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강의자료-프로그램

695-요가의 수행 2-31에서 2-50까지-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全文과 해설

작성자김광조(향기)|작성시간25.07.14|조회수60 목록 댓글 0

695-요가의 수행 2-31에서 2-50까지-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全文과 해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全文과 해설

II 요가의 수행

 

2-31. 이상과 같은 禁戒가 행동의 지침이 되어야한다. (수행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이 계율을 지켜야한다.

파탄잘리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변명도 용인하지 않는다. '남을 해치지마라'고 했으면 무조건 해치지 말아야지 이유가 붙을 수없다. 파탄잘리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전쟁에서 우리 편이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고, 내가 그 전쟁에 군인으로 참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2-32.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목숨을 유지할 최소한의 필요 이상을 구하지 말고) 만족하라', '고행하라', '스스로 연구하라[讀頌]', '(主人空 에게) 헌신하라'는 것이 勸戒이다. (고행과 讀頌과 헌신에 대해서는 2-1에 대한 해설을 참고하라. 譯註)

몸과 마음을 함께 깨끗이 해야 한다. 만약 자기 자신을 아트만[主人空]이 거하는 처소로 여긴다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생각은 저절로 들것이다. 마음만 깨끗하면 됐지 몸이야 더럽든 깨끗하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생각은 최소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옳지 않다. 수행자가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겉과 속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겉을 씻음으로써 마음도 씻긴다. 심신이 피곤할 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나면 몸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개운해지는 법이다. 육체의 내부기관들도 적절한 음식을 절제해서 섭취함으로써 정화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는 것과 말하는 것을 절제하여 적절히 읽고 적절히 말함으로써 정신이 맑아지고 힘을 얻는다. 우리는 영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한다. 물론 이 말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주제들은 '세상적'이라거나 ''라고 배척하는 배타적인 타부를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부정적인 청교도주의는 자기만 옳다는 교만을 키우고,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것을 은밀히 바라는 정신적인함정에 빠지게 만든다. 문제는 우리들의 태도다. 항상 깨어있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무엇을 보더라도 배울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깨어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초보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잡담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비평, 또는 텔레비전연속극이나 코미디 등은 위험하다.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 흘려버리면 되려니 생각하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위기에 물들어 집착이나 혐오나 갈망이 생겨 마음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항상 깨어있는 수밖에 없다. 성 프란시스 드 살레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정신의 균형이 깨지면 가슴은 더 이상 주인노릇을 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신에 대해 얘기하라."고 가르치는 힌두교성자가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충고다. 신에 대해 얘기하라는 것은 소위 '종교적인' 주제만을 선택해서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극히 '세상적인' 일일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영적인 실재가 감추어져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무엇'을 얘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얘기하느냐의 문제이다. '신에 대해 얘기하라'는 것은 '하느님'이니 '영혼'이니 '기도'니 하는 등의 낱말을 섞어가며 말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런 말들은 감정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의 귀에는 매우 거슬린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거룩한 단상에 앉아서 자기들을 마치 저 아래 있는 죄인 취급하는 것이 아니냐고 느낀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상태이긴 하나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으며, 기꺼이 그런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이렇게 인정만한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써가며 훨씬 더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상대방의 관심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며 애정을 갖고 솔직한 태도로 대화에 임한다면, 일상적인 주제에 관해 얘기를 나눈다 할지라도 말없는 중에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로 인해 놀라운 삶의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고행과 讀頌과 헌신에 대해서는 2-1의 해설을 참고하고, 여기서는 '만족하라'는 계율에 주목해보자. 물론 '만족하라'는 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함으로써 갈망과 동요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이다.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의롭지 않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죄악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에 만족하라'는 파탄잘리의 가르침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파탄잘리의 가르침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라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모른 체하라는 뜻은 아니다. '만족하라'는 계율을 지킨답시고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모른 체하는 것은 냉혹한 무관심이다. 수행자에게는 더 잘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꾸짖을 권한이 없다. 그 보다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상대적으로 불운한 사람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한다. 그게 수행자의 의무다. 수행자라면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나 이기적인동기가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웃을 도와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다.

 

2-33. 요가상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에 반대되는 생각의 물결을 일으켜서 방해되는 생각을 잠재워야한다.

