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오의 삶과 강인한 · 유재영의 시
강 경 호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회화는 신앙고백의 예술이다. 대학시절 화집을 통해 만난 루오의 작품들은 기존의 성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화였다. 중세시대 성당의 벽화를 통해 성화의 세계를 알게 된 나의 상상력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면은 거칠고 섬세하지가 않았다. 검은 띠를 두른 인물이나 풍경들은 대부분 어두웠다. 그리고 거룩한 성서의 풍경이 아니라 창녀, 어릿광대, 재판관 등으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종교적인 것과는 먼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림이 전해주는 정서와 메시지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그 반향이 큰 것이었다.
루오의 그림은 특정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어 종교화로 규정할 수 있지만, 나는 그의 그림이 그것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낀다. 두껍게 칠한 물감, 투박한 붓질, 검은 띠를 두른 사물, 때로는 형태가 많이 파괴된 형상, 특히 붉은색 계통과 푸른색 계통의 보색의 충돌이 빚어내는 신비스러움은 왠지 모르게 죄의 허물을 벗고 싶고, 참된 인간의 길을 가고 싶어 착해지고 싶은, 맑은 영혼으로 염원하고 싶은 존재의 소망이 루오의 그림 속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독교라는 종교를 떠나 착한 인간의 본성을 깨우는 힘이 있다. 루오의 그림을 보면 마구 울고 싶어진다. 그 울음은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울음으로 세례 받은 것처럼 깨끗해져서,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다.
나는 그의 화집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때 가지고 있던 그의 화집을 잃어버려 최근에 사방을 수소문해서 1970년대에 발간된 금성출판사의 12권짜리 화집을 다시 구했다. 당시에는 매우 고급스러운 책이었지만 인쇄상태가 오늘날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의 감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훗날 내가 시인이 되어 기독신앙과 시(詩)와의 간극에서 몹시 갈등을 할 때도 루오의 그림은 나에게 신앙과 문학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매력 있는 루오는 삶과 예술에 대해 시인들이 관심을 갖고 시로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루오는 지난 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 땅에 떨어진 기독신앙을 일으켜 세우려 몸부림치며 신앙 고백하듯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인 창녀와 어릿광대의 삶에 연민을 보내고, 피고인들보다 높은 곳에 앉아 언제나 벌을 내려주기만 하는 재판관들을 조소하며 풍자한 그림을 그리는 성자였다. 루오는 성실한 삶을 바탕으로 간절하게 인류의 원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른 예수를 내세워 인류의 구원을 염원했다. 이러한 루오의 성품은 신실한 카톨릭 집안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루오, <거룩한 얼굴> 1946년 작품.
루오는 1871년 5월 27일 파리의 빌레트가에 있는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구제조사이며 피아노 끝손질을 하는 기술자였고, 할아버지는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자였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모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할아버지는 도미에, 쿠르베, 마네의 복제판 그림을 수집하는 열렬한 미술애호가여서 할아버지를 따라 세느강변의 그림가게를 다녔다.
어린 루오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프로테스탄트 학교에 보내졌다. 그것은 루오의 아버지가 신봉하던 사제 라므네가 『어느 신자의 말』이라는 책에서 부자들의 대저택에 선전포고를 하며 교황청과 갈등을 유발하여 파문 당하자 루오의 아버지는 정의감과 신앙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아들 루오를 개신교학교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루오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체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루오의 아버지는 루오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열네 살 때 루오는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자인 할아버지의 도제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옛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도제로 일하면서 루오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주는 종교적 정서를 깊이 각인하게 된다. 그때 배운 손기술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된 유리창의 아름다운 색채에 대한 사랑이 눈을 떴으며, 이 사랑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이를테면 할아버지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을 배우던 시간들이 화가 루오의 훌륭한 미술교육기간이었던 것이다.
