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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의 고을은 이런 모습? 낙안읍성 둘러보며 남도의 따뜻한 풍광 속으로 2025년 1월 고을학교는 <순천고을> 새해를

작성자김광조(향기)|작성시간24.12.26|조회수98 목록 댓글 0

조선 초의 고을은 이런 모습낙안읍성 둘러보며 남도의 따뜻한 풍광 속으로

 

2025년 1월 고을학교는 <순천고을>

 

새해를 맞는 고을학교(교장 최연고을답사전문가), 115강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으면서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낙안읍성과정유재란 때 왜병과 조·명 수륙연합군이 두 차례 최후의 결전을 벌인 왜성이 있으며김굉필의 유배지로서 그의 학문적 연원인 절의와 도의정신이 살아 숨쉬고한국현대사에 아픈 상처를 남겼지만 아직도 해원되지 않은 여순사건의 현장전남 <순천고을>로 갑니다참가신청 바로가기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으면서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낙안읍성순천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5강은 2025년 1월 26(일요일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115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순천시(순천향교/옥천서원/임청대)-해룡면(순천왜성/검단산성)-낙안면(낙안읍성/동문/임경업장군비각/객사/동헌/내아)-서울의 순입니다.

 


<순천고을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손소독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5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순천고을의 지형은 호남정맥이 감싸며 그 산줄기가 해안까지 이릅니다.

순천은 지리적으로 남쪽으로 순천만과 광양만이 있고동쪽에는 조계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감싸고 있어산지 지역과 해안 지역의 특성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평야는 순천시를 관류하는 동천을 중심으로 간척평야가 넓은 들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줄기는 서쪽 경계는 화순의 백아산(810m), 모후산(919m)으로 이어지며동쪽 경계는 광양의 백운산(1,228m)에서 분기한 계족산(723m), 비봉산(555m), 웅반산(312m)으로 이어지며 북쪽 경계는 한동산(648m)에서 뻗어 나온 지능선이 희아산(764m), 봉두산(753m)으로 이어집니다.

 

순천에서 가장 높은 산은 모후산(919m), 그 다음은 조계산(887m)인데 이들 두 산을 주축으로 산릉을 이루고 산맥을 형성하고 있으며그 맥이 해안선까지 이어집니다.

 

물줄기는 섬진강 수계와 남해로 유입하는 하천 수계로 나뉩니다.

물줄기는 호남정맥을 분수계로 섬진강 수계와 남해로 유입하는 하천 수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섬진강 수계에는 섬진강보성강송광천주암천황전천 등이 포함되며남해로 유입하는 하천 수계에는 이사천동천해룡천낙안천선암사천 등이 해당합니다.

 

섬진강은 곡성의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여순천시 황전면 비촌리 칠안마을부터 구례군과 시의 북부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다가 황전면 선변리 용림마을 앞에서 황전천과 합류하여 다시 구례군으로 흘러 들어갑니다섬진강 총연장 220㎞ 중 순천에서는 약 5.1가 흐릅니다.

 

보성강은 보성군 웅치면에서 발원하여 순천시 송광면 월산리에서 화순동천(和順同川)과 합류하여 순천시에 유입되며송광면 우산리 곡천에서 장안천과 합류한 후에는 대소 하천과 합하여 주암면 대광리에서 주암다목적댐을 이루고순천시 경계를 벗어나 섬진강과 합류합니다.

 


순천만은 남해안의 대표적인 연안습지로 5.4(160만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순천시

 

지형적 특성 때문에 거점 관방시설이 많이 설치되었습니다.

순천은 남해안에 접해 있으며북쪽으로는 호남정맥의 끝자락으로 이어진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해안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발달하여 삼국시대부터 거점지역으로서 관방 시설이 지속해서 설치되었습니다.

