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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12) - 마나님의 굳은 절개

작성자박부호/소진FLOWER|작성시간18.09.30|조회수207 목록 댓글 0

 

 

마나님의 굳은 절개

 


 

늘 보아오던 산이요, 늘 보아오던 물이기는 한데 오늘따라 청산도 처음 보는 것 같고 녹수도 처음 보는 것 같아 산과 물 사이를 걸어오는 김삿갓의 입에서는 우암 송시열의 시조 한 수가 절로 흘러 나왔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절로

 

그 중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날씨가 무척 화창한 어느 봄 날, 김삿갓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아낙네를 한 명 보았다. 장옷을 입고 남바위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 댁 마나님으로 보였다. 하인도 안 데리고 이 산길을 혼자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저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지 한참 됐는데 제법 멀리서 다투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도둑을 맞은 것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서 뛰어가 보았다.

 


 

저만큼 잔디밭 위에서 아까 그 마나님이 50세가량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내밀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산중에서 한 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런 때려죽일......”

 


 

그러나 마나님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당당한 위엄을 보이며 스님을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다.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일시적인 사념(邪念)으로 파계를 하려고 하시나이까. 한두 번의 과오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이 순간부터나마 사념을 깨끗이 버리시고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시옵소서.”

 


 

그러나 욕정에 눈이 뒤집힌 중놈은 좀처럼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중놈은 회색 장삼에 어깨에는 붉은 가사를 걸쳤고 손에는 육환장(六環杖)까지 짚고 있어서 차림새만으로는 고승처럼 품위가 있어 보였다.

 


 

“우리가 이 깊은 산중에서 단둘이 만난 것은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하여 전생부터의 인연을 무시하고 나의 간절한 욕구를 거절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께서는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 자꾸만 하고 계시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런데 대사께서는 육욕을 탈피하지 못해 탐욕, 번뇌에 시달리고 계시오니 한시 바삐 해탈의 눈을 뜨도록 하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 가야할 정도일 것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중놈을 깍듯이 존중하며 도도하게 이론으로 꾸짖는다. 그러나 육욕에 환장한 중놈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나는 그대와 불경을 토론할 생각은 없소. 그러면 우리 말재주로서 승부를 가리면 어떻겠소.”

 

설득으로는 성공할 자신이 없음을 깨닫자, 중놈은 또 다른 편법으로 나온다.

 


 

“내가 이제부터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인즉, 그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보시오. 대답을 제대로 못했을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말을 들어줘야 할 것이오.”

 


 

중놈의 요구는 어거지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악착같이 덤벼든다. 마나님은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중놈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는지,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를 걸어오시오. 그러면 내가 대(對)를 놓아 보이겠소이다.”

 


 

저 마나님이 어떤 봉변을 당하려고 해괴한 내기를 응낙하는가 싶어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한다. 중놈은 이제 됐다 싶은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내기 말을 씨부려 대는 것이었다.

 


 

일,  일룡사 사는 중이

 

이,  이룡사 가는 길에

 

삼,  삼로 거리에서

 

사,  사대 부인을 만났으매

 

오,  오음(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로 점을 치니

 

칠,  칠괘도 좋다마는

 

팔,  팔괘는 더욱 좋다

 

구,  굽어라

 

십,  X좀 하자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음담패설이었다. 바로 그 순간, 마나님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중놈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내가 다시 한 번 훈계를 내릴 테니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일,  일편단심 이내 마음

 

이,  이심이 있을소냐

 

삼,  삼강이 뚜렷하고

 

사,  사리가 분명커늘

 

오,  오할(五割)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둘러 짚고

 

칠,  칠가사 둘러메고

 

팔,  팔도를 편답하며

 

구,  구하는 게

 

십,  X이더냐

 


 

마나님의 호통은 추상같이 준엄하였다. 마나님은 지금까지는 말끝마다 대사님, 대사님 하고 깍듯이 존중하다가 <오할할 이 잡놈!> 이라고 불호령을 지르니 중놈은,

 

“천하에 무서운 계집이로고.”

 

하며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중놈이 도망을 가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 내려간다. 참으로 대단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나마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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