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 말씀 93
개, 돼지
93.1 “거룩한 것(ⲟⲩⲁⲁⲃ, be pure, holy)을 개(ⲟⲩϩⲟⲟⲣ, dogs)에게 주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똥더미(ⲕⲟⲡⲣⲓⲁ, hill, mound of manure, dung)에 던질까 두렵다.
93.2 진주(ⲙⲁⲣⲅⲁⲣⲓⲧ[ⲏⲥ,pearl)를 돼지(ⲉϣⲁⲩ, pigs)에게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조각낼까(ⲗ]ⲁ[ⲕⲙⲉ], fragment) 두렵다.’
콥트어 본문에는 [예수가 말했다 ⲡⲉϫⲉ ⲓ̅ⲥ̅]가 없다. 어떤 번역서는 괄호 표시를 하고 [예수가
말했다 ⲡⲉϫⲉ ⲓ̅ⲥ̅]를 넣어준다. 신약성서의 병행구 맥락으로 보면 예수의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콥트어 본문에는 훼손된 활자도 보인다. 그 뜻을 새기기도 모호하다. 학자들이 추정해서
단어를 완성시키며 대괄호 표시를 해놓았다. 훼손된 마지막 단어를 완성시키는 세 가지
제안이 있다. 마지막 단어에 대한 제안에는 ⲛⲗⲁ[ⲁⲩ] (‘그들을 아무것도 없게 만들다’),
ⲛ̄ⲗⲁ [ϫⲧⲉ](그들을 진흙으로 만들다), ⲛ̄ⲗⲁ [ⲕϩ] 및 ⲛ̄ⲗⲁ [ⲕⲙ̄] (‘그들을 조각내다’) 등.(See Layton
& Lambdin,‘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Nag Hammadi Codex II, 2–7:Volume One, 86.)
마태복음의 “그들이 그들을 발로 짓밟을까 염려하라”라는 표현과 일치시키기는 쉽지 않다.
훼손되지 않은 활자와 훼손된 활자를 추정해서 조합한 콥트어 단어 중, 마태복음 의미와
일치시킬 단어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 등장하는 ‘개’와 ‘돼지’는 당연히 비유다. 비유에 등장하는 ‘개’의 속성에는 거룩한 것을
거름 더미(똥)에 일부러 던지는 속성이 있을까. 그러므로 여기 ‘개’는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
으로 알아볼 수 없는 속성을 비유한다. ‘개’로 비유된 종교인들이 ‘거룩한 것’(진주, 보물)’을
‘거룩한 것’으로 알아보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왜 진주를 알아볼 수 없을까. 보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땅 위에 있는 보물을 하늘의 진주로 여기고 정작 하늘의 보물은 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우주를 초월해서 전지전능한 존재로 계신 하나님이 보물이지, 성전 곧 네 안에
‘없이 계신 하나님’은 간혹 입에 올려보기는 하지만 거들떠보지 않는다.
안에는 욕심밖에 보이지 않고, 안에 있는 하나님을 떠 올릴려면 무언가 복잡해진다.
텅빈 고요 가운데 충만을 경험하려면 가부좌라도 틀어야 할 거 같고 거기 사유 곧 무엇인가
생각이 들어가야 하는 거 같아서 귀찮다. 보물은커녕 오물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초월자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보물이어야 한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나 간편한가.
생각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쉬운게 필요하다. 그들에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당위요 필요
하다. 그러므로 보물이 보물을 가린다. 보물이 보물을 은폐시킨다. 신이 신을 은폐한다.
우상이 신의 자리에 좌정하고 신의 소리, 사람의 소리와 그 입을 틀어막는다.
진주를 쓰레기 취급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든 동일
하다. 개와 돼지는 개와 돼지에게 필요한 것이 보물이지, 그에게 필요 없는 것을 아무리
던져줘도 쓰레기 취급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개는 개요, 돼지는 돼지다.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의 정신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하나는 짐승(개, 돼지)의 속성이다. 내 안에는 개와 돼지가 있다. 땅 위에 있는 것을 보물로
삼으려는 속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속성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과 저만큼
떨어져 있는 내 고요 속에는 그것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나에 대한 열망이 있다.
