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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작성자mono|작성시간04.10.21|조회수65 목록 댓글 1
아버지

작가: 김정현 각색: 계용수



등장인물: 정수, 남박사, 영신, 지원, 황변호사, 포장마차 주인, 과일장수, 나래이터






조명이 켜지면 무대 한쪽의 테이블에 정수와 남박사가 앉아 있다. 남박사는 계속 담배만 피운다.

남박사: 자네 집사람은?

정수는 의아하게 남박사를 처다본다.

남박사: 한잔 할까?

정수: 좋지.

남박사: 자네도 늙어가는군.

정수: 몇갑이나 피웠기에 목소리가 그래? 전에는 갈라지기 까지는 않더니만...

남박사: 자네 걱정이나 해.

정수: 왜그래?

남박사: 뭐가 왜그래야? 자네 집사람은 집에 있어?

정수: 그럼 집에 있지. 가출이라도 했을 까봐?

남박사: 이럴땐 같이 좀 다니지.

정수: 왜? 검사결과 때문이야? .... 죽을 병이야?

남박사: 술이나 먹자.

정수: 술마지자는 것을 보니 죽을 병은 아닌 모양이구만..

포장마차 주인 등장. 안주와 소주를 준다.

남박사: 소주하고 안주 주세요.

포장마차: 안주는 뭘로 하실거유?

남박사: 아무거나 주세요.

포장마차: 아무거나 뭐유?

남박사: 거기 들고 있는거 주세요.

남박사는 계속 술만 먹고, 포장마차 주인은 한 쪽 구석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손질한다.

남박사: 한병 더 주세요.

정수: (걱정스러운듯) 왜그래? 병원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남박사: 너나 잘해.

정수: 결과가 그렇게 나빠?... 죽을 병이야?.... 뭐야?

남박사는 담배를 물어 길게 내뿜는다.

정수: 뭐냐니까? ... 괜찮아. 뭐든 상관없어.

남박사: C. A....

정수: C. A? ... 그게 뭐야?

남박사: 캔.. 서... 미안해....

정수: 뭐? 캔서?..... 캔서라니? 무슨...

남박사: 캔서... C. A. N. C. E. R. .... 잰장.

정수: 어느정도야?... 절게수술... 많이들 한다면서?.... 그것도 힘들어? ... 쳇, 그럼 밥통 몽땅 드러내고 링거로만 버텨야겠군.... 그렇게는 얼마나 사는 거야? 한 50년? 후후후....

남박사: 위에는 전이 된거야... 췌장암이야..... 간, 위만큼이나 중요해. 그게 잘못되면 간도 기능을 못하고 췌액이 분비되지 않아 위도 소화기능을 못해. 벌써 위는 물론이고 십이지장과 간에까지도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야.

정수: 별게 다 붙어서 속을 썩이는 구먼... 소주는 마셔도 되는 거야?

남박사는 빈잔에 술을 채운뒤 한 숨에 들이킨다.

정수: (술을 털어 넣으며) 그나마 다행이군.

남박사: 미안하다. 췌두부만 돼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췌관과 췌미부에 걸쳐있어. 그것도 아주 심해 진작에 조금 이상할때 말하지 그랬으면 ... 지금은 이미 너무 늦어서 어떻게 순을 댈 수 없어.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정수: 그럼, 공무원 정기 신체검사는 뭐야?

남박사: 원래 췌장이란게 위 후방복막뒤에 있어. 그래서 정밀검사가 아니면 조기에 발견되기 어려워...

정수: 돌팔이 새끼들...

남박사: 그래. 미안해...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동시: 저...

정수: 먼저해.

남박사: 아니야 네가 ...

정수: (단호히) 먼저해.

남박사: 그래... 저... 자네 집사람은 ... 내가 만나지...

정수: 미친놈. 만나서 뭘? 어떡하게?나도 아직 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보고 뭘 어떡하라고?

남박사: 그래도 네가 너무 힘들어.

정수: 뭐가 힘들어? 그래, 그 사람이 알면 살 수 있어? 다시 살아나는 거냐고?

남박사는 아무말없이 소주만 먹는다.

정수: 남박. 소주는 마셔도 되는거야?

남박사: 좋을건 없어. 단축할 뿐야.

정수: 얼마나?.... 닷새? 아니면 열흘? .... 젠장, 그럼 혼자 마셔야겠군.

남박사: 그래 언제든 같이 마시자... 좀 정리가 되면 내게 말해. 자네 집사람에게는 내가 말하지.

정수: 꼭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남박사: 그래도... 자네 집사람도 뭔가 정리를 해야되지 않겠나?

정수: 정리?... 그렇군. 나도 정리를 해야겠군. 그래. 그게 남아있어.... 그런데 뭘 정리해야 하지?

남박사: 글쎄...

정수: 하긴... 자네는 췌장암 환자가 아니니까 나보다 더 모르겠군.... (장난끼있게) 췌장암이 뭐냐? 촌놈끝까지 촌스러워지겠군... 뭐 그거말고 고상하게 들리는 이름없어? 이왕이면 병명이라도 좀 멋있게... 좋잖아..... 젠장. 무식한 돌팔이들 이름도 그따위로 무식하게 지어가지고... 집사람에게 욕꽤나 들어 먹겠군... 왜그런게 걸리는 거야? 술? 담배?

남박사는 가만히 고개만 젖는다.

정수: 그럼 과로?...스트레스?.... 아니면 손발 안딱고 자서?...(고함치듯) 그럼 도대체 뭐야?

남박사: 자세한 이유는 아직 몰라.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흔치도 않고...

정수: 다행이군. 우리 집사람에게 술, 담배, 손발 안딱는것 그것때문이라고는 하지 마라. 그래야 날 더 미워하지. 술, 담배, 손발도 제대로 안닦아서 결국... 그래도 잘됐다고는 않겠지?... 그런데...너 왜 제수씨라고 안하냐? 자네 집사람이 뭐야? 차라리 형수씨라고 그래....이제는 형수씨라고 할거지?.... 후후후 드디어 내가 이겼다. 후후후흐흐흐(흐느낀디)

잠시후 진정된듯 남박사를 쳐다본다.

정수: 얼마나 남은거야... 괜찮아. 정리를 해야지... 남은 기간이 얼마야?

남박사: 5개월쯤...

정수: 젠장, 더럽게 많이도 남았군...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거야?

남박사는 아무말없이 담배만 피운다.

정수: 이 친구야. 이대로 멀쩡하게 있다가 5개월뒤어 콱하고 죽는건 아닐거아니야? 병이 진행이 어떻게 되고 뭐 그런거 있잖아.

남박사: 그래, 내일 내가 진통제와 몇가지 약을 줄께. 그리고 한 두어달쯤은 통증이 있을때만 약을 먹으면 견딜수는 있을거야.

정수: 그다음에는?

남박사: 석달쯤부터 황달 증세가 나타날거야. 그러면 입원해.

정수: 황달?

남박사: 응. 얼굴이 누렇게 변해서 점점시커멓게 돼가고 통증도 심해질거야.

정수: 그리고는?

남박사: 한달쯤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복수도 차오르고....

정수: ...그렇게 두달이야? ...누렇게 황달증세가 나타나면 보기 흉해?

남박사: 흉한게 문제가 아니야. 통증때문에 견디기 힘들어 질거야.

정수: 아주 많이?... 그럼 입원하면 뭘해?

남박사: 신장기능이 악화돼서 소화가 불가능해지니까 음식물이 소용없지. 그래서 영양제와 진통제를 투여하고....

정수: 그러면 오래 살아?... 돌팔이들, 그런데 뭐하게 입원을 시켜?... 결국 인간으로서는 두달 남은 거군...

남박사: (소리치며)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마!

정수: 뭘?

남박사: 고통스러워도 인간의 생명이야! 왜그렇게 함부로 말해!?

정수: 나도 그정도는 알아. 그러나 이건 내 생명이야. 내가 내 생명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 못해? 내꺼야! 내꺼라구! 알아? 넌 의사로서지만 난 주인으로서야... (수그러지며) 미안해... 다른 병원에 안가봐도 돼?

남박사: 가봐. 나도 돌팔이가 되어서인지 의사 그만하고 싶다.

정수: 검사는 다 해본거야?

남박사: 그래.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했던게 초음파 내시경검사야. 차라리 그러나 해보지 말걸....

정수: 대학병원에서도 더 해볼게 없을까?... 응? 그래도 만의 하나라도.... 다른 검사방법이든 뭐든 생각해봐.

남박사: 열어보는 방법이 있지만, 마찬가지야. 이미 내시경으로 확인됐어.

정수: 열다니?

남박사: 개복... 그래도 소용없어.

정수: 개복? .... 열어?..... 이새끼야! 내 배가 문이냐? 네 눈에는 내 배가 문짝으로 보여! 열어? 그래 열어라, 열어!!

