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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마이클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2009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1.27|조회수1,014 목록 댓글 0


06. 마이클잭슨(Michael Joseph Jackson, 1958~2009)

 

 

 

 

 


 

 

영향을 준 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이 팝 스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잭슨과 견줄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잭슨의 혁신성을 그들 각자의 작품에 적용할 제자들만이 앞으로도 꾸준히 생겨날 뿐.

 

 

현 세대의 모든 팝 뮤지션들이 마이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마이클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인성 흐레기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 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때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 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추모 영상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춤과 노래를 커버한 적도 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팝 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마이클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 Z,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더 위켄드, 테일러 스위프트 등 주요 팝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진영이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을 듣고 자신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고 빅뱅, BoA, 문희준, 박재범 등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인기와 평가

 

 

 

만약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기여한 혁신적인 업적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음악과 예술은 아마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오늘날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그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해 얻은 결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그는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며 최고 음악인이 되기 위한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결국 최고의 가창력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 최고 수준의 댄스로, 전 세계 춤과 음악계 판도 모두를 바꾸었다. 어셔,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등 수많은 팝스타들이 현재까지도 그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등에 비견할 만한 이 팝음악사에 길이 빛날 걸출한 음악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음악계의 큰 손실이다.

 

 

팝의 황제이자 아이콘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농구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인물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수식으로는 모자란, 그 분야 자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마이클 잭슨은 천재가 노력도 하고 성실함까지 갖추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동시에 그가 지닌 여러 재능이 어쩌면 고루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퀸시 존스 같은 위대한 프로듀서와 작업한 최고의 재능을 지닌 댄스 가수를 넘어 이미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능이 재능을 가렸다고 할까. 불세출의 뮤지션..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요절로 인한 신화화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요절로 인한 신화화로 인해 자신이 지닌 음악적 능력보다 과대평가된 뮤지션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북유럽 신화의 많은 신들이 마지막 날에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멸망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단어는 바그너에 의해 사용된 후 위대한 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자리잡았다. 지난주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후 바로 이 표현이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죽음이 단순히 한 아티스트의 죽음이라기보다 세계 음악시장 쇠락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론가 강명석 씨도 지적했듯이 지금도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직 마이클 잭슨만이 '팝의 제왕'(King of pop)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지며 그의 부재는 엄청난 상실감을 남기는 것이다.

 

 

그 완벽한 사운드 안에서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에 지금의 그 어떤 팝 앨범보다 현대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음악의 원초적인 비트와 그루브를 백인의 팝 안에 정제시켜 융화했고, 그것을 록의 다이내믹으로 폭발시켰다. 그가 곡의 도입부에서 선보이던 독특한 창법은 그대로 어셔와 저스틴 팀버레이크, 비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수많은 댄스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보며 퍼포먼스를 구상한다. 그는 모든 장르가 가장 쾌락적인 형태로 융합하는 팝음악을, 가수의 춤이 단순한 몸짓을 넘어 거대한 무대와 합일 되는 새로운 퍼포먼스의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King of Pop’의 서거는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시작이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지구의 모든 뮤지션들이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마이클 잭슨 개인은 그 업적으로부터 격리됐다.

 

 

