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움켜쥔 용기
■말씀: 마태복음 10:24-39
■주제: 참된 제자는 세상의 거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교리: 제자도, 래디컬
■이미지: 거절의 용기
■필요: 성도는 세상의 위협과 유혹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션: 성도는 세상의 가치관과 맞서 싸우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설교 형태: 성경적 3대지 설교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본문 배경
오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제자의 삶은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것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제자도의 가르침은 가공된 이론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 후반, 실존적 벼랑 끝에 서 있던 마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이정표였다. 기원후 80-90년대는 유대교 역사와 초대교회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고 잔인한 전환기였다.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제사를 중심으로 하던 사두개파와 열심당은 몰락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바리새파는 얌니아(Jamnia, 야브네)에 모여 성전 없는 유대교의 생존 방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단일화하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정립되었다. 얌니아 회의의 결과로, 랍비들은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키고 기독교인들을 분리해 내기 위해 매일 드리는 18개 기도문에 ‘비르카트 하미님(이단자들을 향한 저주)’ 조항을 삽입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은 회당에서 저주를 받으며 쫓겨나야 했다(출교). 당시 유대인들에게 회당에서의 출교는 단순한 종교적 배제가 아니라, 가문과 시장, 법적 보호망 등 모든 사회·경제적 삶의 터전으로부터의 영구적인 격리를 의미했다.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이 로마에 내던 성전세는 이제 로마의 주피터 신전에 바치는 ‘유대인 세금(Fiscus Judaicus)’으로 강제 전환되었다. 로마인들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은 합법 종교(religio licita)인 유대교의 보호막에서 벗어난 불법 이단아들이자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반역자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폭풍 속에서 마태 공동체 성도들은 영적·정서적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동일한 가문 안에서 누구는 유대교에 남고, 누구는 예수를 따르게 되면서 가정이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마태가 묘사한 “아들이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한다”(마 10:35)는 선언은 비유가 아닌, 당장 옆집에서 매일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더욱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회당과 공회(로마 법정)에 밀고하는 비극적인 배신이 횡행했습니다. 혈연의 안전망이 영적 전쟁터로 변해버린 실존적 지옥이었다. 회당에서 저주를 받으며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인지적 부조화에 빠졌다. “우리가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회당이 우리를 저주하는가?” 그들은 심각한 소외감과 영적 고립감을 겪고 있었다. 몸을 죽이고 가문을 빼앗는 세상 권력자들의 실존적 공포 앞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거나(배교) 신앙을 숨기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았다. 마태는 이러한 전방위적 위기에 직면한 공동체를 살려내고, 그들의 무릎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입을 빌려 본문을 기록했다.
마태 공동체 성도들이 가문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는 위기 속에서도 이 말씀을 붙들고 승리했던 이유는 주님이 약속하신 참 생명이 세상의 안전망보다 훨씬 무겁고 영광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저울에 올려진 돈과 가족, 자아실현의 추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자아를 잃어버리는 자가 참 생명을 얻는 이 거룩한 역설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메시지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신학적 메시지는 ‘참된 제자도’이다.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와 종말론적 연합을 경험함으로 세상의 것을 거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수용한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돌보심 속에서 이 땅에서 움켜잡고 있는 안전망을 해체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존재이다. 사실 당시 세상의 거절은 그리스도와 한 식솔이 되었다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제자가 세상에서 마주하는 소외와 박해가 우연한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필연적이고 존재론적인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와 스승, 종과 상전, 가족과 가장의 유비를 점층적으로 사용하신다. 특히 주님이 자신을 ‘집 주인’으로, 제자들을 ‘그 집 사람들’로 명명하신 것은 고대 사회의 연대적 책임을 반영한 말씀이다. 세상이 가장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 불렀다면, 그 식솔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제자들에게 ‘충분함’, 즉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의 실현이 된다.