정수는 남박사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등 심하게 한다. 그러나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조명 페이드 아웃.
남박사와 포장마차 주인 퇴장. 영신등장.
조명 인.
정수와 영신과의 대화는 매우 일상적이고 감정이 메마른 로봇의 프로그램에 의한 대화같다.

영신: 저녁은요?

정수: 응. 했어.

영신: 또 회식있었어요?

정수: 아니 남박이랑...

영신: 물드려요?

정수: 됐어.

영신: 그럼 주무세요. (퇴장 하려한다.)

정수: 지원이는?

영신: 웬일이세요. 지원이를 다찾고?.... 친구 만나고 지금 들어오고 있데요. (퇴장)

나레이터의 독백에 마춰서 음향의 효과가 중요하다. 처음에는 피아노의 고운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음향이다가 점점 거친 음향과의 교차가 중요하다. 마지막에는 해비메탈의 한 곡을 선정하여 강하게 들려준다.

나레이터:피아노의 고운 선율... 그것은 정수가 그녀에게 이끌렸던 첫번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을 시골의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정수에게는 영신이 도시속에서 누리는 모든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런 영신은 정수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어서 결혼이라는 중간 정거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동기들보다 승진이 늦는등 여러가지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정수는 집에서 영신과 지원이의 눈치를 보며 지내게 되었다. 그가 술을 먹고 들어온 날이면 영신은 그와의 잠자리를 피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방을 따로쓴 별거아닌 별거생활이 되어버렸고, 그는 점점 가족에게서 소외되어갔다.

정수는 해드폰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나레이터가 독백을 하는 동안 혼자서 옛생각을 하는등 마임으로써 뒷바침을 해준다. 독백이 거의 끝나갈 무렵 헤비메탈 음악이 나오면 헤드폰을 낀다.
지원과 영신 등장. 정수를 부르면 음향 아웃.

지원: 아빠.

정수: 지금 왔니? 일찍일찍 다니지 않고...

영신: 당신 지금 뭐해요?

정수: 응? ... 그냥 잠이 않와서...

영신: 술 취했으면 그냥 자지, 애들 앞에서 무슨 짓이에요. 이젠 갈수록 희한한 짓을 하네요... 어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려고...

영신과 지원 퇴장.
정수는 그냥 멍하니 관객만 바라본다.

정수: 짓?...... 짓?...... 내가.... 내가 그렇게 잘못을 한것인가? 아내에게 심지어는 딸의 눈치를 보며 죽어지내는 것으로 부족해서 이제는..... 짓? ...... 흐흐흐....

조명 페이드 아웃
암전 상황에서도 정수의 허탈한 웃음소리는 조금더 이어진다.
조명이 들어오면 정수는 의학서적을 보며 허탈한듯 앉아 있고, 남박사 등장.

남박사: 계속 연락이 안돼서 사무실로 찾아 갔더니 여기에 있다더군...

정수: 어.... 남박...

남박사: 벌써 눈에 사람도 안보여?

정수: 어. 아니야... 그런데 여긴 왜 왔어? 난 국회에 보고할 자료들 좀 챙기느라...

남박사: 자네 언제 보건 복지부로 발령났어?

정수는 허탈한듯 웃어보인다.

남박사: 괜찮아. 내가 오진할 것일지도 몰라. 아니 오진일거야. 내일 나와 함께 어디 큰 대학 병원에라도 가서 다시한번 검사 받자.

정수: 미안해. 자넬 못믿어서가 아니야. 왠지 그렇게라도...

남박사: 알아. 그 마음. 그러내까 다시한번 검사받아.

정수: 내일부터 도서관에 안나오려 했어.

남박사: 아니야. 내가 나를 못 믿겠어. 그러니까 내일 같이가.

정수: (애원하듯) 정말 미안해 화내지마.

남박사: 화? 내가 왜 화를내? 화낼 사람은 자네야. 알아? 바로 자네라구... (소리치듯) 이친구야. 화를내! 화를 내라고! 억울하지도 않아? 지금 이 세상에서 자네 마음대로, 자네 기분대로 화내고 소리치고 울어! 통곡이라도 하라고! 내가 이렇게 화나는데, 왜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아?... (애원하듯) 이봐, 아무것도 눈치 볼 것없어. 자네 생명이야. 자네에게 자네 생명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디있어. 세상은 넓어. 내 이 얄팍한 의학 지식이 세상의 절대 진리는 아니야. 무슨짓이든 하고싶은대로해 신도 찾고, 병원도 다니고, 하다못해 무당에게라도 쫒아가고... 발악이라도 해봐. 벼랑끝에 매달려서 무슨 짓인들 못해. 그런다고 누가 뭘 욕하겠어?... 추하다고?.... 점잖지 못하다고?... 너도 별수없구나 할까봐?

정수: 그러면 뭐가 변하는데?... 그렇게 하면 살수 있기는 한거야?.. 그런것도 아닌데, 내가 왜 뻔한 결과에 추하게 매달려야해? 지금까지 추했던 것만도 억울한데..

남박사: (언성높여) 자네가 뭘 그렇게 추했는데? 그리고 좀 추해지면 어때? 그 꼴난 자존심때문에 그만큼 외로웠으면 됐지. 마지막까지 그 얄량한 자존심 가지고 가서 뭐할래?

정수: ...(차분히) 그만해...

남박사: ... 술 할래?

정수: ... 남 박...

남박사: 그래, 말해.

정수: 취하고 싶다.

남박사: 그래, 취해보자.

정수: 아니, 얼마동안은 계속 취해야 될것 같아.

남박사: 그래, 계속 취해. 너 하고 싶은데로 해.

정수: 혼자인게 두려워. 외로울 것 같아서 그래.

남박사: 그러니까 집사람에게 하루하도 빨리 이야기해.

정수: 아니, 그게 아니라...

남박사: 그럼?

정수: 혼자 마시고 혼자서 취해야 될게 두렵다는 거야.

남박사: 걱정마. 언제든 같이 마셔줄께.

정수: 그러다가 제수씨에게 쫒겨나면 어떡하고?

남박사: 또 시작이야? 걱정마라. 제수씨처럼 미인도 아닌데 쫒겨나면 어때? 혹시 내게도 기막힌 기회가 올지 아냐?

정수: 도둑놈 심보하고... 그런데 이친구야. 제수씨가 뭐야? 형수님 이시지...

남박사: 이런 친구하고, 나이어린 할아비는 있어도 나이어린 형님은 없댄다.

정수: 내가 왜 나이가 어려? 이친구야.

남박사: 그럼 주민등록증 꺼내 볼까?

정수: 그거야 호적이 잘못된 거니.

남박사: 나도 호적이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다.

정수: 그럼 자네가 먼저 죽을 거야?..... (미안한듯) 뭘 먹을끼? 뭐 기막히게 맛있는거 없을까?

남박사: 그래 뭐 먹을래?

정수: 돼지갈비에 소주 어때?

남박사: 겨우 돼지갈비?

정수: 겨우라니? 이 친구 이제 배가 불렀구먼...

같이 퇴장.
잠시후 등장. 둘은 술이 어느정도 취해 있다.

정수: (노래부르듯) 어차피 남남인데 정은 왜들어. 후회도 했소, 원망도 했소, 떠도는 가슴앓이를... 어차피 남남인데, 정은 왜들어... 이봐, 남박...

남박사: 그래 말해.

정수: 자네 우리 지원엄마에게 말하면 안돼, 알아?

남박사: 그래 그래 절대로 안할께.

정수: 그래. 절대로 안하는 거야. 만약하면... (주먹을 보이며) 알아?

남박사: 그래 염려마.

정수: 이대로 지내다 가자. 마누라에게 구박받고 자식놈들에게 따돌림 당해도.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내가 무슨 별난 동물이라도 되는양.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건 정말 싫어. 갑자기 절절한 애정이 생긴양. 하늘이 무너지듯 아타까운 양. 마치 내가 없으면 하루도 못살것처럼 그렇게 말도 안되는 눈빛과 표정을 대하는건 우선 내 자신이 싫어. 아직은 지금 이대로가 좋아. 자네와 술에 취해 이렇게 함께 예전처럼 밤늦게 집으로 쳐들어 갈 수 있다는게 좋다구. 알아?.... 알아?..

남박사: 그래. 알아. 걱정마. 아무말도 안할께.

정수: 그래. 좋아 그럼가지... (노래하듯) 어차피 남남인데 정은 왜들어...

남박사: (팔을 끌며) 이봐 저기 가게에 잠깐 들르자.

정수: 가게? 가게는 왜?

남박사: 아이들에게 줄 과일이라도 좀 사가지고 가야지.

정수: 과일? 거 좋지. 그래 가자.

남박사: 먼저 고르고 있어. 난 약국에 잠깐 다녀올께.

정수: 약국? 그래. 그래라.

남박사는 바쁘게 퇴장. 과일가게주인 등장.

과일장수: 어서오세요.

정수: 거. 과일좀 주쇼.

과일장수: 어떤걸로 드릴까요?

정수: 요즘 아이들 잘먹는걸로 주쇼.

