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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외과와 산과의 발전(外科-産科-發展)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01.28|조회수70 목록 댓글 0

 

63. 외과와 산과의 발전(外科-産科-發展)

 

 

 

19세기를 통해 마취술과 세균학이 발달함에 따라 외과에도 커다란 변화와 도약이 일어났다. 나중에 마취용으로 쓰이게 된 몇 가지 가스는 이미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미국 코넥티컷에서 개업을 하던 치과의사 웰즈(Horace Wells, 1815-1848)1844년 화학강사이던 콜튼(Gardner Colton)에게 이를 뽑는 동안 마취를 목적으로 웃음가스’(아산화질소)를 환자에게 주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발치는 성공적이어서 환자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웰즈가 그 다음 몇 차례 시험적으로 시도해 본 것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 아산화질소를 마취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실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웰즈와 함께 치과를 동업하던 모턴(William Thomas Morton, 1819-1868)은 보스턴으로 이주한 뒤에도 적당한 마취제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846년 매사추세츠 종합벙원(MGH)의 외과의사 워렌(John Collins Warren, 1778-1856)의 환자에게 에테르(ether)를 흡입케 하였다. 실험은 다시 성공하여 수술은 거의 통증이 없는 가운데 끝났다. 유감스럽게도 모턴은 자신이 사용한 마취제의 특성을 아무에게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과거에 챔벌렌 가문에서 산과용 핀셋을 집안의 비밀로 전수하였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시대는 바뀌고 모턴은 비난과 악평의 제물이 되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의 통증을 없애거나 줄이는 이 새로운 기술을 마취술(anesthesia)’이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산욕열에 관한 기술로 유명한 보스턴의 홈즈(Oliver Wendell Holmes, 1809-1894)였다. 모턴의 바람과는 달리 에테르 마취의 비밀은 곧 밝혀졌고, 성공담은 급속히 퍼졌다. 같은 해 영국의 외과의사 리스턴(Robert Liston, 1794-1847)은 다리 절단수술시에 에테르 마취를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외과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될 리스터(Joseph Lister)는 학생의 신분으로 리스턴의 수술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취술이 산과 영역에 쓰이게 된 것은 에든버러의 심프슨(James Young Simpson, 1811-1870)에 의해서였다. 심프슨은 동료들과 함께 분만시에 통증을 덜어 줄 물질을 찾기 위해 자신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그들은 이미 아산화질소와 에테르는 별로 마땅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실험에서 클로로포름(chloroform)이 상당한 마취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심프슨은 그것을 분만시 마취제로 사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클로로포름을 산과영역에 사용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청교도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이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대로 산고(產苦)는 하나님이 내리신 것인데 인간이 그러한 신의 의지에 맞서 개입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불경한 짓이라는 주장이었다.

 

사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는 질병과 고통을 단순히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아 왔다. 그들은 질병과 고통의 종교적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사들의 견해와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러한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의학적 견해와 종교적 교리가 맞부딪칠 때 어느 쪽이 타당한지를 가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대사회에서는 종교교리보다 의학적 의견이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상대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자리에 있다는 점이다. 종교는 권위를 많이 잃었고 의학과 과학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는 다분히 세속 사회이고 의료화(medicalized)된 세계기 때문이다.

 

클로로포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영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한 여성에 의해 결말이 났다. 도덕적이며 신앙심이 깊어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오던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의 왕자를 낳을 때 클로로포름 마취를 허용함으로써 비판자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과학이 종교를 압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3의 권위가 필요했다. 그 뒤로 무통분만(無痛分晚)은 바람직한 일로 인정을 받았으며, 더 나은 산과용 마취제를 찾기 위한 노력은 더욱 활발해졌다. 지금은 몇 가지 부작용 때문에 클로로포름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마취제가 쓰이기 전에도 수술기법은 산발적으로나마 발전하고 있었다. 미국 켄터키의 맥도웰(Ephraim McDowell, 1771-1830)은 처음으로 북부를 통한 난소종양 제거술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수술은 당시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지만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맥도웰은 그 후로도 환자 12명에서 똑같은 수술을 시도하여 여덟 차례 효과를 거두었다. 복부를 여는 수술은 이전에도 제왕절개 수술을 비롯하여 간혹 행해지기는 하였지만 맥도웰의 시도와 성공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반적으로 복부수술은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외과의사들이 꺼려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립된 영역으로 발전하던 부인과에 관심이 많던 외과의사 웰즈(Thomas Spencer Wells, 1818-1897)는 당시 수술을 할 때 의사들의 애를 먹이던 출혈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핀셋을 개발하였다. 그는 1858년 난소제거술에서 자신의 핀셋을 이용하여 지혈에 성공한 뒤 여러 차례 성과를 거두어 그러한 술식(術式)을 정착시켰다.

