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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 떠나는 빵과자 여행-중세의 빵

작성자Vv방지영vV|작성시간02.01.08|조회수2,763 목록 댓글 0
<고대로 떠나는 빵과자 여행>-중세의 빵


▶ 고대로 떠나는 빵과자 여행-중세의 빵 중세 시대 동안, 농민들은 극단적으로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지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에서 시작해서 빵의 완성으로 끝나는 길고도 힘겨운 과정 중에는 느리게나마 새로운 기술 발전들이 일어났다. 이시기에는 동물들이 목이 졸리지 않고도 훨씬 더 무거운 짐을 끌수 있게 하는 목걸이 형식의 마구 및 바퀴가 달린보습, 또 도리깨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차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풍차의 기원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지만, 유럽 최초의 풍차는 9세기 잉글랜드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며 (134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노폭에 남아있다), 3세기 후에는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역사서에 의하면 이베리아 사람들은 포도주보다 맥주의 일종이라 할 에일(ale)을 마셨다. 바로 이 에일을 양조할때 생긴 거품이 빵을 만드는데 이용된 이스트였다. 이를 통해 고대그리스나 로마인들보다 더 부풀림이 좋은 빵을 만들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붕괴는 빵의 제조 능력이 향상된 것과는 달리 전반적인 식품의 제조방법은 크게 후퇴시켰다. 로마를 점령한 새로운 주인은 요리용 오븐과 화려한 목욕탕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각종 요리법들도 차츰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이밖에도 로마제국의 붕괴는 상품의 무역이 중단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진귀한 식품들이 완전히 유입되지 않자 해당지역에서 생산되는 식품들로만 조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상업이 부활되기까지느 수백년의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흔히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혀 역사의 진전이 이 시기에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니다. 조리와 제빵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븐 사용료를 물어야 했던 봉건시대
중세 가정에는 직접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을 모두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중세의 도시에는 이같은 사람들을 위한 시에서 운영하는 공동 오븐을 마련했다. 지방에서는 봉건 영주들이 빵굽는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사용료를 내고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중세에 서민들 가옥은 난방이 설비돼 있지 않아 몹시 추었다. 문이나 갈라진 벽 틈에서 새어들어오는 바라은 그들이 식탁에 앉아 있을때에도 모자를 벗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식사 관습은 이후 500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중세를 경제사적인 측면에서는 봉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유럽 각지의 농촌에는 봉건주의가 확립됐다. 봉건 주의의 여러 특권들 가운데는 방앗간과 빵집에 대한(Bakehouse) 운영권도 포함됐으며, 이러한 권리는 영주의 재산에 속했다. 빵을 굽고자 하는 농민들은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고, 그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위험하고 겨울이면 통과가 불가능하기까지 한길을 통해 곡식 짐을 운반해야 했다. 그런뒤에 방앗간에 이르면 이것을 거칠게 가루로 빻기 위해 몇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때로는 앙심을 품은 방앗간 주인이 이 과정에서 모래를 집어 넣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농장으로 돌아가서 반죽을 이겼고, 다시 대체로 방앗간 바로 옆에 위치한 공동 빵집으로 가면, 베이커는 마침내 익은 빵을(그러나 익다만 경우도 많은)건네주고 다시 사용료를 받았다.


무게가 10파운드 이상 나가는 이런 농민의 빵에는 밀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시절에도 농민들 식단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이빵에는 거칠게 제분한 잡곡, 즉 밀과 함께 수확된 호밀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풍요로운 시기는 아주 드물었다. 9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의 농촌은 수많은 흉년에 시달렸고, 보리와 귀리마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시절에는 흉년 빵(famine bread)을 먹었다. 흉년 빵이란 거친곡식가루 약간에 밀짚, 진흙, 나무껍질 가루등을 넣고 만든 빵이나 도토리 또는 호스체스트넛(horse chestnut), 아니면 뿌리나 허브를 갈아서 만든 케이크로, 모두 약한 불에서 구워먹었다. 남부 잉글랜드에서는 1439년에도 빈민들은 고사리 뿌리를 두드려 만든 가루를 사용할 정도였다.


중세 부자들에게 빵은 요리접시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영주나 왕, 부자들의 식탁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중세 시대나 그 뒤를 이은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를 농민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살았다. 17세기 프랑스의 대학자중의 한명인 뒤 캉주는 중세시대에 부유한 자들이 먹은 빵의 종류를 자세한 목록으로 정리했다. 법정빵, 영주빵, 교황빵, 기사빵, 소지주빵.. 이러한 목록은 찬방에서 먹는 초라한 빵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이런 빵들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두 밀가루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17세기까지 귀족사회에서 빵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고 있다.


두께가 2인치 정도되는 빵은 고기를 올려놓는 일종의 접시로 쓰였다. 이러한 트랑슈아('도랑'을 의미)는 고기즙을 흡수해서 식사가 끝났때쯤 먹거나 아니면 하인들에게 던져주었따.

