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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년∼1932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11.07|조회수1,083 목록 댓글 1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1883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이 찍은 공식 기념사진.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 의사이자 조선 왕실부 의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 공사, 즉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대 외과 의학을 조선에 도입한 공로가 있다. 하지만 의료 선교보다 개인의 영달과 로비스트 활동에 더 치중하는 등 위선자적 면모도 많이 보인 인물이다. , 의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욕이 많아서 쌓아놓은 공로도 깎아먹은 반쪽짜리 인물. 후술되어있듯 현 연세대의 일부 전신인 광혜원(제중원)을 처음 운영한 인물이기도 한데, 행보가 이렇다보니 연세대 설립자격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에 더 비교되는 안습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서 의료 활동을 하다가 1884년 한국에 들어와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지내면서 개신교 선교 사업을 겸하였는데, 그 해 겨울에 터진 갑신정변 때 첫 희생자로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 의사 겸 고종황제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 조선 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3]이 세워지자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1890년에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의료 활동 대신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우선 고종황제와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하였는데, 그 처리 과정에서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의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로 볼 때 조선인들에 대해 저평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했다.

 

조선의 각종 이권을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으로 넘겼다는 점도 그가 비판받는 부분이다. 큰 건수만 보아도 나라 빚을 다 갚고도 남았을 거라는 운산 금광 채굴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 서울 시내 전등·전차 부설권 등... 그러고도 1904년에 고종은 미국과의 관계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알렌에게 훈일등 작위와 태극대수장을 수여했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루 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 개광 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는데 아무래도 운산 지역의 도로나 물류 상태가 미비했기 때문에 10만 달러로는 개발이 택도 없었다. 결국엔 동업자를 모집하여 1897년 헌트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제가 중일 전쟁으로 미국 자본의 자국 송금을 제한한 1937년까지 30여년 동안 자본금 투자의 3배에 달하는 수익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를 남겼다.

 

다만 성공적인 투자이긴 했지만, 초기 투자 7년 동안은 전혀 배당이 없다가 이후 30여년간 회수가 되었기에 투자 당시 가치로는 초대박 수준은 아니었다. 대략 투자금 대비 50%170% 수익률 정도 올렸다고 보면 된다. 중박에서 대박 사이 정도 친 것. 그 후 1939OCMC는 중일 전쟁 이후 수익이 급감하자 대유동 금광을 경영하던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였으면 적대국 자산이라 강제 몰수당할 것이었지만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 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게 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거느리게 된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2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도 여느 외국인과 다를 바 없이 개인의 영달과 자국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챙기는데 전력투구했다는 점에서, ‘환자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의술 활동에 전념했다고 흔히 묘사되는 대중 매체 속 그의 모습은 여러모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에 의료인이지만 자기 사업에 치중했던 알렌은 동료 의사인 존 헤론과도 마찰을 빚었고, 결국 대한제국 왕실의 비호 아래 재산을 치부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알렌은 고종에게

 

미국 국민은 대한제국이 만일 곤경에 빠질 경우에 강력하고 사심없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국민이 될 것이다

미국은 다른 조약 체결국들이 대한 제국의 독립을 강탈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어렵게 만들 것이다.’

 

라고 표현했다. 당시 외교 독립론에 빠져서 미국이 큰 형처럼 느껴진다라고까지 할 정도로 미국과 손잡으려 애썼던 고종 입장에선 이보다 달콤한 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렌은 고종이 멋대로 미국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제물포 조약의 우호 관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다. 당혹스럽다.’라는 식으로 미국에 전문을 보내는 것으로 고종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알렌이 초창기에 미국에 대한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전문을 보내고, 대한 제국이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주장을 해서 고종의 알렌 매수설이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대립씩이나 하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이권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권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고종이 군주로 있는 대한제국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알렌의 생각도 러일전쟁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사실 알렌의 생각은 알고 보면 단순했는데,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중립국으로 존재하고 이것을 미국이 중재하면서 자신과 미국이 이권을 얻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칭다오를 확보하고, 러시아가 이에 자극을 받아서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왕따가 되면서 사정이 변화한다.

 

국제 정세가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대한 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그를 통해서 이권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일본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러일전쟁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의 변화를 인식한 알렌은 태도를 일변시킨다. 자신이 반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1902년과 1903년 미국 본국에 전보를 보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에 대해서 엄청나게 혹평을 한 것이다. 심지어 이중엔

 

러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승리하면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더욱 적합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을 정도였다.

 

알렌은 한국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수십 번 말했으며, 더욱이 한국이 망하고 있다는 것에 즐거움마저 나타낸 일이 있었다.”

 

알렌과 함께 공사관에서 일했던 F. H. 해링턴의 말이다.