과일장수: 지원이가 잘 먹는게... 응. 저기 오렌지와 키위를 좋아하죠.

정수: 우리 지원이를 아쇼?

과일장수: 그럼요. 참 예쁘고, 똑똑하죠. 그런데 지원 아버지가 왠일이세요. 지원이 과일을 다 사가지고?

정수: (울분을 터뜨리며) 뭐? 왠일로? 야! 내가 내 새끼 과일을 사다주든 말든 네가 뭔데 잔말이야! 야! 네가 지원이 아비냐? 뭐야? 예쁘다고? 그래 예쁘다. 어쩔래?

과일장수: 어이구 이거 약주가 과하셨군요. 그만 가세요.

정수: 뭐? 가? 야. 네가 술 사줬냐? 엉? 네가 술 사줬어?

과일장수: 어허 이거 점잖으신 분이 왜이러세요.

정수: 뭐? 못가 못가 임마.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과일장수: (언성 높이며) 이사람이 왜이래? 빨리가!

정수: 뭐? 이사람?

과일장수: 그래 이사람!

과일가게주인은 떠밀듯 어깨를 치자 정수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진다. 일어서려고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수: 어쭈 사람을 쳐!

정수는 계속 일어나서 때리려다 넘어지고 과일가게 주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체 쳐다보고 있다. 남박사 등장.

남박사: (불쌍해서 견딜수 없어) 이봐. 이 친구야 (정수를 일으킨다.)

정수: 이자식이 사람을 쳐.

과일장수: 내가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이거 남의 가게에서 무슨 짓이에요. 술취했으면 그냥 곱게 갈 일이지. 왜 멀쩡한 가게는 두드리고 난리요 난리가...

남박사: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친구가 너무 과음을 해서...

과일장수: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될 일입니까? 손해가 얼만데....

남박사: 염려마세요. 이 친구 데려다 주고 나와서 해결해 드리리다. (명함을 건네준다.)

조명이 페이드 아웃 상황에서 정수는 악을 쓰면서 남박사에게 이끌려 퇴장.
조명인.
영신은 등장해서 무대에 앉아서 정수를 기다리고 있고, 지원이는 옆에서 책을 읽고 있다. 정수와 남박사 등장.

정수: 여보. 내가 왔소.

남박사: 영신씨 밤늦게 미안해요.

정수: 임마. 형수씨보고 영신씨라니?

영신: (기분나쁜듯) 지원 아빠....

남박사: 이친구야. 영신씨가 어떻게 형수씨냐?

정수: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형수씨라고 하기로 약속했잖아.

남박사: 그래, 알았다 형수씨다. 형수씨.

정수: 오! 우리 자랑스러운 딸 지원이...

팔을 활짝 벌렸지만 휘청거리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지원: (짜증난듯) 안녕하세요.

정수: 그래. 너 남박알지. 이거 순 돌팔이야. 돌팔이.

영신: (수치스러운) 지원 아빠... 지원아 넌 어서 들어가.

정수: 뭐해? 빨리 상차리지 않구!

정수는 무대 앞쪽에 들어 눕고 영신은 무대 한 구석에서 찻물을 끓이고 남박사는 조심스럽게 영신에게 다가간다.

정수: 야! 이새끼야!

정수는 남박사의 어깨를 잡아당기자 남박사는 넘어진다.

영신: (비명적으로) 어머, 여보.... 남박사님! 괜찮으세요.

남박사: 예, 예 ... 괜찮습니다.

정수는 남박사를 일으키려는 영신의 팔을 세차게 뿌리치고 남박사를 무대 앞으로 끌어내려한다.

영신: 여보, 이게 무슨짓이에요!

남박사: 괜찮습니다.

무대 앞으로 끌어낸 정수는 남박사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정수: 이새끼..

남박사: (침착하게) 그만해. 이거나 받아.

남박사는 정수의 손을 걷어내며 약봉투를 건네준다.

남박사: 혹시 밤에라도 통증이 오면 각각 한알씩 먹어. 위경련 비슷한 통증일 거야. 이제 난 간다.

멀리서 바라보던 지원은 수치스러운듯 퇴장. 남박사 퇴장. 영신은 어쩔수 없다는듯 퇴장. 음침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정수의 마임은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것을 포옹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몇번이고 자신의 가족을 잡고 지키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체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갑자기 고통이 물려오기 시작한다. 바닥에 쓰러지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려 애쓴다. 음향은 점점커진다.

정수: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려는듯) 난....난... 아직 정리해야할 일이 있어. 아직 쓰러지기엔 너무 일러...

조명과 음향 아웃. 정수 퇴장.
조명이 들어오면 과일가게 주인은 과일을 정리하고 있고, 지원이 등장.

지원: 아저씨 안녕하세요.

과일장수: 어. 그래 지원이구나 야. 우리동네 자랑 지원이가 갈수록 예뻐지네, 서울대보다 이화여대에 들어갔으면 메이퀸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지원: 아저씨도 참. 이젠 이화여대도 메이퀸은 안뽑아요.

과일장수: 그래? 허... 거, 왜 안뽑니?

지원: 아유, 그만 놀리시고 과일이나 주세요.

과일장수: 하하하, 그래. 뭘로 줄까? 오렌지? 키위?

지원: 아뇨. 오늘은 포도하고 딸기 주세요.

과일장수: 그래, 엄마가 좋아하시는 과일을 사는걸 보니 오늘 과외비 받은 모양이구나. ... 그날 저녁에 아버지... 별일 없었니?... ... 모르는 모양이네... 그런데, 왜 어머니는 요즘 통 안오시지?

지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과일장수: 으응... 왜 지난 금요일인가? 며칠전 아버지가 술에 많이 취하셨던날... 왜 그날 양복에 과일물이 잔뜩 매었을 텐데...

지원: (무언가 생각난듯) 예..예..

과일장수: 어이구, 말도 말아. 그날 어찌나 술에 취하셨던지... 공연히 화를 내시며 우리 과일 더미를 발로 차고 하시더니, 나중에는 과일 위로 넘어지셔서 쯪쯪... 나도 나중에는 화가나서 경찰에 신고를 다 하고싶더라고, 그래도 학생과 어머니를 봐서 참았지만, 그 아버지 친구분이 그날 고생 많이 하셨을 거야. 그렇게 말려도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나중에 그 친구분이 오셔서 과일 값을 변상해 주시갰다고해서 안받으려다 조금만 받았지. 그 친구분은 의사시라던데, 참 점잖으시더구먼.... 난, 또 그일 때문에 어머님이 통 안오시나 했지.

지원은 과일을 받자마자 급하게 퇴장. 과일장수는 다시 과일을 정리한다.
조명 OUT.
조명 IN
지원과 영신은 무대중앙에서 얘기를 나누고있다.

영신: 그런일이 있었다니...

지원: 엄마. 정말 몰랐어?

영신: 응. 몰랐어.

지원: 아이 참... 이제 창피해서 이 아파트에서 어떻게 살아? 어떡해, 엄마?

영신: 뭘 어떡해.

지원: 창피해서... 엄마.

영신: 뭐가 창피해. 그럴수도 있지.

지원: 그럼,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영신: 그게 어때서. 어디 아빠만 그러시니.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아.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으시니 술마시는 거고, 그러다가 취하면 취중에 그런일 한번 벌여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지원: 아니야. 다른 아빠들은 그렇게 까지는 안해. 난 정말 아빠가 싫어. 미워.

영신: 됐어. 그만해.

지원: 엄마 이사가자.

영신: 어디 다른 동네로 이사가면 어빠가 안그러신다든?

조명 OUT
영신과 지원 퇴장. 남박사 정수 포장마차주인 등장. 포장마차 주인이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주며
조명 IN

남박사: 통증은?

정수: 점심먹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곧바로... 네가 준 약먹고 30분쯤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남박사: 술좀 어지간히 먹지.

포장마차: (안주를 주며) 오늘은 안주나 많이 들고 술은 조금만 드슈.

남박사: 어이구 고맙습니다. 아저씨도 한 잔 하시죠.(잔은 내민다)

포장마차: 아니 내게는 신경쓰지 말고 말씀이나 나누슈. 서로 하고싶은 얘기들이 많을텐데. (잔에다 소주를 따라주고 자기일을 한다.)

남박사: (정색하며) 그래. 할말이 많을 것 같은데.... 이제 시작해야지.

정수: 시작?... 그래. 짧은 끝이겠지만 그것도 시작은 시작이겠지... 그렇잖아도 오늘 하루종일 무엇부터 어떻게 정리해야하나 많이 생각했어. 우선, 아직은 그렇게 심하게 힘들지는 않으니 당분간 더 출근을 해야겠어. 아이들에게도 특별히 남겨줄 건 없고, 그사람도 영원히 그렇게 혼자서 정리를 해줘야할 것 같아. 그게 내 소홀함에 대한 책임일것도 같고... 또...

남박사: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수: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남박사: 그럼? 네가 나서서 재혼자리 중매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수: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남박사: 그럼 뭐야? 지금 너 뭐하고 있는거야? 미친놈...

