謙齋 鄭敾美術館을 관람하다(2-2)
鄭敾筆 楓嶽圖帖 -보물 제1875호(원본;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정선필 <풍악도첩>은 현재까지 알려진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肅宗 37년(1711년∙辛卯年)에
제작된 작품으로 ‘辛卯年 楓嶽圖帖’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基準이 될 수 있으며, 初期作이므로 後期의
圓熟한 畵風에 비하여 未熟한 부분도 엿보이지만 <풍악도첩>에 수록된 그림들은 한결같이
畵家 초창기의 活力과 熱意로 가득 차 있다.
금강산을 처음 대하는 화가의 情緖的 반응, 그리고 우리나라 산천에 걸 맞는 표현방식을
모색하려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형성된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크기 36.0cm×37.4cm의 작품 13매와 成帖 來歷과 畵帖 이름을 담은 跋文 1매로 구성되어
모두 14매의 도첩이다.
이 화첩이 제작되게 된 배경은 그의 藝術世界를 이해하고 지지하던 槎川 李秉淵이 1710년
금강산 초입의 金化縣監으로 부임하고, 다음해인 1711년에 鄭敾이 금강산을 방문할 때 白石이란
雅號를 가진 인물과 동행하며 13폭의 금강산 일대 경치를 그려
<鄭敾筆 楓嶽圖帖(辛卯年 楓嶽圖帖>을 남기게 된다. (*槎: 떼 사)
(36) 鄭敾筆 金剛全圖 -국보 제217호(원본: 三星美術館 리움 所藏)-
내금강의 實景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94.5㎝×130.8㎝로
전체적으로 圓形構圖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으로
畵面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號,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당시의 山水畵는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이 그림은
직접 우리나라의 實景를 보고 그린 것으로 鄭敾이 그린 금강산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그의 眞景山水畵風이 잘 드러난 걸작이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題畵 詩와 함께 ‘甲寅冬題’라는 款記가 적혀 있다.
*제화시(題畵詩): 만이천봉 개골산(皆骨山), 누가 참 모습 그릴런가.
뭇 향기 동해밖에 떠오르고, 쌓인 기운 세계에 서려 있네.
몇 송이 연꽃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솔과 잣나무 숲에 절간일랑 가려 있네.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간다 해도,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
(37) 外金剛/海金剛, 佛頂臺-侍中臺-百川橋 (* <鄭敾筆 金剛全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佛頂臺: 불정대와 천길 절벽을 두고 內金剛과 外金剛의 경계가 구분되며 외금강의 돌산,
내금강의 흙산, 外圓通 주변의 숲이 대조를 이루는 듯 하면서도 조화롭게 표현되었다.
=侍中臺: 關東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한 翕谷에 있는 侍中湖 일대를 그린 그림으로
호수 안의 七寶島와 花鶴臺와 멀리 東海의 작은 섬들이 보인다. (*翕: 합할 흡)
=百川橋: 백천교는 外金剛 물이 모여나가는 外圓通庵 아래에 있으며 이 화첩의 대부분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거나 아주 작게 그려 있는데, 이 그림 오른쪽에는 내금강 旅程 때
타고 다녔을 藍輿 4채와 이를 메고 다녔을 승려들이 보이고, 갓을 쓴 일행은 모두
4명으로 건너편 외금강 쪽으로는 이들이 탈 말 4필이 대기하고 있다. (*藍: 쪽 남)
(38) 四仙亭-九龍瀑 (*< 鄭敾筆 金剛全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四仙亭: 三日湖 일대를 그린 그림으로 사선정은 삼일호의 四仙臺에 있는 정자로,
신라 때 永郞 등 花郞 4명이 경치에 반해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고 놀았다는
古事에서 비롯되었다.