제왕 마이클은 인종차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백인 주류 사회의 총아로 등장했다.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사로잡는 무기는 다름 아닌 마이클의 팝 음악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우리는 이미 로큰롤의 제왕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고, 비틀스, 레이 찰스, 밥 말리 등 대중음악의 시대별·장르별 전설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이클 잭슨을 내 생애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레전드 중 레전드”(T 윤미래의 말)로 만들었을까? 그의 음악은 모타운의 유명 흑인 스타들을 자랑하던 디트로이트 R&B의 정수의 경계를 뛰어넘어 록과 재즈, 포크와 발라드 등 여타 장르의 장점을 모두 모은 정제된 작품이었다. 가장 많은 리스너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팝의 틀 속에 용해하는 절제력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힙합을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MTV 등 주류 방송 매체로 진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이라는 사실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은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잭슨은 팝 음악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어떤 면에서 그가 팝 음악 그 "자체"를 정의하는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팝이 무얼까? 잭슨이 "Off The Wall'로 본격적인 Epic 레코드 시절을 열어가기 이전에 팝이란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주류 중산층 청취자 타겟의 보수적이면서 듣기 편한 이지 리스닝 재즈/팝의 변용 내지는 빅 밴드 음악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틴 팬 앨리가 그랬고 스윙이 그랬다. 락앤롤, 트위스트, 디스코, 훵크 등 흑인들의 음악으로 출발한 주류 대중음악도 결국 백인 주류 문화로 변형, 도입, 흡수되거나 아니면 저질 음악으로 낙인 찍혀 조기에 사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중 인기가 높았던 모타운은 확실히 광범위한 청자를 확보했지만 록에 비하면 저질스러운 싸구려 음악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고 그나마도 그 뒤를 이은 디스코와 훵크는 7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제대로 꽃피우기 전에 또 하나의 깜둥이 음악으로 낙인 찍히며 '블랙뮤직에 기반한 주류 팝 음악'이라는 미션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 잭슨은 정확히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다. 다른 방식으로. 그는 메인스트림인 팝을 자신만의 블랙뮤직 속에 녹이며 백인들의 지배적인 팝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결과 MTV가 열광한 첫번째 스타는 허여멀건한 금발의 청년이 아닌 검은 잭슨의 춤사위였고 백인 중산층 청자들의 보수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AOR(Album Oriented Rock)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것도 그의 음악이었다. 재즈에서 훵크까지 모든 음악을 꿰뚫고 있던 프로듀서 퀸시 존스, 그리고 클래식부터 록앤롤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스승으로 송 라이팅을 공부한 잭슨의 어프로치는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했다. 그들은 정확히 장르나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어떤 다채로운 사운드의 모음을 향해 질주했고, 이런 독창적인 방향 설정은 정확히 엘피 시대를 지나 씨디 시대로 향하는 첨단 현대 대중 음악의 취향을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었다. 장르 아티스트가 아닌 팝 아티스트의 영역, 타협적이지만 자유롭고 실험적인 한 곡 한 곡,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과 송 라이터, 엔지니어들이 총 출동, '곡에서 곡'을 향하는 거시적인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한 음에서 한 음으로' 집착해대는 음악 만들기를 실험한 결과 잭슨이라는 걸출한 아이콘이 탄생된 것이다. 뻔한 수치조차 들먹일 필요가 없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그는 전 세계 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이며, 미국 밖에 알려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유명한' 미국인 엔터테이너였다. 음악성, 지명도, 상업적 성공 등을 모두 종합해 볼 때도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솔로 가수나 밴드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대중음악에만 시선을 고정, 시대적인 상징성만으로 명인들의 계보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40년대의 프랭크 시나트라, 50년대의 엘비스, 60년대의 비틀즈, 70년대의 레드 제플린을 잇는 80년대의 진정한 아이콘은 마이클 잭슨임에 틀림없다. 잭슨의 삶, 퍼스낼리티, 그리고 그의 음악은 오로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평생을 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악, 다른 세대, 다른 지역, 다른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려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장난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퓨어 팝의, 한때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원대한 꿈을 그는 잠깐이나마 이뤘고, 그 담대함이 가져다준 성공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에 그 업적들이 오늘날 킹 오브 팝이라는 그의 위상을 선사했다. 21세기 팝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 잭슨은 잠재력 있는 천재 소년 가수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예술의 경지를 탐하며 그의 모든 것을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페셔널리즘과 예술과 음악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심은 그가 떠난 무대에 미국 팝의 정수라 부를 만한 여섯 장의 레코드로 똑똑히 증언된다. 그리고 팝의 전당에, 음악의 전당에, 대중의 전당에 마이클 잭슨의 별명 킹 오브 팝은 영원히 결번 아닌 결'별명'(retired nick name)되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 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가수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매니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1984) 대중음악의 피터팬이자, 성장하기를 거부한 소년인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이클 잭슨은 컴백을 시도했으나 목요일 오후 UCLA에서 사망했다. 잭슨 씨는 50살 인생 중 40년을 대중들의 시선에서 보냈고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이클의 커리어 중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였으며 75천만의 레코드를 판매했습니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그의 죽음에 반응하며 노래를 마라톤처럼 송출하고 마이클 잭슨의 혁신적인 뮤직비디오의 결과로 성공한 MTV는 그의 히트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009).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연예인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충격적인 공연은 모타운 25주년에서 마이클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미치지 못 하는 것은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마이클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 위인들과 함께 합니다. 빌리 진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깊이가 함께 한 그가 만든 가장 중요한 레코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노래보다 빌리 진은 가장 훅(hook)이 많았습니다. 빌리 진은 기억하기 쉬우며 빌리 진 안의 모든 악기는 각기 다른 훅을 연주합니다. 당신은 거기서 12가지의 음악적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진정한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잭슨신드롬 이후 그 어떤 가수가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일찍이 전설이 된 엘비스와 비틀스를 빼놓고 대중적 파급효과를 따진다면 잭슨을 능가하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지구상 모든 인류가 열광한 가수는 잭슨이 유일했다. 그의 음악 앞에선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됐다. 매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션 연주자들을 초빙, 빈틈 없는 마술 같은 스튜디오 레코딩을 창조했다. 'Billie Jean' 'Man in the Mirror' 'Black or White' 등 그렇게 탄생된 잭슨의 음악은 지구촌 수억 인구에게 감동과 전율, 눈물과 환희로 다가왔다.

