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세계 Ⅱ
-Michelangelo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3. 6. ~ 1564. 2. 18)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 미켈란젤로의 소네트 사랑[예술가의 취향]
르네상스시대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최고의 예술로 생각했다. 회화와의 단순 비교가 아닌 문학과 음악과 같은 타 장르 예술과 비교해도 가장 뛰어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인문학자들의 도움으로 당시 조형예술의 위상이 좀 나아졌다고 느꼈지만, 르네상스인들은 비천한 육체노동에 근간한 조각이 최고의 예술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한 건 조각만이 유일하게 신의 창조행위를 상기시키기 때문이었다. 조증이 한창이던 서른일곱, 천지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를 그릴 때도 미켈란젤로는 조각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엄청 투덜거렸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에 숭고하고 비장한 사상만을 담았다. 그러다 보니 억압된 자기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르가 필요했던 것일까. 미켈란젤로는 수백 편의 소네트(Sonnet)를 지어 삶 속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토로했다.(소네트는 소곡 또는 14행시를 일컫는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민요에서 파생된 것으로 단테나 페트라르카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르네상스시대에는 널리 유럽 전역에 유포되었다.)
통상 미켈란젤로는 침울하고 상을 찌푸린 채 고심하는 사람,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등 사회생활을 멀리하고 고독 속에 파묻혀 사는 초연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의 말처럼, 예술과 결혼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예술 외에는 어떤 것에도 무심했다고 전해졌다.
이런 통념과는 달리 그는 사람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은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와 노래와 농담을 즐겼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그는 조각이나 회화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마음을 시와 편지에 담아냈다.
1546년 이후에는 시집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당대 로마의 유명 작곡가들에 의해 그의 시에 곡이 붙여지기도 했다. 바로 마드리갈(madrigal·14~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성행한 세속 성악곡)이 그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당대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던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것이다.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마치 굶주린 자의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을 때, 길에서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면
나는 얼굴을 붉히지만
모든 괴로움은 일시에 가라앉지요.
‘가니메데의 납치’ 미켈란젤로, 1532~1533년, ‘미켈란젤로의 초상’ 야고피노 델 콘데, 1535
토마소(소년)와 자신(독수리)을 묘사한 소묘
사랑에 빠진 미켈란젤로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이다. 도대체 누구를 향해 그리움과 고통이 가득한 연심을 표현했던 것일까. 미켈란젤로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사로잡혔다. 특히 예술과 음악과 학문에 몰두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청년들에 매혹되었다.
그의 소네트는 게르라르도 페리니와 페보 디 포기오와 같은 잘생긴 젊은이들에게 보내졌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미소년들에게 끌렸던 것이다. 콰트로첸토(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 당대의 가치관이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시쳇말로 ‘예쁜 게 착한 거’였다니, 그들의 미소년 사랑을 어찌 탓하랴!
미켈란젤로의 미소년 사랑은 나이가 들어서도 식을 줄 모른다. 아마도 외모콤플렉스(지금 보면 좀 개성적인 외모에 속하겠지만) 때문인지 추남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추한 것은 절대로 그리지 않았다.
1532년 57세의 미켈란젤로는 무려 35살이나 어린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라는 멋진 귀족청년을 소개받는다. 그 이전까지 만났던 돈 밝히고 경박한 미소년들과는 달리 토마소는 탄탄한 육체는 물론, 세련된 매너와 고상한 성품을 가진 비범한 지성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가 예술에 미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사랑의 소네트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던 것! 그뿐이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토마소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목동 가니메데를 독수리 모습의 제우스로 변신한 자신이 하늘로 낚아채는 그림을 그려서 보내기도 했으며 ‘최후의 심판’에서는 그를 건장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칭찬에 인색하기 그지없었던 미켈란젤로가 토마소에게 보낸 소네트를 보면 사랑에 눈먼 노인이 보내는 숭배에 가까운 찬사가 낯 뜨거울 지경이다.
