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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설명

영국-잔지바르 전쟁(Anglo-Zanzibar War)

작성자대한민국등소평|작성시간10.07.02|조회수828 목록 댓글 0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영국과 잔지바르간에 1896년 8월 27일에 벌어진 전쟁으로 시작에서 끝까지 38분이 소요되어 지금까지 기록된 전쟁 중에선 가장 짧았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잔지바르의 술탄 하마드 빈 투와이니가 1896년 8월 25일에 사망한 후에 발발했다.

 

그는 영국의 식민경영에 협조적인 인물이었다. 사망 후 술탄의 지위는 무력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그의 조카인 할리드 빈 바르가쉬에게 넘어갔다.

 

영국은 하무드 빈 무함메드를 새로운 술탄 후보로 지지하고 있었는데, 영국인들은 그와 일하는 것이 더 손쉬울 것이라 생각했고, 바르가쉬에게 술탄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르가쉬는 이를 거절했고, 대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 군대는 약 2,800명 규모였으며, 항구에 정박중이던 요트인 HMS 글래스고우를 무장시켰다. 반면에 바르가쉬군이 궁전을 요새화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5척의 전함을 궁궐 정면의 항구로 집결시켰다.

 

이들 함정은 3척의 현대적인 순양함인 에드가급 순양함 HMS 세인트 조지 호. 펄급 장갑 순양함  HMS 필로멜 호, 아처급 순양함 HMS 라쿤 호, 두 척의 포함인 HMS 트러쉬 호, 및 HMS 스패로우 호였다. 영국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 영국 해군 중위인 로이드 매슈 장군이 지휘하는 2개 대대 900명 규모의 잔지바르의 왕당파 정규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바르가쉬가 막판에 미국 대표부를 통해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영국 해군은 1895년 8월 27일 오전 9시에 궁궐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바르가쉬의 무장 요트 "글래스고우"는 곧 격침당했으며, 궁궐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바르가쉬는 독일 제국 영사관으로 황급히 퇴각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포격은 38분 후에 중지되었다.

 

영국은 독일에 술탄(바르가쉬)를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바르가쉬는 1896년 10월 2일 해상으로 탈출했다. 그는 1916년에 영국에 붙잡힐때까지 다르에스살람의 망명지에서 살았다. 그는 나중에 몸바사에서 살 수 있도록 허가받았고, 1925년 그곳에서 죽었다.

 

1. 잔지바르

(영어: Zanzibar)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탄자니아의 자치령으로 대표적으로는 잔지바르 섬을 의미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잔지바르 섬과 펨바섬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잔지바르의 구시가인 스톤 타운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육두구, 계피, 후추 등의 향신료 산지로 유명하다. 그곳은 아직도 이따금 향신료 섬 (Spice Islands)으로 언급된다.  잔지바르 붉은 콜로부스 원숭이와 잔지바르 표범이 잔지바르에서만 서식한다.

 

2. 역사

세석기 도구의 존재는 잔지바르 인간 거주의 20,000년을 입증한다. 섬이 아랍의 무역업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아라비아, 인도, 아프리카 사이의 항해를 위한 토대로서 잔지바르를 이용하였다, 그러므로써, 잔지바르는 더 넓은 세계의 역사적인 기록의 일부가 되었다.

 

잔지바르가 방어 및 보호가 가능한 항구를 제공하므로, 아랍의 상인들은 잔지바르의 소량의 산물보다는 동아프리카의 해안 마을과 무역하기 편리한 지점인 현재의 잔지바르 시(스톤 타운)에 정착했다. 그들은 섬에 주둔지를 세우고 남반구 안에 최초의 모스크를 설립하였다.

 

1503년부터 200년간 포르투갈인이 점령했으며, 그 이후에는 오만 일부가 된다.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이 점령, 1861년 오만에서 분리되어, 이 나라의 왕은 술탄이라 일컫게 된다.

 

19세기 말 한때 독일이 영유권을 주장했었으나, 당시 영국령이던 북해의 헬골란트 섬을 영국이 독일에 양도하여 잔지바르 섬의 영국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1963년에 영국에서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듬해 술탄제가 폐지되고 탕가니카와 연합하여 탄자니아 공화국이 되었다.

 

1993년 1월에는 잔지바르만 따로 이슬람 회의 기구에 가입했으나, 같은 해 8월 탈퇴하였다.


2004년 당시에 조사한 인구는 100만 명으로, 수도는 잔지바르 시에 있다. 면적은 약 1,660㎢이다.

3. 종교 : 잔지바르는  수니파 이슬람교 사회이다.

4. 역사

아랍, 이란, 인도 ,포르투갈, 영국 및 아프리카 본토의 영향을 받았었다. 페르시아만의 예멘인들이 문화와 종교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5. 문화

스톤 타운은 굽어지는 길들, 원형의 탑들, 무늬가 새겨진 나무 문들, 세워진 테라스, 아름다운 모스크의 장소이다.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들은 리빙스톤 하우스, 굴리아니 브릿지,하우스 오브 원더스이다.

키디취 타운은 터키식 목욕탕(hammam)적 특징으로 바르가쉬 빈 사이드의 통치 기간 동안 시라즈, 이란 출신 이주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6. 대중 매체

1973년에 컬러 텔레비젼을 도입한 아프리카의 최초의 지역이었다. 현재 TV 방송국은 TV Z이다. 탄자니아 본토의 최초의 텔레비젼은 약 20년 뒤까지 도입되지 않았었다.

