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처럼 가벼웁게
-김영재의 작품에 대해
1974년 등단한 이래 거의 해마다 시집을 생산해 낸 김영재 시인은 10여권 남짓한 시집을 보더라도 왕성한 창작의욕을 갖고 작품을 써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오래된 시집 『다시 月山里에서』를 읽었을 뿐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밝지 못한 사정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읽은 기억으로는 시인의 정신적 배경의 한 중심이었던 고향이 주암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상실감, 즉 전통적 농촌사회의 관습과 전통적 신념의 상실감을 노래한 줄로 안다.
이번 작품 속에 드러난 김영재 시인의 의식 속에는 `비워있음의 충만'이 그의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 인간의 존재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했다. 삼라만상 가운데 먼지보다 작은 인간의 존재는 실로 가벼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볍기는커녕 머리가 부서지는 무거움의 연속이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삶 속에 번민과 고뇌로 가득차 있다. 보라, 시인의 서재에 가득한 수많은 책들은 인간이 얼마나 무거운 존재인가를 말하지 않는가. 식자일수록, 또는 책을 많이 읽을수록 가벼워지며 환하게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시인들이 세기말을 살면서 세상과의 불화를 드러내는 데 반해 김영재 시인은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 즉 무거움을 비우기 위해 자신을 추스리며 안으로 채찍질하는 자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참다운 인간으로 서고 싶은 그의 삶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정신세계가 무슨 `화엄'이니 하는 무겁고 거창한 것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발은 언제나 지상에 있으며, 지상의 삶 속에서 현실의 번잡스러움을 해결하고 떨쳐버리려 한다.
그곳은 개경 송악산
이렇게 맑은 날이면 몸도 따라
가겠네
밤 한 알 떨어지듯 밤하늘 별 내리듯
아이야
사람의 마음도
땅 위에 내려놓으면
강물 언
혹한의 밤도
따순 손
펼 수 있겠지
-「가을날」 중에서
이 작품은 남북으로 대치된 분단상황이 그 배경에 있다. 위의 작품의 전반부는 통일로를 지나 “임진강 어디쯤”에서 아이와 아버지가 밤을 줍는 모습이다. 개경의 송악산이 잡힐듯이 보이는 맑은 날의 풍경이 투명하게 보인다. 이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맑은 날”과 “땅 위에 내려놓은 사람의 마음”이다. 맑은 날 사람의 몸이, 마음이 송악산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땅 위에 내려놓으면 `혹한의 밤', 즉 분단의 아픔도 통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의 마음'은 `부질없는 욕망'이 아닐까. 마치 밤나무가 한햇동안 키운 밤알을 자신을 키워준 대지에 스스럼없이 돌려주는 것이 무슨 종교의식처럼 엄숙해 보인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결국 김영재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비워있음의 충만'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참을 무거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무거움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병들기도 하고 망가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그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로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 몸부림은 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리 사랑 깃털 같은
순결함이야 가벼움이야
사는 일 무거웁다
가슴 찌든 사람들
참 밝은
봄날 드높게
깃털처럼 가벼웁게
맨살로 고개 내민
봄풀의 경이로움
비비쫑 연한 노래
민들레 꽃씨에 싣고
길 찾던
어린 새 한 마리
깃털처럼 가벼웁게
-「깃털처럼 가벼웁게」 전문
김영재 시인은 위의 작품을 통해 가벼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순결함'이다. “사는 일 무거”운 사람들, 즉 “가슴 찌든 사람들”이 “참 밝은/봄날 드높게/깃털처럼 가벼웁게” 살기 위해서는 “어린 새”처럼 또는 “맨살로 고개 내민/봄풀의 경이로움”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순결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민들레 꽃씨”는 “비비쫑 연한 노래”를 전도하는 전도사이다. 비비쫑 연한 노래는 틀림없이 `사랑'이며 `희망'이며 `순결함'이다.
그런데 이제 날개짓을 막 배운 `어린 새' 한 마리가 드넓은 세상, 또는 거친 세상에 무엇인가 순결함을 전파하려고 옳고, 아름다운 길을 가려 한다. 따지고 보면 민들레 꽃씨를 통해 어린 새는 무엇인가 참다운 것을 전파하려는 전도사인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것은 봄날처럼 드높은 어떤 가벼움이다. 그 가벼움은 `사랑'이며 `순결함'으로 복잡한 인간사의 무거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김영재 시인의 따스한 마음일 것이다.