루오는 할아버지 밑에서 하나의 기술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유로운 예술세계에 대한 끼가 자라고 있었다. 스무 살 때 에콜 데 보자르라는 미술학교에 입학해 구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에게 사사했다. 모로는 신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몽환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우러나왔다. 이 상상의 세계는 현실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루오는 스승 모로의 작품들을 사랑했으며 훌륭하게 여겼다. 모로는 영민하고 싹수가 보이는 제자 루오에게 차이를 알아보는 법과 유행을 좇아가기보다는 옛 거장들에 열성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훗날 근대미술의 거장들이 될 마티스, 브라크, 마르케 등과 스승인 모로 밑에서 재능을 키워가고 있었다. 모로는 루오에게 “자네는 지극히 검소한 예술, 그 본질상 종교적인 예술을 사랑하는군”이라고 예언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모로의 미술과 가혹할 정도로 간결한 루오의 미술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모로가 죽은 뒤 루오는 모로미술관의 초대 관장이 되었다.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루오는 고독했다. 한동안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을 품었다. 화창한 봄날이면 새벽 다섯 시에 센 강변 다리 아래로 갔다. 거기에서 웃옷을 벗은 부두 노동자들이 화물선에서 짐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극심한 정신적 위기를 맞으며 루오는 절망에 맞서 싸우며 공포를 견뎌야 했고 실존의 가혹함을 피부로 느꼈다. 내적 불안은 악마 같은 무감각으로 커졌다.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 무감각은 현대의 종교적 인간이 견뎌내야 하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러다가 거룩한 체험을 하였다. 섬광 혹은 은총의 빗줄기가 루오에게 내렸다. 이후 루오의 눈은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던 사물들이 의미 있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루오에게 새로운 실존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시민계급에게 그리스도교는 그저 이름뿐인 부패한 종교였다. 신자들에게 미사참례는 습관일 뿐이었다. 루오는 세상 물정에 밝고 겉모습이 화려한 바로크 그리스도교에서 갱생하여 잔혹할 정도로 진지한 ‘지하 납골당 그리스도교’로 되돌아갔다.
은총의 빛줄기 세례를 받은 후 루오는 세상을 올바르게 보게 된다.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고, 남루한 옷을 입고 초라한 집에서 연명하는 늙은 여인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어스름한 저녁에 먹을 만한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등 파리라는 대도시의 현실과 밤과 가난, 두려움과 음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 실존의 가혹한 슬픔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루오는 한때 야수파 화가들과 만나면서 단순화된 구성과 색채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야수파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이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시류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끊어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 둥지를 튼 우울과 고독과의 싸움뿐이었다. 그러던 중 베르사유의 콜베르거리를 걷다가 사창가의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창녀 몇 명을 보게 된다. 몸을 파는 여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루오는 창녀의 서 있는 모습, 여러 측면에서의 창녀의 모습, 뚱뚱한 몸, 여윈 몸을 그렸다. 벌거벗은 몸에 까만 스타킹만 신은 창녀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만지고 있는 창녀, 손님을 기다리는 창녀를 그렸다. 루오는 창녀들을 추하거나 음탕하게 그리지 않았다. 그녀들이 견뎌내야 했던 온갖 가혹한 체험을 그림으로 이야기하는데 몰두했다.
루오는 창녀의 그림을 통해 “너희가 어떻게 했기에 너희 이웃이 이렇게 되었느냐?”는 질책을 한 것이다. 이름뿐인 그리스도교가 드러내는 잔인함과 경직성에 항거하는 메시지가 투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오가 그린 창녀들의 얼굴은 슬프다. 창녀들이 견뎌야 했던 영혼과 육체의 비참함이 깃들어 있다. 창녀들을 그리스도교 사회의 희생 제물로 보았던 것이다.
루오는 법원 사무관으로 일하는 친구의 초청으로 법정에서 재판과정을 지켜본 일이 있다. 루오는 법정에서 본 장면들이 사창가의 창녀들의 모습을 본 것처럼 충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1908년에 「재판관들」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된다. 그는 법정에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피고인보다 높은 자리에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을 주목한다. 그리고 재판관을 정의의 거짓된 대변자로 묘사한다. 법복을 입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재판관을 그렸다.
