리에 백발이 보였다.‥‥ 을미년(1715년) 겨울에 우연히 감기를 앓다가 마침내 그 해 11월 26일 백련동의 옛집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48세였다.

 

윤두서가 삼십여 세에 벌써 백발이 나타났다는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낳은 지 이레 만에 큰집에 입양되었는데, 종손인 까닭에 재산은 풍족했으나 그 삶에는 남달리 슬픔이 많았다. 우선 15세에 혼인했으나 22세에 부인이 2남 1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27세에 양아버지가 죽고, 29세에는 셋째형이 당쟁에 휘말려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30세에는 큰형이 모함을 맏을 때 연루되어 고생하였고 그 후로 벼슬의 뜻을 아예 버렸다. 32세에 친아버지가 죽고 37세에 친어머니가 죽고 39세에는 절친한 벗 이잠(李潛)이 흉서(凶書)를 올렸다 해서 맞아 죽었다. 43세에는 또 다른 마음의 벗 심득경(沈得經)이 죽고 45세에 양어머니가 죽었다. 그래서 46세(1713년)에 서울을 버리고 아주 해남으로 내려왔더니 이듬해에는 맏형이 죽었다. 결국 윤두서 자신도 바로 그 다음해에 48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2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양부모, 생부모를 제외하고도 다섯 번씩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초상을 당한 아픔이 명을 재촉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윤두서의 아픔은 《자화상》 속에서 눈시울의 붉은 기운과 눈가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엿볼 수 있다.

  

「행장」에서 윤두서의 “용모와 말씨가 중후하고 존엄했다”고 하는 내용은 《자화상》에서 보는 인상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는 엄숙한 외모와는 달리 마음속 깊이 하층민에 대한 여리고 따뜻한 시선을 간직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하많은 슬픔을 겪었던 까닭에 남들의 아픔도 쉽게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윤두서 「행장」을 아들이 지었다 해서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의 인품은 아직까지 전하는 윤두서의 회화 작품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그의 「나물 캐는 아낙네」나 「밭 가는 농부」, 혹은 「짚신 삼는 사람」 같은 그림은 모두 하층민의 일상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현존작으로 판단하는 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민풍속화이다. 공재 윤두서는 그 따뜻한 가슴으로 조선 회화상의 새로운 분야 또한 개척했던 것이다.

 

 

 자신에 대한 성실한 산물 《자화상》

거울 속의 한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눈빛은 전혀 나를 보고 있지 않다. 그는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나는 이를테면 그림 속의 윤두서와 그것을 그리는 또 하나으 윤도서, 그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나는 용케 두 사람의 내밀한 대화 사이로 숨어들어 몰래 엿보기는 하지만 끝끝내 두 사람간의 침묵의 대화 속에 끼여들 수가 없다. 그려진 윤두서의 고요함 속으로도, 그린 윤두서의 강한 의지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윤두서가 나지막히 윤두서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누구인가, 네가 나인가, 너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윤두서는 관모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그저 망건을 단단히 조여맨 위로 탕건을 꾹 눌러 썼을 뿐이다. 하지만 몸이 지워진 현상에서도 관자놀이 위쪽 살이 눌려 있는 점에서 윤두서의 단정한 옷매무새가 짐작된다. 망건과 탕건은 의관의 일부일 뿐 윤두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윤두서는 그것들을 아주 소략한 필치로 북북 그어놓았다.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흑백이 분명하고 광채가 나며 혼이 살아 있고 위엄에 찬 눈이다. 그것은 생명력이다. 그러나 똑같은 눈이 어딘가 축축히 젖은 듯하고 붉은 기운이 배어 있어 마치 슬프고 아픈 사람의 그것과도 같다. 특히 눈 아래 와잠(臥蠶) 부분은 지난 세월의 무게로 약간 처져 있다. 그리고 눈 둘레는 거슴츠레한 피곤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진실함이다.

