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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확장의 원동력, 긍휼 ■말씀: 마 9:36-10:8, (9-23)

작성자강경호|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하나님 나라 확장의 원동력, 긍휼

■말씀: 마 9:36-10:8, (9-23)

■주제: 하나님 나라 선교는 긍휼에서 시작된다.

■교리: 긍휼, 제자도, 선교적 삶

■이미지: 감수성

■필요: 성도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제자의 삶은 긍휼에서부터 시작됨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미션: 성도는 부활을 경험한 성도로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다.

■설교 형태: 4TS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10/1 1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본문 배경

마태복음은 크게 5개의 강화와 5개의 내러티브가 교차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5-7장은 산상수훈, 즉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 성품과 윤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고, 10장은 제자 파송의 장이다. 13장은 천국 비유장이고, 18장은 교회 공동체 강화장이고, 24-25장은 종말 강화장이다. 그리고 첫 번째 내러티브는 1장에 족보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고, 두 번째 내러티브는 8-9장에 치유에 관한 내러티브이고, 세 번째 내러티브는 11-12장에 예수님에 대한 반응과 갈등에 관한 내러티브이고, 네 번째는 13:53-17:27에 제자 공동체 형성에 관한 내러티브이고, 다섯 번째 내러티브는 19:1-23:39에 예루살렘을 향한 길과 심판 내러티브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5-9장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셨다. 그리고 4:23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는 말씀은 9:35절에서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9:35에서 단독 사역을 일단락 지으시고, 이제 10장(파송 강화)에서는 제자들을 세워 그 권능을 이양하시고 세상으로 파송하심으로 사역의 복제와 확장을 시도한다. 단독 사역에서 공동 사역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본문 바로 앞에는(9:32-34) 말 못 하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자 무리는 놀라워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라며 적대감을 드러낸다. 뒤로 이어지는 말씀(10:24-42)은 파송받은 사도들이 당면할 실제적인 저항과 핍박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은 성령 강림 주일과 삼위일체 주일을 지나 성령의 임재 속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오순절 이후 기간의 초입부에 위치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부활, 승천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적 사건들을 통과한 교회가 이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선교적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령 강림 사건은 언어와 인종, 국경의 장벽을 허물었고, 성령강림절 이후 주일 말씀은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온 천하 만민에게 흘러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단순한 친목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고 보냄을 받은 ‘선교적 공동체’임을 선언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선교적·제자도 신학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9:36의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이라”라는 말씀은 선교적 동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교와 전도는 의무감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예수님읠 긍휼(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에서 출발함을 보여준다. 37-38에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라는 말씀은 기도와 준비, 즉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추수하시는 주인(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탁과 기도로 시작된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10:1의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는 말씀은 권능의 위임, 즉 주님은 우리를 맨몸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성령의 권능(오순절 사건)을 제자들에게 이양하셔서 보내신다. 10:7-8은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잃어버린 양들)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선포하고 치유를 베풀라는 명령이다. 마지막으로 10:8에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라는 말씀은 거주 주는 은혜에 대한 말씀이다. 복음의 원리는 세상의 시장 경제가 아니라 은혜의 경제학임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신학적 메시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신학적 메시지는 ‘선교적 삶의 동력, 긍휼’이다. 마태복음 9:36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불쌍이 여기셨다”라고 증언한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의학에서 ‘창자, 내장’을 뜻하는 단어였다. 즉 단순히 감정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신체적 고통’을 묘사한다. 이 긍휼이 마태복음 10장에서 파송하는 유일한 원동력이 된다. 칼뱅은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구절을 다루면서, 지도자들의 부패로 인해 영적으로 방황하는 백성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목자적 심정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서 참된 목자를 잃고 고사해 가는 영혼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들어 하나님께 일꾼을 보내 날라고 간구해야 하는 비결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불타는 애끓는 사랑에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선교적 기도가 주님의 긍휼을 품는 일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고통과 십자가를 깊이 다루었는데, 그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무관한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에게 긍휼은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받는 하나님의 연대였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 관점에서 교회의 긍휼 사역은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견디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역이다. 그뿐만 아니라 월터 브루그만은 ‘긍휼은 제국의 무감각에 맞서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의 예언자 전통을 통해 긍휼을 사회적·예언자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제국과 권력 체제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고통을 정상화한다고 보았다. 이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의 고통을 다시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긍휼은 단지 개인적 친절이 아니라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을 듣고, 불의한 구조를 흔드는 예언자적 감수성이다. 출애굽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나님은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사회적 해방과 정의의 동력이 된다.

