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시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1970년,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부 선생님께서 보여준 그림 한 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그림은 채색화가 아니라 흑백그림이었다. 소와 말이 울부짖고 목이 떨어진 사람, 짓밟힌 사람, 죽은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여인의 모습이 처참한 인물이 그려진 내용의 그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멋진 인물이 그려진 고전적인 그림밖에 몰랐다. 그런데 초상집 같은 흑백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내용의 그림을 보자 나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이 그림의 이름은 「게르니카」였다. 게르니카가 스페인 바스크라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의 이름이란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1937년, 스페인 내란 때 프랑코 장군을 지지하는 독일 나치가 비행기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살육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통해 나는 지금껏 알고 있던 그림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켜 예술의 사회성에 대해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1951년)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3년에 사망했다. 우리 나이로 여든세 해 동안 살았으니 장수했다. 오랫동안 세상에서 산 것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재능 또한 장수한 화가였다. 그의 예술적 에너지는 어느 예술가에게 뒤지지 않는 왕성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그 예술적 생명력은 당대의 모든 예술이론을 불신하는 데에서 나왔다.
주지하다시피 피카소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재화가이다. 마치 그림을 위해 태어난 예술가 같았다. 14세 때 바로셀로나의 미술학교를 너무 어려 받아줄 수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 호세의 고집에 의해 입학시험을 치뤘다. 한 달간 시간을 주어 제출하도록 한 입학시험 과제를 하룻만에 완성하여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의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도 하룻만에 데생을 제출하여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재능을 일찍 발견한 화가였던 피카소의 아버지 호세는 화가의 길을 버리고 아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피카소는 청색시대, 장밋빛 시대를 거쳐 1907년 입체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마치 급행열차처럼 세계회화의 들판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관념과 인식의 세계를 전복시켰다.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전통의 숲을 가로지르고, 회화는 물론 조각, 그래픽, 연극, 도예, 그리고 시 문학까지 닥치는 대로 새로운 언어를 변주했다. 인류 역사가 낳은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에 대해서도 자신의 조형언어로 새롭게 채색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피카소는 기존의 예술에 대해 따분해 하고 지루해 하며 20세기 인류의 미술사를 거침없이 써냈던 것이다.
게르니카(1937년)
피카소는 단순히 조형언어의 새로움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통해 죽은 누이와 친구, 곡예사에 대한 연민, 가족과 연인에 대한 따스함, 그리고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특히 피카소에게 자유는 생명, 그 자체만큼 본질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자유는 물론 만인의 자유에 대해 엄청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 내전으로 조국 스페인 동포의 자유가 위협 받을 때 「게르니카」를 그려 파시즘에 저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이 들끓었다. 특히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를 사랑해 아폴리네르, 알프레드 자리, 샤를 빌드락, 피에르 막오를랑, 막스 자코브 등 시인들과 그의 집이거나 술집에 모여 그림이야기를 하거나 시낭송을 하기도 하였다. 피카소는 노트에다 글을 써 나갔는데, 인기척 소리만 나도 얼른 쓰던 것을 숨기곤 하다가 나중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기도 하였다.
피카소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35년부터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자 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그러더구나. 네가 글을 쓴다고 말이야. 나는 네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단다. 어느 날 네가 미사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난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을게다.” 쉰네 살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했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시는 1959년까지 그가 시를 썼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가 시를 집중적으로 썼던 시기는 예술적으로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아내 올가와 결별할 무렵이었다. 사교적이고 화려한 생활을 접고 작업의뢰를 받지 않으며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이 무렵 피카소는 시쓰기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시인 피카소는 350여 편으로 시와 세편의 희극을 남겼는데, 화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 했다.
그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는데 때로는 두 가지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장시(長時)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쓴 것이 많고 실험 언어로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피카소의 시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탐탁찮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우선 그의 시는 난해하였으므로 다양한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화가로서는 이미 대가로써 누구든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켠에서는 그의 명성만큼 시를 과대평가가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이 안 되는 시에 대해 “이런 것도 시인가?”하는 조소도 보냈던 것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시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화가라는 틀은 내게 너무 작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그저 화가로 알아줄 뿐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 말 속에는 그림에만 몰두하기에는 그의 예술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것과 그의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포되어있다.
그의 시속에는 그가 화가라는 것이 여실히 녹아있다. 즉 페이지의 구성이나 소재, 매체의 선택에 화가적인 특성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시상이 떠오르면 신문 귀퉁이나 봉투, 메모지 등에 기록했다가 종이에 옮겨 적는 경우가 많았다. 또 썼다가 지운 초고, 가지런히 정성껏 작업한 원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미로 같은 원고, 원고에서 그의 버릇을 알 수 있어 재미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통해 시인 피카소의 면모를 살펴보자.