 

현대적 모습의 외과가 등장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은 수술시의 출혈방지, 마취와 더불어 감염문제였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취술이 개발됨으로써 외과의사들의 커다란 고민 한 가지가 해결되면서 역설적이게도 수술은 더욱 위험한 것이 되었다. 통증 때문에 감히 손도 못 대던 복부수술 등을 과감하게 하면서 감염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다. 감염은 당시 모든 외과의사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지만 또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수술이나 외상에 따르는 불가피한 동반자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 무렵 파스퇴르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수술에 따르는 감염과 그 밖의 감염현상의 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외과분야에서 파스퇴르 업적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파악한 것은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였다. 스스로 수술을 받는 환자 주변과 공기 중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 박테리아들을 소독하기 위해 리스터는 석탄산(石炭酸)을 뿌려[분무] 보았다. 감염과 패혈증(敗血症)을 줄이는 효과는 가히 기적적이었다. 수술 뒤 상처는 말끔히 치유되었던 것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당시의 수술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자. 수술은 거의 대부분 오래된 탁자 위에서 행해졌으며 수술에 참여하는 외과의사, 조수, 간호사 그리고 실습학생 모두 외출복을 걸치고 있었다. 외과의사들은 재킷을 걸친 채 소매만을 걷어올리고 수술을 하기도 하였다. 수술도구들을 소독한다는 일은 꿈에도 있을 수 없었다. 리스터의 소독술도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결국은 외과의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무균법이 개발되어 소독술을 대치하게 되었다.

 

무균법에서는 환자의 수술부위로 병원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 진다. 수술도구들은 당연히 멸균 소독하고 수술복뿐 아니라 수술장갑 등도 모두 멸균된 것들을 사용한다. 위에서 상상해 보았던 100여 년 전의 수술장 모습과는 전혀 달라진 것이다.

 

마취술이 발달하고 널리 쓰여짐에 따라 19세기말이 되면서 외과의사들의 손이 미치는 범위는 대단히 넓어졌다. 그러나 머리속과 가슴속은 여전히 까다로운 부위였다. 환부에 이르는 방법도 쉽지 않을 뿐더러 신경조직, , 심장 등 까다로운 조직과 기관을 다룰 기초의학적, 임상의학적 지식과 기술이 모자랐던 것이다. 이들 부위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은 다음 세기에 맡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복부 속 장기에 대한 수술은 매우 친숙한 것이 되었다. 수많은 종류의 복부수술이 유럽과 미국의 많은 병원에서 대규모로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은 첨단기술 의학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그에 따른 염려와 불안도 상당히 팽배해 있다. 그러한 불안은 심장이식 등의 중요한 수술에 따르는 윤리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또한 당장의 실제적인 가치가 없는 듯이 보이는 기초의학연구에 대한 비판도 한몫 거들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해부학은 오랜 세월 동안 실제적이며 임상적인 가치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해부학은 사후부검을 통해 병리학과 결합함으로써 질병관에 커다란 변화와 발전을 가져 왔으며, 마취술과 소독법이 발달하여 외과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외과적으로도 유용한 지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몇 백 년 동안 실제로 임상에 응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부학이 무용(無用)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기초의학이나 기초과학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어 왔음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는 당연한 수술로 별 위험 없이 수행되는 복부수술도 시행초기에는 첨단적인 것으로 사망률도 높고 수술방법도 표준화되어 있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었다. 그렇다고 첨단기술 의학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이다.

 

외과수술이 점점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확인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수술의 영역도 더욱 확대되면서 의료계내에서나 사회 속에서 외과의사들의 지위도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의료 전체와 의사 일반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의학과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욱 두터워지고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가정이나 교회에서 가족과 성직자들에 의해 행해지던 역할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병원과 의사들의 차지가 되었다. 즉 사회의 의료화(medicalization)가 본격화된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뚜렷해지는 현상이지만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출생과 사망 등 인간 삶에 관련된 많은 것들이 의료영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산과영역도 외과와 마찬가지로 마취술과 소독멸균법 등 새로운 성과들을 받아들였다. 난산뿐만 아니라 순산 때에도 산모가 겪는 통증은 대단하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심프슨이 분만시의 통증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마취제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클로로포름이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지만 분만통을 줄이기 위해 아편을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클로로포름이나 아편류는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때때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로 여겨지는 일은 분만이나 산과수술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될 마취제나 진정제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회인식의 변화 없이는 새로운 개발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개발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실제임상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장애에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다.