정수: 아니야. 그게 내가 할 도리야.

남박사: (소리치며) 도리? 무슨도리? 이친구야. 그건 자네몫이 아니야. 자네가 해야할 정리는 그런게 아니야. 아니, 그래 그런 부분의 정리도 필요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나중 문제야. 지금의 자네는 그런 걱정을 할 떄가 아니야.

정수: 그럼...

남박사: 제일 중용한건 자네야. 그 앞에선 당사자는 다름아닌 바로 자네란 말이야. 알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자네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 자네를 위한 정리를 하란 말이야.

정수: 그래. 그래서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정리하려는거 아니야.

남박사: 이런 답답한.... 이봐 자네 걱정을 해. 하루하도 더 살고 싶으면 당장 사표던지고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는가, 아니면 절에라도 가서 스님을 찾거나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서 마음의 평안이라도 얻어. 그것도 싫으면 어디 너를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라도 사귀어서 하다못해 단 며칠이라도 너만을 위한 너의 인생을 즐겨보던가...

포장마차 주인은 일 손을 멈추고, 들의 얘기를 듣는다.

정수: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평온하다고.

남박사: (멱살을 잡으며)그래. 잘났다. 정말 잘났어. 야! 이 얼빠진 친구야. 그런데 왜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 집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거야? 지금이 어떤처지인데, 지금 자네 코앞에 있는게 무엇인데... 자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실감이나 하는거야? 아니, 내가 오진을 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건 아니야? 그래서 정말 암이 그것도 친구인 나까지 손을 놓아버리고 이렇게 자네 술벗이 돼줘야 할 정도인 그런 종말의 암이라는걸 믿지 않는거야? 그런거야? 그런거냐고?

정수: 그만해. 술이나 마시자.

포장마차: 말씀중에 죄송하우만, 나도 한잔 주시겠수?

남박사: 아. 예 (술을 준다.)

포장마차: (마신뒤 잔을 주며) 한잔 받아 주시겠소?

남박사: 예.

포장마차: 본의 아니게 엿들은 꼴이 되었수만, 정말 내 마음이 다 무겁수. 보아하니 이쪽 친구분은 의사인것 같고, 저쪽분은 나름데로 성공한 분인것 같은데... 댁들같이 성공한 분들에게 나같은 무식쟁이가 이런저런 말을 한다는게 우습소만, 나도 워낙 거친 인생을 살다보니 나름대로 인생이 뭐가 생각해 본적이 있었수.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술을 마신다.) 자식새끼. 마누라.... 다 좋수. 그렇지만,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건 역시 내 자신입니다. 나도 고약한 성질 못참다가 처음 형무소에 갔을때는 오로지 자식새끼, 마누라 걱정뿐이었수. 자식새끼들 보기 부끄럽고, 마누라에게 미안하다고... 그런데 나와보니 그게 아닙니다. 난 모두 내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 남이었수. 아니 제각자의 인생일 뿐이었수. 그토록 믿었는데, 나없는 동안에 살아보니 살만했던 모양이우. 그렇게 변하고 차가울 수가 없었수. 한편 서럽기도 하고, 형무소가고 했더니 이제는 거의 남남이 되었수. 그래서 나도 이제는 숫제 그쪽에는 신경쓰지 않고 살 요량으로 이짓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자식새끼 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디다. 그게 모두 정인가 뭐가하는 더러운 미련 때문인 것도 같고, 같잖은 양심탓인 것도 같수. 형무소에 있는 동안 놈들 말데로 뒈지도록 두드려패는 그런놈들 마누라가 더 사랑을 압디다. 내가 스스로 미안해하고 죽어주면 그럴수록 내 자리를 더 없어지는 것이라우. 그래도 이렇게 욕을 할 망정, 아직 두들기고 싶은 생각은 없소만... 허, 허허허... 미안하우. 무식한 놈이 같잖은 소리를 지껄여서...

포장마차 주인은 술을 마시며 계속 허허 웃는다.
조명 페이드 아웃.
모두 퇴장하고 영신과 지원이는 등장후 무대 중앙에 않아 있다. 정수 등장.
조명 IN

정수: 지원이 여태 안잤었구나?.... 어. 이놈 왜이래? ... 왜 잔뜩 골이 났어?... 왜 아빠에게 할 말 있어?

지원이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하지만 자꾸 망설인다.

영신: (간곡하게) 지원아.... 그만 들어가서 자, 어서.

지원이는 싸늘하게 퇴장하려한다.

정수: (화내며) 한지원. 무슨짓이야!

지원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멈춰서서 돌아본다.

영신: 버릇없이 무슨짓이야. 어서 들어가.

정수: 야! 한지원! (지원 퇴장) .... 왜이래? 이게 무슨 짓이야?

영신: 그만해요. 당신도 잘한거 없어요. (영신퇴장)

정수는 어의없이 허허 웃는다. 음향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다. 음향은 음침하다못해 잔인하게 느껴진다. 정수는 서서히 고통이 밀려든다. 그 고통을 이기려고 노력을 하지만 고통은 계속몰려온다. 음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의 고통도 서서히 사라진다. 음향이 OUT되면 그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온다. 테이블위에 편지 한통이 놓여있어 그것을 본다.

정수: 지원이 올림? 허허허 지원이게 내게 편지를...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어두운 음향 페이드 인.

정수: 아버지 전 지금 당신에게 몹시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 실망은...

지원: (목소리) .... 분노에 가깝습니다. 전 언제나 당신이 다른 그 누구보다도 저에게 훌륭한 아버지시고 엄마의 남편이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매번 저희를 실망시켰습니다. 언제나 술취한 모습, 그리고 비틀거리고 흔들리고 나약하고 볼품없는 모습. 왜 저희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익숙해야 합니까. 저희도 남들처럼 자랑스럽고 성공한, 그리고 멋진 아버지를 갖고싶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매일 술만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엄마에 대한 불만인가요. 아니면 저희가 언제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을 했나요. 아니면 공부를 못해서 아버지의 걱정을 샀나요. 그런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술을찾나요.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대학교 입학식외에는 그 어느행사에서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유일한 사진속의 당신을 바라보면서 고마움보다는 서글픔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당신이 이루지 못한 한풀이였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엄마는 항상 저와 같이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엄마에게 수고한다. 고맙다는 말 한번 없이 언제나 무관심한 표정. 그 당신의 무관심에 저와 엄마는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십니까?
그렇다고 당신께서 가족에게 소홀이 할 만큼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면 재산은 많이 모아서 부귀를 누리는 것도 아닌데 왜 가족에는 소홀하시는겁니까?
친구의 소중함은 저도 친구가 있어서 잘 압니다. 하지만 가족또한 그 친구들 못지않게 소중하고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흔들리는 모습은 보여주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발 친구들에게서 가족으로 시선을 돌려 당신의 자리를 찾으십시요.
전 정말 이젠 당신의 천박한 술주정을 보고싶지 않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제가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아버지를 사랑하고픈 딸 지원이가
추신: 전 이편지를 쓴것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께서 받으실 상처는 모두.....

정수: ....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배경음악이 점점커지면서 정수는 서서히 주저앉기 시작한다. 고통이 서서히 몰려온다. 도저히 참을수 없는 고통이 몸 깊은곳에서 밀려온다. 나중에는 오히려 그 고통을 즐긴다. 허탈하면서도 잔인한 웃음소리가 그를 위로할 뿐이다.

정수: 아무리 세상이 미쳐버렸다고 해도, 그래 네 말대로 내가 그렇게 볼품없고 무능하고 나약하고 천박하다고 해도, 네가 어떻게 나에게... 실망했다고? 소홀했다고? 무관심했다고? 상처입었다고?... (절규적으로) 어떻게 네가 내 사랑을 그토록 처참하게 짓밟을수 있으며 감히 네가 나를 그렇게 무참히 비난할 수 있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가슴깊이 사랑했는지... 내 가슴을 열어 보여줄까? 아니면 내 지난 과거를 찾아다 펼쳐보일까? (서글프게 흐느낀다.)

조명 페이드 아웃.
조명이 켜지면 테이블에 정수와 남박사가 앉아있고, 포장마차 주인은 바쁘게 움직인다.

남박사: 통증은?

정수: 괜찮아.

남박사: 왜? .... 무슨일이라도 있었어?

포장마차: 어제는 내가 너무 주제 넘었수. 오늘은 조용히 두분 이야기 나누슈. 안주나 많이 들고 소주는 적게하고...

남박사: 아니 무슨 말씀을요. 같이 한잔 하시죠.

포장마차: (안주를 주며)그거 오늘 오후에 시장에 나가서 수월찮이 구해온 진짜 민물장어요. 정력에 좋으니 어서들 드슈. 여기 더 있수.

정수: ... 억울해.

포장마차: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보우? 자식새끼 마누라 다 소용없수. 드슈. 억울한건 댁 혼자일뿐이우. 누구도 댁의 억울함을 나눠 가질순 없수. 먹고 기운차려 단 하루를 살아도 힘있게 사는게 최고유.

