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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희

26년 6월 20일 조선일보 기고문 "호흡"

작성자예종희|작성시간26.06.13|조회수46 목록 댓글 0

지금도 김영삼 대통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억양과 엉뚱한 장면이 있다. 사건의 맥락과 배경은 모르지만 아마도 당 대표였던 시절 단식하는 의원을 방문해서 했던 말. "마 단식하면 마.. 학실히 죽는다." 그때 김영삼의 단식장 방문으로 약간 안도하며 웃음까지 지었던 단식하는 국회의원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지던 TV 뉴스 장면이 나에게는 지금도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근데 사람이 학실히 죽는데, 단식하는 방법밖에 없을까? 스스로 광합성을 하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예외겠지만 대부분은 움직여야 살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에너지를 획득하고 몸을 유지보수를 하며 관리해야 한다. 잠자는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필요 없는 것은 끊임없이 배출하는 정기적인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이런 평등함에 취해 확대해석한 나머지 힘센 상대방에게 대들다가 확실하게 제거된 많은 사례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여러 측면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보면 우리는 대부분 불평등하다. 그저 생물학적인 면에서 평등한 것이다. 즉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학실하게 평등하다. 그럼 어떤 조건들이 우리를 평등으로 인도하는지 조금 더 살펴보자. 

외부 획득 에너지를 카테고리별로 묶으면 크게 3가지 에너지인 음식. 수분. 공기(산소)로 나눌 수 있다. 평등에 도달하는 시간을 보면 음식은 평균적으로 약 1달에서 두 달 정도. 물은 운 좋으면 1주일이 넘어 걸리며 공기는 10분이면 충분하다. 산소를 끊으면 수십 초~수 분 내 뇌세포가 손상되기 시작해 의식이 흐려지고 10분 전후부터 사망 위험이 급증한다고 한다. 지금 당장 평등함을 느끼는 방법이 있다. 숨을 완전히 크게 내쉰 상태에서 30초 정도 견뎌보면 그 평등함을 잠깐 맛볼 것이다. 그렇다고 그 평등의 욕심에 10분 이상을 견디면 안 되니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에너지의 종류가 다른 것이 왜 이런 도달시간의 차이를 만들까? 그 이유는 각각의 외부에너지가 인체 내부에 저장되는 차이 때문이다. 음식은 지방 형태로 바꿔서 몸에 대량 저장이 가능하고 물은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며 산소는 거의 저장이 힘들다. 바꿔 말하면 지방 형태로 몸 안에 아무리 많이 저장해 놓아도 호흡을 한 10분 정도 안 하면 우리는 대부분 학실히 죽는다. 

 

3년 전쯤 명상과 호흡을 수련하는 국선도 모임을 알게 되어 지금도 주 1회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3년 정도 수련은 했다지만 국선도의 역사적 전통과 효과 그 수련 능력을 선보이기에는 아직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 부끄러움을 꽁꽁 감추고 매주 사람 만나는 재미에 감염되어 웃고 떠들던 어느 날, 3년 정도 꾸준히 출석하는 게 이쁘게 보였는지 아니면 뭐라도 해야 하겠다는 부담감이 있었는지 별안간 승급 시험을 치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승급 소감문을 제출해야 한다고  한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런 거는 없는 거 같던데 아마도 꽁꽁 싸맨 내 속을 헤쳐보고 싶은가 보다 하는 짐작으로 승급시켜 주면 쓰자 아니면 말고 식의 배짱으로 버티다가 정말로 승급이 되어버렸다. 돌이켜보면 그 농담 같은 배짱 속에는 밖으로 보이기 부끄러운 내 속마음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서 할 수 없이 카톡 단톡방에서 간증하게 되었다. 

"23년 봄의 어느 토요일 아침. peter 사장님의 소개로 카메룬 센터의 장소를 찾아 만나게 된 국선도가 어느덧 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2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돌려서 보내며 꾸준하려고 했던 수련 경험에서 먼저 기억나는 것은 견디는 힘이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거대한 견디기이다. 비록 밖에서 볼 때는 상황에 따라 당연하게 보고 또는 이상하게도 보겠지만 누가 어떻게 보던지 또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호흡은 계속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도 그 호흡을 멈추겟지만 당연하게 생각된 그것의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 국선도 수련에서 얻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호흡을 가다듬는 일, 단순한 몸의 반응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였습니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든, 내가 어떠하든, 제 안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버틴다는 것이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선택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SNS 카톡의 단톡방이라 급히 올리긴 했지만 우리는 많은 사소함에 둘러싸여 있고 그런 사소하게 얽힌 복잡함을 견디는 힘이 중요했다는 깨달음을 말하고 싶었다. 삶을 지탱하는 건 사소한 숨쉬기인데 사소함을 무시하다가 삶에 되치기당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흔하므로 가격으로 매겨지지 않던 것들의 중요함은 죽음 앞에 가까이 가서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이 죽음이 존재하는 쓸모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있어서 삶이 소중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보이지 않아 숫자로 측정하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에 무엇이 있을까 한번 주변을 돌아보자. 나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수련하고 1시간 정도 수다 떨고 음식을 나누며 안부를 묻는 그 순간이 소중하다. 그 순간의 몸짓과 사소한 행동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언어를 넘어선다. 그러한 분위기가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끈다. 몸이 불편해도 꼬박꼬박 수련에 함께하는 고문님과 어르신들의 몸짓은 조용히 국선도 수련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것이 사랑의 정체가 아닐까? 

 

숫자로 나타나는 구매력이 가치 세계에서 대표주자가 되었다. 쓸모없는 사소함에 소중한 내 시간과 돈을 쓰는 일은 점점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무의미해 보이는 배경과 공허는 재미라는 가치로 남김없이 메꿔지고 있다. 그 재미라는 가치의 모습은 상품과 서비스로 시장에서 나타나고 구매력만 있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의미를 찾고 만들어가는 일은 더 지난한 작업이 되었다. 의미는 무의미의 배경에서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소소한 쓸모없는 일들에서 발굴해 생각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힘이 부족하니 사회가 이미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생각들. 도덕과 이데올로기를 가져와 내 것으로 소유한다. 내 것으로 믿고 한평생 소유하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서 알게 된다. 평생 믿어왔던 믿음이 신기루라는 것을 깨달을 때 자아는 허물어지는 것이다. 

무의미함과 쓸모없음의 의미가 효율성과 생산성의 이름으로 무시되고 있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로 촘촘해지고 변화는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주변이 혼란해질수록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존 질서를 만들려는 욕망은 딱딱하게 발기된다. 인간의 파괴 본능인 폭력성이 서서히 눈을 뜬다. 혼란은 위험으로 느껴지고 일단 살아야 미래가 있으니 이는 당연한 생존 본능일 것이다. 확실함의 유혹. 한방에 두루 만사 적용이 되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그림자이다. 다양함과 복잡함의 에너지를 소화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힘의 부족이 풍선 터지듯 폭력으로 터진다. 무의미의 의미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호흡과 같은 당연함. 그냥 있어 줘서 고마운 존재들의 소중함은 나란 의미의 배경이다. 차분한 그런 생각의 여유와 쉼은 견디는 힘을 단련하게 해준다. 그런 사소함이 조용히 나의 쓸모를 묵묵히 지탱해 주고 있었음을 돌아보게 한다. 그 쓸모없음의 무시를 묵묵하게 감내해 왔던 나의 배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차분해진 몸을 통해 들락날락하는 숨이 자주는 아니라도 사랑이라는 모습을 일상에서 문득문득 발견하게 할 것이라고 소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하는 마음들이 우리 공동체를 더 단단하게 묶어줄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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