“내가 너만을 사랑한다고, 내 신사여. 흥분하지 말아다오. 네게서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것, 네 미모에서 배우는 것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네. 우선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네.”
“식음을 잊는 것이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쉽다오. 초라하게도 음식은 단지 우리의 육신을 지탱할 뿐이지만 그대의 이름은 나의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
세간에 회자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플라토닉한 관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이 관념적인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동성애이긴 매한가지다. 여하튼 스승과 제자로서 그들의 우정은 32년간 지속되었고 미켈란젤로는 사랑하는 남자의 팔에 안겨 죽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을까!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60년 뒤인 1623년, 조카 손자가 우연히 그의 육필 시를 접하게 되었다. 조카 손자는 그 시들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에 매료되었고 그 연시가 모두 남성들에게 바쳐졌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가문의 수치라고 비난받을 게 뻔하지만 묻혀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미문이었다. 고심 끝에 내린 타협안이 시 속의 남성형 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출간한다는 것! 이 시집은 시인으로서의 미켈란젤로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250여년간 미켈란젤로의 동성애적 성향은 가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시집의 여성형 대명사를 다시 남성형으로 되돌려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동성애운동가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생애’의 저자인 존 애딩턴 시먼즈였다.
미켈란젤로가 뛰어난 소네트를 썼다 하더라도 그는 시를 본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그저 하나의 여기(餘技)로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조각에 대해서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던 그가 시에 대해서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으며 좀 더 솔직했고 위트가 있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인간미와 진면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덜어내기’라면, 소네트는 ‘더하기’가 아닐까. 다시 말해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은 절제와 억압이고, 시는 과잉이고 잉여가 아닐까. 미켈란젤로는 그런 식으로 자기 삶의 밸런스를 맞출 줄 알았다.
평균수명이 50도 안 되었던 500년 전, 아흔 살까지 살았던 대가의 장수비결은 바로 문학과 미술 간의 균형 혹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예술가의 취향 / 주간조선
Tomb of the Medicis
View of the Medici Chapel 1526-33 Marble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자 그의 묘소 제작을 위한 자금이 대부분 삭감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소년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레오 10세는 그를 피렌체로 불러들여 메디치가의 영광을 과시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저택의 개조 및 그 가문의 교구에 있는 산로렌초 교회의 개조를 위한 건축설계를 하게 되었다. 산로렌초 교회의 거대한 개조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 교회에 딸린 메디치가의 묘소를 짓게 되었다
Tomb of Giuliano de' Medici 1526-33 Marble, 630 x 420 cm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이 일은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을 따라 줄리아노와 로렌초라고 각각 이름 지어진 메디치가의 젊은 두 후계자들이 1516, 1519년에 죽은 것과 관련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1527년까지 이 교회의 대리석 내부와 아주 독창적인 벽의 설계 및 무덤에 세울 조상들에 몰두했다.
그 결과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례적인 비례와 두께를 지닌 창문들과 코니스들 같은 건물의 세부에서 전통적 고전 형태의 건축을 제멋대로, 비이성적으로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방의 맞은편 벽에 있는 2개의 묘소 또한 매우 독창적인데, 석관의 덮개가 둥글 뿐 아니라 그 위에 남성상과 여성상이 놓여 있다.
미켈란젤로 자신의 말에 따르면 낮과 밤을 상징하는 우의적인 조각상들이 한 묘소에 놓여 있으며, 또다른 묘소에는 새벽과 황혼을 상징하는 우의적인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완성작들로 손꼽히는 이 우의적인 조각상들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순환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피할 길 없는 시간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거대한 〈낮 Day〉과 〈황혼 Dusk〉은 그 거대한 위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느낌을 준다. 두 여성상들(〈새벽 Dawn〉·〈밤 Night〉)은 키가 크고 늘씬하며 당시의 미적 취향대로 작은 발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는 매우 대조적인데, 처녀상인 〈새벽〉은 마치 생명을 얻으려는 듯 자신의 곡선을 따라 위로 쭉 뻗치고 있고 잠들어 있는 〈밤〉은 긴장된 꿈을 암시하는 듯한 자세이다.