정수: 그럽시다.

나래이터: 남박사는 정수가 비록 아무런 얘기를 하지는 안았지만 무슨일이 있었는가를 알것같았다. 35의 신화... 그가 창조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위해 1년동안 부단히 노력한 그의 신화이다. 지원이가 서울대의 영문과로 가기위해서는 입학정원인 35라는 숫자안에 들어야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35라는 숫자안에 항상 있으면 지원이가 합격할 수 있을것 같아서 그는 무엇을 하던지 항상 35라는 제한 숫자를 사용했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도 끝자리가 35이하이면 그는 아무리 급해도 타지않았다. 전철을 타더라고 항상 35명안으로 타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지원이가 합격을 했을때 자신은 그녀의 입학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낼수 있었다. 그런 그를 잘 아는 남박사는 더욱 화나기 시작했다.

무대에는 중앙에만 조명이 들어온다.
남박사와 포장마차주인은 자연스럽게 퇴장. 반대편으로 지원과 영신이 등장. 지원은 나오면서 계속 정수를 짐승보듯 처다본다.

영신: (지원에게)그만 들어가 자거라.

지원은 기분 나쁜듯이 뒤돌아 선다. 갑자기 정수는 무대 구석에 토한다. 지원은 저주하듯 처다본다.

영신: 뭐해. 어서 들어가.

지원은 괴성을 지르고 영신은 지원을 데리고 퇴장.

정수는 한 참을 토한뒤 자신의 얼굴을 만져본다. 눈, 코, 광대뼈.... 그의 손에는 완전한 환자의 느낌이다. 그는 서글픈듯이 쓴 웃음을 짓는다. 나래이터의 설명이 시작되면 서서히 일어나서 테이블로 가서 이것저것 바쁜듯 들여다본다.

나래이터: 정수는 자신이 죽은후 가족들의 생계에 대해서 항상 걱정이다. 우선 영신앞으로 가게를 얻어서 그녀가 앞으로 살수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전망있는 지역과 가게의 인수금에 대해서 알아봤다. 다음으로는 지원이의 앞날이다. 학교는 자신이 괴외를 해서 다니고 용돈도 번다고는 하지만 시집갈땐 비록 정수가 같이 입장하지는 못하지만 결혼준비는 자신이 손수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수는 퇴직금이외에 이것저것 돈이 될만한것을 찾아보느라 늘 바쁘다.
하지만 지원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무관심인것 같은 아버지가 지원은 항상 불만이었다.

지원과 영신 등장.

지원: 엄마. 오늘도 봐. 벌써 열두시잖아.

영신: 나도 알고 있어. 그만 들어가 자.

정수는 무대 중앙으로 이동한다. 잠시 지원과 영신을 번갈아 본뒤 그냥 지나치려한다.

영신: 지원 아빠.... 저와 이야기 좀 해요.

정수: (놀라며) 무슨?

영신: 당신, 요즘 왜 그래요?

정수: (안심하며)... 그만둬.

지원: (날카롭게) 아빠!

영신: 어서 들어가지 못해! ... (정수에게) 당신에게 가족들은 도대체 뭐예요?

정수: 가족? 흥. 언제 내가 가족이었지? 난 기억에도 없는걸. 그건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던가? 내 무엇이 그렇게 무능했어? 그래도 최소한 당신의 남편이었고, 자식들의 아버지였어. 그런데 왜 날 무시하고 경원해? 나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해서 그토록 부끄럽고 싫었나? 그래 솔직히 나도 이런 내가 싫고 화났어. 하지만 그냥 이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이것만으로도 난 행복했어. 자리보다는 사람이 좋았고, 더러운 교재보다는 편안한 만남이 좋았어. 친구, 술, 그게 왜? 그렇게라도 기대지 않으면 난 어디에서 삶을 느끼고 숨쉬라고.... 가족? 날 가족으로 생각한게 언제적 이야기야? 당신이, 그리고 지원이가 날 가족으로 대한게 도데체 어떤거냐구?

영신: 그럼 이 모든것이 제 책임이란 말인가요?

정수: 책임? 그럼 그게 내 잘못만인가? 언제 내게 진정 가족으로서 따뜻한 웃음 한번 보여준 적이 있었나? 어느날 부턴가 날 반긴건 무관심과 형식뿐이었어. 당신도 지원이도 모두가 그랬어. 생각해봐 어느한날 진정으로 기다리고 반가워서 정겨운 인사한번 건네 준적이 있었는지. 어쩔 수 없이 기다리다 의무처럼 그개 한 번 끄덕이고, 그리고는 무심하게 본래대로 돌아가 그대로 남이었어. 그게 얼마나 날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었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거야. 난 그런 무관심의 경멸속에서도 내 사랑을 .... 내의무를 다해왔어...

영신: 당, 당신... 무섭군요. 어떻게 그토록 많은 말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계셨어요? 전 당신 말대로 정겹지 못하고 무심하긴 했어도 그렇게 당신처럼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지는 않았어요. 다만 몇가지 부탁정도가 있었을 뿐인데...

정수: 묻어둔게 없다고? 흥. 그건 거짓이야. 아니면 착각이거나. 아니.. 그래 그렇다고 해. 당신 말대로 무심했다고 해. 바로 그 당신의 무심이 나에 대한 철저한 멸시였어. 그래서 무심할 수 있었던거라구. 바로 당신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철저한 멸시...알아?

영신: (울먹이며) 너무해요. 어떻게 그런 당신만의 일방적인 생각을...(흐느낀다)

지원은 괴성을 지른다. 정수는 허탈한듯 영신을 바라본다. 지원은 서서히 영신에게 와서 영신을 감싸안는다.
조명 페이드 아웃.
모두 퇴장하고 남박사와 황변호사가 심각하게 있다.
조명 IN

황변호사: 이봐 남박 오진이야. 그렇지? 응? 그렇지?.... 이봐 말좀 해봐!

남박사: 미안하네, 정말이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왜 내가 정수에게 그런 진단을 내려야 하는지... 요즘 같아선 의사라는 내 직업에 회의가 들뿐이네...

황변호사: 빌어먹을... 다른 병원에는 가봤대?

남박사: 아니. 그친구 그짓도 안해. 겨우 처음 며칠 도서관에 간 정도로 끝이야.

황변호사: 도서관이라니?

남박사: 의사보다 의학이 못 미더웠겠지.

황변호사: 자네, 나중에 오진이면 내 틀림없이 고발할 걸세..... 이봐 그래도 뭔가 발악이라도 해봐야 되는거 아니야?... 정말 그렇게 아무 가망도 없어?

남박사: 그만해. 수술? 어차피 틀린 목숨... 그런 발악이나마 내가 더 해보고 싶어.

황변호사: 그런데?

남박사: 고통만 더 줄 뿐이야. 말이 좋아 최후의 발악이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고통의 가중을 당사자에게는 잔혹한 고문이야. 그런 무책임이 어디있어. 난 못해.

황변호사: 왜 못해. 그래도 혹시? 다른 사람이라면 했을지도 모르잖아.

남박사: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수는 친구야. 내겐 단 하루하도 친구의 살아 숨쉬는 삶이 중요해. 있지도 않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행운을 기대하는 그런 뻔뻔한 만용을 친구에게 부릴 수가 없네.

황변호사: 오히려 친구여서 자네가 용기를 잃어버린건 아니야? 그렇다면 그건 직무유기야. 그것도 살인의 직무유기...

남박사: 차라리 내가 그 벌을 받지.

황변호사: ... 그 병신같은 자식은 무슨 지랄을 했기에...... 지원엄마는 어때?

남박사: 아직 몰라.

황변호사: 뭐야?

남박사: 정수가 원하지 않았어. 제 나름대로의 정리가 끝난 다음에 이야기 하겠지.

황변호사: 그럼, 자네는 지원엄마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덜렁 정수에게만 그런 엄청난 사실을 알려준거야? ... 미쳤군, 정수보다 자네가 더 미쳤어.... 이봐 가족이 뭐야? 차라리 당사자보다 가족이 먼저 알아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야 뭔가 대책을 세울거 아니냐구?

남박사: 무슨 대책?

황변호사: ... 그래도 그건 당연한 순서가 아니야?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건 너무 무책임한 판단이야. 고통은 나눠야...

남박사: 당연한 순서? 그게 오히려 무책임 아닌가? 내 생각은 다르네... 친구가 아니었으면 나도 아마 그랬을거네, 그게 나도 편해. 하지만. 상대는 정수야. 내 짐을 덜자고 그렇게 한꺼번에 혼란에 싸여 병원을 헤매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무런 정리도 하지 못한체 끝나는 그런 모습이 정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아니 서푼짜리 알량한 오기가 됐든, 그거나마 지키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당장 슬픔이 더하더라도 그건 순간일 뿐이야. 마지막까지 보여주는 그 무엇하나 그것이 영원한 위안이 되고 살아갈 앞날의 힘이 될거야. 그게 친구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내 심정이네.