호수 중앙에 四仙을 두고 俯瞰하여 그렸는데, 이런 원형 구도는 정선 이전의
실경산수 전통에서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오랫동안 즐겨 사용되었다.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俯: 구부릴 부 *瞰: 굽어볼 감)
=九龍瀑布: 衆香폭포라고도 하는 폭포길이 50m로 王流溪의 최상류에 있으며,
금강산의 폭포 가운데 가장 크다. 1장의 盤石으로 되어 있는 폭포 밑에는 폭포 물에
뚫린 크고 작은 9개의 瀑壺가 마치 용이 빠져나간 듯한 모양을 이루고 있어
九龍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壺: 병 호)
폭포의 상류에는 八潭이 連珠처럼 이어져 있으며, 53佛에 쫓긴 9龍이
8담과 구룡폭포 밑에 숨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39) 金剛山 長安寺 (* <鄭敾筆 金剛全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金剛內山總圖의 왼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장안사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담고 있는
그림으로 무지개모양의 萬川橋와 오른쪽의 釋迦峯, 觀音峯, 地藏峯 등
백색의 바위 봉우리들이 유독 크게 그려졌다.
長安寺는 內金剛으로 들어가는 길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산속으로
접어들었을 때 화가가 느꼈을 신선한 現場感이 화면에 담겨 있다. 내금강의 계곡물들이
모여 나오는 金剛川의 흐름을 자세히 그리려 했던 진지한 鄭敾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40) 金剛山 穴望峰-普德窟
=穴望峰: 謙玄神品帖(*원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혈망봉은 내금강의 望軍臺 맞은쪽에 있는 봉우리로 산꼭대기에 커다란 맞구멍이
나있어 그 큰 구멍으로 하늘이 내다보이는 봉우리라 하여 穴望峰이라고 한다.
=普德窟: <鄭敾筆 楓嶽圖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金剛臺에서 大香爐에 이르는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長安寺를 지나 金剛臺와 萬瀑洞을
거슬러 오르면 碧霞潭이 있고 그 오른쪽 높은 언덕에 보덕굴이 있다. (*霞: 노을 하)
좁은 화면에 여러 景物을 그려 넣으면서도 봉우리의 高度感을 표현하는데 치중하느라
전체적으로 답답한 構圖가 되었으며, 바위의 質感을 묘사하는 준법(皴法)과 묵법(墨法)에
있어서도 아직 정선 특유의 筆致가 나타나 있지 않는 그림이다. (*皴: 틀 준)
*준법(皴法): 山水畵에서 산이나 돌에 주름을 그려 입체감을 나타내는 畵法.
(41) 毘盧峰-金剛臺
=毘盧峰: 높이 1,639m의 金剛山 主峯으로 금강산 連峰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동쪽으로 日出峰∙月出峰, 서쪽으로 永郞峰∙凌虛峰, 북쪽으로 磨石岩,
남쪽으로 釋迦峰∙地藏峰 등에 둘러싸여 있다.
서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高位平坦面을 이루고, 동쪽과 남쪽은 오랜 浸蝕으로
급한 절벽을 이룬다. (*원본: 개인 소장)
=金剛臺: 금강산 表訓寺 북쪽 萬瀑洞 안에 있는 높은 기둥모양의 石臺로 금강대 자체가
마치 푸른 하늘에 떠있는 蜃氣樓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푸른 물결 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蜃: 큰 조개 신)
金剛山 一萬二千峯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謙齋가 금강대의 모든 것을 理想化시켜
표현했다고 한다. (*원본: 간송미술관 소장)
(42) 金剛山 萬瀑洞 (*원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만폭동은 內金剛에 있는 名勝地로 金剛門에서 火龍潭까지 1.2km
구간으로 금강산 중에서도 계곡의 絶景을 대표하는 구역으로
수많은 폭포와 沼가 있다고 萬瀑洞이라고 한다.
影印複製畵
(43) 金剛內山總圖. (* <鄭敾筆 金剛全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金剛內山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그린 듯한 視點으로 捕捉∙觀察한 것을 많이 그리려고
主客과 强弱의 按配가 안 되어 平易하고 散漫한 양상을 보이며, 정선 회화 후기의 과감한
필치보다는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그렸다.