 

 

마이클 잭슨은 한동안 팝의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팝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스가 있었다. 하지만 잭슨 뒤로는 아무리 기교가 좋고 인기가 높은 팝 스타라고 해도 갈수록 분화되는 음악 팬들의 다양한 맛을 맞추지 못했다. 커트 코베인,퍼피,머라이어 캐리,셀린 디온,비욘세,라디오헤드도 '아니올시다'였다. 그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마돈나마저 그의 수준엔 못 미쳤다...(생략)... 사실 잭슨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예인이 결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설적 댄서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춤을 칭찬했고 가수로서도 잭슨은 지나치리 만큼 카멜라온이었다. 부드러움과 거침,감칠맛 나는 비통함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생략) ... 특히 음악을 개념화한 뮤지션으로는 아마도 제임스 브라운만이 잭슨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을 듯하다. 잭슨과 선견지명 있는 그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디스코, 소울, 팝을 혼합했다. 사실 그런 음악은 많은 가수가 만들어내 매일 매시간 모든 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들린다. 하지만 잭슨의 노래만 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니 뮤직 사장을 지낸 토미 모톨라는 잭슨을 음악 사업 전체의 주춧돌이 됐던 존재라고 말했다. 안에서 느끼는 그의 삶이 뭐든 간에 밖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분명히 천재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대성공이라고 하든 기묘한 서커스라고 하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적 창의성에서나 예술적인 자기 개조에서나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마이클, 네 솔로 앨범을 내가 만들고 싶은데 말야.” 나는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 어린 놀라움에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미개척지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즈 음악가인 나로서는 소름 끼치는 모험이었지만 말이다. 마이클과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프레디 드맨, 론 와이스너는 에픽 레코즈사를 찾아가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픽 레코즈는 내가 너무 재즈풍이라고 여겨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이클은 사업 수완이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과소평가한 그의 특성 중 하나였다. 마이클은 잭슨 파이브 활동으로 음반 사업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음반사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음반사 측에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겠다고 우겼다. 결국 음반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이클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는 뒤에서 나를 등지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보컬 코치인 세스 릭스가 그를 혹독히 훈련해 음역을 넓혔다. 우리는 마치 전투를 치르듯 앨범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성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이클은 그 앨범(Off The Wall)을 계기로 10대용 버블 검 팝에서 벗어나 1980년대 팝음악의 심장에 자신의 깃발을 확고히 꽂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이클을 내 작은 동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음악 산업을 영구히 바꿔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클이 나를 떠났단 말인가? 그는 내 영혼의 일부였다.