황변호사: 그래도... 그 친구 인생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남박사: 아니야. 나도 이제서야 내 생각이 그르지 않았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네. 하지만 이젠 늦은것 같아.

황변호사 퇴장. 영신등장. 남박사는 무척 어둡고, 머뭇거린다.

남박사: 저.... 정수.... 어제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죠?

영신: 예.

남박사: 어제 저녁에 만났습니다. 조용히 생각할게 있다며 여관으로 들어가는걸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신: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남박사: 요즘 정수에게서 이상한것 못느끼셨습니까?... 짜증을 많이 낸다거나 체중이 많이 줄었다거나...

영신: 예, 부쩍 술이 잦고, 게다가 말도 짜증스러워.... (놀람)... 무슨... 일이 있어요?

남박사: 죄송합니다. ... 정수가 ....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영신: 무슨 고통을 말씀하시는지...

남박사: (빠르게) 암입니다. 췌장암 말기 입니다. 수술도 불가능하고 어떤 치료 방법도 없습니다. 오진이 아닙니다. 남은 삷은 이제 길어야 4개월 정도 입니다. 죄송합니다.

영신: (멍하게 서있으며 자신을 의심한다.)

남박사: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번 모든 검사를 다 해봤는데.... 3주전에 확인을 했습니다. 정수가 지원엄마에게는 알리지 않기를 원하더군요. 물론 꼭 정수의 의견을 들은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정수의 마음정리부터 끝나야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영신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멍하니 앞만 바라본다. 남박사는 “죄송합니다” 만 멍하게 반복하며 비틀거리며 퇴장.

영신: 자신을 불태우며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언제나 아무일 없는듯 고통을 숨겨야 했나요.
자신의 짐을 지우기 싫어서 그렇게 홀로 지냈나요.
내가 비록 당신에게는 부족할지 몰라도 사랑해요.
당신 혼자 떠난다는 배심감에 두렵지만 언제나 사랑해요.
가여워서 어떡해요. 모두가 제 잘못이예요.
그이의 외로움도 지원이도... 모두 모두요...

지원등장. 영신은 분주히 정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다 노크소리가 들리자 지원은 달려간다.

지원: (웃으며) 아빠?... 다녀오셨어요?

정수: (어리둥절 하며)... 응...

영신: 저녁은요?

지원: 아빠, 피곤하시죠? (정수를 끌며) 어빠 뭐해 어서 들어와요.

정수: (쭈삣뿌삣 뒷걸음치며) 어...

정수는 무언가에 쫒기듯 퇴장

영신: 여보!

지원: 아빠.. 어디 가세요!

조명 OUT
모두 퇴장.
조명 IN
정수는 터벅터벅 등장. 무대 중앙에 편지가 놓여있다. 정수는 편지를 들고서는 의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뒤 읽는다.

정수: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놀란듯 하나 다시 읽는다)

지원: (목소리) 아빠. 용서를 빕니다. 철없고 경솔했던 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아빠의 그 깊고깊은 사랑을 제가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투정이었는데, 어리광이었는데, 제가 너무 격했어요.
그동안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제자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에 대한 죄스러움이 더해 미처 용서를 빌 기회마저 놓쳐버렸어요.
아빠. 얼마나 서운했어요. 얼나마 노여우셨어요. 백번을 만번을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빌어도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아빠. 차라리 제 뺨을 때려주시죠. 차라리 밉다고 혼내시어 쫒아내기라도 하시죠. 그랬으면, 정말 그러셨으면 아빠의 품에 안겨 엉엉울며 용서를 빌었을텐데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어요? 얼마나 허무하셨어요? 아빠. 부디 절 용서해 주세요.
사랑하는 아빠 돌아와 주실 거죠? 기다릴께요.
사랑해요. 우리가족 모두 아빠를 사랑해요. 엄마도 저도 모두 어빠를 사랑해요.
지원올림
추신: 아빠, 많이 아프시다죠? 죄송해요. 제가 아빠마음을 아프게 해드렸기 때문이예요.하지만 우리모두 하느님께 빌고 있어요. 그러니 곧 완쾌되실 거예요.
아직 화가 안풀렸으면 천천히 들어오셔도돼요. 하지만 보고싶어요. 특히 엄마가 많이 보고싶어 하세요.

정수: (환하게 웃으며) 허허허 남박, 내가 뭐라던가? 이건 사랑이라 했지. 투정이라 했지. 어리광이라 했지....? 거 보라구. 우리딸이 이렇다네 얼마나 고운가... 허허허

남박사 등장

정수: 어디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되지 뭐 번거롭게...

남박사: 아니야. 자네 집사람도 같이 왔어

영신 등장. 정수는 놀란다.

남박사: 어디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영신: 아니예요. 당신 곧바로 집으로 가실거죠? 남박사님 죄송해요. 오늘은 일찍 쉬시게 하고 저녁은 다음에 해요. 그때는 제가 모시죠.

남박사: 그게 좋겠네요. 지원엄마도 앞으로는 자주 뵈야....(자신의 말이 실수였다는듯 끊는다.)

영신: 남박사님도 저희집에서 저녁 함께 하시죠.

남박사: 아닙니다. 다음으로 미루죠.(퇴장)

나레이터의 설명에 마추어 정수는 마임을 한다.

나래이터: 집에 들어선 정수는 자신이 제대로 왔는가 의심했다. 거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정수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신의 물건이 모두 안방으로 옮겨져있었다. 별거아닌 별거생활의 마지막이 온것이다. 옮겨놓은 물건은 모두 정수의 편의를 위해서 배치되어있었다.

영신: 뭐하세요? 옷...

정수: 뭐하게... 잠만 와서 자면 되는데.

영신: 당신, 아니 우리방인데요... 이리 주세요. (정수는 어색하게 옷을 준다.) 씻고... 아니, 쉬다가 나오세요. 저녁부터 준비할께요. (퇴장)
(목소리)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지원: 아빠 오셨어요. ... 아빠... 잘못했어요.

정수: 아니야. 아빠가 미안했어. 편지 고마웠다.

지원: 아빠.... (흐느낀다. 정수는 살포시 감싸 안는다.)

정수: 지원아...

조명 페이드 아웃.
조명이 어둡게 켜지면 정수와 영신은 무대에 앉아있다. 영신은 조심스럽게 흐느낀다.

정수: 왜?... 그만 자지그래.

영신: 예. 자요.

정수: 많이 늦었어. 어서자.

영신: 예.... 저 다알아요. ... 전 괜찮아요. 당신보다는 덜 힘들어요.

정수: 지원이는?

영신: 자세히는 몰라요. 위암 초기라고만 했어요.

정수: .... 그런데 믿을까?

영신: 빨리 입원을 하셔야겠어요. 우선은 방사능 치료중이라고 말했는데.... 지원이가 왜 입원을 않느냐고 하길래 방사능 치료결과를 봐서 곧 입원하게 될거라고 말했어요.

정수: 소용없어. .... 아무 소용없어. 이미 끝난거야.

영신: 그래도 입원하셔야해요. 그 고통은 어떻게 견디시려구요.

정수: 남박사에게 진통제를 강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뭐.

영신: 됐어요. 피곤한데 그만 주무세요.

조명 OUT
영신퇴장. 남박사. 황변호사 등장
조명 IN

남박사: 월요일에 곧바로 입원하자.

정수: 사표부터 제출해야지.

황변호사: 사표는 왜?

정수: 왜라니? 이제 근무를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내야지.

남박사: 그럴 필요없어. 지병이라기 보다는 과로한 업무로인한 발병일 수도 있어. 병가를 내.

정수: 병가? 풋... 내가 치료를 받는 사람이야? 병가를 내게...

남박사: 그래도 그렇게 해.

정수: 왜? 두어달이라도 봉급 더 타게?

남박사: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정수: 그럼?

황변호사: (울분을 터뜨리며) 왜 그렇게 자네만 생각해? 그러면 남은 사람들이 너무 비참하리란 생각은 안들어? 평생을 바쳐 일해온 그 공무원.. 너라도 남아야지... 자연인 한정수면... 지원엄마 그리고 지원이를 생각해!

정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소용없어. 가면 그만인데,. 추억은 오히련 남은 사람들의 발목이나 잡을 뿐이야.

황변호사: 그렇지 않아. 자네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은 영원히 자네를 기억해!

정수: 그래도 나는 싫어. 다 정리하고싶어. 깨끗이...

남박사: 그럴필요없어. 그건 지나친 결벽이야. 더이상 무얼 어떻게하려 들지마. 그건 자네 욕심이야. 남은 사람들의 몫도 있어야해. 그냥 그렇게 두고...

정수: ... 두고 가라고? 후후... 나도 그러고싶은 마음이 없는건 아니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지난 삶이 너무 무능했던것 같아서 싫어. 다른 이들처럼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 오래된 앨범속의 사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어느 하나라도 튀어나올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내겐 그런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싫어.

황변호사: 욕심이다.