끝과 끝을 맞추어 선 슬픔으로 죽은 시체들 튀김가루가 자신의 블라우스를 망가뜨리며 치즈의 제단 앞에 지나치게 격식을 차려 인사한다 단추들에게 그녀의 생각들을 털어놓으면서 지휘관의 딸이 경례대신 망가진 못 수프를 담금질하며 돌돌 말린 독사의 똬리를 푼다
포도주 메뉴가 다른 곳에 목매달아 죽으러 가라는 장난으로 하는 통고를 받으리라는 위험을 느끼고 발끝으로 일어선다 그리고 풍경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어도 밤의 이빨들 위에 구워져 가는 축제에 활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입 안에는 에클레르 맛이 그리고 죽어가는 염소의 눈에서 펄럭이는 국기의 손가락들 끝에서 나는 겨드랑이 냄새 뒤집어진 손톱들 얇디얇은 종잇조각이 땅바닥 위에 펼쳐진 석쇠 끝에서 그의 노래를 다시 반복한다 관리인 초소에 붙은 사형 집행 말뚝 뒤에 겹쳐진 손들 그러나 트루레투들과 멀리서 들려오는 빵 플루트 소리와 레 라 오 라여 얼간이 중의 얼간이 돌차기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열쇠구멍에 달라붙은 새들의 절망적인 외침들 이 얼마나 참혹한가 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뼛속에 파고드는 무서운 추위와 거기 진동하는 이 혐오스런 냄새여 어개를 찢는 칼의 유리를 생생하게 느끼면서 알로에의 맛이 그의 귀에 대고 몸을 뒤집으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병영의 문에 걸어놓은 백합들의 회랑의 대나무 줄기들에 찢긴 그의 인형의 웃음소리들 대단한 선물 대단한 거짓말은 향연에 참가하지 않고 파도들 위에 펼쳐진 침대보들에 못 박힌 발코니에 걸어놓은 줄에서 추는 춤들과 사랑에 열린 그의 목 안에 와인의 환희의 불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배는 너울대는 화염 위에 쌓이는 눈송이들에 붙은 파랑의 심연에 매달린 공포에 덜덜 떨며 도착 하는구나 그리고 담비와 자고새 새끼의 빈 새장과 줄사다리와 담배들에서 떨어지는 재와 마늘이 잔뜩 든 모르타르가 기름이 엮여서 횃불로 합쳐져 불태울 것이다 기묘한 주연 밤이 조각을 내는 기묘한 축제 그네 권태 꽃 줄 장식의 권태 그리고 자바 섬 사람의 점잖지 못한 애무들은 그녀의 실크 스타킹들 속에 찢어진 고통의 깊이를 결코 메우지 못할 것이다 고요도 시간도 모든 욕망들도 찌꺼기들도 모든 잎들의 떨림의 빛들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피카소의 시 「1937년 7월 12일」 전문
피카소의 시를 수없이 읽어도 독자들은 결코 그 의미를 모두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피카소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과 규칙들을 거부하고, 언어라는 새로운 재료를 그림에서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의 발상과 과정을 알 수 있는 단서로 「1935년 10월 28일」에서 “만일 내가 어떤 언어로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된 ‘개가 숲 속에서 산토끼를 쫓고 있다’라는 문장을 다른 언어로 옮겨야 한다면 ‘모래 속에 네 다리를 단단히 박은 흰 나무 테이블이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움을 못 이겨 빈사 상태에 빠졌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 쓰는 일은 원래 언어가 뜻하는 이미지와 의미를 오롯하게 옮기고 싶다면 형태뿐만 아니라 내용까지도 전혀 다르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와 이미지로 변용이 되어 전혀 낯선 문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프랑코 총통의 망상과 거짓(1937년)
그의 시는 그의 삶과 그림 세계를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써졌는지를 분석하는 전기적인 비평이나 시대 상황을 드러내는 역사주의적 관점으로는 들여다보기 힘들다. 오직 텍스트만을 놓고 분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7월 12일」에 쓴 이 작품은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그의 작품처럼 제목이 없다. 작품을 쓴 날짜만 있을 뿐이다. 아니, 시간의 연속성을 알 수 있도록 작품을 쓸 날짜를 제목으로 병용하였다. 그러므로 작품을 들여다보기가 더욱 힘들다.