 

 

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고 2015년에는 KBS 연예가중계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됐다. 일본에서는 태풍 마이클이 별명이라고 한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김정은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MBC가 보도했는 데 어린 시절을 유럽에서 살았으니 이상할 거는 없다. 그러나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 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 잭슨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 잭슨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고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었으며 물론 당대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소련은 마이클을 백인에게 영혼을 판 악마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었다. 가만..러시아인들도 사실상 거의 백인 아닌가.. 아마존 주민들도 마이클 잭슨은 알아본다.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게다가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파파라치들을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런 뜨거운 인기를 얻었지만,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에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5%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할 만큼, 93년 성추행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93년 사건 이후 그리고 결혼과 이혼의 반복과, 후에 있었던 또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2005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을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반전됐는데 2014Yougov라는 기관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의 60%가 잭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으로 2위로 뽑는 등 실추된 명예가 회복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 2008'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로 선정했다. 또한 빌보드는 마이클을 2015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 의회가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9.11 테러,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2017년에는 ThoughtCo 매거진의 마크 에드워드 네로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울&알앤비 아티스트 20'에서 1위에 선정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올랐다.

 

간혹 인터넷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 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 Icon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 조차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는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그러나 마이클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04년 쓰인 롤링 스톤의 마이클 잭슨 바이오 그래피를 보면 내용이 가관인 데 첫 줄에 천재라고 썼으면서도 뒤에는 괴물이라고 마이클을 디스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내용에서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고 이게 가십 기사인 지 헷갈릴 지경. 그래도 최근 나온 바이오 그래피는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최종적으로 여러 비평 사이트와 미국 언론들의 마이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면 이렇다. '1970년대 Jackson 5 시절부터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기 아이돌이 됐으며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80년대의 팝 음악계의 음악 산업을 뒤흔들었고 지금까지 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우리 대부분이 공유할 수 있는 마지막 팝 스타로 그의 음악은 굉장히 유비쿼터스하다. 아마 오늘날의 대중문화 영웅들은 성취할 수 없는 수준(유명세,팝적 인기)이자 제임스 브라운 이후 그의 음악과 춤은 흑인음악의 가장 강력한 절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감당치 못 할 수준의 엄청난 성공과 재능은 그를 은둔 생활로 몰았으며 사생활 문제는 그를 너무 멀리 보냈다.'

 

 

댄스와 비디오 같은 비주얼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잭슨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엄청난 능력을 간과 당한다.

 

 

마이클은 자서전 문워커에서 사람들이 나를 댄스 가수로만 알고 나의 작곡 능력을 몰라본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사람들이 "이 곡 누가 만들었어?"라고 물을 때마다 슬프다고, 편견과 달리 마이클은 자신의 빌보드 113곡 중 8곡은 단독, 1곡은 공동으로 작곡했고 2002년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어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대표적인 단독 작사/작곡 곡으로는 Billie Jean, Beat It, Smooth Criminal, Heal The World 등이 있고 공동 작사/작곡으로는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한 We Are The World, 폴 매카트니와 함께한 Say Say Say 등이 있다. 현재 미국저작권협회 BMI에 등록돼 있는 잭슨의 단독/공동 작곡 곡들은 총 200곡이 넘는다.

 

마이클이 작곡을 하는 방식은 떠오른 선율들을 비트박스로 표현하여 테이프로 녹음한 뒤 이를 다른 뮤지션을 시켜 악보로 옮겨 적게 했다고 한다. 사실상 작곡과 동시에 편곡도 어느정도 체계가 잡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입으로 음음거리면서 베이스 라인을 녹음하고, 그 위에 비트를 빌드업시키고 멜로디를 얹는 방식으로 데모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디가 없던 시절 입으로 프로그래밍을 한셈. 이런 방식은 대중음악 업계에서도 매우 독특하다고 소문이 나있는데 보통 아티스트들은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악기를 이용하며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작곡을 공부했다며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차이코프스키를 언급했고 그의 호두까기 인형 앨범에서 큰 영감을 받았는 데 대부분의 팝 앨범들이 몇몇 곡만 좋지, 나머지는 Side-B면에 넣는 형편없는 곡들로 채워 넣었다며 자신은 호두까기 앨범 처럼 모든 곡들이 히트할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어 한다며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곡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였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기타 연습을 위해 만든 손가락 연습곡을 바탕으로도 새로운 곡을 만들어 냈고, 최고의 작곡 훈련을 받은 뮤지션들도 마이클을 보고 종종 놀랐다고 한다. 드림윅스 레코드사의 존 맥클레인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작곡가 중 한명으로 마이클을 뽑았다. Invincible 앨범 작업을 함께한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도 마이클은 음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2015년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100인에 마이클이 조지 해리슨, 엘튼 존, 빌리 조엘, 마빈 게이,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 등을 제치고 34위에 선정됐으나 리스트를 보면 실제 전문 작곡가들은 소외됐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들이 주로 구성되어 있어 인지도가 고려된 것으로 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명단은 아닌 것 같다.