다음 작품은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로다”라고 설파한 성철스님의 법어가 생각나게 한다. 김영재 시인의 자의식이 들여다보이는 생각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봄산에 가면
뻐꾸기 운다
그리운 이름 부르며
목메어 운다
사람은 죽어 산이 되고
풀잎은 죽어 바람 되는데.
길을 버리고
잡목숲 접어든다
푸른 잎 터지는 소리 두 귀가 맑아지고
없던 길
낯선 숲길이
환한 길 보인다
허리를 낮추고
비탈을 휘어돈다
돌부리에 넘어져 이젠 더 갈 수 없다
공손한 물줄기 몇이
낮게낮게 흐른다.
산은 가득차 있고
산은 비어 있다
차고 비어 있음은
마음주기 달린 일
한 생애 번잡스러움이
나이테로 감긴다.
-「봄산」 전문
약간 길지만 전문을 인용했다. 김영재 시인의 만만치 않은 정신세계가 뿌리깊고 튼튼함을 확인할 수 있다.
첫연에서 “사람이 죽어 산이 되고/풀잎은 죽어 바람이 되는” 평범한 자연의 순리를 담담하게 말한다. 사람이 죽어 뻐꾸기가 되고 생전의 그리움 때문에 봄산을 목메게 우는 절절함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것도 인동의 아픔 뒤에 새로 살아오는 봄산에서의 일이다. 그래서 `봄산'이 상징하는 것은 `생명'이 아닌가. 새로 살아오는 봄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울음의 절절함이여.
두 번째 연에서부터 의미가 깊어진다. 시인은 “길을 버리고/잡목 숲 접어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길'은 세상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 그 길을 버리고 또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다. 그 길은 물리적인 길이 아니며 시인의 정신, 또는 마음 속의 길이 분명하다.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잡목숲은 인간 세상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푸른 잎 터지는 소리 두 귀가 맑아지고/없던 길/낯선 숲길이/환한 길”인 것이다. 실제 푸른 잎 터지는 소리가 들리겠는가마는 무엇인가를 터득한 시인의 마음은 푸른 잎 터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시인의 정신은 봄산 숲속에 와 번잡한 세상을 잊은 것이며 숲을 보며 가지고 있던 것을 한순간이나마 버린 까닭이다. 시인은 계속 숲속을 헤집고 들어가고 있다. 비탈을 휘어돌기도 하고 돌부리에 넘어져 더 갈 수가 없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공손한 물줄기 몇”이다. `공손하다'라니 물줄기더러 공손하다고 할 수 있다니. 시인의 마음은 이제 자연과 내통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잘났다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낮게낮게 흐”르는 물줄기인 것이다.
결국 시인이 봄산에 와서 깨달은 것은 수풀 우거진 산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산인 것이다. 시인의 깨달음처럼 “차고 비어 있음은/마음주기에 달린 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모두가 인간의 정신이 터득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비어있음의 충만'을 말하고 있다.
위의 「봄산」에서 김영재 시인은 결론적으로 번잡함과 욕망을 비워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는데, 그런 무잡한 삶을 위해 더 구체적인 올바른 인간의 삶을 제시하기도 한다. 다음 작품은 그 표본이 될 수 있다.
쥐똥나무가 쥐똥나무이기 위해
작은 잎을 무성히 피운다
이 세상 큰 열매 많지만
쥐똥만한 열매를 위해.
어깨를 비비고 키재기하며 크는 나무들
쥐똥보다 못한 일 흔해도 비웃지 않고
말없는 울타리 되자고
비와 바람을 맞는다
잠들어서는 안된다
다투어 깨어있는 잎들
찬란해라, 아름다워라
소리치지 않아도 큰 울림이여
-「쥐똥나무」 중에서
오늘의 세계는 내적성찰의 기회가 축소되어가고 있다. 신화도 없고 우상도 없는 시대, 우상이라야 유명한 가수나 운동선수, 또는 영화배우쯤이나 있을까 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고뇌요, 한계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의 삶을 통찰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지만 세상을 안고 흐르는 큰 물줄기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 불신과 물신주의에 의해 `나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편협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이 세상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게 하며 눈앞에 장막을 쳐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련의 작품을 통해 김영재 시인은 자신의 본분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려 하고 있다.