정수: 욕심이라고? 풋... 그래도 할 수없지.

황변호사: 그 판단은 자네몫이 아니야. 화려하고 아름답고 그런건 모두 남아서 정리하며 돌아볼 사람들의 몫이지 자네가 판단할 몫은 아니야.

남박사: 그리고 뭐가 그렇게 무능했는데. 그 무능이란 판단의 기준이 뭐야? 그래 좋아 자네 말대로 무능했다고쳐. 그게 무능이라면 그건 순수야. 그대로가 더 나아. 무엇보다 아름답고 화려해. 그러지말고 그대로두고...

정수: ... 가라고?

황변호사: (미친듯) 그래가! 그렇게 그냥두고 가란말이야. 이젠 속이 시원하니? 그렇게 가란말이 듣고싶어? 그래 가! 가!

나래이터: 점점 수척해가는 정수의 모습을 보며 그의 친구들은 더욱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났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을 즐기듯 받아들이는 정수를 보니 남박사와 황변호사의 가슴에는 더욱 큰상처가 남았다. 이젠 더이상 친구의 죽음을 바라볼 용기조차 나지않는것이다. 그런데 친구란 이런것일까? 아무리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자꾸 돌아보게되고 서글퍼지는 이 느낌은 어찌할 수 없는것 같다.

조명 OUT
모두 퇴장.
조명 IN
의사가운을 입은 남박사는 정수에게 주사를 놓고 있다.

정수: (기운없는듯)이게 무슨 주사야?

남박사: 왜?

정수: 마약같아서...

남박사: 언제 맞아봤어?

정수: 후후... 그럴 것 같아서. 통증도 사라지고, 나른한 가운데서도 의식은 또렷하고 또 그러다가 편안히 잠들고... 잠에서 깰때는 자꾸 무엇이 보여. 그렇지. 마약이지?

남박사: 아니야. 데메롤이야.

정수: 결국 마약이네뭐. 후후... 이렇게 아편쟁이까지 돼가며 뭐하겠다는 건지.

남박사: 뭐가 마약이야? 이건 진통제야. 의료용 진통제라고

정수: 마약성 진통제? 후후... 그게 그거지. 의료용이라고 다를게 뭐 있어?... 그거 한꺼번에 많이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지금처럼 근육주사가 아니고 정맥주사라면...

남박사: (위엄있게) 정수!

정수: 후후...뭘 그렇게 놀라?

남박사: 이사람.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정수: 남박 나 같은 사람의 장기도 사용이 가능할까? .... 눈, 심장, 콩팥, 간.... 뭐든지 다주고싶어.

남박사: 씨끄러워. 그만 잠이나 자.

정수: 이사람, 왜 화를 내?

남박사: 그 사람들에게는 생명이야. 그렇게 장난하듯 말하지마.

정수: 장난 아니야.

남박사: (고함을 지르듯) 아무리 장난이 아니라도 그렇게 버리듯이 팽개치는 건 우선 내가 안받아! (퇴장)

나레이터의 말에 따라 정수는 마임을 한다.

나래이터: 남박사는 정수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듯한 그의 말투며 행동은 더이상 그를 똑바로 볼수없었다. 그런데 정수는 병원의 자료실을 드나들며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남박사는 그런 정수를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남박사: (등장하며 소리친다) 야 이자식아! 너 나가! 당장 퇴원해! 퇴원해 버려!... 네가 의사야? 네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녀! 네가 뭔데 자료실을 찾아가! 그렇게 잘났으면 왜 진작에 몰랐어? 왜? 왜! (노려본뒤 퇴장)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않은 음향 IN

영신: (등장하며 울듯이) 여보... 당신...

정수: 내 장기를 다 기증했으면 싶어. 사용가능한 모든 장기를... 가능한 빨리...

영신: (울음을 삼키며) 여보...

정수: 감정의 사치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소. 어쭙잖은 자선의 은혜로 뭔가를 기대하는 그런 심정은 더구나 아니오...

영신: (끊으며 애절하게)여보...

정수: 다 버리고 싶소. 그리고 내 죽음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아주오. 꼭 화장을 부탁하오.

영신: (흐느끼며) 안돼요. 싫어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어쩌라고요. 남은 우리는 어쩌라고요? 절대 못해요. 절대...(정수의 품으로 안긴다.) 흑흑흑.....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의 그 허무는 모두 제 탓이에요. 안돼요. 사랑해요..... 제발 마지막까지 견뎌주세요. 제발, 제발요....

지원은 등장하다가 영신의 통곡을 듣게 되고 그자리에 놀라서 서있는다. 영신은 그런 지원을 데리고 무대의 한 쪽으로 이동.
음향 OUT

지원: 엄마. 뭐야? 뭐가 잘못된거지? 그렇지?.... 엄마. 왜그래?.... 엄마. 뭐야? 뭐가 잘못된거지? ..... (울먹이며)..아니지? 응? 그렇지? 아니지?

영신: 지원아.....아빠가 장기를 기증하시겠대. 무덤도 만들지 말고 모두 태워달래. 훨훨 날고 싶으시대. 서둘러 가시겠대. 자살.... 안락사를 원하신대....

지원: (멍하게) 엄마...... (점점 광적으로)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귀를 막고 주저앉으며 비명을 지른다.)

영신: (지원이를 붙잡으며) 안돼! 일어나야해! 아직은 쓰러지면 안돼! 아빠가 불쌍해.... 지원아. 어떻하든 아빠의 남은 3개월을 지켜줘야해. 그것마저 포기하시게 해서는 안돼. 내 잘못이야. 우리들 잘못이야. 너무 힘드셨대. 너무 외로우셨대..... 그래서 남은 3개월마저 그만 버리고 싶으시대... 일어나 어서. 어서....(지원이를 일으킨다)

조명 OUT
조명 IN
모두 퇴장하고 남박사는 등장해서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황변호사: (등장하며) 남박 있어?.....(놀라며) 뭐야?

황변호사는 술병을 뺏으려 하자 남박사는 완강히 거부한다.

황변호사: 왜이래!

남박사: 그 망할 자식이.... 그새끼가.... 장기를 모두 기증하겠다네...

황변호사는 술병을 뺏어 쏟아붓듯 병을 비운다. 남박사는 밑에서 다른 술병을 꺼낸다.

남박사: 매일매일 저 앞 자료실에서 죽음을 연구하고 있어. 그리고 날보고 웃어. 도와달라고... 죽여달라고.....어떻게 해야되는 거야?.....

황변호사: 아직 안락사는 허용안돼.

남박사: 자네마저 왜 그래? 그게 어떻게 안락사야?

황변호사: (소리치며) 그래. 살인이야! 알면서 왜 물어?

남박사: 후후... 살인? 그래. 그것은 살인이지. 그 당연한 결론을 알며서도 도대체 난 뭘 생각하고 있는거지. 이봐. 내가 미쳤나봐. 그렇지?.... (중얼거리듯) 법이란게 뭔가?... 아니. 법의 가장 기본되는 원칙이 뭔가?....(황변호사에게) 그럼 자네가 집행했던 그 처벌법의 기본은 뭐야?..... 기대 가능성 아니던가?

남박사와 황변호사는 각각 무대뒷편을 바라보며 관객에게 등을 돌린다.

나래이터: 친구를 위해 살인을 해야하는 남박사와 자신이 한없이 무능하게 느껴지는 황변호사. 이들은 진정 정수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수가 더이상 가족에게 보여줄 최소한의 자존심을 위해서 그를 죽여야한다는 것은 남박사나 황변호사에게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지운다는 큰 고통과 양심의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남박사: 나. 남과장이오. 한정수. 그 판크래아틱 씨에이 (Panreatic C.A) 환자좀 데려다 주시오.

남박사와 황변호사는 관객을향해 다시 돌아선다. 정수 등장.

황변호사: 이봐 정수. 자존이니 뭐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 모두 자네의 그런 모습을 원하는게 아니야. 그냥 자네면 돼. 자네 그모습 하나로 족한거야.

정수: 이상적인것말고 현실을 생각해. 자네는 이젠 가난도 잊었지? 우리들 시절은 모두가 다 비슷했지만 가난.... 그거 아주 몹쓸 거였어. 흔히들 말하기 좋아 가난이지 가난은 죄가 아니라 그저 불편한 것일 뿐이라지만, 웃기는 이야기지. 죄는 아닐지 몰라도 불편할 정도는 아니야. 아주 비참한고 나아가 인생을 망치게도 해. 영원히 가슴에 남아 평생을 발목 잡히기도 하는게 그 더러운 가난이라는 거야. 내게도 그런 더러운 추억이 있어. 추억은 아름다운거라고? 정말 웃기는 이야기야. 그리고 미안하고 또 부끄러워.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은데도 그놈의 기억은 징그럽게도 쫒아다니며 내 발목을 잡아. 그게 때로는 어려움 모르고 자란 아내에 대한 콤플랙스가 되기도 했고.....

남박사: (퉁명하게) 병원비 안받아.