 

 

 

마이클 잭슨은 대단한 멜로디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요. 제가 백만년이 지나도 절대 생각할 수 없을 것들을 떠올릴 수 있죠.

 

 

그룹 토토의 맴버이자 작곡가 스티브 포카로/ 1987년 피플 매거진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정확한 음악적 직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의 머릿속에는 곡이 앞으로 어떤 레코딩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었죠. 이건 정말 흔치 않은 작업 방식인데, 보통의 경우에 사람들은 기타리스트를 고용하면 "여기 코드가 있습니다. 이렇게 소리가 나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요청을 하죠. 그러면 기타리스트가 나중에 사운드를 구상해서 가지고 옵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아니에요. 마이클은 모든 리듬과 음, 코드를 전부 입으로 표현해요. 근데 그게 너무 기가 막혀요. 어떤 사운드가 나와야 하는지 아주 정확히 표현하죠.

 

 

프로듀서 빌 보트렐/ 2004SoundOnSound 매거진 인터뷰

 

 

 

엔지니어들과 프로듀서들은 마이클이 곡을 스튜디오에 가지고 오면 함께 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들조차도 마이클의 천재성에 놀라곤 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롭 호프만은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어느날 아침 마이클이 밤새도록 작곡한 곡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는 기타리스트를 불렀고, 마이클은 각 코드의 모든 음을 그에게 노래로 들려주었습니다. "여기가 첫번째 코드고 첫번째 음입니다. 두번째 음, 세번째 음.. 또 여기는 두번째 코드의 첫번째 음, 두번째 음, 세번째 음..." 그리고 우리는 마이클이 음향조정실의 SM57 마이크를 가지고 가장 감동적이고 깊이 있는 보컬을 들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이클은 우리에게 곡의 전체 현악 배치와 모든 파트를 노래해 들려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마이클이 작업실에서 현악기 파트를 노래하는 것을 본 스티브 포카로가 저에게 직접 그것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여덟 마디를 반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마이클의 머릿속에는 곡의 하모니를 포함한 모든 구성 요소가 다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곡의 전체 구성을 미니 카세트에 녹음해 두곤 했습니다.'

 

 

NME/ 20144'The Incredible Way Michael Jackson Wrote Music'

 

 

 

악보와 악기에 의지하지 않는, 다소 변칙적이지만 직관적인 마이클 잭슨의 작곡 스타일은 특히 90년대 이후 컨템포러리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규 음악 교육 대신에 뒤늦게 작곡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기초적인 화성 진행을 통해 이론적으로 구현되는 멜로디 구성에는 능숙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부적인 멜로디 메이커 중 한명이었다. 엘튼 존이나 폴 매카트니와 같은 초강력 멜로디 머쉰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대신 창의적인 전천후 멜로디 메이커였고, 뛰어난 연주자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기에 동시에 능해 머릿속으로 구상한 소리들을 구현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만 화성이나 코드진행의 정격성보다는 입으로 불러진 자유로운 멜로디 구성에 훨씬 능했는데, 이것은 다분히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폴 매카트니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여기에 리듬과 편곡이라는 요소를 더욱 적극 활용함으로써 "작곡->편곡->프로듀싱"이라는 관습적인 녹음 방식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그와 작업한 프로듀서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 잭슨은 때때로 머릿속에서 편곡이 완성된 곡을 입으로 직접 불러내어 스튜디오에서 즉흥적으로 녹음으로 적용시켜 내기도 했으며, 특히 댄스 곡들의 경우 특별히 정해진 악곡 구성이나 화성의 진행이 없이 리듬과 즉흥적인 멜로디의 연결만으로 훌륭한 곡을 완성시키곤 했다.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을 보였는데 잭슨스 시절부터 형제들과 함께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성인 이후 첫 솔로작인 1979Off The Wall 앨범부터는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잭슨은 1982Thriller 앨범까지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Billie Jean, Beat It 등 본인이 작곡한 곡들에 한해, 1987Bad 앨범은 작곡 여부와 상관없이 전곡을 퀸시와 함께 공동으로 프로듀싱했다. Bad 앨범을 마지막으로 퀸시와의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잭슨은 그 뒤 1991Dangerous 앨범에 빌 보트렐과 뉴 잭 스윙의 창시자인 테디 라일리, 1995HIStory 앨범에는 테리 루이스와 지미 잼, 데이비드 포스터 그리고 2001Invincible 앨범에서는 로드니 저킨스, 베이비 페이스와 같은 프로듀서들을 기용하여 함께 앨범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앨범의 모든 곡들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트랙을 프로듀싱하면서 앨범의 전체적인 제작을 총괄하며 최종 OK 사인을 내린 것은 잭슨이었고 일정 트랙에서만 저들과 함께 작업했기 때문에 앨범 크레딧을 보면 이전 Bad 앨범까지는 퀸시가 이름을 올렸던 메인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항목에 Dangerous 앨범부터는 잭슨의 이름만 단독으로 올라가 있다.