귀족의 식사과정은 수많은 요리들로 구성됐다. 이러한 요리가 대부분의 차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식탁위에 놓은채로 각자 자유로이 가져다 먹었다. 식탁위의 요리 그릇수는 대략 만찬에 참여한 수에 비례했다. 바로 이그릇을 파이와 페이스트리가 대신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것은 너무 딱딱하게 구워져 먹을 수 없는것도 있었다. 이 딱딱한 것은 여러가지 모양의 스튜를 넣은 장방형의 용기 역할을 했다.


영국사람은 이용기를 코핀(Coffin)이라고 불렀다. 먹을 수 있는 페이스트리는 별도로 만들어졌다. 음식의 종류가 많지 않고 값비싼 요리들이 골고루 돌아갈 수 없을 때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배분됐다. 보통 귀족계급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집에도 자기 하인을 데리고 가서 그 하인들에게 자신의 식사 시중을 들게 했다. 하인들의 임무는 주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었다.


호밀이 섞일 수 밖에 없던 거친 중세빵

그렇다면 가난한 중세의 사람들의 빵과 요리는 어떠했을까? 로마시대와 12세기 사이의 중세 초기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북유럽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은 일년내내 빵과 물, 맥주, 그리고 큰솔에서 펴낸 '콤파나티쿰'이라는 빵에 곁들어지는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푸딩 또한 큰 냄비에서 요리됐는데 특히 완두콩 푸딩은중세의 가장 보편적인 육류식품이었던 소금에 절인 삶은 돼지고기와 잘어울렸다. 이밖에도 남은 고기를 잘게 썰어서 콩, 빵가루와 함께 섞은 다음 후라이팬에서 튀겨낸 크로켓이 애용됐다.
또 프루멘티(Fmmenty)는 우유가 든 젤리로 껍질을 벗긴 밀을 뜨거운 물에 담가 24시간 동안 불려서 만든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만 난로의 한쪽 구석에 열에 강한 질그긋접시를 갖다 놓기만 하면 됐다. 이렇듯 중세기간 북유럽등지에서 재배된 밀은 빵으로 만들어지기 보다는 프로멘티로 더 많이 이용됐다. 호밀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그 당시 유럽대륙의 전반에 걸쳐서 주요작물이 됐다. 호밀가루는 때때로 완두콩 가루와 약간의 보리를 섞어서 일상적인 평범한 갈색빵으로 만들어지곤했다. 북유럽과 같은 추운지역에서는 밀과 호밀이 섞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말가루를 마스린(,maslin)이라 하며, 불어로는 미쉐린(miscelin)이라고 한다. 중세의 베이커들이 오븐 앞에서 바쁘게 일한 것은 바로 이런특권 계층의 소수 그리고 도시민들을 위해서 였다. 프랑스에서 중세의 베이커들은탈멜리에라고 불렀는데, 이기원이 불분명한 말은 15세기에 와서야 불랑제(둥근 반죽을 의미하는 불에서 기원)라는 말로 대체됐다.


큰도시에서도 필립 아우구스투스가 베이커들에게 개인 오븐을 소유하도록 허락한 것은 12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파리에서 베이커들의 업무는 왕권에 의해 규정됐고, 프리보스트(임명시장)의 통제를 받았다. 재빵을 관할하는 그랑 파네티에(영국에는 그랜드 팬터로 알려진)가 이들을 도왔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1155년에비커들이 길드를 만들었다. 1266년에는 '빵 조례'Assize of Bread)가 만들어져 포괄적이고 얼마간은 엄혹하기까지 한 제빵규약을 확립했다. 양국에서 모두 14세기 이래로 이런 길드에 들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명의 베이커 장인들에게서 도제 노릇을 하고, 그런 뒤에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야 했다. 그러면 그랑 파네티에가 지명한 12명의 심판관이 이런 장식적 작품(예를 들자면 역사적 사건이나 기적을 묘사하는)을 보고, 그 사람이 장인의 대열에 올라설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했다. 19세기 초기까지 비슷한 규약이 런던 명예 베이커 협회(Worshoipful Company of Bakers in London)의 '옛장인' 들에게도 통했다.


13세기 이전에도 파리와 그 인근 지역의 최고 베이커들은 모양뿐 아니라 재료도 가지각색인 다양한 빵을 서른가지 이상 만들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간단한 뻉 드브로드(호밀과 거친밀을 사용), 상등급의 흰 밀가루로 만든 뺑드 샤이이, 빵 껍질이 부풀어 오른 뺑 코키유(조개빵)등이 있다. 파리 북쪽 발두아즈에 있는 고네스시에서 비롯된 뺑 드 고네스는 가장 유명하며, 앙리 4세가 많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잘 반죽된 발효 밀가루로 만드는 이빵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떄까지도 가장 유명한 빵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또한 밀기울이 든 거친빵인 뺑 발레, 밀과 호밀로 층을 이루어 두 가지 색깔을 갖게 만드는 뺑 드 되 쿨뢰르, 체에 치지 않는 밀과 호밀로 만드는 황갈색 빵, 뺑 루세도 있다. 물론 이렇게 풍성한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그 해 수확의 양과 질에 따라 좌우됐다. 그리고 수확이란 오랫동안 오직운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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