루오는 소년시절 서커스공연을 구경한 적이 있다. 그때 받은 인상이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줄타기하는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공연을 두려움으로 바라본 모습이 훗날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낮고 소외되고 가엾은 창녀들의 실존과 어릿광대들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앉아있는 광대, 서있는 광대, 말 타는 광대, 줄 타는 광대 등을 연달아 그렸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서도 내면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어릿광대들의 슬픔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안 루오는 어릿광대의 내면에 깃든 우울과 슬픔을 그림으로 드러낸다. 이는 어릿광대가 삶의 희생자이며 측은히 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루오에게 어릿광대는 이웃으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며 천국의 도시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여겨졌다. 어릿광대를 그림으로써 루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이는 종교적인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예수의 얼굴 표정과 똑같은 어릿광대의 얼굴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어릿광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기도 한다. 스스로를 어릿광대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제레레>, 루오의 연작 판화집에서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기에 『미제레레』라는 판화집을 구상한다. 판화가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이 작품집엔 거의 모든 주제가 채택되어 있는데 용기 있게 사고하는 그리스도인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집은 1914년부터 10여년 동안 제작한 것들로 판화집 이름은 라틴어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의 온 영혼이 투사된 것으로 「전쟁은 세상의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것」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 「삶은 가혹한 노동」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는 치유받았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베로니카의 수건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나다」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계대전의 잔학성과 신앙을 통한 구원의 염원을 이 판화집에 담아냈다.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술은 예술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는 성화 화가들이 항상 염두에 두었던 한 가지 진리다”라는 확신을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빛나는 종교화를 그려낸 루오의 삶과 예술은 시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많은 미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관심을 갖고 시로 형상화 시켜 온 강인한 시인은 「루오, 1948년 11월 5일」을 발표했다. 그리고 유재영 시인은 「이사벨을 기다리며」를 자신의 언어로 형상화시켰다. 이들 두 작품의 공통된 점은 루오의 특정 작품에 대한 관심보다는 루오의 삶과 관련하여 시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이들 두 시인의 작품 모두 특정한 날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는데, 강인한 시인의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듯 ‘1948년 11월 5일’이며 유재영 시인의 작품은 ‘1958년 2월 12일’이다.
머리가 언제부터 벗겨졌는지 몰라
백색 중절모를 눌러쓴 그가 벽난로 속에
집어던진다 던지고 또 던진다
필생의 누추한 허물이며 칠 벗겨진 명예를
불쌍히 여기소서
배가 고프다고 시뻘겋게 소리치는 아궁이
그 속에 먹이를 던지고 또 던진다
은제 십자가를 닦다가 해진 마른걸레 같은 것들
활활 타오르는 저 검은 아궁이는 배가 고프다
작업을, 앞으로 남은 짧은 햇빛으로는
도저히 끝마칠 수 없는
미완의 작품을 이렇게 포기하느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백… 이백… 삼백 점을 넘어서도
일흔 일곱의 노인은
쌓아둔 오랜 증오를 헐어내듯
페인트와 기름 냄새 밴 캔버스 쪼가리들
그 미련을 미련 없이 불구덩이 속에
조르주 루오는 처넣고 있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벚나무 갈색 이파리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날려서 떨어지는 늦가을 저녁
검정 테를 두른 높다란 십자가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수염 텁수룩한 사내 하나가
서쪽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강인한, 「루오, 1948년 11월 5일」 전문