짐승의 속성에 종속된 정신을 뒤집고 싶은 모반의 충동이 있다. 문사철이 명맥을 이어가는
이유다. 소외되더라도 ‘시’가 소멸할 수 없는 이유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다. 물론 개와
돼지의 향유를 위해 봉사하는 문사철이 왜 없겠으며 하늘과 상관없이 가이사에게 헌신하는
‘시문’이 어찌 없을까. 무늬만 예술, 개와 돼지가 선호하는 보물을 위해 포장지를 언제나
입도선매한다.
그럼에도 나뉜다. 내 안에는 둘이 있다. 두 번째가 반란을 일으킨다. 분란의 원인이다.
두 번째는 처음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처음 것을 덜어냄으로 숨어 있던 두 번째가
드러난다. 처음 것을 덜어 내는 작업이 ‘인’을 떼는 것이고, 숨어 있고 감춰있던 은폐된
두 번째를 드러내는 것이 곧 진리다.
내 안에 어둠의 밤하늘로 은폐된 채 덮여있고 숨어 있던 ‘없이 계신 있음’이 드러나는 것,
일러 「알레데이아」 곧 ‘진리’라 한다. 그러므로 숨어 있던 또 다른 ‘나’가 진리인 셈이다.
그것이 ‘길’이다. 숨어 있던 그가 드러나는 것, 그러므로 진리가 곧 하늘의 생명이다.
이것이 도마복음의 대강령이다.
내 안에는 개와 돼지도 있고, 내 안에는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있다.
사람을 찾게되면 너무 어렵게 찾은 사람이어서 옛사람들은 일러 ‘신’이라 했다.
얼 사람을 일러, 구전과 구송으로 전승되던 시절에는 ‘깨인 사람’이라고 했다.
민간에 떠돌다가 이야기는 알에서 깨어난 사람으로 변용되어, 난생설화가 유통된다.
정말 깨인 사람은 난생설화가 잘못된 오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얼과 알을 분별하고 알을 얼(?)로 읽어낸다. 이야기의 유통을 훼방하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
전통 사회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집단지성이고 지혜였다. 난생설화과 더 흥미롭다.
이야기의 생명력을 높인다는 얘기다. 옛 이야기들이 신화의 옷을 입는 까닭이다.
삼국유사에 난생설화로 신라의 건국신화를 남겨 놓은 까닭이리라.
개와 돼지를 지나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서사가 경의 이야기 속 한결같은 주제일러라.
그럼에도 여전히 인류는 개선된 것이 없고 개, 돼지는커녕 무섭고 두려운 짐승으로 퇴보된
것을 무수히 목도한다. 하더라도, 사람이, 신이 쓸데없는 자기기만의 언어라고 내려놔야
할까. 종교의 언어는 짐승의 언어가 된 지 오래다. 저급을 경쟁하고, 짐승의 언어로 하늘을
찌를 듯 더욱 기승한다. 정화는커녕 대명천지에도 중세 암흑 세계를 더 크게 구현한다.
종교가 말하는 짐승의 언어는 인류에게 절망을 선물할 뿐이다. 큰 자 이데올로기가 짐승의
세계를 유지하는 근본 이념이다. 사람의 언어, 거룩한 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진언조차, 자기 기만의 되풀이로 보아야 할까. 사람, 신, 거룩은 실현될 수 없는 신기루일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내 안의 혼탁을 가장 잘 정화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세계가 더욱 기승, 절망을 가져다준다 해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 안에 보이지 않는
은폐된 그것이 신기루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다. 거창하게 인류를
위한 구호로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을 위해서. 도마복음 말씀 93을
묵상하며 또 풀이 글을 계속한다.
93.1 ⲙ̄ⲡⲣ̄ϯ ⲡⲉⲧⲟⲩⲁⲁⲃ ⲛ̄ⲛⲟⲩϩⲟⲟⲣ⳿ ϫⲉⲕⲁⲥ ⲛⲟⲩⲛⲟϫⲟⲩ ⲉⲧⲕⲟⲡⲣⲓⲁ
93.2 ⲙ̄ⲡⲣ̄ⲛⲟⲩϫⲉ ⲛⲙ̄ⲙⲁⲣⲅⲁⲣⲓⲧⲏ[ⲥ ⲛ̄]ⲛⲉϣⲁⲩ ϣⲓⲛⲁ ϫⲉ ⲛⲟⲩⲁⲁ⟨ⲩ⟩⳿ ⲛ̄ⲗⲁ[…]
93.1 ‘Do not give what is holy to dogs, lest they cast them into the dung.
93.2 Do not cast pearls [to] pigs, lest they make them … .’
글: 김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