부정적인생각의 물결을 긍정적인생각의 물결로 잠재우는 것에 대해서는 1-5의 해설을 참조하라.

 

2-34. 요가를 방해하는 장애물인 폭력이나 진실치 못한 행동들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일 수도 있고, 강요에 의해 행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폭력이나 진실이 아닌 것을 묵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런 일을 행한 꼴이 된 경우도 있다. 그 정도도 대, , 소의 구별이 있을 수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탐욕이나 분노나 미망이 그 원인이다. 수행자는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無知와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라는 생각을 거듭 떠올림으로써 장애물을 제거해나가야 한다. 자발적으로 한 것이든 아니면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없이 한 것이든 간에,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따라온다. 행한 바에 따라 좋은 결과가 올 수도 있고 나쁜 결과가 올 수도 있다. 또는 그저 그런 결과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일단 결과가 오면 받지 않을 수없다. 그러므로 은밀히 품은 악한 생각이나 아무도 모르게 행한 사소한 악행이라도 無知와 괴로움이라는 열매가 되어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온다. 이건 절대적인자연법칙이다. 이 점을 확실히 인정할 수만 있다면 입술과 생각을 조절하기가 훨씬 쉬워지리라.

 

2-35. 남을 해치고자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수행자에게는 아무 것도 적의(敵意)를 보이지 않는다.

흔히 '비폭력'이라는 말을 '힘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들의 '비폭력'은 힘을 행사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비폭력은 엄청난 정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폭력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면, 폭력이나 적의가 발붙일 곳이 없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그 주위에 창조된다. 동물들은 그런 분위기에 민감하다. 야생동물을 채찍으로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다. 노련한 조련사들은 해치고자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만이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리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독사를 가지고 노는 사람은 말한다. "이 뱀은 내가 절대로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말했다. "아힘사(비폭력)의 기준은 질투심과 경계심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 세상의 소위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보잘것없는 이름, 하찮은 명예, 한 조각의 빵을 놓고 서로 질투하고 경계한다. 이렇게 질투심과 경계심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 아힘사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2-36. '거짓말하지마라'는 계율을 완전히 지켜 진실 됨이 확립되면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 된다.

일반적으로는 말과 행동이 어떤 사실에 부합되어야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거짓을 제거하고 진실 됨을 확립한 수행자의 경우에는,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 된다. 그가 사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는커녕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가 말하면 말한 대로 사실이 된다. 누군가를 축복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받는 사람이 그런 복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병을 고치는 능력도 있다. 질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알았다' 또는 '이젠 괜찮다'고 말만해주어도 그대로 낫는다. 소위 '카르마의 법칙'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2-37. '도둑질하지마라'는 계율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게 되면,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풍요가 따른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탐심이 사라지면 무엇이 부족해서 궁핍하다는 생각에서 해방을 받게 된다. 즉 외적인상황은 변한 게 없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둘째, 물질적인탐욕을 버린 사람에게는 실제로 풍성한 물질이 따라온다. 비베카난다는 이 점에 대해 "떠나면 떠날수록 물질은 그대에게 더 가까이 따라온다. 그대가 전혀 돌보지 않아도 물질은 기꺼이 그대의 종이 된다."고 말한다.

 

2-38. '(성적욕망을) 절제하라'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면 영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실제로 행하는 상상하든, 모든 성행위는 생명력을 소진시킨다. 따라서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면 생명력이 보존되고, 그 생명력은 깨달음을 촉진하는 영적인 에너지로 승화된다. 영적인스승은 이 에너지로 제자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전달한다. 진정한 종교는 빛이나 열이 전달되는 것처럼 전달되는 것이다. 역사나 수학을 가르치듯이 가르치는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2-39. '탐내지 마라'는 계율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게 되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알게 된다.

집착과 갈망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눈앞의 바위벽만 쳐다보고 있으면, 자기가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알 수없고 어디로 올라가야할지도 알 수없다. 마찬가지로 눈앞의 현실에 집착하여 탐내는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자신의 여행의 전 과정을 보지 못한다.

 

2-40.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계율을 잘 지키면, 육체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육체적인 접촉을 싫어하게 된다.