 

잭슨이 단독으로 프로듀싱한 곡들로는 They Don't Care About Us, Stranger In Moscow, D.S, Money, Little Susie, Morphine, Superfly Sister,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등이 있는데 특히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함께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오른 State Of Shock은 잭슨이 작곡, 편곡, 프로듀싱까지 혼자 다 한 곡으로 직접 들어보면 잭슨만의 사운드를 느껴볼 수 있다.

 

 

 

마이클과 함께 빌리진을 믹싱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이클을 정말 좋아해요. 너무나도 재능이 많고 또한 굉장히 공손합니다. 같이 일하기에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죠. 마이클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브루스, 사운드가 완벽해요. 하지만 한 번만 더 해볼 수 있을까요?" 저는 흔쾌히 다시 믹싱을 했고 우리는 그렇게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했습니다.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 2012년 세일 대학교 강연

 

 

 

마이클은 자신이 원하는 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이클은 아주 실천적이어서 믹싱을 할 때에도 항상 함께하고, 세밀한 레벨조정 등의 작업에도 함께합니다. 항상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보컬 녹음에도 완벽주의여서 트랙의 사운드 퀄리티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음이 되느냐 하는 방법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예를 들면 펀치가 부족한 음이 있는 경우에 어떤 이펙트 처리가 필요한지를 금방 압니다. EQ의 주파수 포인트까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우리들에게 맡겨 버리고, 한번 노래를 부르고 나면 다시는 스튜디오에 오질 않습니다. 믹싱은 소리만 좋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지만 마이클은 몇 시에라도 매일 반드시 스튜디오에 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마이클의 곡의 믹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은 밤 10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서, 마이클은 "믹스를 들을 수 있는 있는 건 몇 시쯤이 될까?"라고 물어보길래, "아마 새벽 3시 정도일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이클은 놀랍게도 새벽 3시 정각에 스튜디오에 나타나 ", 들어봅시다"라고 하더군요. 그는 음악에 대해서는 진지합니다. 그래서 그의 앨범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고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보다도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일 겁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내고 싶은 새로운 사운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우리들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진지하게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음에 따라갈 수가 없어요. 어중간한 자세로는 어림도 없죠. 마이클이 원하는 바로 그 음이 아니면 OK되질 않습니다. 그게 그의 방식입니다. 믹스에 관해서도 항상 완벽함이 요구됐습니다. 상당히 큰 공부가 되었죠.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 2002년 음향 잡지 Sound & Recording 인터뷰

 

 

 