정수: 그것도 아차피 구걸이야. 나도 아내도 그러 따위는 원하지도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이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난의 기준이 달라지긴 했어도, 병원비 때문에 그 정도의 가난이 이어질 정도는 물론 아니야.

황변호사: 그런데...?

정수: 아비로서 최소한의 도리야. 금액의 과소와는 다른 문제야. 내 생명이 정말 단 1프로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또 달라. 어차피 상황은 뻔해. 그런데도.... 그건 정말 아비로서 더할 수 없는 무책임이야. 난 그렇게 내 자존을 허비하고 싶지 않네. 차라리 그 돈을 다른어느곳에 기부라도 하는게 자식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하네.

황변호사: 미친놈...

정수: 감상적이지마. 현실적으로 생각해.

남박사: 임마. 네가 더 감상적이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개자식!

정수: 그렇게 준귀한 인간의 생명 어쩌고.... 그게 바로 감상적인 사치야. 당사자를 생각해봐. 정해진 날짜를 기다리는 그 초조함. 그러면 인간은 누구나 다 한번은 죽는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과는 달라.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의차이. 기다림과 우연함,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망연히 죽음의 사신만을 기다려야 한다면.... 자네들은 다를 것 같나? 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몰골, 지쳐가는 가족, 점점더해지는 고통.... 그러게 끝까지 비참해야 할 의무가 어디 있어? 누가 그걸 강제할 거야? 정말 인간이 존귀한 거라면 죽음 역시 존귀하게 맞이할 권리가 있어. 태어난 건 자유의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죽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어. 더구나 뻔히 보이는 비참함의가중일 뿐인 날들을 인내하라면 그건 차라리 고문이야.... 날 고문하지마. 날 마지막까지 구속하지마. 자유롭고 싶어. 해방되고 싶어. 죽음의 초조함에서 초라함의 슬픔에서.... (울먹이며) 내가 지키고 싶은 그 자존심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 (진정된듯) 남박사. 내 장기 기증받을 사람이나 알아봐줘.

남박사: 빌어먹을...

정수: 그냥 팽개치듯 버리는게 아니야.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네. 그런 아픈 추억들 때문에라도 이 세상에 별로 미련은 없어. 그래도 자네들 같은 고마운 친구, 좋은 아내, 착한 딸.... 그런 모든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하늘이 고마워서 주고 갈 건 다 주고 가려는 걸세. 잊혀지고 싶네. 나또한 잊고 싶고...

조명 OUT
암전 상황에서 정수의 목소리만 들린다. 음향이 조용히 IN

정수: (목소리) 내가 지금까지 버틸수 있었던 것은 자네들과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내가 지금은 비록 이런 모습으로 모두의 곁을 떠나가지만 모든것을 잊는것은 아니네... 자네들이나 가족들 모두에게 나라는 존재는 가슴깊은곳에 남아있을 줄로 알고 나또한 이곳에는 없지만 먼곳에서 자네들에대한 기억을 간직할 것이네.... 고마웠네...

조명 IN
남박사와 정수만 등장해있다.

남박사: 왜? 약이 어떻게 안맞아?

정수: 매주 쉬지도 못하고 고생이 많구나.

남박사: 구토가 나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불편해?

정수: 황변호사도 요즘은 병실에 통 안오던데, 네겐 들르지? 창가에서 들어오는 모습을 봤어.

남박사: 아직 부종은 없을 텐데?

정수: 요즈음도 술 자주 마셔? 지난번 같이 그렇게 폭주는 하지마.

남박사: 특별한 거부반응은 없을 거야. 링거 그대로 맞아.

정수: 언제 우리 셋이서 함께 술 한잔 하자.

남박사: (서서히 거칠게) 다른 약제는 모두 링거로 함께 투약중이야.

정수: 마지막이 될테지만 나중에 한번 더 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남박사: .... (소리치며) 어떻게 안맞아? 어떻게 거북해?

정수: 오늘 저녁은 어때?

남박사: 그래, 잘났다. 잘났어! 그래, 송별주 하자! 네가 예수냐? 최후의 만찬이야? 망할 자식...

정수: 벌써 데메롤을 근육주사가 아닌 정맥주사로 놓더구나. 내 상태가 그정도로 심각하다는거 나도 잘 알아. 그래서 말인데 대략 2,3앰플정도를 주사해 주면 나도 이제는 고통스럽지 안을것 같아.

남박사: 이...

정수: (손을 들어 말을 제지시킨다) 그정도면 나중에 부검을 하더라도 전부터 데미롤을 사용했기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리고 링거호스에 투약하니 의심도 받지 않을것이고....

남박사: (소리친다) 야! 이 나쁜 자식아. 네 한놈 그 꼴난 자존심을 지키자고 남은 가족들은 생각도 안해? 어떻게 그토록 이기적이야! 아무리 네가 당사자라지만 그래도 그쪽의 고통도 한번은 생각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너 떠나는 것만 바쁜고 남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시간을 안줘도 되는거야! 넌 아직은 죽을 자격없어. 그 교만 다 버리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고통스러워도 살아야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모르는 놈. 그런 놈이 무슨 죽을 자격이 있어? 그리고 나도 죄짓지 않을 거야. 그래 절대 못지어.

정수: (울음섞이 목소리로).... 남박사....날좀 죽여줘... 제발...이제 보내줘.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무릎꿇고 빌게. 제발 날 좀 어떻게 해줘. 제발.....

남박사: 정수야.

정수: 자존심이라고? 내게 남은 자존심이 어디 있는데? 이미 자네에게 죽음을 사정할때부터 난 다 무너진 거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야. 사랑해. 자넨 몰라. 더는 괴롭힐 수 없어. 그만 갈래. 그게 사랑하는 마지막 방법이야. 내가 남아 있어 그들이 어마나 고통스러운데. 이제 아내 앞에 그토록 사랑하는 지원이 앞에서 이렇게 무릎꿇고 애원할 일만 남았어. 그렇게까지 욕되게 만들지 마. 그렇게까지 그들을 괴롭히게 하지마. 얼마나 무서웠는데. 자넨 몰라. 눈을 감는 순간마다. 잠시 정신을 놓는 순간마다 꿈처럼 찾아드는 죽음의 악몽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자넨 몰라... 내가 자살할 용기가 있었다면 벌써 죽었어. 그런데 바보같이 그런 용기 하나 없이 자네에게 애원하네... 제발.... 내 거짓이 미웠더라도 제발 용서해줘. 그리고 보내줘. 제발....

정수는 한없이 울기 시작했다. 남박사도 그런 정수를 껴안고 울기 시작한다. 영신은 서서히 등장한다. 밖에서 둘의 얘기를 들은 것이다. 어찌하지 못하고 그냥 멀리서 둘의 통곡을 지켜만 볼뿐이다.
조명 OUT
조명이 들어오면 지원과 영신만 무대에 등장해 있다. 영신은 뭘하는지 굉장히 분주히 움직인다.
전화벨이 울린다. 그 소리를 들은 영신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지원: 이 밤중에 누구야?.... 엄마. 남박사님...

영신: 네...(전화를 끊는다)

지원: 엄마, 뭐라셔?

영신: 응, 가자.

지원은 언듯 이해가 되지안다가 설마하는 생각이 확신이 됐다.

지원: 엄마...

영신은 충격을 받은듯이 비틀거렸으나 바로서기위해 노력한다.

지원: (자지러지듯) 아, 안돼!...어... 엄마... 아빠...

영신은 입술을 깨물어가며 견디고 있다.

지원: 엄마. 이제 어떡해. 이제 아빠를 어디서 봐야해. 아빠 불쌍해서 어떡새 아직 그 잘못을 용서받지도 못했는데.... 아빠...

조명 페이드 아웃
독백이 시작되면 잠시후 서서히 배경음향 IN

정수: (목소리)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렇게 보내줘서 뭐라 고맙다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미리 써두는것이기는 하오만 당신을 믿고 있소..... 당신이 좋았소. 난 행복했던 사람이오. 조금 일찍 간다고 가여이 여기지는 마시오.... 고운당신, 착한 지원이, 좋은 친구들, 미더웠던 동료들, 나를 위해 장어를 사러다니던 포장마차 주인. 모두 사람 냄새가 났던 좋은 사람들이오..... 지원이를 잘 길러주시오.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말이오. 사람냄새가 그리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오, 메마른 이 세상. 우린 사람으로 남읍시다..... 당신과 지원이가 사람냄새를 그리워할까 염려되오. 그러나 둘러보면 많이 있을 거요. 그래서 나는 이제 마음놓고 눈을 감을까하오..... 저승이나 다음생이 있다면 당신을 또 만나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사람냄새가 그리우면 또 만납시다...... 정말 사랑했소.....
추신: 이건 지원이에게 배운거요.... 지원이에게 난 처음부터 그게 사랑이란걸 알았다고 전해 주시오........그럼 안녕.

음향 강해지다가 서서히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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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영순 | 작성시간 11.03.17 퍼가요~ 잘 읽겠습니다.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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