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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XIII (변승우 목사님의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 중에서)

작성자소망으로|작성시간26.06.18|조회수9 목록 댓글 0

  ■ 왜 견인의 교리를 반드시 바르게 알아야만 할까요?

 

  (4) 견인의 교리에 근거하여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십시오!

 

  3) 하늘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본

 

  그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옳은 것을 따르기 위해 핍박을 감수하며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른 서신서들과 달리 그 서두에서 수신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도 수신자가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히브리서의 모든 사본은 '프로스 헤브라이우스' 즉 "히브리인들에게"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 표제가 언제부터 붙여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히브리인들이었다는 초대 교회의 이해는 그 타당성이 매우 높습니다. 대다수 학자들이 수신자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런 동의는 주로 내적 증거들에 근거한 것입니다. 

 

  첫째, 히브리서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수신자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줍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성경 구절들이 빈번히 인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12:16-17). 특히 대제사장 제도, 제사 의식, 장막의 구조, 모세의 언약 등에 관한 상세한 논점 전개는 수신자들이 구약성경에 매우 익숙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가능서을 강력히 지지해줍니다. 

 

  둘째, 수신자들이 직면해 있던 위험은 유대교의 핍박으로 말미암은 유대교와의 타협 또는 유대교로의 회귀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은 수신자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가정함으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당하였던 핍박은 매우 실제적이고 극렬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당한 투옥과 심문(해 3-4장, 5:17-41), 스데반의 순교(해 7장), 사울이 행한 핍박(행 8:3, 9:1-2), 선교여행 중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수난(행 13:45-50, 14:2, 19-22, 17:5-14, 21:30-36, 22:12-30)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핍박에 직면하여 유대교와의 타협 내지는 유대교로의 회귀 유혹을 가장 심각하게 받았을 대상은 당연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족장들에 관한 다음 구절은 독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브리서 11:15-16)

 

  족장들은 '그들이 나온바 본향'인 메소포타미아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처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도 핍박을 피하기 위해 타협하고 절대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교훈입니다. 

 

  제가 1년 중 제일 싫어하는 날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구정과 추석입니다. 이날 단지 우상숭배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출석률이 저조해서도 아닙니다. 명절이 지난 후 수백 명이 떨어지고 몇 달 동안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가서 이단사냥꾼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속은 목사들에게 다시 속은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과거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명절 때마다 가난한 성도님들 가정에 20만 원씩 억대를 지원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이런 배신입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픈지 모릅니다. 

 

  이렇게 불이익이나 핍박을 피하기 위해 타협하는 것은 외국인과 나그네ㅔ게 어울리는 삶이 아닙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들은 온갖 질시와 차별, 편견 혹은 박해를 받습니다. 이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나그네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신 것처럼 옳은 것을 따르는 데에는 항상 박해가 따릅니다. 그것이 우리가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고 여러분 중에는 박해에 굴복하여 비겁하게 과거로 돌아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버림받을 가능성을 알고 죄와 싸우며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를 나그네로 표현한 다른 신약의 구절들이 잘 보여줍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전서 2:11)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두 구절을 보고 뭐 생각나는 것 없으십니까?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어떤 의미가 될까요? 바로 고린도전서 9장 27절의 고백이 됩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긍하지 않고 두려워하며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곧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나그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립보서 3:20-21)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이것은 회심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8-10)

 

  이것은 회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회심의 3대 요소를 기록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회심의 본질 - 우상으로부터 돌아섬, 하나님을 섬김, 그리스도를 기다림 - 을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것들과 믿음, 소망, 사랑의 세 요소 간의 대응을 간파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은 분명 믿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열매로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소망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들에서 변치 않는 회심의 모델을 보여주였다. ... 이러한 돌아섬, 섬김, 기다림이 없이는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고 거의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회심의 3대 요소인 우상을 버림, 하나님을 섬김, 재림을 기다림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재림을 고대하며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궁극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또한,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은 회심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데살로니가전서 1:1-4) 

 

  신앙생활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전부가 아닙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즉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보고 타협하지 말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나그네로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이 본을 보여준 대로, 과연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의 3대 요소인 신·망·애 중 칼빈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거짓 교리로 인해 '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매 시간 두 명의 학생에게 설교를 시킵니다. 하루는 한신애라는 신학생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신애라,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소망이 빠졌네요. 현신애 권사임 생각이 납니다. 이분 이름에도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소망이 빠졌지요. 이름뿐 아니라 삶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입신을 경험했을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대부분의 목사님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부인하시는 것을 듣고 회개하고 40억을 북한선교회에 바친 것 아닙니까? 치유사역을 통해 40어글 모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과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소망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의 삶 속에 빠진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초대형 교회 목사들조차 적지 않은 수가 하늘이 아닌 땅의 것에 소망을 둔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각종 불법을 저지름으로 주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타난 대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순서로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구절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즉 소망을 가장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신앙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궁극적인 구원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나그네의 삶입니다. 

 

  한편, 우리가 살펴본 족장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경주자였으나 지금은 응원자들입니다. 우리를 응원하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을 응원하겠습니까? 바로 세상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잘 달리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이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관심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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