7. 출신 유명인

의 프레디 머큐리가 잔지바르 출신이다.

8. 정치

'혁명 평의회'와 '하원'(50석을 가지며, 5년 임기로 직접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됨)이 있다. 잔지바르에는 많은 정치 정당이 있지만, 주요 정당은 여당인 CCM (Chama Cha Mapinduzi)과 CUF(Civic United Front)이다.

 

1990년대 초기 이래로, 잔지바르의 정치는 CCM과 CUF, 두 정당 사이 반복된 충돌에 의해 두드러진다. 2000년 후반 선거는 2001년 1월 잔지바르에 학살 (35명 사망 600명 부상)을 이끌었다.

9. 교육

잔지바르는 잔비바르 대학교, 1999년 잔지바르 주립 대학교(SUZA)로 변모한 이전의 스와힐리어 외국어대학(TAKILUKI)의 소재지이며, 잔지바르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는 루뭄바 단과대학으로서 알려진 루뭄바 제2학교이다.

 

또한 많은 사립 학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SOS 학교는 1993년에 고아를 위하여 계획된 학교이다. 오늘날, SOS 학교는 다른 사립 학교들과 비교하여 적은 비용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한다.

10. 경제

잔지바르, 주로 펨바 섬은 한 때 1970년대 동안 세계 일류의 정향 생산지였지만 연례 정향 판매가 1970년대 이래로 80% 가량 폭락한 상태다. 이것에 대해서 주어진 설명은 빠른 움직이는 세계 시장, 국제 경쟁과 정부가 정향 가격과 수출을 조절했을 때인 1960년대와 70년대에 탄자니아의 사회주의에 과한 실패한 실험으로부터 후유증이다.

 

잔지바르는 현재 잔지바르의 7%를 세계 정향의 75%를 공급하는 인도네시아와 비교하여 거리가 먼 3위를 랭크한다. 잔지바르는 향신료, 해초, 품질이 좋은 라피아를 수출한다. 또한 큰 어장을 갖고 있으며 환목선 생산을 한다. 관광은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2008년 5월과 6월 동안 잔지바르는 정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섬주민들은5월 21일에서 6월 19일 까지 전력이 없거나  디젤 발전기 같은 전기 생산의 대체 방안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거의 한달 동안 지내야만 했다. 이 정전은 주로 국제적인 관광 사업에 기반을 둔 섬의 빈약한 경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일반적으로, 잔지바르인들은 탄자니아 본토보다 더 나쁜 조건 속에 산다. 잔지바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US $ .50 보다 적은 수입으로 생활해 나간다. 왜냐하면 관광 산업말고는 어떠한 고용이나 채용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짧은 전쟁, 잔지바르 전쟁(1896.8.27)

지금은 탄자니아에 속한 잔지바르는 아프리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섬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일찍이 노예무역과 중계무역이 성행했으며, 오랫동안 강국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포르투갈을 거쳐 오만의 지배를 받다 1861년 독립했지만 1890년 다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던 때인 1896년 8월 25일 할리드 빈 바르가슈가 잔지바르의 새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식민 정책에 협조적인 인물이 술탄이 되길 바랐던 영국은 할리드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영국은 할리드의 즉각적인 퇴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할리드는 이를 거부하고 내친 김에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전쟁 준비에 착수한 잔지바르, 하지만 이 나라가 보유한 군대라는 것이 낡은 화물선을 개조한 군함 글래스고 1척과 2천800명 규모의 육군 병력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27일 오전 9시 할리드는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때마침 영국군은 아프리카 동부 연안을 작전구역으로 하는 헨리 로슨 함대의 전함 5척이 크리켓 경기를 하기 위해 잔지바르 수역으로 집결해 있었다. 선전포고를 접한 영국 함대는 9시 2분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잔지바르의 유일한 군함 글래스고는 2발의 포탄을 맞고 침몰했다.

 

이어서 궁성이 집중 포격을 받고 파괴되었다. 할리드는 긴급히 독일 영사관으로 피신했고,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종전 시각은 9시 40분께, 소요된 시간은 약 38분이었다. 잔지바르군은 500여 명이 전사했지만 영국군은 피해가 없었다.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록된 잔지바르 전쟁. 전쟁이라고 하기엔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약소국의 비애가 느껴지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잔지바르 [Zanzibar]  
인구(명)  422,300 (2006)
잔지바르섬 서쪽 연안에 있는 근대적 무역항이다.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 동쪽 연안의 전통적 중계무역 때문에 아랍의 범선 다우의 기항지이다.

 

잔지바르는 페르시아어 잔지(Zanzi:흑인)와 바르(bar:사주해안)의 복합어로 ‘검은 해안’을 뜻한다. 고대에 아랍인(人)이 건설하였으며, 1107년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다. 노예 집산지로서 번영하였는데, 1828∼1861년 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1861년부터는 오만에서 분리한 잔지바르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964년 1월의 혁명까지는 아랍인 술탄의 왕궁 소재지였다. 아랍풍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 노예시장의 유적, 술탄의 왕궁, 오만 제국의 요새, 이슬람 사원, 영국 탐험가 D.리빙스턴의 집, 성공회 성당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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