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나라 시 소개

편의점에서 잠깐 / 정호승

작성자김중일|작성시간26.06.05|조회수14 목록 댓글 0

늦은 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당신은 맥주를 사러 왔고 나는 라면을 사러 왔는데

편의점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죽기 전에 잠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니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당신은 아직도

겸손의 손으로 캔맥주를 들고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나는

교만의 손으로 컵라면을 들고 그리운 눈인사를 나누며

아직도 사랑하는 척 부모님 안부를 묻는다

 

작년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다고

어머니 돌아가신 지 벌써 몇해나 되었다고

공연히 부모님 안부를 나누는 거짓의 입술에

돌아가신 부모님만 또 돌아가신다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사랑을 판매한다 해도

할인가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

 

오늘밤 편의점의 흐린 불빛은 

우리가 함꼐 거닐었던 항구의 불빛처럼 쓸쓸하다

잘 가라 우리가 비록 편의점에서 잠깐 만났다 할지라도

부둣가를 밝히는 검은 불빛을 따라

또다시 밤배는 떠나간다

 

ㅡ 편의점에서 잠깐 / 정호승

창비시선 522호  ( 2025. 08)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