1948년 루오는 볼라르라는 화상의 유족들을 상대로 작품을 되찾는 반환청구소송을 냈다. 루오가 소송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볼라르가 가져간 그림들 중에는 대부분 미완성작이기 때문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오는 1913년에 화상인 볼라르와 전속계약을 하였다. 보잘 것 없는 액수이지만 정기적으로 돈을 받는 대신 그의 전 작품을 볼라르에게 넘긴다는 내용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작품완성에 평생이 걸려도 좋다는 조건도 들어있었다. 루오는 볼라르가 특정한 작품을 그리라고 재촉해 놓고 나중에 그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기를 반복하자 여러 번 불평을 하였다. 수년 후 볼라르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상속자들이 그의 그림들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자 루오는 상속자들에게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오랜 소송 끝에 상속자들은 루오의 미완성작들을 루오에게 반환해야 했다. 루오가 되찾은 작품은 805점으로 119점은 돌아오지 못했다. 1948년 11월 5일, 루오는 집달리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림을 불태웠다. 자신의 이름을 지키려 애쓴 예술가의 고집과 집념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말년의 조르주 루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초유의 예술작품 소각사건이 정서적으로 민첩하고 섬세한 강인한 시인의 눈길에 들어왔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루오, 1948년 11월 5일」이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루오의 모습과 성격, 그리고 예술가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3인칭으로 쓴 이 작품은 화자가 루오의 1948년 11월 5일을 서술하는 형식이다. “머리가 언제부터 벗겨졌는지 몰라/백색 중절모를 눌러쓴 그가 벽난로 속에” 그림을 집어던진다. 그날 불태운 작품은 315점이다. 정열을 바쳐 오랜 시간에 투자됐을 작품을 불 속에 처넣었다. “필생의 누추한 허물이며 칠 벗겨진 명예를” 불 속에 처넣는 루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미완성작엔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119점은 볼라르의 유족들이 몰래 서명을 해 팔아먹어 버렸으니 루오의 심정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마치 도공이 맘에 들지 않는 그릇을 깨는 허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불쌍히 여기소서” 또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시행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3인칭으로 쓴 작품이지만 이 대목만은 루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화자가 1인칭으로 대변하여 외친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루오의 「미제레레」에서 따온 말로 루오가 10년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판화집 이름이기도 하다. 그림들이 활활 타는 아궁이의 모습이 마치 “배가 고프다고 시뻘겋게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시인은 루오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신앙 고백하듯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시인은 일부로 가톨릭 정서를 환기시키기 위해 “은제 십자가”와 “높다란 십자가에서” 예수로 은유화한 “수염 텁수룩한 사내”를 시행에 배치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0년 후에 세상을 뜬 이 노화가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의식하며 수많은 미완의 작품을 이 세상에 남기지 않겠노라는 결의로 작품들을 불태웠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앞으로 남은 짧은 햇빛으로는/도저히 끝마칠 수 없는/미완의 작품을 이렇게 포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루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엄격함으로 그림을 그리자마자 빼앗듯이 가져간 볼라르에 대한 “쌓아둔 오랜 증오를 헐어내듯/페인트와 기름 냄새 밴 캔버스 쪼가리들”을 “미련을 미련 없이 불구덩이 속에” “처넣고 있었”던 것이다. 11월 5일, “벚나무 갈색 이파리들이 손바닥을 비비며/날려서 떨어지는 늦가을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루오의 연작 <수난> 중에서 '무게도 없이 부피도 없이 그는 간다'
일찍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운 루오의 그림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할 수 있듯 그림 속의 형상에 검은 띠가 둘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검정 테를 두른 높다란 십자가”라고 그림 속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형상화하고 있다. “수염 텁수룩한 사내 하나가” “슬그머니 내려와” “서쪽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기 위해 복음처럼 성화를 그려낸 루오의 일생에서 그림을 불태운 행위를 통해 그의 예술의 진정성이 더욱 심화되기를 염원한다는 화자의 생각이 깃들어 있는 대목이다.