2-41. 마음이 정화(淨化)되면, 희열과 집중력과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능력과 아트만[主人空]을 직관하는 힘이 생긴다.

이제부터는 勸戒를 수행할 때 생기는 결과에 대한 설명이다. 육체는 겉으로 나타난 意識이다. 따라서 마음이 정화되어갈수록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각이 점점 힘을 잃는다. 그리하여 결국은 육체를 그저 잠시 입고 지내는 옷처럼 여기게 된다. 그 단계가 되면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자하는 갈망이 사라진다. 더 이상 상대방의 육체와 그 안에 거하는 主人空을 혼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상대방 속에 거하고 있는 主人空을 알고 사랑한다면 외적인만남이나 성적인 결합 같은 것은 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主人空은 하나일 바에야, 主人空이 입고 있는 옷들이 서로 만나든지 만나지 못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정화되면 사람의 분위기가 바뀐다. 마음이 정화된 사람 속에서는 밝고 기쁜 성질의 사트바구나가 지배적으로 활동한다.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종교적인사람이 되었다는 첫 번째 증거이다. 요가수행자에게는 모든 것이 희열이다. 누구를 만나도 기쁘다. 불행과 비참함은 죄의 결과다. 불행과 비참함은 그 외에 다른 이유로는 생기지 않는다. 침울한 얼굴을 해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얼굴표정이 침울하다면 밖으로 나가지 말고 골방에 틀어박혀있어라. 그대들에게는 밖으로 나가 그런 질병을 퍼트릴 권한이 없다."

 

2-42. '만족하라'는 계율을 잘 지키면, 더 없는 행복[無上樂]을 얻는다.

존 매스필드는 "행복한 날은 우리를 현명하게 한다."고 말한다. 매스필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때의 상황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행복했던 때의 경험을 종합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즉 어떤 이유가 됐든 모든 애욕과 갈망이 사라진 순간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왔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고 다가올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지금'이라는 순간에 깊이 몰입했을 때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파탄잘리가 '만족하라'고 말하는 뜻이다. 물론 어떤 욕망이 충족되어도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러면 행복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얻는 만족은 이렇듯 덧없는 것이며, 그 자체 안에 새로운 욕망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그대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경험한 행복감이 얼마나 오래갔던가를. 그러나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은 오래간다. 논리적으로는 만족이 행복의 원인이 될 이유가 전혀 없다.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다. 욕망이 없으면 기쁨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우둔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욕망을 버린 사람에게서는 그의 내면에 거하는 主人空의 기쁨이 걷잡을 수없이 솟아난다. 主人空의 기쁨은 우리가 쌓아놓은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솟아난다. 그렇지 않고서야 뚜렷한 이유도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2-43. '고행하라'는 계율을 잘 지키면, (마음과 육체의) 불순함이 제거되고 육체와 감각기관에 초자연력이 생긴다.

고행을 통해 감각기관이 정화된다. 그리고 감각기관이 정화되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초-자연력에 대해서는 3-16 이하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2-44. '독송(讀頌)'을 하면 자신이 선택한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다.

2-1에서 살펴본 것처럼, '讀頌'에는 경전을 읽는 것과 만트람을 반복하는 자파수행이 포함된다.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트람은 입문 때 스승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1-27-29를 참조). 파탄잘리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讀頌은 자파수행을 가리킨다.

 

2-45. 이슈바라[自在神]'헌신'하는 수행을 하면 삼매상태에 도달한다.