 

윤두서의 눈빛은 고요하다. 안면의 어느 부분보다도 짙은 먹선으로 그려졌고 날카롭게 치켜진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침착하기 그지 없다. 그것은 평생을 공(恭)과 경(敬)으로 일관한 삶의 정신이 절로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눈꼬리 쪽에 두세 줄씩 잡혀 있는 자잘한 눈주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두서는 허망한 세월 속에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끝없는 초상치레로 이어졌던 세월은 늘어진 볼 위에도 슬쩍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곱게 진 쌍꺼풀이 이채롭다. 그것은 중간쯤에서 풀려나와 눈썹과 평생선을 그렀다. 눈썹은 씩씩하게 치켜 올라간 검미(劍眉)다. 용맹스런 무사의 그것과 같은 곧은 눈썹은 끝으로 갈수록 흐려지고 넓어진다. 강인하면서도 중후한 인상이다.

 

윤두서의 수염은 마치 관우와 장비의 수염을 합쳐놓은 것 같다. 관우처럼 기품 있는 턱수염이 길게 가슴을 덮었고, 장비처럼 풍성한 구레나룻이 얼굴의 옆으로 뻗쳐 있다. 특히 뺨 위쪽으로 드날리는 수염은 마치 불길처럼 솟구쳐서 얼굴의 생명력을 북돋워준다. 수염은 한 올 한 올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것은 펜으로 그린 양 분명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굽이치는데 특히 그 끝이 예리하게 살아 있다. 그리고 굵기와 강도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입술을 덮은 필자 콧수염이 구레나룻이나 턱수염보다 더 뻣뻣하고 억세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가지런히 다문 입술은 의지적인 면모와 인자한 성품을 함께 보여준다. 두툼한 입술은 수염에 가려져 실제 보다 작아보이지만 그 끝에는 미소가 어린 듯도 하다.

 

작품 속의 윤두서는 실제 얼굴보다 약간 작지만 거의 실물 크기에 가깝게 그려졌다. 그리고 극사실의 묘사로 터럭 한 올도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윤두서 자신을 보여준다. 《자화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의 산물이다. “이른바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 삼간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故君子必慎其獨也”는 『대학(大學)』 제6장의 말씀이 그대로 《자화상》이 된 것이다. 윤두서의 콧구멍을 보면 코털 서너 올까지 숨김 없이 묘파(描破)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을 향한 인내심 강한 관찰과 냉엄한 성찰은 끝까지 관철된다. 그러나 윤두서의 속마음의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마치 화면상에 광선이 가득하지만 특정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그것은 제삼자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눈 둘레에 동그라미 모양의 불그레하게 눌린 자국이 보인다. 이것은 안경자국이다. 이 자국은 흔히 노인들의 눈둘레가 움푹 패여 만들어진 그림자와는 다르다. 아직은 중연이고 비교적 살집이 좋은 윤두서의 얼굴이 갑자기 눈부분만 패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경자국이 눈 위쪽에도 보이는 것은 어째서인가? 윤두서 당시의 안경은 테가 없이 끈으로 당겨 귀에 거는 실다리 안경이었다. 그러므로 꺾기다리 안경과는 달리 눈에 꼭 밀착되도록 착용했던 것이다. 또 노인의 파인 눈은 코와 눈썹 쪽의 골이 더 깊게 마련인데, 오히려 바깥으로 귀 쪽의 자국이 두드러진 것도 안경 끝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사망하던 해에 쓴 편지 속에는 나빠진 시력을 한탄하는 내용이 보인다.

