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계곡은 괴암괴석으로 유명하고 특히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으로 유명하다
근처에 도명산(643미터)등 부근의 산행은 여러번 갔어도 계곡은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번 산행은 허리부상으로 계곡 구경을 하면서 모처럼 주차장에서 제8곡인학소대 그리고 지나 만 다니던 대원군의 서원철폐의 원인이 되었다는 화양서원과 萬東廟를 구경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이 임진란 때 우리를 도와 준 明나라 神宗과 丙子胡亂 때 우리를 도왔던 明니리 毅宗황제의 고마움을 기리기위해 세운 사당인데 송시열 사후 제자들이 다른 곳에 있던 송시열의서원을 이곳 으로 옮겨 왔다고 하는데 서원은 일종의 지방의 사설 교육 기관으로 이중 賜額書院은 사설 기괸이지만 國家公認 기관으로 書院名,懸板,奴婢 ,書籍을 하사 받은 서원을 말하는데 宣祖 肅宗 때는 577개였고 高宗 때는 100여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원의 田結은 세금을 면제 받는등 특혜가 있었는데 특히 파벌 형성의 근거지가 되는 등 페단이 많었다고한다
대원군이 파릭호시절 하인들의 부축하에 화양동에 구경왔다가 하인들의 부축하에 만동묘 계단을 오르 던 중 만동묘 경비가 이를 보고 황제가 계시는 곳에 감히 부축을 하고 올라가는냐고 발길로 차서 계단에서 나 딩굴었다고하는데 실제로 계단을 올라 가 보니 계단이 가파르고 계단 폭도 다른 곳과 달리 몹씨 좁아 위험하다 그래서 인지 한 구간은 관람객을 위해 양쪽에 별도의 목재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각설하고 봉변을 당한 파락호 대원군은 책임자를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경비를 처벌할것 을 요구 했더니 거절 했다고 하는데 그후 세월이 흘러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 때 생각 이나서 그 때 서원 책임자를 죽여 버리고 1865년에는 먼저 만동묘를 철폐하고 아울러 전국의 1,000개의 사원중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들은 모두 철폐및 정리하여 사액서원 47개만 남겨 놓았는데 엄격한 정원제 , 지방 수령이 관 리 통제,田結에 대한세금 부과및 요새 말로 사액서원의 분교 설치금지등을 실시 지방 양반과 유생들이 반발해서 들고일어나 대원군의 은퇴를 주장 하였는데 특히 만동묘 철폐에 반대 상소를 올린 최익현이 유명하다 (최익현 선생은 한일 합방에 반대 의병을 일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귀양갔다 굶어 죽었는데 학교 때 국어책에서 배운 기억도 나고 오래 전 우리34회가 대마도 관광을 갔다가 일본 어느 절에 갔더니 그 곳에서 최익현 선생의 순절비를 보고 발 걸음을 멈추었던 생각이 나는데 그 분의 묘는 예산군에 있다고 한다) 이 상소사건이 바로 만동묘사건이라고 하는데 결국은 이 일로 대원군은 이듬해 물러나게 되었다고힌 다
우리가 아는 화양 서원 ,영주의 소서원등은 사액서원으로 성균관 과 맞 먹는 지방교육기관이 였다고 한다
지나 다니면서 말로만 듣던 만동묘를 보고 궁금해서 찾아보고 소설 한 번 써 본다
화양구곡 주차장 안 음식점 앞에 있는 성황당인데 돌 무덤이 특이하다
쓰레기인줄 알았는데 산행꾼들이 성황님께 진상한 술과 음식이다
화양구곡 공원 길 양 옆에는 일 반 도로와 달리 가로수가 터널 숲을 이루고 있다
도로가 넓은데 일반 차량은 통행금지이고 이 안에서 장사를 하는 음식 점이나 숙박시설으; 차량만 표지를 하고 다니 는 것 같다
백년이상 된 느티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서울 진관사 입구에 있는수백년 된 느티나무 군락지가 생각 난다
사대주의에 물든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
학소대에서 도명산 가는 다리
출렁다리에서 바라 본 화양구곡
이 건물이 화양서 안쪽 맨 위에 잇는 만동묘 인데 곳곳에 CCTV가설치도어 있다고 한다
신 발을 벗으라고 해서 벗고 들어가보니 신주단지인데 덮어 놓아서 그냥 나왔다
만동묘 입구 문지방인데 턱이 키 작은 나는 사타구니가 닿는다 간신히 넘었다 하도이상해서 사진을 찍 었는데 아래흐;ㄴ 부분 부터 붉은 위까지
계단이;가피르고 믾다
비례 부동이라고 돌에새겨 곳곳에 놓았길레 알아보니 이곳 암벽 곳곳에 송시열 선생이 새겨 놓은 글을 본떠다 진열 헤놓은 듯 하다
화양동 사적비후면
화양동 사적비 전면
서원전경
하천의 바위가가 몽골의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