“이 세상 큰 열매 많지만/쥐똥만한 열매를 위해” “쥐똥나무가 쥐똥나무이기 위해/작은 잎을 무성히 피”우는 삶의 자세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 빛나는 모순이라니.
김영재 시인이 이 작품을 쓰기 위한 동기유발은 `쥐똥나무'가 아니였을까. 하찮은 쥐똥나무-열매 생긴 모양이 쥐똥같아 쥐똥나무라고 누군가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지지리도 못난 나무-는 쥐똥나무보다 더 큰 열매가 얼마든지 있지만 보잘 것 없는 열매를 맺기 위해 봄이 되어 작은 잎을 무성하게 피우는 그것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깨를 비비고 키재기하며 크는 나무들”은 비바람을 맞으며 울타리가 된다. “쥐똥보다 못한 일 흔해도 비웃지 않고” 제 할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한겨울을 보내다 봄이 되어 잎을 피우는 일은 무엇인가. 잠에서 깨어나 잠들지 않기 위해 열심히 오롯한 정신으로 눈떠 있음이다. 이 `눈떠 있음'이란 살아있음이요,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쥐똥나무는, 김영재 시인은 잠들지 않고 진정한 `살아있음'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찬란한 삶이며 아름다운 삶'이라고 김영재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평범한 삶도 참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살면 찬란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시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김영재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절제된 시의 행간 속에서 함부로 살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다음 작품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논은 쓸쓸하다
겨울보리 언 땅 녹이며,
초록봄 틔울 수 없는
버려진 사랑 초라하다
서릿발
하얗게 곤두선 봄
밟아 줄 당신은 없다.
-「논」 전문
겨울보리가 있으면 논은 언 땅을 녹일 수 있을텐데 겨울보리 없는 논은 마치 버려진 사랑처럼 초라하다. 봄이 되어도 쓸쓸한 논은 서릿발에 하얗게 곤두서 있다. 그 서릿발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 살아내면서 때로 누군가 자신의 삶에 간섭해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 마치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누군가를 찌르려고 할 때 그런 자신을 꺾어주고, 밟아주기를 바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재 시인은 이 작품에서 하얗게 서릿발로 곤두선 자신을 밟아줄 사람이 없다고 실토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논은 쓸쓸하다고 말한다. 논은 당신일 수도 있고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버려진 초라한 사랑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김영재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쓸쓸하고 초라한 인간의 모습만을 얘기한 걸까. 아니다. 이 작품의 기저에는 뜨거운 피와 노기를 다스릴 사람은 자신뿐이며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는 뜻이 내재해 있다. 깊이있게 생각해 보면 이 작품 역시 앞의 여러 작품처럼 삶에 대한 통찰과 성찰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으로 가득 차오르는 어떤 것을 쉴새없이 비워내는, 그래서 마침내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인간적 고뇌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가 없음도 보여주고 있다. 「겨울 간이역」에서 “나를 버리러 왔다가 너무 쓸쓸해/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챙겨 돌아”서기도 하였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첫사랑의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철길 같은 인생길에 잠시 내려보는 간이역에서의 추억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므로, 그렇게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고뇌는 따지고 보면 일상사의 한 부분으로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스님의 가을」에서 역시 `비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단풍잎
산을 버리고
먼
여행
떠나시네
스님은 어떠신지요
나야
뭐
가을
아닌가
-「스님의 가을」 중에서
고승의 선문답 같은 짧은 작품이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이미 어떤 가치를 잃은 것으로 파악된다. 오죽하면 “석가는 정년퇴직”했고 “예수는 명예퇴직”했다고 얘기했을까. 그러나 가을이 되어 제 육신의 한 부분인 단풍잎을 미련없이 버리는 나무에 그의 시선이 멎는다. 사실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의 아픔은 어떤 것일까. 이 세상에 자신의 몸 한 부분을 떼어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 하나를 줄 수 있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 시대는 나무와 같은 참다운 용기,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영재 시인은 언젠가 그런 단풍잎 같은 고승을 만난 것일까. 가을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의 소망은 가을 같은, 단풍잎 같은, 무엇인가를 선뜻 줄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을 비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일 게다.
두서없이 살펴본 김영재 시인의 소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절제되고 헤프지 않은 그의 작품 속에서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의 메시지는 작은 구원을 줄 수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처럼 `깃털처럼 가벼웁게' 자신의 뼈마저 가볍게 비운다면 아마 구름이 되고 별이 되고 마침내 우주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