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1851년)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영어: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 4월 23일~1851년 12월 19일)는 영국의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왕립 미술원에서 그림 수업을 한 뒤, 잠깐 사이에 준회원에서 27세 되던 1802년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서 획기적인 표현을 남긴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일생의 염원이었다. 그런 만큼 중기(中期)에는 로랭의 영향이 보이나 후반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한층 더 빛의 묘사로 들어간다. 터너는 1819년부터 약 10년마다, 세 번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는데, 물과 하늘, 그리고 빛나는 남국의 태양은 터너의 꿈이요 시였다. 터너는 풍경의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 그것은 균정(均整)이 잡힌 윤곽에서 정중하게 그린, 당시로서는 대담한 창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시 창작을 계속하여,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1843)에서 배의 그림자까지 거칠게 불어대는 태풍 속으로 꺼지는 듯 눈보라의 심한 상태를 주제로 잡고, 과거의 회화에 전례없는 동적인 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號)》(1839),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황금가지》 등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서 고독한 성격이었으며, 본가 외에 체르시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이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입니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인 윌리엄 터너는 런던의 한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그를 터너의 1789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불과 15세의 나이에 수채화 전시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습니다. 그는 1799년 준회원으로는 가장 어린 나이인 2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으며 1802년에는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이 되었죠.
터너는 1800년대 초부터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꾸준히 여행을 다녔습니다. 요크셔, 웨일스, 스코틀랜드는 시작으로 1802년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 그 후 10년 마다 이탈리아를 여행했죠. 터너는 특히 풍경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여행 중 만난 물과 하늘, 태양과 자연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터너에게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터너의 그림은 자연과 대기, 빛의 표현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터너는 평생 동안 풍경화를 그린 풍경화가였습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을 무척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능가하는 풍경화가가 되는 것이 생애의 염원이었지요. 처음 로랭의 풍경화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리던 터너는 1810년이 넘어가면서 로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터너는 색채를 자유로이 사용하면서 자연과 빛의 풍경을 표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터너는 단순히 자연을 그림처럼 묘사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빛과 색채로 환원하여 표현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닌 자연 현상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풍경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요, 그런 그의 작품은 당시로는 무척 획기적인 것이었죠.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남긴 터너의 이 말은 그의 미술 세계를 여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터너는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1842년 네덜란드를 방문한 터너는 그곳에서 폭풍을 만났지요. 그는 선장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자신을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바다 폭풍의 한복판에서 변화무쌍한 자연의 현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였습니다. 물론 선장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무모한 행위를 반대하고 나섰죠. 그러나 터너는 겨우 선장을 설득, 자신의 몸을 갑판 돛대에 묶은 채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는 몰아치는 폭풍속에서 공포와 환희에 찬 밤을 보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폭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배, 그림 속에서는 빛과 바다와 폭풍이 뭉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작품 자체가 한덩어리가 되어 꿈틀거립니다. 거친 바다와 표호하는 하늘로 가득찬 이 그림은 색채 역시 한덩어리 입니다. 자연의 색들은 흩어지다 또 뭉치기를 반복하며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공간을 보여줍니다.
터너는 이러한 상태의 작품들을 전시하면서 작품이 걸리게 될 위치와 조명등 작품을 둘러싼 환경까지 고려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조정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사실 터너는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점점 유명해지고 부유해졌지만 첼시의 작은 별장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이름까지 '부스'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왕립아카데미 교수직도 사임하고 말이죠. 그는 곁에 단지 늙은 가정부만을 두었고 사람들의 방문도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죠.
터너의 작품은 낭만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이며, 인상주의를 예고하고 또 표현주의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사가이자 미술비평가인 허버트 리드는 터너를 '영국회화의 장대한 거인''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 로 평가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극찬했지요. 하지만 그의 미술 세계를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터너의 풍경화를 보면서 자연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감정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빛과 자연은 살아있습니다.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