대개 서울에 있을 적부터 이 일을 포기 한 지 벌써 오래 되었는데 남쪽을 돌아온 후로는 더욱 적막하게 지내면서 눈의 시력 또한 흐리고 뿌예졌습니다. 글 짓고 쓰는 일 모두가 너무나 허술해진 지경에 하물며 그리는 일이야 어찌 생각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애써 화첩을 보내셨으나 부끄러워 탄식만 깊이 할 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옛 선비들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이 글 읽고 쓰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안경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난 공석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공석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경건한 뜻에서 그리는 자화상에서 안경은 이차적인 부가물이므로 마땅히 제거됐을 것이다. 본격적인 조선 초상화 속의 인물이 안경을 착용한 채로 그려진 예는 필자가 아는 한 오직 구한말의 황현(黃玹, 1855~1910)초상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조선 초상화의 정신은 ‘터럭 한 올이라고 다르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 一毫不似 便是他’는 사실주의였다. 그러므로 안경 자국은 물론 마마 자국이나 노인의 검버섯 같이 흉한 것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우리 옛 그림의 전통이었다. 이것은 이웃 중죽의 미화된 초상화이나 일본의 간략하게 추상화된 초상과 현격히 구분되는 우리 옛 초상화으 특색이다.

 

또 이긍익(李肯翊, 1796~1806)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윤두서는 “인물과 동물, 식물을 그릴 적이면 반드시 하루 종일 뚫어져라 관찰해서 그 참모습을 그대로 얻은 후에야 마쳤다(凡畵人物動稙 必終日注目 得其진眞形而後己)”고 적었다. 윤두서의 외손자였던 정약용 역시 “윤두서의 손자 윤용은 일찍이 호랑나비와 잠자리 등속을 잡아다가 그 수염이며 분가루 같은 미세한 것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여 형태를 묘사했으며 기어이 실물과 꼭 닮게 된 후에야 끝마쳤다.(尹公嘗取 ○蝶蜻蛉之屬) 細視基髮毛澤之媺 而描基形 期於肖而後己“고 전하였다. 이상은 《자화상》에 보이는 집요한 사실정신(寫實淨神)이 윤두서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수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기실 사실정신은 이시기 회화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의 경향성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최순우 선생은 “이러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한 점의 작품이 한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고 지적하였다.

 

옛 그림은 옛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므로 어떤 이는 《자화상》을 관상학적인 견지에서 살펴보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이를 테면 전체 얼굴이 원만형이고 귀 양쪽 명문이 넓기 때문에 온화하고 이성적이라든지 눈썹과 눈 사이의 전택궁이 넓은 편이어서 위엄이 있다든지, 심지어 인중이 짧은 편이므로 단명하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두서으 아들 덕히는 부친 윤두서 공께서는“운명이나 관상 등을 단지 묻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집에 담지도 않으셨다.(如談命設相之類 非惟不之問 亦未嘗及於言議)”고 「행장」에 밝혀 적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석은 고인에 대한 실례가 될 뿐 적절한 해석의 길은 아니라 생각된다.

 

《자화상》의 예술성은 회화의 가장 중요한 표현 수법 가운데 하나인 '대조(對照, Contrast)'를 고차원적으로 활용한 데에 있다. 얼굴은 여기서 코를 중심으로 보면 치올라간 눈과 예리함과 아래로 팔자처럼 펼쳐진 점잖은 콧수염이 대조를 이루며 화면에 활력을 불러넣는다. 그 위쪽이 사내답고 날카롭고 이성정인 성격을 보여준다면, 아래쪽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감성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또 탕건의 거칠고 단순한 처리와 수염의 섬세하게 유동하는 표현동 mr적인 대조를 이룬다. 나아가서 작품을 보는 이가 받는 인상 또한 첫눈에는 무섭다 강렬한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인자하고 부드러우며 고요한 느낌을 갖게 되는 모순된 것이다.

 

그러한 상호 대립적인 요소의 병존은 어쩌면 윤두서라는 분이 선비의 학문과 무인의 기량을 함께 추구했던 문무일치 정신이 발현된 까닭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윤두서와 절친했던 이잠, 이서, 이익 삼형세 가운데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조선 고유 서풍(書風)의 창시자로도 유명했던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는 윤두서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오호라! 하늘이 이 세상을 편안케 하고 싶지 않으셨는가? 공을 빼앗아 감히 어찌 이다지 빠른가? 하늘은 이미 공에게 재상의 국량을 주고, 또 적을 방비할 장수의 재주를 주지 않으셨던가 ‥‥ 따뜻한 심지를 가졌던 박학한 선비 윤두서의 삶은 《자화상》처럼 미완성이었다. 또한 그것은 훌륭하고 기대할 만한 것이었던 만큼 정년 그의 죽음은 안타깝고 비장한 것이었다.