 

설교문

I. 서론

오늘은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주신 말씀은 마태복음 9:35-10:8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의 원동력, 긍휼”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치명적인 질병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다양한 질병이 우리를 괴롭히기는 하지만, 현대 문명과 관련해서 볼 때, ‘연결의 과잉’ 속에서 찾아오는 ‘친밀함의 파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외로움과 고립의 거대한 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 지표에 의하면, “내가 몸이 아프거나 낙심했을 때, 대화하거나 도움을 청할 사

람이 단 한 명도 없다”라고 응답한 우리 사회의 ‘사회적 고립도’는 34.1%에 육박했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은 완벽하게 혼자 버려져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보건복지부의 고독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 해 동안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수일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는 고독사 수치가 해마다 급증하여 연간 3,600건을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구 통계조사가 아니라,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하고 정밀한 기계 장치 속에서, 인간 영혼이 부품처럼 마모되다가 아무도 모르게 폐기처분되는 듯한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영국의 진화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폴 길버트(Paul Gilbert)는 그의 저서 『치유하는 마음』(The Compassionate Mind)에서 현대인의 뇌 구조가 심각한 불균형에 빠져 있다고 진단합니다. 인간의 뇌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위협-방어 시스템(Threat System)’과 성취와 자원을 획득하려는 ‘추구 시스템(Drive System)’, 그리고 타인과 유대감을 맺으며 평안을 누리는 ‘돌봄-안정 시스템(Soothing System)’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움직이는데,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과 끝없는 생존 경쟁 구조를 부추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뇌 속에서 ‘위협 시스템’과 ‘추구 시스템’의 볼륨만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내면은 늘 불안과 분노, 코르티솔 호르몬의 중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고 나를 안정시키는 ‘돌봄과 안정의 시스템’, 즉 ‘긍휼의 주파수’를 완벽하게 꺼져버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수전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미디어와 스크린을 통해 타인의 비극을 청쥐하지만, 그것은 그저 감각을 자극하는 스텍터클로 소비될 뿐, 우리의 전두엽과 심장을 울리는 실제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합니다. 타인의 슬픔은 그저 ‘지나가는 풍경’일 뿐입니다. 이러한 긍휼의 부재 현상 속에서 떠오르는 시 한구절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우리가 눈물이 없다면>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메라는 세상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눈물이 없다면 분노가 없다면

무엇으로 이 세상의 썩어가는 것을을 씻어내랴

어머니의 눈물이 어린아이의 눈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물인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니요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리

 