 

출산 직후 산모들에게 올 수 있는 위험 역시 출혈과 감염이다. 특히 출산뒤의 산욕열로 많은 산모가 죽었고, 또 큰 고생을 겪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의사 젬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분만하는 임산부들이 산과 병동에 들어오기를 꺼려하며, 그것은 그 병동에서 산욕열로 죽는 산모가 많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젬멜바이스는 그러한 이야기를 흘려 듣지 않고 면밀히 관찰 검토한 결과, 산욕열이나 패혈증으로 사망한 임산부를 부검하는 자리에 있었던 의사나 의과 대학생이 분만을 거드는 경우 감염에 의한 사망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젬멜바이스는 의사나 학생들이 부검실로부터 병동의 산모들에게 감염증을 옮겨 주는 구실을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들에게 손을 청결히 씻을 것을 주장하였지만 한낱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 후 부다페스트대학의 산과 교수의 자리를 맡기도 하였지만 그 때도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젬멜바이스는 나중에 세균학자들이 밝혀 낼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사회의 경멸과 악평 속에 그 부담을 이겨 내지 못한 채 정신병동에서 쓸쓸히 죽어 갔다. 오늘날 부다페스트에는 젬멜바이스 의과대학교가 있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생존 당시에는 엉뚱한 주장을 펴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비운을 겪었던 것이다.

 

젬멜바이스의 고통은 그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앞 절에서 보았던 맨체스터의 화이트와 스코틀랜드의 고든(Alexander Gordon)도 마찬가지 주장을 하였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보스턴의 웬들홈즈도 비슷한 처지를 겪었다. 홈즈는 1843년 보스턴의 어느 의사들 모임에서 산욕열의 감염성에 관하여(On the Contagiousness of Puerperal Fever)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분만에 임할 의사는 전염성 질병을 앓고 있는 다른 환자를 보아서는 안되며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을 부검하는 자리에도 가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의사들에게 손톱을 청결히 하고 손을 깨끗이 씻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들은 의사들은 홈즈가 자신들을 근거도 없이 비방한다고 생각하여 신랄하게 홈즈를 공박하였다. 사태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홈즈가 손이 깨끗한 신사도 병을 옮길 수 있다.”라는 변명조의 답변을 하였지만 분노한 의사들을 달래기에는 힘에 부쳤다.

 

파스퇴르 등 세균학자들과 리스터 등 임상가들에 의해 마침내 산욕열의 정체가 드러나고 또한 소독멸균법으로 질병의 전파를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파스퇴르와 리스터보다 얼마 전도 아닌 젬멜바이스의 시대에는 병원에 따라 10% 이상의 산모들이 감염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산과병원이나 병동이 폐쇄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1877년 런던 남쪽의 한 산과 병원은 2년 가까이 문을 닫고 있었다. 병원 당국은 가까운 킹즈컬리지병원에 근무하던 리스터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리스터는 자신의 소독법을 소개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리스터의 소독법이 보급됨에 따라 산욕열로 인한 사망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산과학과 관련 있는 기초과학 지식들도 더욱 잘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바에르(Carl Ernst von Baer, 1792-1876)는 처음으로 난자를 관찰하였다. 이것은 수정 과정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발견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사인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주로 콩을 가지고 유전현상에 대해 연구하여 여러 가지 유전법칙을 밝혔다. 멘델의 연구는 1856년에 시작되었으며, 1865년 고향의 한 작은 학회에서 그 결과의 일부가 발표됨으로써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다시 묻혀 있다가 그로부터 35년 뒤 그리고 멘델이 죽은 지 16년 만에 세 사람의 식물학자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멘델의 연구는 다윈의 진화이론에 빠져 있는 부분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미흡한 부분이란 다윈의 자연선택이 작용하려면 개체에 변이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 변이를 다윈의 학설은 설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멘델의 답은 생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전적 변이였다. 멘델은 생식에 의한 유전적 변이가 어떤 기전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지만, 다음 시대에 확대, 발전될 연구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멘델은 20세기 후반에 꽃피게 될 유전공학의 길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과와 산과의 발전 [外科-産科-發展] (의학개론 1(의학의 개념과 역사) , 2006.4.10,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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