참된 제자는 세상 권력이 주는 실존적 공포(사회적 매장과 죽음)를 영원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와 그분의 촘촘한 돌보심에 대한 신뢰로 전복시키는 존재이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을 재설정하십니다. 몸밖에 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폭력(로마 제국, 회당 출교자)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거룩한 경외는 공포로 끝나지 않고, 가장 저렴한 화폐 가치인 아싸리온 동전 한 푼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주권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완벽한 사랑의 신뢰로 이어진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세밀한 사랑은 제자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무력화하고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도록 만드는 제자도의 강력한 동력원이 된다. 무엇보다도 참된 제자는 가족과 자아실현을 그리스도 앞에서 해체하고, 비로소 하늘의 참된 생명을 소유하게 된 사람이다. 최초의 십자가 명령은 제국의 반역자처럼 내 삶에 대한 모든 소유권과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하고(Lose), 주님의 통치 아래로 온전히 귀속되는 철저한 ‘자기 죽음’의 결단을 촉구한다. 내 얄팍한 자아실현을 포기한 자만이, 창조주가 태초부터 예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문
서론
오늘은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입니다. 마태복음 10:24-39의 말씀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움켜쥐 용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뭔가를 계속해서 움켜 쥐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움켜쥐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돈, 명예, 권력, 자존심, 인정, 때로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움켜쥐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불안’이라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 이유는 잡으려는 것이 사라질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공포심까지 유발합니다. 사라짐의 공포, 다시 말해서 질병의 공포, 노후에 대한 염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등 현대인들은 누구나 불안과 초조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상실과 불안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나의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우리 내면에 찾아온 허무와 불안은 오늘 우리를 백골처럼 메마르게 하는 마음의 병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에서 인간이 겪는 3대 실존적 불안에 대해서 분석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불안, 무의미의 불안, 그리고 죄책감의 불안입니다. 인간은 이 비존재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존재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도들에게 그를 극복하고 용기있는 삶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하고 가득한 시대 속에서 용기 있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영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선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4-25절의 말씀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해석
24절을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선생이 제자보다 지위가 높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제자는 선생에게 지식을 전달받는 학생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는 선생과 함께 생활하며 선생의 말투와 행동, 생각과 가치관, 삶의 방식까지 닮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선생 같으면 족하다”는 말씀은 제자의 완성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제자의 완성은 선생을 넘어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자의 완성은 선생을 닮는 데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남보다 높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주님은 “높아지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와 같아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성공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닮음을 기준으로 제자를 평가합니다. 얼마나 크게 성공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닮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가보다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영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거절과 고난까지도 함께있다는 사실입니다. 25절을 보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한 일을 악한 일로 왜곡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베푸셨지만 오해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셨지만 비난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예수님을 닮아 살아간다면, 언제나 박수만 받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무례하고 독선 때문에 고난을 받을 있지만,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세상의 가치와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원리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아짐 없는 높아짐도 없습니다. 죽음 없는 새 새명도 없습니다. 참된 은혜는 편안히 눞혀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참된 은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십자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감당할 힘을 줍니다.
적용
영화 <미션>을 보면 남미 원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선교사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고, 안전한 곳으로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섬기던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약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도망갈 방법이 없어서 남은 것도 아닙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남았습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 도망가라고 말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어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능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이제 기도의 내용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예수님, 내 자녀를 잘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내 사업을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아니라
“주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보다 문제 속에서 주님을 닮게 해 주십시오.”
“주님, 성공하는 것보다 정직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주님, 인정받는 것보다 충성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편안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의 용서는 거대한 사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일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말 한마디를 참는 것,
잘못을 인정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정직하게 보고하는 것,
외로운 사람 곁에 앉아 주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작은 일들이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움켜쥐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용기 있는 제자의 삶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겠다는 교만한 선언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제자는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반듯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소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해서 엄습해오고 있는 이 시대에 불안을 이기고 용기있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용기는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움켜쥔 신앙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용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455장의 가사처럼 주님의 마음을 본받음으로 용기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선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6-31절의 말씀입니다.
