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3장22~36절
제목 : 요한의 증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고,
요한도 근처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에게 몰려들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향했음에도 요한은 시기하지 않고 메시아의 증언자인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1.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22~26절)
1) 예수님의 세례(22절).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의 변두리 지역으로 옮겨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있는데, 요4:2를 보면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이었습니다.
이 세례는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마 3:2;4:17).
*마3:2;4:17 “[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4: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한편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2) 요한의 세례(23절)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인 살렘 근처 에논에서 증거자 요한 역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현재 살렘 근처 에논의 위치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물이 풍부한 두 지역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두 지역이란 각각 벧산 남동쪽 방향에 있는 요단강 근처 지여과 세겜의 디르사 근처에 있는 곳을 말합니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풀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고 있은 모습은 공관복음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요한이 동시에 경쟁적으로 사역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공관복음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공식적인 사역의 출발점을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서는 요한의 투옥 이전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경쟁적으로 사역하신 모습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24절에서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함으로 공관복음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요한의 투옥 이전 기간을 지적하여 공관복음의 기록과 요한복음이 배치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본서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즉,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거(25~30절)
사람들은 예수님과 증거자 요한 사이에 서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세례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이지 예수님이나 증거자 요한의 태도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1)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합니다(25절)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2)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사람이 다 선생이 증언하시던 이에게로 간다고 보고 하였습니다(26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을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더이다는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냅니다.
막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냅니다(11:48).
3)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27절).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님의 제자들 등도 포함 됩니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4) 제자들의 오해를 교정해 주었습니다(28절).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아직도 잘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친히 증거한 것을 요한의 제자들이 대신 증거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 자신의 사역과 역할은 끝나고 이제 메시아가 현장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정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5) 증거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29절).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습니다(엡5:32;계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님과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C.K. Barrett).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 까지도 담당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고후 11 : 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6)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입니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릴레이 경주 할 때에 바턴을 주는 선 까지만 뛰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할 일을 알았습니다. 거기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국가발전론에 보면 위대한 지도자는 정상에서 빨리 네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을 정복한 후에는 빨리 네려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
의 뜻히 필연성과 당위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 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막 1 : 14 ; 눅 3:18-20).
3. 하늘 출신인 예수님의 특징(31~33절)
1) 위로부터 오시는 이(31절).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인류는 죄로 인하여 멸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울고, 그들의 마지막은 극단의 비애 곧, 죽음이고, 그들의 생의 중간 토막은 괴로움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찾습니다.
물에 빠진 자의 구원은 육지에 있는 힘밖에 없고,
무저갱에 침륜되는 자의 구원은 위에서 오시는 이,
곧 하나님 아들의 힘 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이의 힘은 초자연적 능력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능력의 원조 없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힘으로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초자연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높은 차원에서 오는 힘으로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위에서 오시는 이십니다.
그는 찾는 자에게 오시는 이십니다.
그는 하나님 아들로 오셨고, 성령으로 늘 오시고, 최후에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는 ‘오시는 이’십니다.
그는 이렇게 늘 오시는 이십니다.
겔47:1~12에 기록된 생명강은 성전에서 흘러서 계속적으로 흐른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부르짖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의 오심은 결단코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항상 기도할 용기를 얻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살전5:17)은, 그가 언제든지 기도자에게 오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1) 그의 기원은 천상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보다 우월합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습니다(12,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관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 입니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입니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습니다(1:30;마11:3;눅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합니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입니다(창 2:7).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킵니다.
(2) 그의 기원은 땅이 아니고 천상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 역시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 우월합니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2)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시는 이(32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이 말씀은 3:11의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한다”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1)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합니다.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됩니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일 1 :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2)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신 것은 참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보고 들으신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위에 오시기 전 하늘에 계실 때에 육안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에는 하늘의 것들을 영안으로만 보셨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 제일인 줄압니다.
인간의 육안은 실상 독수리의 눈만도 못한 것입니다.
독수리는 낭떠러지에 그 둥지를 틀고 있으며, 높은 곳에서 몇 실리 밖의 산중에 죽은 토끼 한 마리도 본다고 합니다.
이렇게 독수리는 망원경식으로 그 눈을 조절하며 멀리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것을 이 육안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심령의 눈으로 보려고 힘써야 됩니다.
우리의 육안이 본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속 심령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을 구원 문제와 관련시켜야 됩니다.
우리 심령의 눈으로 보며 심령의 귀가 들으려면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그가 보고 들으신 것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언제나 참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이(33명).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것은 그의 말씀은 사생활의 것이나 공생애의 것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는 내용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한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가 무한하신 성령을 받으셨다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신앙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생기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누가 엎드러지지 않으랴?
우리가 그의 말씀 앞에서는 신뢰와 안심을 가질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에 벌써 관설된 것과 같이 그의 말씀은 곧 살리는 영이십니다(요6:33).
그런데 그 영은 무한하다고 우리 본문이 말합니다(34b).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말씀과 성령의 병행으로 성립됩니다.
하나님의 능령은 말씀(진리)없이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순종하게 하심은 진리의 능력으로 하십니다.
구원 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말씀을 들음으로 끊임 없이 믿음을 얻습니다(롬10:17)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님을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 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 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4)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계속적으로 부어주십니다(34절).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입니다.
4. 영생과 진노(35~36절)
1)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습니다(35절).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님과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2) 인간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입니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됩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습니다(36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을 권고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1)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고.-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永生)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성도들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입니다.
(2)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입니다.
본절에서 영생(永生)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을 의미합니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24).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의 자격을 거론합니다.
제자들의 말에 요한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27절).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떤 성과도 거둘 수 없습니다.(시127:1~2).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겸손은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26~30절)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의 세례사역을 시기하자,
요한은 그 부흥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여기며,
자신은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조연임을 기쁘게 밝혔습니다.
그는 사역 목적과 방향에 대해 흔들림이 없었던 신실한 증언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흥하신다면 우리가 받는 작은 오해와 비판에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과 심판의 결정적인 기준은
혈통이나, 율법이나, 제사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기에,
그 증언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참된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땅에 속했지만, 신령한 하늘 세계를 알게 되어 참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영생을 소유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길이나 방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운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신령한 특권을 기억하며, 참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