44절과 이 구절은 바크티-요가bhakti yoga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면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위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4가지 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바크티-요가bhakti yoga: 예배와 기도와 자파수행을 주로 하는 바크티-요가는, 신을 사랑하며 신께 헌신하는 행위를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요가다. 이 요가를 통해 예배하는 자와 예배를 받는 자인 신 사이에 직접적이고 인격적인관계가 맺어진다. 바크티-요가수행자는 자기가 섬길 자기마음에 드는 구체적인 신 또는 신의 화신(化身)을 선택한다. 그것은 쉽게 사랑에 몰입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크티-요가는 가슴이 뜨겁고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효과적인수행법이다. 사실 각 종교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바크티-요가수행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카르마-요가karma yoga: 카르마-요가는 자기를 비우고, 모든 것을 신께 바치는 행위로 여기는 수행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행위를 통한 요가이다. 카르마-요가수행자는 항상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는 행위를 추구한다. 그러면 점차 깨달음이 생기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 사다리를 이용하여 사다리를 넘어설 수 있는 것처럼, 행위[有爲]는 행위를 통해서 초월할 수 있다. 행위를 초월하여 행하는[無爲] 사람에게는 집착이라는 굴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행위를 해도 카르마가 쌓이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평안함 속에 안주한다. 그리고 진짜 행위자인 主人空을 깨닫게 된다. 카르마-요가는 활동적인사람들, 특히 사회적인봉사의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수행법이다. 카르마-요가는 그런 사람들을 일에 대한 과도한 욕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혼란한 중에도 고요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노자는 이를 일컬어 '하지 않음으로써 못할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고 했다. 譯註).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주는 충고는 거의 대부분 카르마-요가에 관한 것이다.

3). 즈나나-요가jnana yoga: 즈나나-요가는 지성을 통해 현상세계의 진정한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해나감으로써 브라흐만을 발견하는 지적인수행법이다. 즈나나-요가수행자는 피상적인현상세계를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하고 부정함으로써, 끝내는 더 이상 부정할 수없는 브라흐만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수행은 대단히 어렵다. 엄청나게 끈질긴 의지력과 명석한 두뇌를 필요로 한다. 이 수행법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통해 깊은 경지에 들어간 성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특정한 종교라는 테두리 속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4). 라자-요가raja yoga: 흔히 '명상요가'라고 부르는 이 수행법은,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가가 혼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명상에는 신에 대한 헌신인 예배와, 자신이 선택한 신의 형상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그를 깨닫는 수행이 포함된다. 라자-요가수행자들은 영적인 에너지의 통로인 육체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그들은 1-36에서 언급된 '심장의 연꽃'과 같은 인간의 육체 속에 있는 에너지 센터[차크라]들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한다. 라자-요가는 이렇게 소위 과학적인명상을 강조하는 수행법으로써, 명상 또는 기도하는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준다. 이 수행법은 은둔수도사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또는 조용히 앉아서 관조하기를 즐기는 체질인 사람들에게 적절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든 작든 모든 수행자들은 어느 정도 라자-요가를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너는 이런 기질이니 이 요가를 해야 하고, 또 너는 성격이 이러니 저 요가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다른 형태의 요가를 배제하고 '나는 이 요가만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이라면, 어떤 요가를 선택해서 수행하든지 (바크티-요가의)사랑과 (즈나나 -요가의)분별력과 (카르마-요가)의 헌신적인행위는 다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결여된 사랑은 감상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분별력은 영적인 자만심을 키울 위험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삶에는 행위가 포함되어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바크티-요가의 방법으로 하느님께 접근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자들 중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같이 즈나나 요기타입인 사람들과 빈센트 드 폴처럼 카르마요기타입인 사람들도 많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선택해서 진리에 접근한다. 그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요가를 선택해서 수행하든, 파탄잘리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요가의 가지와 규칙'은 요가의 황금률로써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바크티-요가의 길과 관련해서,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그의 제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 잠시 눈길을 돌리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제자: 선생님, 신은 형태가 있나요 없나요?

라마크리슈나: 아무도 신은 '이렇다' 또는 '그렇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없다. 그는 형상이 없으면서 또 있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는 숭배자에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고와 현상세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내적인 분별의 길을 가는 즈나나요기에게는 신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즈나나요기에게는 모든 형상이 꿈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내적인 意識 속에서 브라흐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궁극적인 실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의 숭배자에게는 신이 인격적인존재로 나타난다. 브라흐만을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라고 하자. 숭배자의 뜨거운 사랑은 그 바닷물을 얼게 만들 수가 있다. 그러면 얼음덩어리라는 형상이 그 앞에 나타난다. 신은 이처럼 숭배자들에게 인격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면 얼음은 녹아 다시 형태가 없는 바다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그러면 신의 인격적인 모습도 사라진다. 지혜의 빛 속에서는 에고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묘사될 형상이 없어지고 묘사할 사람도 사라지는데, 누가 누구를 묘사할 수 있겠는가?