     

풍속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한 사람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조선시대 회화에 나오는 인물은 선비와 신선, 아니면 미인정도였다. 그런데 윤두서에 이르러 처음으로 나물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 등 서민들이 선비나 신선을 대신하여 당당히 인물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윤두서의 그림에서는 산수화 배경을 그대로 두고 단지 인물만 서민으로 바꾸어 넣은 탓에 김홍도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나 웃음이 나오는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그런 공재의 그림에서 미약하지만 표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이 그림이다. 짧은 바지에 웃통을 벗어버린 석공의 앙다문 표정이 정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망치를 든 석공의 힘찬 모습과는 반대로 정을 잡고 있는 사람은, 채가 휘어질 정도로 무거운 망치가 정에 꽂히는 순간 튀어오를 돌 조각에 신경이 쓰이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역시 석공의 표정과 맞물리는 실감나는 표현이다.

 

앉은 사람의 발쪽을 자세히 보자. 바위의 둥근면을 따라 나란히 둥글게 파인 구멍들이 보이고 있다. 바위에 끝이 뾰족한 쇠를 대고 망치로 두드리면 그림에서 보이는 것 같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에 나무 심을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불어서 그 불어나는 힘에 의해 바위에 금이 가서 깨진다. 우리 조상들은 고인돌을 만들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커다란 바위를 깨뜨려 사용했다. 바위 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거기에 인위적인 구멍을 내고 - 같은 돌이라도 단단함의 강도에 따라 쓰이는 용도가 달랐을 터 - 이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 물로 불려 떼어내는 방법이나 겨울철에 물을 부어 얼린 다음 그 부피가 팽창하면서 밀어내는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두 사람은 무엇에 쓰려고 저리도 힘을 쓰며 돌을 깨어내고 있는 것일까?

 

 

 윤두서 자화상 수수께끼 풀렸다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18세기초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국보 240호·해남 윤씨 종가 소장)은 그림을 둘러싼 숱한 수수께끼로도 이름높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안면의 핍진한 묘사가 압권인 이 절세의 초상화는 목과 상체는 물론 귀도 없이 머리통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뛰어난 사대부 지식인이던 공재가 당대 유교적 미의식을 정면으로 벗어나면서까지 엽기적 자화상을 그린 까닭은 무엇일가. 왜 이 걸작은 미완성 그림처럼 남았을까.

 

 한국 미술사학계의 첨예한 논란거리였던 공재의 ‘머리통 자화상’에 얽힌 비밀이 최근 상당부분 풀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지금도 두 귀와 목과 상체의 윤곽이 뚜렷하게 남은, 온전한 그림이었다. 자화상은 윤곽선만 그린 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채색까지 되어 있었다. 단지 이런 부분들이 후대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보존과학실 연구팀이 지난해 용산 박물관 개관 특별전을 위해 윤씨 종가에서 빌려온 액자 형태의 <윤두서 자화상>을 처음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밝혀냈다. 연구팀은 박물관이 최근 펴낸 <미술자료>74호에 ‘윤두서 자화상의 표현기법 및 안료 분석’이란 글을 싣고 상세한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우선 적외선 투시 분석 결과 눈으로 보기 힘든 상체의 옷깃과 도포의 옷 주름 선의 표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현미경으로 자화상 얼굴을 확대해 본 결과 화가가 생략한 것으로 알려져온 양쪽 귀또한 왜소하지만 붉은 선으로 그린 사실도 밝혀져 학계에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공재의 자화상에 원래 상체가 그려졌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 작고한 미술사가 오주석이 지난 96년 조선총독부 자료인 <조선사료집진속>(1937년 간행)에서 상체 윤곽이 보이는 당시 공재의 자화상 도판을 발굴해 공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오주석은 “원래 윤두서 자화상은 밑그림 그릴 때 쓰는 유탄(버드나무 숯)으로 화면 위에 상체를 그렸다가 미처 먹선으로 다시 그리지 않은 채 미완성 상태로 전해졌다”고 추정했다. “후대 표구하는 과정에서 표면을 문질러 유탄 자국을 지워버리는 실수를 한 것”이라는 견해였다. 원래 자화상에 있던 공재의 상체 그림이 후대 표구과정에서 실수로 사라져버렸다는 그의 주장은 이후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이번 조사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사라진 몸체를 그린 방식을 놓고 벌어졌던 학계의 논란또한 다시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림 화면 앞 표면에 몸체를 그렸다는 오주석의 주장에 대해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옛 자화상 사진에 보이는 옷주름은 뒷면에 윤곽선을 그린 이른바 배선법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양보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자화상의 사진은 그림 뒤에서 조명을 비추어 찍었기 때문에 뒷면 옷주름선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라는게 이 교수의 견해다.