Tomb of Giuliano de' Medici (detail) 1526-33 Marble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바로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산로렌초 교회의 또다른 부속건물인 라우렌치아 도서관을 설계했는데, 이는 교황 레오가 물려준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 도서관을 위한 설계는 기존의 다른 건물들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2층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은 현관 홀로 사용되었고, 새로 지은 3층에 있는 더 큰 도서실로 이르는 층계가 설계되었다. 리체토로 알려진 계단 홀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독창적인 벽이 설계되었다. 전통적인 건물의 구성요소들을 대담하고 자유롭게 재배치하면서, 심지어 기둥들을 대개 벽면 앞에 두는 관례를 깨고 그 뒤로 들어가게 했다.
이러한 건축설계는 마니에리스모 건축양식 중 최초의 중요한 예로 자주 인용되어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다란 도서실은 가지런히 정돈된 책상들의 전통적인 배열과 바닥이나 천장의 세부 장식 등이 훨씬 절제된 느낌을 준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특별한 경우에는 그의 설계 방식을 수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좀더 평온하고 조용한 효과에 맞추었다. 바로 그 이유로 이것은 그의 작품연구에서 간과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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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Giuliano de' Medici (detail) 1526-33 Marble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1527년 로마가 정복당하고 레오 10세의 사촌으로 그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가 수치스럽게 도망가자, 피렌체는 메디치가에 항거하여 전통적인 공화국을 재건했다. 이는 곧 포위당해 패배했고 1530년에 메디치가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1530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가족묘소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특정한 정부형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식으로 피렌체 시에 정치적으로 더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Night 1526-33 Marble, length: 194 cm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이당시에 별도로 주문받은 2점의 조각으로는 새로운 정치 권력자에게 바치는 선물로 사용된 〈아폴론 Apollon〉 혹은 〈다비드〉(정확한 주제에 대해 논란이 많음)와 패배한 적의 한 노인을 짓밟고 있는 조상인 〈승리 Victory〉가 있다.
〈승리〉에서는 정복자와 패배자 모두 매우 복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패배자는 한 귀퉁이에 쑤셔넣은 것 같고 정복자는 〈아폴론〉처럼 유연한 나선형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조각은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추구한 젊은 조각가들의 애호를 받아 수많은 우의적인 주제들의 본보기가 되고있다.
Night (detail) 1526-33 Marble Sagrestia Nuova, San Lorenzo, Florence
Marble
모세 Mose 모세 1513-1515 조각 대리석높이 235cm, 로마 빈콜리 산피애르트성당,
지혜의 상징인 성서를 옆에 끼고 위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강렬하다. 미술에 있어 조각을 신임했던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 하나이다 최근에 고고학적 금석 문학적 (金石文學的) 연구결과 성서에 기록된 이집트입국 이집트탈출 야훼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사실 인물로 모세의 실제성이 매우 높아졌다.
Rachel and Leah 1545 Marble S. Pietro in Vincoli, Rome
Dying Slave 1513-16 Marble Height 229 cm (7 1/2 ft) Louvre Museum, Paris
Dying Slave 1513-16 Marble Height 229 cm (7 1/2 ft) Louvre Museum, Paris
Rebellious Slave 1513-16 Marble Height 215 cm (7 ft) Musee du Louvre, Paris
Statue of Giuliano de' Medici c. 1526-34 Marble Height 173 cm (5 1/2 ft)
Medici Chapel, San Lorenzo, Florence
Slave (Atlas)1519-36 Marble, 208cm Slave (bearded) 1519-36 Marble, 248cm
Galleria dell'Accademia, Florence Galleria dell'Accademia, Florence
Slave (awakening) 1519-36 Marble,267cm Slave (young) 1519-36 Marble,235cm
Galleria dell'Accademia, Florence Galleria dell'Accademia, Florence
[출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세계 Ⅱ -Michelangelo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