제자: 선생님, 신은 이렇다 또는 저렇다 하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라마크리슈나: 그것들은 전혀 모순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깨달은 대로 신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신을 체험하고나면 그 모든 이야기들이 서로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까비르는 "형상이 없는 절대존재가 나의 아버지이고, 형상을 가진 하느님이 나의 어머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제자: 사람이 신을 볼 수 있는 겁니까? 만약 볼 수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인지요?

라마크리슈나: 그렇다. 단언하건대 신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를 형태가 있는 존재로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를 형태가 없는 존재로 볼 수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제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을 볼 수 있습니까?

라마크리슈나: 그대는 불타는 가슴으로 그를 갈망하며 울어본 일이 있는가? 사람들은 자식들과 아내와 돈을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간절하게 울지 않는다.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 동안에는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른 집안일을 한다. 그러다가 아이가 장난감놀이에 싫증을 느끼고,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엄마를 찾으며 큰 소리로 울면 급히 달려와 아이를 품에 안는다. 마찬가지이다. 신을 만나려면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큰 소리로 울면서 그를 부르라. 그러면 그는 그대를 안아줄 것이다. 자기가 섬기고자하는 신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예수의 경우에는 하느님이 아버지였고, 라마크리슈나의 경우에는 어머니였다. 로렌스형제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여겼고, 동방의 현자그룹[超人]은 하느님을 그리스도아이(Christ child)라고 부르며 애정을 쏟았다. 크리슈나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을 아르쥬나는 친구처럼 생각한 반면에, 라다는 연인으로 여겼다. 바크티요가수행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승화시킨다.

 

2-46. 안정된 자세로 긴장되지 않게 앉는 것이 坐法(아사나)이다.

아사나라는 말에는 요가수행자가 앉는 '자리'라는 뜻과 앉는 '자세'라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있다. '자리'라는 뜻과 관련해서 <바가바드기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앉는 자리는 견고해야한다.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깨끗한 곳이어야 한다. 그 곳에 부드러운 풀을 깔고 사슴가죽으로 덮어라. 그리고 그 위에 천을 덮어라." 앉는 자리에 대한 이 규칙은 전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자세' 또한 전통적인규정이 있다. 가장 유명한 자세는 책상다리로 앉아서 다리를 틀어 양발을 반대쪽 다리에 올려놓는 결가부좌이다. 이 자세 말고도 훨씬 더 유연한 자세들도 있다. 문제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앉아 배와 가슴과 목과 머리를 일직선으로 하고, 그러면서도 긴장되지 않아야한다는데 있다. 그래야만 몸에 신경을 쓰지 않고 명상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자세로 앉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초보자들, 그 중에서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등을 꼿꼿이 펴는 자세로 앉아도 된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바닥에 앉는 것이 좋다. 의자에 앉는 경우, 몰입의 단계가 깊어졌을 때 굴러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몸을 꼿꼿하게 하고 앉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는 명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명상할 때가 아니라도,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을 때보다는 곧게 펴고 앉아 있을 때가 훨씬 더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요가수행자에게는 곧게 앉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명상에 깊이 몰입하면 영적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일어나는데, 그때 에너지의 통로인 척추가 곧게 열려있어야만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2-49, 50에서 더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2-47. 올바른 坐法은 몸의 긴장을 풀고 무한(無限)을 상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올바른 자세로 앉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자세로 앉는다. 그래서 이곳저곳에 육체적인 긴장이 생긴다. 따라서 바른 자세로 앉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앉는 것을 훈련하는 목적은, 자연스럽게 앉아도 흔들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긴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음이 몸을 긴장시킨다. 그러므로 몸의 긴장을 풀려면 먼저 마음의 긴장을 풀어야한다. 본 문에서 '무한을 상상하라'는 것은 마음의 긴장을 풀라는 뜻이다. 무한한 브라흐만자체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우주공간은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무한한 것을 상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2-48. 그러면 상대적인 감각경험의 괴롭힘을 받지 않는다.

'상대적인 감각경험'이란 뜨거움과 차가움, 괴로움과 즐거움, 선과 악 같은 현상세계의 경험을 말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이런 경험을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짝"이라고 부른다. 물론 坐法만으로는 상대적인 감각경험을 통제하지 못한다. 감각을 통제하는 힘은 신의식(神意識) 속에 몰입해야생긴다. 그래서 파탄잘리는 신의식에 몰입하기위한 나머지수행에 대해 계속 언급한다.

