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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서말씀

[스크랩] 2024년 12월 11일 (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작성자정요세비|작성시간24.12.11|조회수47 목록 댓글 0

2024년 12월 11일 수요일

[(자) 대린 제2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워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예수님께 가서 안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안식을 얻고 싶어 할까요? 기도보다 세상이 주는 흥밋거리로 마음을 채우는 것을 안식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과 마음 안에 담기보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험담에서 안식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 게으름, 게임, 술, 인터넷 등 하느님께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안식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우리의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영혼이 지치고 마음이 메마를수록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성체 앞입니다. 여러분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께 가십시오. 그분 곁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이 선택을 할 때 우리 영혼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때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배달되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온통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로로 가득합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여기 쑤시고 저기 아픈, 저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해줍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0-31)

맞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은 영원히 청춘이십니다. 언제나 새롭고 활기로 가득하십니다. 주님은 노쇠하거나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 길이 머무는 우리 역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늙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춘을 살수 있습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 앞에 너나할 것 없이 약해지고 작아지마, 삶은 점점 위축되고 결국 소멸되겠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온몸으로 실감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큰 자비와 은총을 주셔서, 상상을 초월할 강철 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엄청 바쁩니다. 일이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피정 집 운영, 미사, 기도, 고백성사, 신앙상담, 특강, 원고 작성, 청소, 수리, 시장, 주방...그 와중에 물때가 좋으면 해루질에 낚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지만, 놀랍게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너지가 백퍼센트 충전되어 원상복귀됩니다.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니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가 봅니다.

제 체험상 나이들수록 더 움직여야 합니다. 좀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근심 걱정도 주님께 맡기고, 건강 문제도 주님께 맡기고, 병고도 주님께 맡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모든 것 맡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자요 결정적인 위로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고통 저런 상처를 이고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세파에 지칠 때마다, 그래서 걷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바다처럼 관대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그분은 에너지 충전소입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십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자기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즈의 마법사에는 양철 나무꾼이 나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양철 나무꾼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워낙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어서 사랑을 느낄 심장을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심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집착으로 모든 고통을 주는 게 마음임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철 나무꾼이 새로운 심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양철 나무꾼은 본래 닉 초퍼라는 이름의 솜씨 좋은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먼치킨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먼치킨들을 지배하던 동쪽의 악한 마녀는 이들의 사랑을 막기 위해 닉의 도끼에 저주를 걸었습니다. 

“동쪽 마녀가 내 도끼에 저주를 걸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도끼는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베어내었고, 친절한 양철장이가 이를 대신하여 양철로 그의 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의 몸은 전부 양철로 대체되었지만, 도끼는 그의 가슴마저 베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양철장이가 그의 가슴을 양철로 대체했지만, 이에 따라 닉은 심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없이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심장을 잃은 그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심장의 부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무꾼으로서 일을 계속했지만, 마음속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심장이 없으니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삶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날 비를 맞고 녹슬어버린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방치되었지만, 도로시와 허수아비가 그를 발견하여 구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마법사를 찾아가 심장을 달라고 부탁하겠소. 그래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테니.”라며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에메랄드 시로 가는 여정에서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여러 번 희생하며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강을 건너다 허수아비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고, 함정에 빠진 사자를 구출하는 등 친구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랑과 배려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소. 하지만 내 가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오.”

 

마침내 마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심장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법사는 그에게 심장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쪽 마녀를 물리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임무를 마친 후, 양철 나무꾼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는 양철 나무꾼에게 이미 그에게 심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자신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위해 보여준 희생과 사랑은 진정한 심장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양철 나무꾼이 더 이상 공허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법사는 그에게 비단으로 감싼 톱밥 심장을 주었습니다.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이 심장은 당신이 이미 사랑하고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비단은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톱밥은 단순함과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곧 온유함과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성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의 서품 성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저는 얼음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을 원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하.사.시.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심장은 사랑이 거창한 행위나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선택과 타인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장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깨달음을 얻으며 말했습니다. 