 

성곽 시설은 삼국시대 검단산성난봉산성성암산성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해룡산성봉화산성인제산성오성산성조선 시대의 순천부 읍성순천왜성 등으로 이어집니다봉수 시설은 중앙으로 연결되는 직봉은 설치되지 않았으나관련된 간봉 시설인 성황당산 봉수개운산 봉수학산리 봉수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순천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 산성은 난봉산성검단산성성암산성 등 3개소로 산성 간 거리는 15~25㎞ 내외이며이러한 간격은 다른 지역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상호 의지하고 호응하여 적의 침입 시 서로 연계하여 수비하기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산성은 이전 시기에 축조되어 지속해서 사용되는 경우와 새로 축성된 산성으로 구분됩니다광양 마로산성은 경우 백제 시대에 축성되어 지속해서 사용됐지만순천 오성산성봉화산성해룡산성 등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에 축성되어 사용된 것으로 백제 시대와 구분되는 점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에 성곽이 축조되거나 평지에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양극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 대규모의 성곽이 평지에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데성벽의 축조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성벽 둘레가 1,000m 이상인 성곽이 현재의 시군 단위에 1개소 이상 축조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중앙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규모나 구조 등이 일괄적으로 같이 축조되어 일관성을 보입니다그리고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수영성과 진성 등과 행정적 기능이 높은 읍성이 분리되어 설치되었으며방어체계 역시 이원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순천지역의 읍성은 순천부 읍성과 낙안읍성이 있습니다.

 

검단산성은 해룡면 성산리 피봉산(138.4m) 7부 능선에 테뫼식으로 쌓은 6~7세기에 걸쳐 축성된 백제 시대의 성으로 성벽은 성 안팎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이며 총길이는 430m 내벽높이는 1~3m, 외벽 높이는 4~6m, 두께는 5m 정도 됩니다당시의 유물(토기기와)과 저장공건물지문지수문 등이 발견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조선군과 명군 연합군이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면서 임시로 사용했으리라 추정됩니다.

 

검단산성은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고 순천왜성과는 직선 2.5km 거리에 있습니다피봉산은 안산’ 혹은 검단산으로 불리며 동쪽에는 순천왜성서쪽에는 해룡산 토성이 마주하고 있습니다정유재란 때는 순천왜성의 왜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제독 유정의 군사가 함께 이곳에 주둔하면서 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의 연합함대와 연락하며 왜군을 격퇴했습니다.

 

순천부와 낙안의 읍성 안에 읍치 구역이 형성되었습니다.

순천부 읍성은 순천도호부 읍성 성곽으로 고을의 행정 중심지이자 왜구 방어의 거점이었습니다지방 중심지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많아지고 그 피해가 커지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성곽을 축조하게 되었는데 이를 배경으로 순천부 읍성이 1430(세종 12) 12월 축조되었습니다다만 1404년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이방간을 순천부 읍성에 안치하였다는 기사를 토대로 볼 때, 1430년 이전에도 성곽이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순천부 읍성은 순천 시내에 있는 동천의 지류인 옥천 변에 있고배후에는 난봉산 자락이 막고 있습니다지명 유래를 통해 동헌남문 등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순천부 읍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3,383높이는 12여장의 높이는 3척이었습니다적대는 6개소이고성문은 4개소인데 2개소는 옹성이 없습니다성 내부 시설로는 우물 4개소못 8개소아사객사내아망정루공고형청옥사 등 각종 시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성벽 바깥쪽으로 해자가 설치되었습니다순천부 읍성 성벽의 총 둘레는 1,580m, 높이는 5.6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순천부 읍성은 성곽이 폐철된 이후 급격히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시설이 훼손되었으나 2009년 해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순천부 읍성의 일부 윤곽이 확인되었으며이후 2018년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건물지 3개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순천향교는 1407(태종 7) 순천 읍성 동쪽 7(약 2.7)에 세워졌으나순천이 도호부로 승격됨에 따라 1550(명종 5) 순천 읍성의 동쪽 5(약 2)로 옮겼으며 1610(광해군 2), 1780(정조 4) 등 두 차례 더 옮겼다가 1801(순조 1) 순천 읍성 서쪽인 현재 위치로 옮겼습니다.

 

현재 대성전 건물은 도리 하부에 쓰인 상량문이 1649년의 것으로 1780년에 이건할 때 이 건물의 주요 부재를 그대로 옮겨 간 것이며다시 1801년 이건할 때도 부재들을 대부분 사용하여 같은 규모로 건립한 것으로 보여 건물의 건축연대는 1649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축연혁이 분명한 17세기 중엽의 유교 건축으로나주향교 대성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목조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2출목 3익공의 특징적인 공포형식간결하고 소박한 가구 수법 등에 시대성 및 조선 후기 유교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순천향교는 부목에 해당하는 중설위입니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배치로 앞면의 강학 공간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고뒷면의 배향공간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명륜당 좌측에는 150년 된 은행나무우측에는 100여 년 된 홰나무가 있습니다풍화루고사양사재 등은 관리공간입니다.