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단짝이면서 잭슨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가 된 레코딩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의 손으로 마무리 된 MJ의 강렬한 레코딩 사운드는 그 모든 음악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한때 잭슨의 'Dangerous'는 거의 모든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레퍼런스 소스로 쓰였으며 'Bad'의 경우에도 스피커나 플레이어의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잭슨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 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녹음실과 장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마스터링 엔지니어는 수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동시에 작업한다. 그런데 왜 유독 MJ의 음반은 자주 최고의 레코딩으로 거론되곤 하는가? 그의 음반에는 유독 다른 가수들이 쓰지 않는 새로운 테크닉과 장비들이 동원되기라도 하는걸까? 여기서 우리는 현대 대중음악에서 좋은 '사운드'란 단지 마스터링 엔지니어들의 개인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디지털 소스나 프로그램 반주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최근의 음악들은 이미 음원의 선택과 조합 과정에서 그 음의 특색이 상당부분 정해지며 여기서 잘 조화된 음악들이 결국 믹싱이나 마스터링 공정을 통해서 완전히 가다듬어지게 되게 마련이다. 흔히 우리가 "음질"이라고 생각하는 상당부분 역시 결국 "음원의 선택"이나 "균형감 있는 편곡"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많으며 다시 말해 좋은 사운드를 가진 최종 결과물이란 좋은 소리를 구분해 조합하는 최전방 전선의 뮤지션과 프로듀서의 안목이 선행 되어 만들어지는 작업일 때만이 가능해 진다는 것. 음에 관한한 오디오 마니아 수준의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잭슨의 '좋은 귀'가 이런 소소한 설정을 가능케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한 악기, 한 효과음의 선택에도 직접 관여했고 특히 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퀸시 존스가 떠난 이후 만들어진 'Dangerous', 'HiStory', 'Invincible'에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은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음반의 메인 프로듀서 위치로까지 격상되었다. 물론 레코딩 마스터 스웨디언의 비중은 과소평가되어선 안된다. 그는 믹 구저스키, 알 슈미트, 제프 에머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대 다섯명 안에 꼽을 레코딩/믹싱의 장인이며 잭슨의 앨범으로만 세번의 그래미를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HiStory""Invincible" 등 후기의 앨범들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겸하기도 했다. Acusonic Recording Process 이라 불리는, 악기 하나 하나에까지 스테레오 사운드로 녹음해 최종 믹싱 과정에서 다양한 공간감과 효과를 이끌어 내는 특유의 녹음 및 믹싱방식은 악기 장르와 인종의 장벽을 넘나들기를 원했던 마이클 잭슨의 파워풀한 댄스 뮤직에는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테크닉이었다. 필 콜린스, 핑크 플로이드, 토토, 피터 가브리엘, 마돈나, 스틸리 댄.. 팝 음악을 소리의 예술로 승화시키곤 했던 80년대의 거장들의 이름 몇몇을 더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유독 언제나 그 흐름과 경향을 리드하는 몇 안 되는 프론티어였다. 그는 멜로디와 가사로 전달되는 대중음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이 최상의 결과물로서 빛나게 할 수 있도록 편곡, 프로듀싱, 녹음, 마스터링 등 일련의 후반 작업과 부가 작업에는 누구보다도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했다.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한편 마이클이 악기를 잘 다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이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단 한 번도 마이클이 공식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앨범 크레딧에 있는 곡 정보와 주변인들의 발언을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먼저 'Earth Song'에서 기타, 퍼커션, 키보드, 신디사이저, 드럼 연주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고 'Morphine'에서는 드럼 단독, 기타는 슬래쉬와 공동, 퍼커션은 브라이언 로렌, 브래드 부서와 함께 연주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Unbreakable', 'You Rock My World', 'Threatened'에서는 로드니 저킨스와 함께 그리고 'Break Of Dawn'에선 로드니 저킨스, 닥터 프리즈, 테디 라일리와 함께 모든 악기를 연주했다고 나와 있다. 또 사운드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브루스 스웨디언은 'Don't Be Messing Around'에서 마이클이 피아노 연주를 아주 잘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스파이크 리 영화 감독도 배드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마이클이 실제로 피아노를 잘 쳤다고 밝혔다. 또 아일랜드의 음악 사업가 패디 던닝은 마이클이 2006년 아일랜드에서 본인의 집에 잠시 머물렀을 때 비틀즈의 곡들을 드럼, 피아노, 기타를 치며 들려줬는데 실력이 매우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물론 단순히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거나 주변인들의 목격담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앞서 말했듯이 마이클이 수준급의 연주자였는가를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와는 별개로 일단 마이클이 여러 악기에 두루 능했다는 것만은 명확한 사실로 보인다.

 






Michael Jackson - black Or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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