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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다-베라 린(Dame Vera Lynn, 1917년∼ )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12.13|조회수161 목록 댓글 0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다-베라 린(Dame Vera Lynn, 1917)

 

 

 

 


 


 

 

베라 린의 도버의 흰 절벽(There’ll Be Bluebirds Over)’ The White Cliffs of Dover

 

영국 남동부 켄트주() 도버항()은 유럽대륙과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이곳과 바다 건너편 프랑스 칼레까지의 거리는 35km 남짓에 불과합니다. 도버항 좌우로는 우뚝 솟아오른 흰 절벽이 8km 가까이 이어져 있습니다. 공룡이 살았던 백악기로부터 수천만 년 동안 플랑크톤의 사체가 쌓이고 쌓여 형성된 이 절벽은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200m가 훌쩍 넘습니다. 앨비언(하얀 나라)이란 영국의 별칭도 바로 이 흰 절벽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지난 320일 밤, 도버의 흰 절벽은 거대한 스크린이 되었습니다. BBC의 대형영사기가 도버의 절벽을 스크린 삼아 투사한 영상은 날아가는 새떼와 유니언 잭에 이어 한 여성의 모습을 비췄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라 린’(1917.3.20.~ ), 2차대전 당시 군인의 연인’(The Forces’ Sweetheart)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이자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특별히 마련된 이날 영상쇼가 펼쳐지는 동안 스피커에선 베라 린의 히트곡 도버의 흰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이 흘렀습니다. 시간은 7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0년 여름 영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습니다. 프랑스는 이미 히틀러에 무릎을 꿇었고, 서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나치 독일이 언제라도 좁은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밀어닥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세기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에게 정복된 후 1000년 가까이 외침을 당한 적 없는 영국이었지만, 이제 독일의 침공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미국은 아직 참전을 망설이고 있었고, 영국에겐 승산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독일의 공격은 하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이 섬나라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영불해협을 건너야 했지만,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독일은 공군력에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독일이 침공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우선 영불해협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해 연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이곳에 영국 공습에 필요한 항공 전력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노련한 조종사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 신참 파일럿들이 대부분이었고, 숫자마저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훗날 영국본토 공방전’(Battle of Britain)으로 불리게 될 거대한 공중전의 전초전은 도버 해협 상공에서 벌어졌습니다. 영국을 폭격하기 위해 날아오는 독일 조종사나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날아오른 영국 조종사들 모두에게 아스라이 발밑에 보이는 도버의 흰 절벽은 이곳이 생사가 결정되는 최전선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중전이 벌어지는 장소는 점차 도버 해협 상공에서 영국 내륙 안쪽으로 이동했습니다. 8월초부터 독일 공군은 주로 영국 남동부 해안의 군사시설과 도시들을 폭격했는데,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 산업시설 등이 독일 공군의 주된 목표가 되었습니다.

 

815일엔 단 하루 동안 1,000대가 넘는 독일 공군기가 몰려오면서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영국 공군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특히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어 비행을 하지 못하는 조종사들이 늘어나면서 이를 보충할 파일럿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손실된 항공기는 어떻게든 생산을 한다고 하더라도 조종사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새로 보충되는 조종사는 전사자와 부상자의 1/3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관 다우닝 장군의 이름을 따서 다우닝의 병아리들이라고 불렸던 20대 초반의 파일럿들은 영공으로 몰려오는 독일기를 맞아 용감히 싸웠지만, 출격이 이어지면서 그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캐나다나 호주 같은 영연방 국가는 물론, 이미 독일에 항복한 폴란드와 체코의 망명 조종사들까지 투입해서 독일공군과 대적했지만 조종사 수급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습니다. 살아남은 조종사들의 피로도 극에 달했습니다.