 


순천향교의 대성전은 17세기 중엽의 유교 건축으로나주향교 대성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목조건축이다.국가유산청

 

낙안읍성은 순천시 낙안면의 동내리서내리남내리 일대에 있습니다성곽이 있는 곳은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석산오봉산금전산상탕군산백이산으로 막혀있어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교촌천서쪽으로는 낙안천이 남쪽으로 흘러 여자만으로 흘러갑니다.

 

조선 시대에 축조된 석축 읍성으로 치소역할과 동시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유사시 외곽 주민들의 입보처(入保處기능을 하였던 곳입니다낙안읍성 내부에 행정 군사 시설 등과 함께 민가가 들어서 있습니다.

 

조선 전기 유학자인 이석형이 쓴 기문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축성 초기에는 석성이 아니라 토성이었다고 합니다낙안 출신의 김윤길이 절제사가 되었을 때 낙안 사람들과 함께 토성을 축성하였다가 이후 군수 신원절이 옛터에 따라 관사를 지은 것으로 나타나 김윤길이 토축한 읍성이 무너져 있었던 것을 다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390년대 말 김윤길에 의하여 다시 축성된 토성은 낮고 작았던 모양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부터 낙안읍성은 모두 석축 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언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24년부터 1454년 사이에 현재와 같은 규모의 석축 성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길이는 1,468m, 내벽 쪽은 1,351m이며 높이는 3~5m로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성벽은 구간에 걸쳐서 내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기록에 의하면 낙안읍성에는 421개의 타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문종 대까지 없었던 옹성이 그 후 6개소에 설치되면서 여장의 숫자가 240개 늘어난 660개로 나타나한 옹성에 40개의 여장이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적대는 기록상 문종 대에 12개가 있으며 아직 8개는 쌓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낙안읍성에는 옹성이 6개소 있다고 하였으나 처음부터 설치된 것이 아니고 <여지도서>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18세기경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성문은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지도에까지 3개소로 나오다가 1864년에 완성된 <대동지지>에서부터 2개소로 나오며 <동국여지지>에서는 남북문만 언급되어있습니다따라서 낙안읍성의 성문은 처음에 3개소가 설치되었다가 18세기 중엽 이후 어느 시기부터 1개소의 문이 폐쇄되어 남북의 2문만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현재는 순천 낙안읍성 동남문이 복원되어 있습니다해자는 당시 만들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현재는 성벽 외곽 쪽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관아 시설과 민가우물 2연못 2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유적 중 하나로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지성으로서도 그 가치가 높습니다순천 낙안읍성 내부에 관아시설을 비롯한 민가가 배치되어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큽니다낙안읍성 안의 주요 문화재로는 중요민속자료 가옥 9노거수객사임경업장군비각 등이 있습니다.

 

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은 성안의 객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비각과 그 안에 서 있는 비로임경업 장군의 어진 다스림을 기리고 있습니다.

 

임경업은 1626(인조 4)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해왔습니다. 1628(인조 6) 3월 서울지역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이 지역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그를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 신봉하기도 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면 주인들은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비는 거북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입니다비신 앞면 중앙에는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는 비의 명칭을 세로로 새겨 놓았고왼쪽 아래 부분에 건립연대를 적어놓았습니다이 기록을 통해 임경업이 군수직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던 인조 6(1628)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안향교는 순천 낙안읍성에서 남쪽으로 약 800m 위치에 있습니다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낙안읍지>에 따르면, 1658(효종 9) 낙안읍성 동쪽 농암동에서 현 위치인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로 옮겼습니다건물로는 명륜당서재내삼문서무대성전양사재고직사 등이 있습니다.

 

경사지에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동무서무대성전 순으로 된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입니다입구 길가에 22기의 비군(碑群)이 있으며 명륜당 우측에는 수령 4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1658(효종 9) 이건 당시에 심은 것이라 합니다.

 

순천지역에는 삼한 시대부터 소국이 있었습니다.

