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시나(Ibn Sina, 980년∼1037년)
모르는 자, 그러면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피하라.
모르는 자, 그러면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는 어린아이다. 가르치라.
아는 자, 그러면서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잠들어 있는 자이다. 깨우라.
아는 자, 그러면서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현명한 자이다. 따르라.
- 이븐 시나(Avicenna)
부하라 출신의 저명한 페르시아인 철학자이자 의학자, 약사, 시인, 외교관. 풀네임은 아부 알리 알 후사인 이븐 압둘라 이븐 시나. '푸르 시나(پور سینا)'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 '아비켄나스(Αβικέννας)', 라틴어로 '아비켄나(Avicenna, 또는 아비센나)'라고 한다.
트란스옥시아나의 타지크계 순니파 왕조인 사만 왕조 땅에서 태어나 그 영역인 부하라와 구르간즈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사만 왕조가 쇠퇴한 후에는 데일람계 시아파 왕조인 부와이 왕조 치하의 이란 서부로 이주하여 하메단, 레이, 에스파한 등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11세에 이미 쿠란 정본과 아랍 고전을 섭렵했으며, 그 이후에는 이슬람의 법학, 철학, 자연과학, 논리학, 기하학, 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어려움을 느낀 유일한 학문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었는데, 결국 20세가 되기 전에 40회나 정독했다고 한다. 우연히 어느 오후에 책 장터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책을 팔려고 하기에 안 사려고 하던 찰나, 그 사람이 "이 책 주인이 돈이 당장 필요하고 단돈 3 디르함에 팔 테니 사라"고 하여 샀다고 한다. 하필 그 책이 당대의 철학자 알 파라비(al-Farabi)의 각주가 달린 책이었는데,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책에 대한 것임을 알고 기뻐하며 집에 가서 순식간에 읽고 나서 형이상학을 이해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자 너무 기뻐 거리에 나가서 춤을 췄다는 일화도 있다.
어렸을 적부터 천재로 유명했는데 사람들이 10살 때 이븐 시나를 셰이크(장로)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보통 이슬람권에서 셰이크는 못해도 40대가 넘은 사람에게 붙는 존칭인데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대를 받았는지 알만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성공한 학자가 되었지만 대신 성격이 매우 거만했다고 한다.
흠이라면 거만한 성격 외에도 학구열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주위의 충고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매진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다가 일찍 죽은 것은 아니다. 이븐 시나가 이란의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정착해서 잘 먹고 잘 사려는 찰나 술탄 마흐무드의 가즈니 왕조 군대가 부와이흐 왕조 영토 각지를 침공해서 박살내기 시작했고, 이븐 시나는 자신이 이스마일파 신도이기 때문에 가즈니 왕조 군대에게 사로잡히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이곳저곳 피난을 다녀야 했다. 그는 계속 피난을 다니는 와중에도 공무와 학문활동을 동시에 수행하였고, 공무가 끝나면 제자들과 함께 논문을 쓰다가 결국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 이븐 시나에 대해 논평한 서구 학자들은이븐 시나의 생애 말 그가 부와이흐 왕들의 눈치를 보고 마흐무드를 피해 피난을 다니면서 20여 편의 논문과 주요 저서들(《치유의 서》, 《구원의 서》, 《지시의 충고의 서》)을 저술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의 문명 수준으로 감히 견줄 만한 것이 없는 의학서인 《의학전범》을 집필하였다. 이븐 시나는 샌님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고, 《의학전범》을 5부로 나뉜 1권 분량으로 간결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저술하였다. 비교하자면 그의 선배 알 라지는 20권에 달하는 의학서를 남겼으나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고 어렵다보니 알 라지의 책 중에서 홍역과 천연두를 다룬 책만 널리 보급되고 나머지는 제대로 번역, 필사가 되지 못했는데, 이븐 시나가 이를 참고한 듯 하다.
《의학전범》은 출간 직후부터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아랍어로 쓰인 원문은 얼마 안 가 페르시아어 등등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서기 12세기에는 인도의 힌두교도들도 이 책을 읽게 되었으며 1180년에는 라틴어로도 번역되어 유럽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기 14세기 중국의 원나라 때에는 한문으로도 번역되었다. 5백 년 뒤 유럽 쪽 연금술사이자 철학자이자 의사인 파라켈소스(1494~1541)는 이 책을 칭송하면서 5백 년 전 무슬림 페르시아인 책자를 우리 유럽 기독교인은 아직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한탄했다. 의사로서의 능력도 상당했으며 심리적 치료에도 무척 용했다고 한다. 어느 왕자가 상사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엄격한 아버지인 술탄에게 차마 말하지도 못한 걸 단지 말만 듣고도 간파하여 술탄에게 건의하여 살린 적도 있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했기에, 모두 당연한 듯이 믿고 있는 진이나 이프리트, 마리드 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시아파, 그중에서도 이스마일파 같이 과격한 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늘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좀 심각한 천재였던 탓에 법학, 철학, 자연과학, 논리학, 기하학, 의학, 형이상학, 천문학에 통달했고, 잡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의 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스콜라 학파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에서도 괴물 같은 천재로 유명했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으로 오길 권하는 유럽인 지인까지 있었다.
의학, 철학, 신학, 기하학, 천문학 등에 관한 21개의 정본과 24개의 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아랍에선 지금도 천재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영혼과 신체가 별개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철학자 치고는 특이한 것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중 림보에서 키케로, 프톨레마이오스, 히포크라테스 같은 사람들과 함께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븐 시나를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들에게서 떨어져 외로이 있는 살라딘도 있다. 아아 안습이지만 그래도, 신곡에 나온 비기독교인들이 가는 지옥 묘사에서는 이교도라고 해도 공로가 너무나도 훌륭해 고통스러운 지옥에 가지 않은 셈이다.
타지키스탄에서 이븐 시나를 자국의 위인으로 널리 홍보하고 있다. 원래 이란인과 타지키스탄인은 언어민족적으로 동질적이지만 근현대에 구분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많은 역사를 공유한다. 화폐 20 소모니에 이븐 시나가 그려져 있으며, 자국의 고산인 레닌 봉도 타지키스탄에서는 이븐 시나 봉으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