“이 심장을 영원히 간직하겠소. 이 심장은 양철이라도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니 말이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울어줄 때 나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내일 걱정부터 했습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따듯한 가슴을 원했습니다. 이전의 심장이 미웠습니다. 성체를 통해 내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있다고 믿고 온유하고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있다고 조금씩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자신이 유명해지지 못한 발레리나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꿈을 강요하여 딸의 인생을 나락 가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프리마돈나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엄마의 기대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결국 그 일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우리가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미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착한 뜻’을 가지면 됩니다. 지혜를 가지면 됩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지혜로 사랑하려는 착한 뜻만 가지면 지금 심장을 미워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고 그의 낙타들까지 물을 먹였습니다. 이 착한 행동이 결국 이사악과 결혼하여 그의 심장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약에서 십계명을 먼저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심장을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죽음 교육에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짧은 시인데 깊은 여운을 주는 시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노를 젓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를 젓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물질, 성공, 권력, 업적이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를 저으면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참된 행복을 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노를 놓쳐서 잠시 멈추면 비로소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목이라는 노를 저어서 33년을 달려왔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청년부와 주일학교를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행사하고,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사목회를 중심으로 교우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많은 행사가 있었고, 만남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말씀이 부족했고, 영적으로 메말랐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교구청을 중심으로 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교육이 있었고, 행사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교우들이 바라는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역시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 있을 때는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이라는 노를 젓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직에서 젓는 마지막 노가 될 수 있습니다. 점시 노를 멈추고 말씀과 영성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물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벌레는 물속에서 살며 물 표면을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물속 생활에 익숙한 물벌레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물 위로 올라간 친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물벌레 중 하나가 물 표면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물을 떠나 물 밖으로 나온 물벌레는 기다리고 있던 변화를 맞이하며 잠자리로 변태하게 됩니다. 잠자리가 된 물벌레는 하늘을 날며 새로운 세상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속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물속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은 변화를 알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변화와 성장,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신비로움과 연결됩니다. 물벌레에서 잠자리로의 변태는 인간 삶의 단계적 변화를 상징하기도 하며,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부활, 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벌레가 잠자리로 변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짐과 멍에를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짐과 멍에일까요? 강도 맞은 이웃을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수오지심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양지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열정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오늘의 성인

 

성 사비노(Sabin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피아첸차(Piacenza)

활동연도 : +420년

같은이름 : 사비누스, 싸비노, 싸비누스

피아첸차의 성 사비노(Sabinus) 이탈리아 피아첸차의 주교인 성 사비누스(또는 사비노)는 일찍부터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교황 성 다마수스 1세 (Damasus I, 12월 11일)에 의해 멜레티우스(Meletius) 이교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었었다.

그는 또한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의 절친한 친구로서 정기적으로 성 암브로시우스의 저작물 초본을 받아 읽은 후 비평 및 의견을 제시하는 글을 써 보냈다.

그는 381년 아퀼레이아(Aquileia)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를 단죄하는데 앞장섰고, 9년 뒤에는 밀라노 교회 회의에서 요비니아파를 격렬히 비난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성 다마소 1세(Damasus 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305?-384년

같은이름 : 다마수스, 다마쑤스

에스파냐 혈통을 가진 성 다마수스(또는 다마소)는 아마도 로마에서 태어난 듯하고, 사제였던 자신의 부친 교회에서 부제가 되었다가, 366년의 치열한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교황 선출에서 패배한 반대파는 우르시누스(Ursinus)를 대립교황으로 옹립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 분쟁은 반대파가 비극적 종말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즉 우르시누스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로부터 유배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평정되었으나, 성 다마수스 교황을 반대하는 무리들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 늘 도전하였다. 그의 선출은 로마 교회회의에서 무혐의로 판정되었다.

성 다마수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강력한 반대자였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 대리자를 파견하여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는 교황청 교서를 수락케 하였으며, 성령은 신성이 없다는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의 교리를 단죄하였다.

재임 기간 중에 그는 동서방의 황제이던 테오도시우스 1세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종교로 선언토록 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학자이던 성 다마수스는 성경의 정경을 발표하였고, 374년의 로마 교회회의를 통하여 올바른 성경을 명시하는 업적을 쌓았다. 유명한 성서학자인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의 비서였다.

그래서 성 다마수스는 성 히에로니무스에게 성경 주석을 비롯하여 불가타 성경 번역을 부탁하였다.

