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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년∼1901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1.01.24|조회수703 목록 댓글 0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년∼1901년)

 

 

 

 

 

 

그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뼈가 극히 약했던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평생 멈춰 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때문에 사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엄청난 단신이었는데, 한번은 술집에서 스케치를 하다가 연필을 놓고 가려고 하자 옆에서 술마시던 손님이 "무슈, 지팡이 두고 가셨구려"라고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고...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없는 아들 취급하였기에 어릴 적부터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어머니가 반발하여 열심히 돌봤기에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고 죽을 때도 어머니가 곁을 지켰다. 장애 때문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예술 활동에 몰두한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당대 파리의 거장 화가였던 레옹 보나(Leon Bonnat)에게서 예술 교육을 받은 이후 몽마르트 언덕에 정착한다.

 

어머니와 달리 아들을 무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로 유명해질 무렵에 찾아와서는 집에 두었던 그의 여러 그림들을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로트렉은 아버지를 증오했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이래놓고 사후 아들의 작품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되면서 그제서야 아들의 진가를 인정한다고 했으나 언론 관심을 받자 하던 짓이라 어머니는 이걸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 시기 고흐와 교류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 무용수나 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 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 이와 같은 도시 하층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툴루즈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Eduardo Vuillard)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매춘과 더불어 툴루즈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마셨고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게다가 매춘에서 얻은 매독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툴루즈는 1901년 9월 9일, 만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유언은 Le vieux con!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던 그림상 모리스 조이앵은 그가 죽자 그를 기리며 로트렉 미술관을 세웠으며 어머니도 여기에 많은 돈을 내면서 도와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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