산문 형식의 이 작품에서 특정한 문장들을 추출해보면 나름대로의 시의 의미가 모아진다.
“끝과 끝을 맞추어선 슬픔으로 죽은 시체들”
“지휘관의 딸이 경례대신 망가진 못 수프를 담금질하며 돌돌 말린 독사의 똬리를 푼다”
“포도주 메뉴가 다른 곳에 목매달아 죽으러 가라”
“밤의 이빨들 위에 구워져가는 축제”
“죽어가는 염소의 눈에서 펄럭이는 국기”
“관리인 초소에 붙은 사형 집행 말뚝 위에 겹쳐진 손들”
“열쇠구멍에 달라붙은 새들의 절망적인 외침들”
“이 얼마나 참혹한가 이 얼마나 비참한가”
“뼛속을 파고드는 무서운 추위와 거기 진동하는 이 혐오스런 냄새여”
“어깨를 찢는 칼의 유리”
“병영의 문에 걸어놓은 백합들의 회랑의 대나무 줄기들에 찢긴 인형의 웃음소리”
“화염 위에 쌓이는 눈송이들”
“기묘한 주연 밤이 조각을 내는 기묘한 축제”
“그녀의 실크스타킹들 속에 찢어진 고통의 깊이”
“모든 잎들의 떨림의 빛들을 드러내지 못할 것”
「1937년 7월 12일」에서 추출한 문장들은 어떤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시체” “군인” “못 수프” “독사” “목매달아” “죽어가는” “초소” “사형집행” “절망적인 외침” “참혹” “비참” “무서운 추위” “어깨를 찢는 칼의 유리” “화염” “공포” “고통의 깊이”의 시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속의 정황과 정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긍정적이지 못한 폭력적 상황이며 비극적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이 상황을 재구성하면,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누군가 인사한다. 그리고 지휘관의 딸이 먹을 수 없는 못 수프를 담금질 하고 있다. 또 누군가가 목매달아 죽으라고 통보를 받으리라는 위험을 느끼고 있다. 또한 누군가의 죽어가고 있고, 사형집행 말뚝 뒤에 사형 당한 사람들의 손이 겹쳐져 있다. 누군가 절망적인 외침이 있고, 뼛속에 파고드는 무서운 추위와 거기에서 진동하는 혐오스러운 냄새가 있다. 그리고 어깨를 찢는 칼의 유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으며, 대나무 줄기에 찢긴 인형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작은 배는 눈송이에 매달려 공포에 떨며 도착한다. 그리고 실크스타킹 속에 찢어진 고통을 느끼며 모든 욕망들이 모든 잎들의 떨림의 빛들은 드러내지 못할 그런 상황이다. 구체적인 서사를 완벽하게 재구성 할 수는 없지만 파편처럼 툭툭 던져진 문장에서 사람들이 죽고 상처를 입으며, 공포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잠자는 농부들(1919년)
작품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요소를 끌어들인다면 아마도 시가 써진 시대적 상황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를 쓸 무렵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막 그려냈기 때문이다. 프랑코가 독일 나치를 끌어들여 ‘게르니카’의 양민들을 대량 학살한 1937년 4월 27일의 비극을 피카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 그림을 그려 전 세계에 나치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달 이상 스케치를 하고 예비 작을 그린 후에 완성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일련의 우의적인 인물들이 이 사건의 공포를 암시하도록 그렸다. 죄 없는 민간인 희생자를 상징하는 소와 상처 입은 말, 목이 베인 용사, 죽은 아이를 몸에 품은 어머니의 울부짖음 등이 그것이다. 색채를 거의 흑백 톤으로 하여 잔혹한 폭력성과 슬픔을 강조하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프랑스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되었을 때 미셀레리는 “피카소가 우리에게 우리의 부고를 보내왔다.”고 할 정도였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고통을 그려낸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들라크루아의 「키오의 학살」 이후 그 어떤 작품도 동시대 사건의 드라마를 이와 같은 보편적 표현으로 완성하지 못했을 정도로 전쟁을 표현한 20세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무렵 피카소는 「프랑코의 망상과 거짓」이라는 판화를 그려 독재자 프랑코에 대한 거부와 도덕적, 지성적 비열함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판화와 함께 “어린이들의 외침, 부녀자의 외침, 새들의 외침, 기둥과 돌들의 외침, 별들의 외침, 침대와 의자와 커튼과 항아리의 외침”이라는 고발의 글을 실어 인간애에 대한 뜨거움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1937년 7월 12일」에 쓴 위의 시는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를 폭격한 것과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나치의 비이성적인 폭력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찢어진 고통의 깊이를 결코 메우지 못할 것이다”는 피카소의 진술처럼 게르니카와 스페인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피카소의 난해한 시 속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물들의 등장으로 그의 시가 더욱 난해해 진다. 위의 작품에서도 “튀김가루”, “단추”, “치즈”, “포도주 메뉴”, “염소”, “백합”이 그것들이다. 이 사물들 자리에 “사람”을 끼워 넣으면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며 어느 정도 소통도 가능해 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 피카소는 “나는 그림 안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넣는다. 사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기들끼리 자리를 잡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존의 시 형식을 탈피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피카소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의 작품에서도 그랬듯 모든 작품에서 쉼표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쉼표를 찍을 겨를도 없이 연결에 연결을 거듭하는 그의 비정형적인 시를 읽게 되면 호흡과 일치하는 리듬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비교적 긴 시인 산문시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에게 운문형식의 작품도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 그가 고민한 것은 의미와 상관없이 언어가 만들어내는 멜로디에 치중한 점일 것이다.
