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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서말씀

[스크랩] 2025년 10월 26일 (녹) 연중 제30주일

작성자정요세비|작성시간25.10.26|조회수33 목록 댓글 0

2025년 10월 26일 주일

[(녹) 연중 제30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기도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오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듯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주님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은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드시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5,15ㄴ-17.20-22ㄴ
15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16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17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20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21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22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4,6-8.16-18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다음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불편할 때,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난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적은 명함을 드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명함을 드렸다면,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요?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사이는 당당히 예수님께 이런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의인,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명함을 받아 넣고 다시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서 있던 세리는 예수님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인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죄인, 세리.’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으시고 그에게 당신의 명함을 주셨을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과 만나기 위하여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리는 예수님의 명함을 들고는 가슴이 설레어 돌아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 사랑에 맞갖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많고 약한 모습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명함에 이런 글들을 적고 싶어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이’, ‘날마다 미사에 나가는 이’, ‘무슨 무슨 봉사를 하는 이’, ‘세상의 무슨 직함을 가진 이’라고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나는 주님을 만난다면 무엇이 쓰인 명함을 건네드릴지 생각하며, 겸손하게 한 주간을 지내면 좋겠습니다.(이찬우 다두 신부)

 

주님,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사사건건 강한 대립각을 세우시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죄인들이나 이방인들, 불결한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한 바리사이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절대 그냥 못 넘기셨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그들의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은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 11-12)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때 마음이 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화가 진솔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권모술수나 잔머리 굴리는 냄새가 풀풀 풍길 때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화, 겉도는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부터 46년 전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때는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려고 보급소엘 갔습니다. 신문 150부를 들고 배달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신당동에 떡볶이 먹으러 자주 갔습니다. 요즘은 신문도 다들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은 없었습니다. 신당동에는 음악이 있었고,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고 우리들만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레이프 가렛의 "다함께 춤을 춰여"라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진, 나훈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보여준 산울림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했고, 저도 물론 좋아했습니다. 산울림의 첫 번째 노래의 제목은 ‘아니 벌써’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신문을 배달하려는데 '호외'가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유고라고 했다가, 서거라고 했다가 결국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였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셨고,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산업현장을 뛰어다니셨고, 수출 100억 불, 국민소득 1,000불을 위해서 밤낮으로 땀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분의 앞모습만 보았습니다. 신문과 방송도 그분의 앞모습만 저에게 보여주었으니까요. 그 뒤 저는 그분의 뒷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하였습니다. 긴급조치를 남용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이 죽은 지 46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운 업적이나 그의 앞모습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평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드러날 뒷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성인 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었어도 그렇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인 품에 올릴 수 있는지 조사를 합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어느덧 나는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뒤에 감추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평가받기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도 절차가 있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 될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서 될 일도 아닙니다. 머리가 좋아서 될 일 또한 아닙니다. 어떤 절차와 순서가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닙니다. 회개는 세례를 받아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박해받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나병 환자 10명이 치유되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찬양을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치유를 넘어서 영혼이 치유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이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추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사건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희생과 봉사를 만나면 사랑이 꽃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는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십자가와 희생의 자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분열과 갈등은 겸손이 사라지면서 생겼습니다. 겸손의 빈자리에는 교만과 욕망이 넘쳐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보다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셋째는 ‘항구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시계는 언제나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는 시계가 아닙니다. 고장 난 시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와도 소나무와 전나무는 여전히 푸르다.’라는 뜻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제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이렇게 말씀드리니
저에게 그저 들으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으니
저에게 기꺼이 말씀해 주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잘 하고 있으니
저에게 굳지 오지 마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있을 수 있도록
저에게 당신을 거두십시오


오, 하느님!


저 스스로
있을 수 없으니
저에게 당신을 주십시오

 

 

 

오늘의 성인

 

성 에바리스토(Evaristus)

신분 : 교황

출신지역 : 그리스

초대교회의 교황이었던 성 에바리스투스 (또는 에바리스토)에 대한 기록은 희박할 뿐만 아니라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이레네우스(Irenaeus)에 의하면, 성 에바리스투스 교황은 성 클레멘스 1세 (Clemens, 11월 23일)를 계승하여 교황직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리베리우스 교황표”와 다른 문헌들은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 7월 13일) 교황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의하면, 성 에바리스투스 교황은 본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살던 그리스인이었으며, 유다(Judas)라는 이름의 그의 부친은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출신 유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에바리스투스가 교황으로 재위하던 기간 동안의 업적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 시내에 있던 25개 본당을 구역에 따라 교구로 분할하였으며, 각 교구에 명칭을 부여하고 일정 수의 본당을 관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 신자들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신자들의 관리를 위해 필요하였던 조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교황은 6명에게 사제품을 주었고, 5명에게 주교품을 또한 2명에게는 부제품을 주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교회 초기의 일곱 부제의 직분에 따라서 7명의 연장 사제들에게 각 교구를 관할하게 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까지 확정되지 않았던 교계제도에 관한 전통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제도를 설립하게 하였으며, 이 제도는 그 이후 교회 내에 도입되었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즉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연대기” (Chronographia)에는 성 에바리스투스가 9년 동안 로마의 주교직에 재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연대 교황표”에는 10년 간 재직하였다고 나타난다. 또한 순교자 명부에 의하면, 그는 9년 3개월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재임하였다고 한다. “리베리오 교황표”에는 13년 10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의 증언처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이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면, 성 에바리스투스는 101년경부터 교황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교회가 에바리스투스 교황을 성인이요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교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더욱이 현대의 발굴에 의하면 교황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Petrus)의 무덤 옆에 묻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복자  보나벤투라 (Bonaventure)

신분: 수사

활동지역: 포텐차(Potenza)

활동연도: 1651-1711년

같은이름: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포텐차 출신으로 노체라(Nocera)에서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순종의 덕행으로 유명하고 또 장상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수련장직은 맡았다. 성모님께 대한 보나벤투라의 신심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신심이었다. 그는 라벨로에서 운명했는데, ‘순종의 모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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