 

그렇다면 박물관 분석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일단 두 주장 가운데 한쪽에 당장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워보인다. 박물관쪽은 현존 <자화상>의 화면 앞쪽을 현미경으로 정밀 관찰한 결과 화폭 앞 표면에 어깨 부분 옷깃, 옷주름 등을 그린 듯한 부분적인 선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적외선 사진에서 확인된 것처럼 몸체의 형상을 이루는 일관된 선의 흔적은 확인하지 못했다. 통상 적외선 조사는 안료 등으로 가려진 먹선, 즉 채색화의 밑그림이나 먹글씨를 확인하는데 주로 쓰인다. 선이 연속되도록 최소한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먹의 탄소 입자가 적외선을 흡수해 먹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자화상 전면에 보이는 일부 선의 흔적보다 적외선 촬영 사진에서 나타난 몸체의 윤곽선이 더욱 뚜렷한 만큼 앞 표면의 윤곽선이 적외선 사진의 윤곽선으로 찍혔다고 보기에는 미진한 면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놓고 보면 그림 뒷면에서 선을 그려 비쳐보이게 하는 얼개로 몸체를 나타냈다는 이태호 교수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단정은 어렵다. 이 그림이 액자로 표구되면서 배접(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림 뒷면에 다른 종이를 포개 덧대는 것)된 탓에 현재 뒷면을 드러내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외선 사진에 나타난 몸체의 선들이 앞면에 그려진 유탄 혹은 먹선의 흔적인지, 그림 뒷면에 그린 윤곽선인지는 그림 뒷면을 제대로 조사한 뒤에야 규명할 수 있다고 연구팀은 결론지었다.

 

하지만 연백과 진사 안료를 써서 그린 양쪽 귀의 윤곽이 현미경 관찰로 얼굴 가장 자리에서 발견되어 공재 윤두서가 귀를 그렸다는 사실은 분명히 입증됐다. X선 촬영을 통한 안료 분석 결과 선으로만 그렸다고 여겼던 자화상의 안면과 몸체, 탕건과 귀부분 등도 화면의 뒷면에 은은하게 채색하는 배채법으로 색칠되어 있었다는 점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논란의 대상인 몸체의 도포는 전체가 흰색으로 은은하게 배채가 되어있었다. 뒷면에 칠한 색감을 투명하게 비치도록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종이는 젖은 상태의 종이를 여러장 겹쳐 두드려 한 장의 종이로 만드는 이른바 도침(搗砧)가공이 이뤄진 종이로 연구팀은 추정했다.

