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3) 구원의 확실성과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3) 로마서 8장 31-39절은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8장 31-39절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5장과 달리 이 부분에는 암시적인 다른 증거마저 없습니다. 이 구절은 그저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5장에서처럼 이 구절 자체도 진리이고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그것은 로마서 8장만 보면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령에 대한 곡해와 오해는 성경 각권의 전체를 보지 않고 한 구절이나 한 단락 혹은 한 장만 볼 때 일어납니다. 많은 이들이 로마서 4장 1-8절만 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같은 장 17-25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성격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루터처럼 바울이 말한 믿음을 수동적인 믿음으로 착각하여 신앙주의에 미혹이 되곤 합니다.
또, 많은 이들이 로마서 7장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와 같은 일부 두드러진 표현만 보고 구원받은 사람의 경험이라고 오해합니다. 6장이나 8장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의 정의와 7장 5-6절에 나타난 로마서 7장과 8장의 구조에 의하면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한사람이 결코 구원받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같은 실수가 로마서 8장에서도 반복됨을 봅니다. 이 장을 해석할 때 두 진영 모두 실수를 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로마서 8장의 이 단락만 보고, 구원받은 신자가 버림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도 로마서 8장의 이 단락만 보았습니다. 이 단락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목록에 '나' 혹은 '죄'가 없지 않느냐?"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근원이고 견인의 근원입니다. 학자들도 공통적으로 로마서 8장의 바울의 확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실제로 다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 이 고백을 하는 시점이 로마서 6장을 넘어섰구나! 그리고 8장 초반부를 넘어섰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각각 구원받은 자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8장 후반부에 나오는 신자는 당연히 성경의 이런 교훈들을 받아들이고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신앙생활 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견인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무조건 버림받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6장과 8장 그리고 11장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비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여기서 자신과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궁색한 설명을 되풀이하면 안 됩니다. 사실 그럴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버림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 단락 이전에 이미 결론이 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6장뿐 아니라 8장 앞부분에도 신자가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명시적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락의 주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목록 중에, 나 혹은 죄가 없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난 문제이고 이것은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단락은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정상적인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계속 신실하게 신앙생활 할 때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과 신자가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고, 날마다 의지적으로 의에게 자신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멸망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지금 가고 있는 거룩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서 구원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위하시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당신들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다음 구절과도 일치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7-29)
여기서 예수님은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전에서 주님은 양을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는 자'로 정의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랐던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게만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의 제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들이 보여주듯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사람을 누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가는 양들이 절대 안전한 것처럼 이들은 안전합니다. 로마서 8장 31-39절에 나오는 신자들은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을 장담한 것입니다.
4) 정상인이라면 이제부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견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견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베풀어진 사랑입니다.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이 자녀 된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르 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견인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견인과 구원의 확신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이 구원의 확실성을 표현한 구절들 안에는 로마서 8장 31-39절의 경우처럼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가 그 자체 안에 나와 있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실성과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전자 안에 후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칭의 안에 중생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면 방심하지 않고도 구원을 확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바람직한 것입니다.
과거에 저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부대꼈습니다. 그 구절들이 진짜로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해주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한데, 왜 바울이 '자주' 더구나 '적극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말하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불가능했습니다. 뭔가가 시원치 않고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난 후 그럼 마음의 불편이 사라졌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는 성구들에 대해 진심으로 '아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걸림이 없이 원만하게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에 우리는 견인의 교리에 대해 바르게 알았지만 원만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듯한 두 종류의 성구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궁색한 설명들만 늘어놓아서 칼빈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우리도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진리 중 선호하는 한 가지를 선택하고 다른 것은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상반돼 보이는 두 가지 성구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통합적인 이해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도 거부감 없이 우리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앞으로는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눈을 감은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 진리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설명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지금까지 한 설명을 듣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상태의 사람인데 왜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 31-39절에서처럼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바울이 실제로 두려워서 두렵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감정적으로 두려움을 느껴서 두려워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버림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두려워함이로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보다는 진리에 대한 합리적이고 지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자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의 측면을 생각할 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견인 진리의 측면을 생각할 때는 확신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반응과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 바울이 성경의 같은 책이나 장에서 두려움과 확신 둘 다를 말한 것은 그가 어떤 진리를 설명하고 있느냐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이나 행위에 대해 말할 때는 확신을 피력합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할 때는 두려움이나 버림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진리는 복합적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부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어떤 부분을 전하느냐에 따라 이런 고백을 할 수도 있고 저런 고백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일부 성숙한 신자들을 제외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바울의 경우와 다릅니다. 진리보다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느낌이나 고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세윤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 근거 없는 주관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생각과 삶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의지가 내게서 확인되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러주신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나를 계속 그 관계 속에 지탱하여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안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 의지가 약화되거나 흔들릴 때, 우리는 스스로 불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자신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뛰쳐나온 것이 아닌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안도할 수 있어야 하나, '구원의 확신'이 자만과 방종이 되지 않도록 자제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달려가는 자'(경주하는 자)의 긴장('두렵고 떨림' 빌 2:12)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두렵고 떨림'이 상호 긴장을 이루며 동시에 있을 때 그것은 건전한 신앙입니다."
또 김세윤 교수님은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 나의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뜻)를 의식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는 한 우리는 후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안도하고 신앙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과 자세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안도해야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조마조마해서는 안 됩니다. ... 자신이 지금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통치/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가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할까 조마조마하지 말고 하나님의 끝까지 지켜주심을 믿으며,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자신과 함께 계셔 자신을 일깨우고 힘주심의 증거로 보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안도하며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에 구원의 확신과 두려워하는 것 둘 다가 있으므로, 우리가 둘 다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항상 감정적으로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 때에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 하고, 죄를 짓거나 불순종할 때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건강 상태에 따라 우리가 취해야 할 음식이 달라지듯이 자신의 상태에 따라 두려움 또는 확신을 주는 말슴을 취하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고 지혜입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은 더 건강해지고, 무사히 목표 지점인 궁극적인 구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