시인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 감각을 상실했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무너진 인간성을 회복하고, 파산된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그 유일한 힘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거울삼아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고, 그 나라의 군대로 부름받은 사도적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건(이야기)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요약이자, 새로운 거사를 앞둔 웅장한 서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셨는데, 그분의 발걸음은 안락한 성전이나 랍비의 상좌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착취와 대지주들의 횡포로 인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뽑힌 갈릴리의 가난한 민초들이 거주하는 민중의 삶의 사리로 직접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르치셨고, 깨어진 세상의 통치권이 끝나고 하나님의 왕권이 수립되었음을 전파하시고, 질병과 약한 것에 신음하는 이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사건의 정점은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불쌍히’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상적인 연민을 느끼거나 동정심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장, 허파와 심장과 간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약 히브리적 사유 속에서는 어머니의 태반, 혹은 창자를 뜻하는 단어와 일맥상통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느끼신 긍휼은 타인의 고통을 목도하는 순간, 자신의 창자가 사지 방향으로 찢어지고 끊어지는 듯한 신체적이고도 전인적인 통증을 느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심정으로 무리를 “목자 없은 양같이”보셨습니다. 그들이 고생하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 단어는 가죽을 벗기고, 난도질 당하는 끔찍할 정도의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직시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 백성들의 영혼의 가죽을 벗겨 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진하다는 말의 의미는 ‘내 팽개쳐지다’, ‘거리에 내던져벼 방치되다’라는 의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지 못해 이리 저리 유리하다가, 가시덤불에 걸려 가죽이 찢긴 채 뙤약볕이 내리쬐는 광야 한복판에 처참하게 내던져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가죽이 벗겨진 채 버려진 양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고, 그 순간 메시아의 내장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을 향해 독특한 메타포를 던지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은 심판의 때가 임박했고,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들판의 곡식처럼 무르익었으나 그들을 거두어들일 참된 영적 지도자가 없다는 탄식입니다. 그리고 사건은 반전됩니다. 38절에서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의 주체가 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10:1에서 제자들 자신을 보내시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10:1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더루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35절에 예수님께서 혼자 감당하셨던 사역을 이제 열두 제자에게 이양하고 있습니다. 위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12명의 명단을 하나하나 나열합니다. 가룟 유다에 이르기까지, 이 명단은 화려한 영웅들의 명단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충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던 세리 마태, 민족주의 혁명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 등 깨어진 인간들의 모자이크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녹아내려 하나님 나라 군대, 즉 사도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 이 말씀은 구속사적 우선순위의 선언이었는데, 구원의 첫 번째 수혜자는 가죽이 벗겨지고 내팽개쳐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전파할 내용은 단 한가지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앓는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모든 선교적 명령의 기초가 되는 사도적 삶의 대헌장, 즉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문장의 명령으로 인해 갈릴리의 어부와 세리는 온 세상을 뒤흔들 하나님의 거대한 군사로 출정식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2. 오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너희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재건할 황의 군대’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버려진 자들이 아니라 너희야말로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눈물이 머무는 하나님 나라의 진짜 주인공이고, 새로운 시대을 열어갈 영적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낙인찍혀 가죽이 벗겨지고 버려진 군중을 향해 손을 내미시면서 회당에서 쫒겨난 초대교회 성들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서기 70년, 유대 민족의 심장이자 하나님의 임재 처소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대재앙 앞에서 유대교는 존재론적 붕괴를 맞이했습니다.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하던 사두개파와 제사장 그룹은 역사 속으로 소멸해 버렸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유대교의 유일한 분파가 있었으니, 바로 율법을 연구하던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인근의 ‘야브네(Jamnia)’라는 도시에 모여, 성전이 없는 시대에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재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브네 공의회’입니다. 바리새파 랍비들이 주도한 이 재편 사역의 핵심 전략은 ‘철저한 경계선 긋기’와 ‘내부 정화 작업’ 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노선과 다른 이단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서기 80년경 랍비 유대교는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는 가난한 민초들을 ‘땅의 사람들(암 하아레츠, Am ha-Aretz)’이라 부르며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고,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회당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18개 축복기도문(Shemoneh Esreh)’의 12번째 조항에 이단자를 저주하는 문구(비르캇 하미닌)를 삽입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공

식적으로 출교(Excommunication)시켰습니다.