 

결국 미완성처럼 보였던 공재 윤두서의 초상은 사실상 완성품으로 봐도 손색 없는 치밀하고 정교한 인물상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조사에 참여했던 미술부 이수미 학예연구관은 “지워진 줄 알았던 자화상의 상체 부분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점과 배채 채색 사실을 확인한 점이 큰 성과”라며 “액자로 표구하면서 배접지가 붙어 배채법을 쓴 몸체의 색감이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체를 앞 화면에 그렸는지 화면 뒤에 그렸는지의 논란은 앞으로 그림을 다시 표구하기 전까지는 풀리기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분석결과로는 뒤에서 그렸을 가능성에 근접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초본으로 보기에는 완성도가 매우 높아 미완성작으로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현재 <윤두서 자화상>은 그의 후손들이 60년대 말려져 있던 것을 펼쳐서 액자에 표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체와 목 부분의 윤곽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적외선 촬영 사진(가운데), 얼굴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결과 양쪽에 귀가 그려진 사실도 드러났다. 아래 왼쪽 사진은 1937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에 상체 도포가 그려진 모습으로 실린 윤두서의 옛 자화상 도판이며 오른쪽 사진은 상체를 볼 수 없는 현재 자화상의 모습이다.

 

어진이나 사대부 초상이나 품계가 좀 다를 뿐,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관류하는 회화 정신은 매한가지다. 내면세계를 어떻게 불러내느냐 하는 문제다. 모델이 된 사람의 정신을 초상화에 온전히 담아내는 이 기법은 초상화의 천국으로 불린 조선이 가진 자랑이자 흉내내기 어려운 특기다. (중략) 그렇다면 전신이 갖춰진 초상화의 긍경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눈동자에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가장 확실한 예다.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공재의 눈은 관객의 흉중까지 꿰뚫는 듯 하다. 흥미로운 과학적 관찰의 결과가 하나 나왔다. 하버드 대학의 마거릿 리빙스턴 교수는 미국 과학진흥협회 총회에 보고서를 냈다. 르네상스시대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담긴 신비한 미소의 비밀이 풀렸다는 것이 그 보고서의 요지다. 그는 보고서에서 모나리자를 똑바로 쳐다볼 경우 신비한 미소는 사라지며, 눈이나 다른 부분을 볼 때 미소가 뚜렷해진다고 밝혔다. 리빙스턴 교수는 그 이유를 눈이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눈이 사물을 볼 때 중심 시야와 주변 시야를 사용하는데, 중심 시야는 사물의 정밀한 부분을 보는 데 뛰어나지만, 그림자 부분을 보는 데는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는 이처럼 중심 시야보다는 주변 시야로 가장 잘 보인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관람객이 모나리자의 눈이나 얼굴의 다른 부분을 쳐다보면 모나리자의 미소가 더욱 뚜렷해진다고 했다. 다 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묘사하는 데 기막힌 공력을 들였다. 공재는 눈동자를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공재 자화상 역시 눈보다는 얼굴의 다른 부위를 쳐다볼 때 신통한 시(視) 경험을 하게 된다. 입술이나 수염으로 눈길을 돌리는데도 희여번뜩한 눈빛은 보는 이를 그냥 놔두지 않고 파고든다. 그 안광이 얼마나 집요한지, 그림을 벗어나서도 잔상이 어른거린다.(중략)

 

ㅡ 인생이 그림같다 / 손철주 / 생각의 나무, 2005 57~61쪽.

 

 

 

 (左) 짚신 삼는 사람 (右) 돌 깨는 석공

 

 

윤두서상(尹斗緖像)은 국보 제240호로 전남 해남군 해남읍 윤씨 종가에 있다.

 

 

 

 (左) 나물 캐는 여인들 (右) 그릇 만드는 사람

 

 

 《진단타려도(陳?墮驢圖)》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낮잠

 

 

 

밭 가는 사람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심득경 초상(沈得經, 1629-1710)肖像 본관은 청송(靑松) 보물 제1488호

 

 

 

돌 깨는 석공들 모시에 먹, 22.9cm X 17.7cm, 학고재 소장

 

 

 

梅泉 黃玹(1855-1910)의 초상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의 영인본과 실본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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