 

독일은 영국 상륙전을 단행하기에 앞서 최대한 영국 전투기의 숫자를 줄이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어차피 소모전으로 가면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준비해 왔던 자신들에게 유리할 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보급기지와 비행장이 목표가 되면서 영국 공군이 빈사상태로 내몰리던 824일 밤, 템즈강 하구의 공장지대 폭격에 나섰던 독일 폭격기 2대가 하늘에서 길을 잃고 런던 중심지로 날아와서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오폭으로 수십 명의 런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처칠 총리는 바로 베를린을 보복 폭격할 것을 명령했고, 다음날 영국 폭격기들이 베를린에 야간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대노한 히틀러는 독일공군에게 런던 공습을 명령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은 궤멸 직전이었던 영국 공군에게는 오히려 숨통을 틔워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97일부터 무려 76일 동안이나 런던에는 매일같이 공습이 이어졌고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48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는 7만 명에 달했습니다. 히틀러가 노렸던 것은 영국인들 마음속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폭격을 통해 영국인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공포를 불러일으켜서 자신들의 정부를 압박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런던 시민들은 나치의 공습을 의연하게 견뎌냈습니다. 소방대원은 떨어지는 폭탄을 뚫고 불길과 싸우며 시민의 생명을 구했고, 민간인으로 편성된 방공감시단은 적기를 발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습니다. 공습기간 런던의 지하철역은 방공호로 활용 되었는데, 일부 역사는 학교나 도서관이 되어 야간강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공습이라는 유래 없는 대재앙 앞에서도 런던 시민들은 낙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상을 이어갔던 겁니다.

 

독일군의 폭탄은 영국 국왕 조지 6부부가 거주하던 버킹엄 궁전에도 떨어졌는데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제야 폭격에 희생당한 국민들 볼 면목이 생겼다. 폭격 덕분에 그동안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왕궁 벽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여러분들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실도 서민들과 똑같이 고통을 분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영국 국민들은 런던은 견딜 수 있다는 말로 화답했습니다. 히틀러의 예상과는 달리 공습이 오히려 영국인들을 단합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겁니다.

 

공습이라는 한정된 자원으로 영국 공군의 숨통을 끊는 대신 런던에 분풀이를 했던 히틀러는 결국 917일 영국 상륙작전의 무기한 연기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작전은 영원히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월터 켄트가 지은 곡에 냇 버튼이 가사를 붙인 도버의 흰 절벽이 세상에 나온 것은 이듬해 11월이었습니다. 글렌 밀러 밴드가 연주곡으로 녹음하고 몇몇 가수들도 이 곡을 불렀지만, 1942년 베라 린이 취입한 곡의 인기를 따라오지는 못했습니다. 1939년 발표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We'll Meet Again)로 스타덤에 올랐던 베라 린은 이 노래를 통해 영국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도버의 흰 절벽 너머에는 파랑새가 있을 거야.” 곡에 등장하는 파랑새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푸른 유니폼을 입은 영국 공군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성난 하늘로 날아올랐던 용감한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평화가 찾아오면 목동이 다시 양떼를 돌보고, 지미(Jimmy) 역시 자신의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중 베라 린은 이집트와 인도, 버마 등지를 순회하면서 연합군을 위한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의 노래는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고향을 떠나 온 군인들의 향수를 달래주었죠. 이런 그에게 군인의 연인’(The Forces' Sweetheart)이란 애칭이 붙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영국 왕실은 베라 린에게 남성의 기사(騎士)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수여해 치하했습니다.

영국항공전에서 활약했던 전투기 앞에 선 베라 린. 올해 100세를 맞은 베라 린의 노래는 지금도 영국 국민들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출처 = 베라 린 홈페이지)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도버의 흰 절벽2차대전 시기를 대표하는 노래로 지금도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79, 2차대전 발발 70주년을 기념해서 발매한 베라 린 선곡집은 비틀즈의 디지컬 리마스터 음반과 악틱 몽키스’, ‘킹스 오브 레온같은 인기 록밴드를 제치고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베라 린은 지난 3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새 앨범을 내놓았습니다. 대표곡 중 일부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돼 수록된 이 앨범으로 그는 지난 201497세의 나이로 자신이 세운 최고령 앨범 발매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베라 린은 새 앨범 발매에 즈음한 인터뷰에서 한 세기를 살아온 소회에 대해 노래와 춤, 우정에 관한 믿을 수 없는 모험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317, 100번째 생일을 사흘 앞두고 발매된 기념 음반. 이 음반으로 베라 린은 최고령 앨범 발매 기록을 세웠습니다. 영국인들이 70년이 훨씬 넘은 노래를 아직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이 노래가 나치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함께 견디고 극복하면서 만들어냈던, 그들 최고의 순간’(The Finest Hour)을 떠올리기 때문일 겁니다. 노래가 가진 힘은 위대합니다.

 






Dame Vera Lynn - The Holy City



Vera Lynn - Land of Hope and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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