마태복음의 일차 독자들은 바로 이 ‘회당 출교’라는 사회적·종교적 사망 선고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었습니다. 유대 사회 전체로부터 배척당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박탈당한 채, “우리가 과연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라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과 신앙적 고립감에 신음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마태는 바로 그들을 향해 이 복음서를 집필한 것입니다.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모세오경(Pentateuch) 구조를 차용하여 복음서를 정확히 다섯 개의 거대한 강론(Discourse) 구조로 정교하게 기획했습니다. 5-7장의 산상수훈(제1강화), 10장의 파송 강화(제2강화), 13장의 천국 비유(제3강화), 18장의 공동체 지침(제4강화), 23-25장의 종말론 강화(제5강화)가 그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의 모세를 뛰어넘는 '새로운 율법의 완성자(새 모세)'이시며, 예수의 말씀이 성전 파괴 이후 방황하는 백성들이 정초해야 할 ‘새로운 오경’임을 선언하는 문학적·신학적 장치입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이 속한 제2강화를 보게 되면 기록한 목적이 분명해 집니다. 긍휼이라는 시선으로 잃어버린 양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고,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주는 선교적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자 했습니다.

 

3,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규범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규범은 선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긍휼입니다. 마태복음 9:35에서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안타깝게 여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본래 “창자”, “내장”을 뜻하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창자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잠시 안쓰럽게 느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이 흔들리고, 마치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무리를 숫자로 보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무리를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권력자들은 무리를 통제해야 할 백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돌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짐 아래 지치고, 질병과 가난과 죄책감 속에서 기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긍휼은 멀리서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긍휼은 고통받는 사람의 자리로 가까이 가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머무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눈물에서 끝나지 않고 사명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의 긍휼은 마태복음 10장의 파송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그리고 곧바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선교는 전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조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프로그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원동력은 긍휼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으로 보냄받는 이유도 긍휼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긍휼입니다.

칼뱅은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본문을 다루면서, 당시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책임 때문에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백성에게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참된 목자는 없었습니다. 회당은 있었지만, 영혼을 돌보는 목자의 마음은 부족했습니다. 제도는 있었지만, 긍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칼뱅의 해석을 따라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목자를 잃고 고사해 가는 영혼들을 볼 때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늘을 향해 눈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일꾼을 보내 주옵소서.”

“주님, 목자 없는 양들을 돌볼 사람을 세워 주옵소서.”

“주님,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렇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가라.”

“네가 그 일꾼이 되어라.”

“네가 그 양을 돌보아라.”

“네가 그 상처 곁으로 가라.”

 

그러므로 선교적 기도는 단순히 누군가를 보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선교적 기도는 주님의 긍휼을 내 안에 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향해 내 마음이 무감각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긍휼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고, 기도는 우리를 파송으로 이끕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긍휼을 예언자적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그는 성경의 예언자 전통을 통해, 긍휼이 단지 개인적 친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제국의 무감각에 맞서는 예언자적 상상력입니다.

제국과 권력 체제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고통을 숫자로 만듭니다.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음을 통계로 처리합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정상화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다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의 고통을 다시 느끼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익숙해져 버린 고통 앞에서 다시 울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불의 앞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브루그만의 관점에서 긍휼은 단지 착한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을 듣는 영적 감수성입니다. 긍휼은 불의한 구조를 흔드는 예언자적 능력입니다. 긍휼은 세상이 정상이라고 부르는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려오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고, 건져내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해방의 시작입니다. 긍휼은 눈물이지만, 동시에 출애굽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긍휼은 사회적 해방과 정의의 동력입니다. 긍휼은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개인적 친절일 뿐 아니라, 그 고통을 만들어 내는 불의한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4. 우리가 실천할 윤리적 규범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된 윤리적 규범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는 어디에 있을까요? 미국 하와이 제도에 몰로카이 섬이 있는 그곳에 칼라우파파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의 아름다움은 비극적인 과거를 감추고 있습니다. 1848년 하와이에 처음으로 한센병이 발병했습니다. 이 병은 빠르게 번져나갔고, 그 파괴적인 결과로 인해 환자들을 격리 수용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강제 수용 센터가 들어설 곳으로 바로 이 칼라우파라가 선택되었습니다. 그곳은 자연적으로 외진 곳이었고 땅이 비옥하여 완벽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환자들은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환자들은 병들고 나약해져서 견뎌내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1873년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가 7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이곳으로 넘어가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습니다. 그는 이 섬에 도착해서 단순히 종교적 의식만을 집례하는 관조적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그들의 삶의 자리로 파고 들어갔습니다. 썩어 들어가는 환자들의 고름을 직접 짜내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무너진 오두막을 다시 지어주었고, 죽어간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제 손으로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젊음과 건강, 사제로서의 특권을 그들을 위해 ‘거저’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역의 초기, 환자들은 다미안 신부의 헌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미안 신부는 여전히 ‘건강한 백인 사제’였고, 자신들은 ‘저주받은 나병환자’라는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다미안 신부는 매 주일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이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했으나, 그 목소리는 환자들의 마음에 깊이 닿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884년 어느 날 아침, 다미안 신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를 끓이기 위해 주전자의 끓는 물을 발 위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발을 살펴보니 이미 살갗이 데어 물집이 잡혔는데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순간 그는 직감했습니다. 자신에게도 한센병이 찾아왔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두려움이 밀려왔을 법도 하지만, 다미안 신부는 거울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마침내 저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주일, 다미안 신부는 강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꾸고 몰로카이 섬 전체를 뒤흔든 역사적인 설교의 첫 마디를 선포했습니다. 매번 외치던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한센병 환자 여러분(We, Lepers), …”