26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해석
오늘 말씀을 보면, 26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31에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사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두려웠습니다. 박해가 두려웠습니다. 비난이 두려었습니다.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면 믿음이 없다”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두려움을 이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26에 보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거짓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인정받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진심이 왜곡되고, 복음이 조롱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들이 오해해도 하나님은 진실을 아십니다.
사람들이 숨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여론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지금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보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또한, 28에 사람의 권세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명예가 훼손되는 일도 있습니다.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의 영혼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커 보이지만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만이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십자가의 값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용기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영화 「히든 피겨스」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실력과 존엄을 지켜 낸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어서 앞으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가치가 편견보다 크다는 것을 믿고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세상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서 나옵니다. 세상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네가 실패했으니 끝났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전히 너를 붙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사람들의 인정을 얻어야 산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인하라. 내가 너를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건강, 자녀의 미래, 경제적인 어려움, 사람들의 비난과 거절, 질병과 죽음, 그것들이 혹시 나의 영혼을 점령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합니까? 사실 그 두려움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아’라고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만큼 두려움과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움에 지배받지 않으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믿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기란 두려움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품고도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수전 제퍼스의 책 제목처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의지력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밀려 올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겠습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겠습니다.”
“상황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신뢰하겠습니다.”
“내 감정보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기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두려운 상황을 제거하는 대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풍랑을 즉시 없애 주실 때도 있지만, 풍랑 속에서 배에 함께 계심을 경험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불속에서 꺼내 주실 때도 있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속에서 함께 걸어 주실 때도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도 있지만, 문제를 견딜 힘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찬송가 370장에 나온 가사처럼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하며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소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두 제한적입니다. 우리 영혼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상황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드러날 날이 옵니다. 오해와 억울함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을까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참 된 용기는 내가 강하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용기 있는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십자가를 붙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선포) 37-39절의 말씀입니다.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해석
3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검’을 주러왔다는 말은 무슨의미일까요?
여기서 검은 실제 폭력의 무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으로 인해 일어나는 분열과 결단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은 “검” 대신 “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가족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어떤 사람은 거부할 때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35절은 미가 7:6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복음은 중립적인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살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 것인가.
자기 생명을 붙들 것인가, 예수님께 맡길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족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가족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물이지만 내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사랑이 집착으로 변합니다. 자녀를 움켜쥐게 되고, 배우자를 통제하게 되고,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면 오히려 가족을 더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내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한 인격으로 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에서 완성됩니다. 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최종 통제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라는 선언을 포기하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생명 있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적용
드라마 「미생」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영웅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출근하고, 보고서를 쓰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때로 실패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킵니다. 신앙도 때로는 거대한 사건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가정을 지키는 부모의 수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밤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청소하는 손길,
한 영혼을 위해 오래 기도하는 마음,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말씀을 붙드는 신앙.
십자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언제나 극적인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게 맡겨진 사랑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나치 시대에 안전한 미국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독일 교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 때문에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그는 투옥되었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좋아해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책임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움켜쥔 용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과 감당해야 할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충성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이 가득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때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높지 않습니다. 스승과 같아지면 족합니다. 예수님이 거절당하셨다면 우리도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그 고난은 헛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처럼 보이는 것도 이내 사라지고 마는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우리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움켜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움켜쥔 사람은 모든 것을 잃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움켜쥐지 말고 십자가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붙잡지 말고 십자가를 움켜 쥐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성공을 부여잡지 말고 십자가를 움켜잡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리라”찬송하며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두려움과 사람의 인정에 붙들리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을 가장 사랑하며, 맡겨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움켜쥐게 하시며, 삶의 자리에서 정직과 용서와 섬김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https://wpa.imweb.me/notice/?bmode=view&idx=171882882&back_url=&t=board&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