강인한 시인의 「루오, 1948년 11월 5일」은 자신의 예술에 대해 완결성의 집념을 보여준 루오의 정신을 통해 쉽게 작품을 발표하는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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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시인의 「이사벨을 기다리며」는 루오가 자신의 그림들을 불태운 지 10년이 지난 1958년 2월 12일 파리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루오는 그 다음날인 1958년 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붉은 포도주 그리고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오지 않는 이사벨을 기다리며
두 개의 컵에는
두 개의 입술이 잠겨 있다
南佛行
기차 정거장
벗어 놓은 허물처럼
그동안 세상의 문을 열고 닫았던
손때 묻은 열쇠와 작별하고
어디론가 서둘러
먼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다
마지막 저녁별이
아름다운
갸르 드 리옹(Gare de Lyon)
조선 매화 한 가지,
조선 하늘 한 장,
목이 긴 눈먼 새,
기념하듯
캔버스에 그려진
고요한 정물
아틀리에 류 뒤또
1958년 2월 12일
-유재영, 「이사벨을 기다리며」 전문
유재영 시인이 이 작품을 쓰기까지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1970년대에 유재영 시인이 종로5가에서 리어카꾼에게서 책을 2권 입수하게 된다. 한 권은 김기림의 『詩論』이고 또 한 권은 김향안의 『巴里』라는 수필집이다. 알다시피 김향안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부인이다. 본래는 시인 이상의 부인으로 서양화가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동생으로 본명이 변동림이다. 『巴里』라는 수필집은 김향안이 김환기와 유럽생활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쓴 수필집으로 50여년 전에 발간되었다. 그런데 그 수필집엔 김환기가 직접 오일펜으로 그린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환기는 붉은 포도주가 든 잔 2개와 열쇠 2개, 조선백자와 매화, 하늘을 나는 새 등을 그린 그림들을 아내의 수필집 삽화로 그렸다.
그런데 김환기가(家)와 화가 조르주 루오의 딸 이사벨은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1958년 2월 12일, 수녀인 이사벨이 김향안을 만났는데 다음 날 이사벨의 아버지 조르주 루오가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 시인의 상상력이 버무려진 것이 유재영 시인의 「이사벨을 기다리며」이다.
루오가 죽음 앞두고 수녀로 살고 있는 딸 이사벨에 대한 그리움으로 딸을 만나게 되면 “붉은 포도주”를 마시는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을 들었을 것이라고 화자는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사벨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루오는 “갸르 드 리옹”에서 “南佛行/기차 정거장”으로 간다.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 어찌할지라도 텍스트를 통해 독자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남프랑스의 어느 수녀원에 있는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기차 정거장에 나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살았던 이승을 떠나가고자 기차정거장에 나섰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리옹의 기차정거장에서 “벗어 놓은 허물처럼/그동안 세상의 문을 열고 닫았던/손때 묻은 열쇠와 작별하고/어디론가 서둘러/먼 여행을” 루오가 떠날 때,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낸 그의 생이 아름다워 그가 바라보는 지상의 “마지막 저녁별이/아름”답다.
후일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되었을 김환기는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조선 매화 한 가지,/조선 하늘 한 장,/목이 긴 눈먼 새,”로 그렸듯, 아내 김향안이 펴내는 수필집 『巴里』에 매화와 새를 그린다. 루오가 이승을 떠날 때 이사벨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이 마치 김환기가 “조선 매화 한 가지,/조선 하늘 한 장,/목이 긴 눈먼 새,”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시인은 상상한 것이다. 이 작품은 김환기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조국과 고향에 관한 이미지가 갖는 그리움의 깊이를 루오가 사랑하는 딸 이사벨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같음을 시인은 묘파하고 있는 것이다.
유재영의 「이사벨을 기다리며」는 루오의 특정 작품을 형상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수녀였던 딸을 바라보는 화가 루오의 심정을 그린 것이다.
조르주 루오, <聖女 베로니카> 1945년 무렵 작품
루오의 작품 중에 「베로니카」는 이사벨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딸의 인상을 그림으로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가톨릭 전통을 잇고 있는 루오 집안에서 성장한 이사벨이 수녀가 된 것에서 루오는 그의 그림 속에서 등장하는 「베로니카」를 그리면서 딸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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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 문학평론집『휴머니즘 구원의 미학』, 미술평론집『영혼의 형식』『미술과 문학의 만남』. 현재 계간 《시와사람》발행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