많은 잡음이 있었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룩한 일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또한 그는 로마가 교회 중의 최고 교회임을 선언하였고, 많은 성당을 건축하고 카타콤바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복원하여 그곳을 순례하는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격려하였다. 위대한 교황이었던 그는 사후 자신이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건축한 성당에 묻혔다가 후에 산 로렌초 인 다마소(San Lorenzo in Damaso)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Maria Maravillas de Jesus)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연도 : 1891-1974년

같은이름 : 마라빌라스, 메리, 미리암, 예수스, 지저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는 1891년 11월 4일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에서 아버지 루이스 피달 이 몬(Luis Pidal y Mon)과 어머니 크리스티나 치코 데 구스만 이 무뇨스(Cristina Chico de Guzman y Munoz)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교황청 주재 에스파냐 대사였고,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

마리아 마라비야스는 이미 8살 때 정결 서원을 하며 자비로운 일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2월 14일)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ia de Avilla, 10월 15일)의 저작들을 접하면서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가 되려는 성소(聖召)를 느꼈다.

1913년 그녀를 신앙적으로 도와주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했을 때 어머니는 맨발의 카르멜회에 들어가려는 마리아 마라비야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1919년 10월 12일 마드리드의 엘 에스코리알

(El Escorial)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924년 5월 30일 종신 서원 전에 이미 마리아 마라비야스 수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의 카르멜회(the Carmel of Cerro de los &Aacute;ngeles)를 설립하라는 특별한 소명을 받았고, 1926년 10월 31일 다른 세 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함께 수도회를 설립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이는 맨발의 카르멜회의 수도 규칙에 따라 설립된 테레지안 카르멜회의 첫 번째 수도회였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거나 맨발의 카르멜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를 설립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예수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정신과 이상을 더 깊이 살고 전파하는 것만을 추구했다. 1926년 6월 28일 마드리드 알칼라(Madrid-Alcala) 교구의 주교는 그녀를 새로운 수도회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1933년 그녀는 인도(India)의 코타밤(Kottavam)에 수녀원을 설립했고, 여기서부터 여러 분원이 인도 안에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역할은 수녀원장으로서 자연적인 반감과 책임 있는 직책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일생동안 설립한 수녀원들이 영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녀는 강한 정신력과 성실함으로 교회와 수녀들에 대한 순명과 사랑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설립한 수녀원의 빈곤함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수녀들은 가구도 제대로 없는 작은 집에서 텅빈 벽에 성경 구절이나 카르멜회 출신 성인들의 말씀을 걸어 놓고 살았다.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했을 때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 수녀원의 수녀들은 수녀원을 빼앗기고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런 와중에도 1937년 9월 살라망카(Salamanca)의 바투에카스(Batuecas)에 또 하나의 수녀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39년 내전이 끝나면서 체로 데 로스 안젤레스의 수녀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토록 엄청난 박탈과 박해의 한가운데서도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늘 용기와 행복을 주입시켰고 수녀들이 감탄할만한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같은 회의 수녀들조차 알지 못한 심연이 있었다. 오직 그녀의 영적 지도자들만이 그녀의 생애 전체를 관통했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영혼의 어둔 밤은 그녀에게 극심한 영적 건조함과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전적인 신뢰와 포기로 응답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에스파냐의 여러 지역에 수녀원들이 설립되었다.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자신이 처음 입회하였던 엘 에스코리알의 맨발의 카르멜회에 수녀들을 보내 회복을 도왔고 아빌라에 있는 유서 깊은 강생의 수도원에도 그렇게 했다. 그녀가 직접 설립한 수도원과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수도원들과의 결합을 위해 그녀는 성녀 테레사회를 설립하였고, 1972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얻었다.

1974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성녀 마리아 마라비야스 원장은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노자성체를 영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마드리드 인근 라알데우엘라(La Aldehuela)의 카르멜회 수녀원에서 여러 수녀들에 둘러싸여 선종하였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카르멜회 회원으로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다고 한다.

그녀는 1998년 5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마리아 마라비야스 데 헤수스 피달 이 치코 데 구스만(Maria Maravillas de Jesus Pidal y Chico de Guzman)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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