순천지역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소국이 나타난 것은 삼한 시대부터입니다불사분사국불운국초리국이 그것입니다그러나 이때부터 남북국시대까지의 순천의 역사 중 특이하고 의미가 있는 것은 사타모루상다리하다리 등 임나사현(任那四縣)과의 관계입니다.

 

순천지역이 삼국 중 어느 나라에 속했는가를 문헌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백제의 감평군(무평군혹은 삽평군)이었다는 <삼국사기기사입니다순천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백제 성왕 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합니다그것은 백제가 군을 설치한 것은 백제 성왕 때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순천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백제에 편입되기 이전 순천지역에 독자적인 지역 연맹체의 형성 여부신라나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몇 가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성산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고배(高杯)와 호(), 운평리 목곽묘의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용당동과 죽내리의 석곽묘 고배와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등은 모두 소가야계의 토기들이고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의 것들로 편년되고 있습니다.

 

특히 운평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수평구연호는 서부 경남의 출토품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습니다이를 보면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순천지역은 일시적으로나마 소가야연맹체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고 6세기 전반으로 가면 출토유물이 달라지는데 이 시기가 되면 대체로 대가야계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고 있습니다.

 

운평리 고분군은 백제가 전남 동부권을 장악하기 직전인 기원후 5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순천지역 지배층의 무덤으로 대가야계 금귀걸이와 마구류(馬具類), 가야계 토기와 큰 칼옥 등이 출토되었는데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유물들입니다.

 

가야계 유물이 출토되어 임나일본부설의 허구가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유물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입니다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데 임나는 가야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계체기 6(512) 조에 임나사현을 백제에 양도했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자료를 뒤집어보면백제가 차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임나의 영역이었다는 의미입니다한때는 임나사현을 다른 지역에 비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현재는 임나사현을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고 임나사현 중에서 사타국은 지금의 순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점차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평리 고분군은 사타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곳에서 일본계 토기나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고대가야계 유물이 대거 발굴되어 임나사현은 임나일본부와 무관한 가야와 관련 있는 네 지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고나아가 임나일본부가 일본의 지배 기구였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지눌의 수선사 결사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려 시대 순천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은 보조국사 지눌이 지금의 순천 송광사로 내려와 수선사를 만들고이를 통해 고려 불교의 개혁과 중흥을 이뤘다는 점입니다. ‘무신란’ 이후 무인 집권자들은 문벌귀족 및 그들과 밀착된 교종 불교세력을 억압하여 거세한 다음자기 세력 기반으로 그동안 교종 세력에 눌려 지방의 산중에서 명맥만을 유지해왔던 선종 세력에 눈을 돌려 산중에 전해오는 선종계 절을 매입하여 중흥시키는 일에 몰두했습니다고려 후기가 되면 무신정권 밑에서 길러져서 다시 등장하는 문신들이 불교 결사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수선사나 백련사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 속에서 결성되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거조사에서 1190년 정혜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 정혜사를 결성하였습니다그런데 거조사는 너무 좁아서 송광산(조계산)의 길상사라는 폐사를 찾아내 그곳으로 정혜사를 옮겨와 결성하였는데마침 그 이웃에 또 다른 정혜사가 있어 정혜사를 수선사로 고쳤습니다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과 혜()를 함께 닦자는 실천 운동이었습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입니다돈오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돈오라 하며비록 돈오 하여도 습기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이를 통해 고려 불교사에서 기본적 과제였던 선교 통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습니다.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 일치의 완성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 사상적인 의미와 실천 불교의 임무를 완성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이로써 수선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당대 불교계 혁신운동의 중심체였을 뿐만 아니라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사의 큰 흐름의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김굉필의 유배와 정유재란의 왜교성 전투가 있었습니다.

김굉필의 유배는 순천지역 성리학의 전기를 만들었고 절의와 도의 정신이 순천 유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게다가 16세기 이후 순천에 들어온 사족들은 김굉필과의 학문적 연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순천에는 김굉필을 배향한 전라도 최초의 사액서원인 옥천서원이 가장 먼저 창건되었습니다이후 이수광을 배향하는 지봉서원(청수서원등 8개의 서원과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공을 세운 장윤을 배향한 정충사허일을 배향한 충렬사충민사 등이 건립되었습니다이들 12개의 서원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한편 그 중심에는 향교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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