 

2-49. 坐法을 완전히 익힌 후에는, 호흡을 통해 프라나[]를 조절하는 調息 (프라나야마)을 수습해야한다. 調息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숨을 멈추는 것[止息]을 통해 훈련한다.

2-50. 호흡은 들숨과 날숨, 그리고 들숨과 날숨 사이의 멈춤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성질을 가진 호흡을 위치와 시간과 수()를 가지고 조절하는 것이 調息이다. 調息을 통해 숨을 길고 미묘하게 할 수 있다. 프라나[]는 생명에너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1-34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생명에너지인 프라나는 호흡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라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육체의 모든 힘과 감각기관의 기능, 그리고 마음까지도 프라나의 작용이다. <프라사나 우파니샤드>에는 프라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브하르가바가 스승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이 육체 속에는 얼마나 많은 힘들이 뭉쳐있나요? 그리고 그 중에서 어떤 힘이 가장 크고 주도적인가요?' 스승이 대답했다.

'육체 속에는 흙, , , 바람, 공기[五大]라는 다섯 가지 힘이 있다. 이 다섯 요소가 육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마음과 혀와 눈과 귀를 비롯한 다른 감각기관들도 모두 이 다섯 가지요소로 이루어져있다. 하루는 이 다섯 가지 힘들이 모여서 '우리가 서로 뭉쳐 몸을 구성하고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러자 그 힘들보다 뛰어난 근원적인 에너지인 프라나가 말했다. '거짓말하지마라. 몸을 구성하고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이다. 내가 너희들을 통해 그렇게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프라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프라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입증해보이려고 몸에서 떠날 작정을 했다. 그가 떠나려는 순간, 다섯 요소들은 프라나가 떠나면 자기들도 흩어져버릴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프라나가 떠나지 못하도록 말렸다. 프라나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자 다섯 요소들도 각자 자기의 위치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진실로 그렇다. 여왕벌이 나가면 모든 벌이 따라 나가고 여왕벌이 들어오면 다시 따라 들어오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보는 것과 듣는 것 등은 모두 프라나의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들어오고 나간다.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다섯 힘들은 프라나를 찬송했다. '프라나는 불을 타오르게 하며, 태양으로 하여금 빛을 비치게 한다. 구름으로 하여금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프라나이며, 인드라가 되어 신들을 다스리는 것도 프라나이다. 그가 바람을 불게하고, 달빛으로 하여금 온 누리를 적시게 한다. 그는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는 불멸의 생명이다.' 라자-요가의 체계에 따르면, 거대한 영적인 에너지창고가 척추의 뿌리부분에 있다. 이 프라나의 창고를 쿤달리니kundalini라고 하는데, '(똬리를 틀고 있는 뱀처럼) 사리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잠자고 있던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척추를 타고 여섯 개의 영적인 의식센터[차크라]를 거쳐 정수리에 있는 일곱 번째 의식센터까지 상승한다. 쿤달리니에너지가 상승하면서 새로운 의식센터를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과 능력이 생긴다. 쿤달리니에너지가 상승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라마크리슈나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경전들은 일곱 개의 의식센터[차크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음은 그 일곱차크라들 중에 어느 한 곳에 머문다. 마음이 현상세계에 붙잡혀있을 때는 맨 아래 세 개의 차크라, 즉 생식과 배설을 맡고 있는 기관인 배꼽아래의 차크라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 때는 고상한 영적인 뜻이나 비전을 가지지 못하고, 정욕과 탐욕만이 마음을 지배한다. 네 번째 차크라는 가슴에 있다. 마음이 그곳에 머물게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최초의 영적인 각성을 경험한다. 그는 주위가 온통 밝은 빛으로 에워싸이는 체험을 한다. 그는 그 신적인 빛을 보면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의 마음은 아래 단계의 차크라로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다섯 번째 차크라는 목에 있다. 마음이 거기에 도달한 사람은 無知幻影에서 벗어난다. 그는 신에 대해서 말하고 듣는 것만을 즐긴다. 그 외의 다른 이야기들은 아무런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 여섯 번째 차크라는 이마[眉間]에 있다. 마음이 거기에 도달하면 밤이고 낮이고 신의 비전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에고의 흔적은 남아있다. 그때의 신의 비전은, 곧 만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유리 때문에 만질 수없는 유리초롱 속의 등불과 같다. 일곱 번째 차크라는 정수리에 있다. 마음이 거기에 도달하면 삼매가 성취된다. 그리고 브라흐만을 아는 자가 되며, 브라흐만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관습적으로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교육받은 사람에게는 라자-요가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차원의 관계를 간과한 채,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라자-요가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의 생명력에 의해 작용한다고 가르친다. 동일한 에너지가 서로 다른 의식차원에서 서로 다른 양태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그 동일한 에너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때에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 하기도 하고, 달리기를 하게 하기도 한다. 또 기도를 하게 하는 힘과 섹스를 하게 하는 힘도 같은 에너지이다. 