 

그가 “우리 나병환자들”이라고 외치는 순간, 온 예배당은 통곡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다미안 신부가 타인의 고

통을 멀리서 동정하는 사제가 아니라, 스스로 나병환자가 되어 고통과 완벽하게 일치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

니다. 그의 내장이 찢어지는 긍휼( 스플랑크니조마이)이 그들의 내장과 공명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나병환자로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다가 1889년 49세의 나이로 몰로카이 섬의 흙이 되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삶은 마태복음 10장 8절의 말씀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역사 속에서 육화(Incarnation)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기념비입니다. 그는 거저 받았기에 자신의 온몸까지도 거저 내어준 하나님 나라의 참된 사도였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찬송가 411장(통일, 473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우리의 가죽이 벗겨지고 내팽개쳐진 그 고

통의 현장에서 창자를 찢으시며 함께 우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긍휼의 은혜를 ‘거저 받아’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깨어지고 외로운 세상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에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동일한 시선으로 명령하십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만 하지 말고, 이제는 네가 나의 눈물이 되어라. 네가 나의 창자가 되어라. 네가 세상의 자본주의적 보장의 논리를 거부하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되어 저 외로운 거리에 내던져진 양들에게로 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일상의 사역지에서 우리의 시선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내장이 움직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손을 펴서 우리가 거저 받은 사랑과 물질과 치유의 복음을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흘려보내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딛는 일상의 모든 땅마다 사도적 권능이 나타나고, 무너진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에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해 자본과 각자도생의 논리로 메말라 버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유일한 동력이 오직 주님의 창자 끊어지는 긍휼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사회적 고립 속에서 신음하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죽이 벗겨지고 내팽개쳐진 채 기진해 있는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주님, 세상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그들의 비극을 그저 풍경처럼 바라보았던 우리의 냉소적인 시선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위협과 추구의 스위치’를 끄시고, 타인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감각하는 주님의 거룩한 주파수, 긍휼을 우리 영혼 속에 켜 주시옵소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 왕의 명령을 가슴에 새깁니다. 내가 가진 모든 은사와 생명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비로부터 대가 없이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오니, 이제 우리도 세상의 이익과 계산기를 내려놓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사랑을 대가 없이 흘려보내는 무상성의 윤리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스스로 나병환자가 되어 몰로카이 섬의 버려진 양들과 완벽한 연대를 이루었던 다미안 신부처럼, 말뿐인 동정을 넘어 고통의 현장 한복판으로 우리의 육체를 밀어 넣는 진짜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가정과 직장과 교구가 주님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사도적 선교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참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https://wpa.imweb.me/notice/?bmode=view&idx=171753529&back_url=&t=board&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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