춤(1925년)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그가 화가라는 점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일종의 “변주 시”라고 할 수 있는 방대한 숫자의 시 안에 나타난다. 다양한 실험을 했던 그림 작업과 특이한 양식으로 여러 차례 되풀이된 단어와 문장을 조합하는 유희에 몰두한 피카소는 같은 낱말과 문장을 다양하게 배치하였다.
이러한 피카소를 폴 발레리는 “그는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조합할 수 있다는 원리에 입각한 아주 오래된 시적 본능에 충실했다”고 평가하였다.
피카소의 시작품 중에는 조형적인 조합방법으로 꾸민 것들도 있다. 불규칙하게 변화된 여러 가지 요소들과 단어, 숫자, 음표, 특이한 용어들을 한데 묶어 시에 시각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콜라주 작품을 완성해 냈다. 콜라주는 그의 입체파 시기 그림에 적용하던 기법이기도 하다. 이런 시들을 낭독하다보면 읽는 사람은 어느 새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다.
도3레1미0파2솔8라3시7도3
도22시9라12솔5파30미6레11 1/2도1
도333시150라1/4솔17파303레1미106시33.333.333
미10시44라9솔22파43미0-95
-「1936년 5월 3일」 중에서
피카소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식의 하나는 중첩의 효과를 들 수 있다. 첫 운을 뗀 후 몇 개의 낱말과 문장을 더한 후 다시 시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요소를 덧붙여 반복한다. 그런데 의미를 연결시켜 나가는 전통적인 시의 형식이 아니라 사유가 고정된 체계가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우발적이고 자유롭게 전개되는 것이다. 즉 심상의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형식에 구애됨 없이 시상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카소는 자신의 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고치지 않고 단숨에 시를 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구성에 의해 전후연결성을 파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오류에 대해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네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구문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법칙을 근거로 한 것이네. 내가 그런 구분들을 고치기 시작한다면 나의 고유한 어조는 내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문법 속에서 빛을 잃을 걸세. 나의 시어들을 내 것이 아닌 법칙 속에 우겨 넣기보다는 나만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다네”하며 자신의 시 문장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자유로운 자신의 시 쓰기를 옹호하였다.
피카소의 시세계는 난해하지만 그러나 몇 가지 주제가 있다. 주로 스페인과 연관된 것들로 ‘투우’, ‘민속춤과 민요’, ‘토속음식과 요리’, ‘전쟁’ 등이다. 그리고 유년의 추억이나 상상이나 그림 속의 세계, 사랑과 인생, 노화, 죽음, 그리고 시간이라는 관념도 그의 시적 주제로 많이 다루었다.
그의 시는 간혹 제목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에 날짜가 제목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작품 속에도 시를 창작하는 날짜와 시간이 나올 정도로 시간에 대해 각별하고 민감하게 인식하며 사색을 했다. 어떤 작품들은 며칠에 걸쳐 완성했는지도 알 수 있게 날짜를 표기해 두었다. (예를 들어 「1936년 2월 10~12일」)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시간 속의 경험을 독자들도 따라가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예술작품을 한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이며 모든 탐구에는 논리적인 맥락이 있다. 내가 그림에 번호를 붙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 속의 경험이다. 나는 그림에 번호를 붙이고 날짜를 써 넣는다.”라는 피카소의 말처럼 그의 시 역시 시간의 경험인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천재화가 피카소는 끊임없는 자기 변신으로 지칠 줄 모르는 예술적 열정을 쏟아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 쓰기에서도 유감없이 예술혼을 불사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