백화점에서 똑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성의류매장에 갈 수도 있고 스포츠용품매장에 갈 수도 있고 또는 가구매장이나 옥상에 있는 식당에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활동은 동일한 에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물론 오해이긴 하지만) 프로이드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종교는 을 억압하는 것일 뿐'이라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아마 이런 말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싫어하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탄잘리는 그런 말에 코도 씽끗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은 잠재된 종교다. 에너지를 보다 고상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라. 그러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라자-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척추에 '수슘나'sushumana라는 에너지통로가 있고 그 통로 좌우에는 '이다'ida'핑갈라'pingala라는 신경의 흐름이 흐른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그 에너지는 이다와 핑갈라를 타고 나선형원주를 그리며 상승한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수슘나가 닫혀있다. 따라서 쿤달리니에너지가 위에 있는 차크라들을 향해 상승하지 못한다. 앞에서 라마크리슈나가 배꼽이니, 가슴이니, 목이니 하면서 차크라의 위치를 설명했는데, 실제로 수슘나에는 육체의 그런 부위에 상응하는 곳에 영적인 의식센터인 차크라들이 있다. 영적인 비전이 열린 사람들의 눈에는 차크라들이 연꽃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요가문헌에서는 차크라는 말 대신 '연꽃'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베카난다는 차크라를 생리학에서 말하는 신경총(神經叢)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가의 생리학에서는 신경총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를 문제 삼지 않는다. 요가에서는 신경총[차크라]들의 차원 내지는 단계만을 문제 삼는다.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내적인 명상이 오래 지속되면 축적된 엄청난 에너지가 수슘나를 타고 상승하기 시작한다. 상승하는 에너지가 차크라에 부딪치는 충격은 대단하다. 그 충격은 꿈이나 상상 속에서 받는 충격보다 훨씬 크며,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는 충격보다도 크다. 흔히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인 지혜는 모두 쿤달리니에너지가 수슘나를 타고 상승할 때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아주 작은 에너지가 상승해도 그런 일은 생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종교의식은 쿤달리니에너지의 상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할 당시의 정신적인분위기에 의해 자신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쿤달리니의 무한한 에너지가 약간 풀려난 결과일 뿐이다. 사람들은 무지와 두려움과 시련 속에서 신께 예배한다. 그러나 요가수행자는, 접근하는 방법을 알기만하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어머니가 모든 존재 속에 에너지형태로 깃들이어있다고 선언한다. 요가는 모든 형태의 예배와 기도와 기적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종교의 과학'이다." 프라나야마[調息]의 목적은 쿤달리니에너지를 각성시키고 그 생명에너지[프라나]를 조절하는데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프라나는 주로 숨을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 그래서 프라나를 조절하기위해 호흡수행을 하는 것이다. 프라나야마의 핵심은 지식(止息), 즉 숨을 멈추는데 있다. 호흡을 '위치'로 조절한다는 것은 숨을 멈추는 지점을 특정인체부위에 상정해놓고 (상상으로) 숨을 거기까지 끌어들이고 멈추는 것을 뜻한다. '시간'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과 멈춤의 시간을 비율로 배정해놓고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로 조절한다는 것은 들이쉬는 시간과 멈추는 시간과 내쉬는 시간을 숫자를 세어가면서 조절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譯註) 호흡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은 대단히 기술적인문제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파탄잘리의 영적인 가르침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호흡법에 대해서 깊이 다루지 않겠다. 그러나 호흡수행을 하려면 필히 경험 있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만하며, 신을 탐구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고자하는 결심이 없으면 호흡수행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점은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정신이 혼란이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나 허영심에서 다른 사람에게 호흡수행을 해보라고 부추기는 것은 범죄행위에 속한다. 쿤달리니에너지의 엄청난 힘은 가볍게 다루거나 남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호흡법은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른손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콧구멍을 막고 왼쪽콧구멍을 통해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마시는 동안 숨과 함께 순수한 프라나가 들어오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것을 수슘나 왼쪽에 있는 신경관(神經管)인 이다를 통해 척추 끝 가장 밑바닥에 있는 차크라까지 내려 보내 거기에 있는 에너지바다[쿤달리니]로 보낸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추고 옴OM을 몇 번 반복해서 외운다. 그런 다음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왼쪽콧구멍을 막고 몸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른쪽콧구멍을 통해 숨을 내보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상태에서 오른쪽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수슘나의 왼쪽에 있는 신경관인 핑갈라를 통해 척추 끝까지 내려 보낸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이런 식으로 호흡을 반복한다. 이런 호흡은 아무런 해가 없다. 억지로 숨을 멈출 필요도 없고, 산소과다로 육체가 동요되는 일도 없다.