 

이 과정에서 고종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일찍이 고종과 친하게 지내서 이권을 받을 때는 좋게 평가하던 고종을, 1904년에 이르면,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 제국이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결국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대립한 전적이 있던 알렌은 19053월에 해임 당한다.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어서 한국에서 떠났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렌의 후임 공사도 존재한다. 바로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있던 에드윈 V. 모건이다. 그리고 이 모건도 을사조약에 반대 입장을 표시했었다. 때문에 알렌이 친한파라서 해임되었다거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어서 자연스럽게 출국했다는 것은 잘못된 소리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돌까? 다시 해링턴의 말을 인용하면,

 

이제 와서 알렌은 자신을 한국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해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였다. 그리고 실제로 갑자기 생각을 틀었는지 혹은 너무 진행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을사조약 이후 공사관의 철수가 너무 빠르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일본은 결국 미국의 태평양 정책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며 언젠가 미국과 충돌할 것이다.” 라고 말했으나 친일 성향이 있었던 루스벨트는 이 말을 씹었다. 그리고 30여년 뒤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그의 말은 현실화되었다. 물론 이에 대해 외교관으로서 과정이 너무 급하다고 비판했던 것뿐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일리나 루즈벨트가 조선에서 환대를 받고 돌아간 지 몇 주 만에 미국은 공사관을 철수시켰는데, 이게 외교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알렌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12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11녀가 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과 알렌의 등장

 

미국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던 알렌은 갑신정변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 한말 조선의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이 사건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도입을 이끈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884124일 오후 7, 우정국 개소 축하 연회가 우정국 청사에서 개최되었다. 축하연을 준비한 홍영식을 비롯한 국내외 정계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민영익을 비롯한 몇몇 온건개화파 인사들이 화재를 피해 뒷마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관장 서재필의 신호에 맞추어 자객들이 나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살육을 시작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들은 청나라에 기대어 온건개혁을 추진하던 민영익을 비롯한 민 씨 일파를 제거하고 급진개혁을 서두르고자 했다. 개화당의 주요 타겟이 되었던 민영익은 민태호의 아들로 민비(閔妃, 훗날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가 암살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민승호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 결과, 민비는 민영익의 고모가 되었다. 민영익은 1877년 과거 급제 이후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별기군(別技軍)의 책임자로 조선의 개화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민영익은 민씨 일파 중 예외적으로 개화당에 참여해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정치적 동반관계를 형성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이 일어나자 개화당은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갈라설 조짐을 보였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들과의 차별과 임금 체불 등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으로,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복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민비(閔妃) 일파는 충주까지 쫓겨 내려가면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청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면서 난리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민씨 일가와 조영하, 김윤식 등은 청나라를 의지하고자 했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등 일본에 기대어 급진개혁을 추구했던 급진개혁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의존하던 기존의 외교 노선을 탈피하고 선진문물을 도입하는 한편,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史)를 꾸려 미국에 파견했다. 이것은 1882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18835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개설에 따른 조선 정부의 외교적 답례이기도 했다. 18839월 민영익은 40일간의 미국 여행을 시작했다. 적어도 이 당시까지는 민영익이 여전히 개화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국 후 미국 시찰의 경험을 바탕으로 홍영식은 우정국 운영의 책임을 맡았고, 보빙사 일원들은 개화의 주체로 성장해 나갔다. 반면 민영익은 개화당과 대립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화당은 청나라에 의존적인 수구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전격적인 개화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공감했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성공시키고자 했지만, 그들이 추구한 길은 미국형 근대화를 지속하는 길이기도 했다.

 

개화당 내에서 무장 세력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훗날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의사가 되었으며, 독립신문(獨立新聞)주필로 더 유명해졌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으나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도쿄 도야마 육군학교에 유학해 무관으로 변신했다.

 

조선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떠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놓치지 않았던 알렌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운명이 예고되고 있었다.

 

자객의 갑작스런 칼날에 민영익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무려 13번이나 칼에 찔렸다. 자객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민영익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자객의 칼날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었다.

 

죽어가는 민영익을 멀리하며 개화당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죽기 일보 직전의 민영익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귀에서 볼까지 칼에 베여 얼굴뼈가 드러나고 살이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알아본 것은 미국 공사 푸트와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였다.

 

그들은 우선 민영익을 가까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기고, 얼마 전 조선에 온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왕진을 요청했다.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14명의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꿰매야 할 상처 부위에 일종의 고약인 송진 꿀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알렌은 그들을 물리치고 외과 치료를 시작했다.

 

그 시각 급진개혁파들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거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외국인 사회는 혼란에 휩싸였고,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일본인들은 청군과 조선인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고, 서양인들도 서울을 벗어나 제물포로 떠났다. 알렌의 가족들 역시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돕던 일본인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얼른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알렌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우선은 민영익의 수술을 마치고 치료와 간호를 맡길 사람이 없었고, 정변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환자들에 대한 치료로 바빴기 때문이다. 알렌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피하지 않았고, 이것은 조선 왕실이 알렌을 신뢰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더욱이 한국인 최초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던 민영익의 목숨이 알렌의 손에 맡겨지면서 알렌의 눈앞에는 새로운 운명이 예고되고 있었다.

 

-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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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깻띠성님 | 작성시간 19.11.07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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