2-51. 외적인 대상이나 내적인 대상에 대한 집중이 완전해지면 호흡의 제4형태인 정지가 일어난다.

앞의 두 구절은 호흡의 세 가지 형태, 즉 들이마심과 내쉼과 멈춤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의 調息은 의식적인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호흡이 진행되고 멈추는 단계가 있다. 훈련을 통해 프라나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사람이나, 또는 調息을 수행하지 않았어도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해 높은 영적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에는 집중상태에 들어가면 호흡이 저절로 정지된다. 이런 정지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도 수행자 자신은 거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 삼매상태에서는 몇 시간씩 숨을 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 그런 상태가 저절로 일어날 만큼 수행자 자신의 영적인 의식이 계발되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2-52. 그 결과 내적인 빛을 가리고 있던 덮개가 벗겨진다.

'내적인 빛'이란 실재와 비실재를 구별하는 영적인 식별력을 뜻한다. '덮개'는 과거에 쌓아놓은 카르마에 의해 생성된 無知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바는, 調息을 통해 마음이 정화되면 無知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2-53. 그러면 凝念[다라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凝念에 대해서는 다음 장 첫 구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2-54. 마음이 감각의 대상들로부터 분리되면 감각기관도 대상에서 분리된다.

감각기관은 마음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이 대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制感(프라트야하라)이라고 한다.

 

2-55. 制感이 되면 감각기관들은 완전히 통제된다.

지방의 영주들이 중앙의 제왕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모든 감각기관들은 마음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한다. 마음에 욕망이 남아있으면, 감각기관들은 그 욕망의 대상을 향해 제멋대로 달려 나간다. 감각기관은 본능적으로 주인을 모방하는 동물과 같다. 만약 주인이 악하고 불결한 정욕을 품고 있다면, 감각기관들은 마치 미친개가 어린애 물어뜯으며 끌고 다니듯이 주인을 끌고 다닌다. 그러나 마음이 강하고 통제가 잘되고 있으면, 감각기관들은 충직한 하인처럼 복종한다. 이렇듯 육체적인현상은 마음상태가 반영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마음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마음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욕망 같은 것에 하도 익숙해져있는 탓에, 그런 것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끊어지지 않고 울리는 북소리처럼 계속 울리면서 모든 생각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명상의 전초전으로서, 하루에 단 몇 분씩이라도 마음을 관찰하고 마음속에서 계속 울려대는 북소리를 듣는 훈련을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객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평소에 자기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신의 마음과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도 점점 더 고요해질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 만들어낸 탐욕과 어리석음이라는 껍질에 싸여있다. 밖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비평의 칼이 날아와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마음을 덮고 있는 無知의 껍질은 오직 스스로 관찰하고 확인하여 벗겨내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위해서는 훈련을 규칙적으로 지속해야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히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커질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