봉우리들이 서릿발처럼 날카로워 霜嶽이라고도 불렸던 금강산의 특징을 뾰족한 형태와
흰 채색으로 묘사했는데, 아직 鄭敾 특유의 힘찬 垂直皴으로 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산봉우리마다 명칭을 적어놓고 길을 뚜렷이 표시한 것은 조선시대 지도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다. 그림크기 35.9×37.0cm. (*皴: 틀 준)
(44) 금강산 披襟亭圖. (* <鄭敾筆 金剛全圖>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강산을 遊覽하는 여정 중 길손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던 金城의 披襟亭을 그린 것으로
近景에는 南大川을 건너 피금정으로 가려는 일행들이, 中景에는 울창한 나무 사이의
피금정을, 遠景에는 뽀얀 안개구름 위로 미점을 찍어 묘사한 큰 산들이 옆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披: 헤칠 피 *襟: 옷깃 금)
왼쪽 위에는 煙客 許佖이 白下 尹淳의 漢詩 한 구절을 인용하여 평하였다
白下尹尙書詩曰(백하윤상서시왈) 峽色深如莫(협색심여막) 邨容静若眼(촌용정약안)
/ 골짜기의 빛은 깊어 저문듯하고 마을 모습은 고요하여 잠자는 것 같네. (*邨: 마을 촌)
(45) 淸風溪圖-毓祥廟圖(오른쪽)
=鄭敾筆 毓祥廟圖. -보물 제873호- 63㎝x146.5㎝(*개인 소장)
종로구 宮井洞에 있는 육상묘와 그 뒤 白岳山을 그린 일종의 기록화이다
謙齋가 만 63세 때(1739년) 그린 그림으로 나무, 집, 산의 표현에
水墨과 옅은 담채를 써서 內面世界를 표출해 내는 南宗畵風의 영향이
뚜렷하게 보여 鄭敾 개인의 화풍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화로서 역사적∙학술적인 의의가 큰 작품이다. (*毓: 기를 육)
*毓祥廟(서울 毓祥宮/사적 제149호)는 肅宗의 後宮이며 英祖의 生母인
淑嬪 崔氏를 奉祀한 廟로 영조 6년(1725)에 건립할 때는 淑嬪廟였으나
1744년 毓祥廟로, 1753년 毓祥宮으로 승격되었다.
1908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宮들을 合設하여 六宮이 되었으며 1929년
英親王의 모친 淳嬪 嚴氏의 神位를 봉안하여 七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46) 淸風溪圖 -1739년작/비단에 담채 133.4×59㎝/원본소장; 간송미술관-
겸재가 64세 때 그린 老年期 眞景山水의 명작으로 白岳山 淸風溪 골짜기에 있던
安東 金氏 仙源 金尙容의 故宅을 그린 작품이다.
겸재의 청풍계 여러 폭의 그림 중 이 작품은 力動的인 시각 구성과 능숙한 필법,
강렬한 흑백 대비로 매우 격동적인 풍경을 표현해 내고, 그림 위쪽 계곡의 풍경에서는
바위의 입체적 質感을 강조한 남성적인 필치가 돋보인다.
고택의 정원에는 울창한 고목이 늘어서 있으며 그 사이사이로 연못가의 樓閣, 草家,
家廟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아래쪽에는 방문객의 모습과 집밖에 매어 놓은 나귀의 모습이
보인다.
(47) 彰義門圖. <장동팔경첩> 중 (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壯洞八景帖은 仁王山과 白岳山(北岳山) 일대의 경치 좋은 여덟 곳을 그린 것으로, 여기에
收錄된 작품들은 鄭敾dl 70대 이후에 그려서 원숙한 老年期 작품들로 筆墨이 자유롭고
疏略한 가운데 老成한 韻致를 느끼게 한다.
장동팔경첩에는 弼雲臺, 大隱岩, 淸風溪, 聽松堂, 紫霞門, 獨樂亭, 翠微臺, 水聲洞이
수록되었다.
壯洞은 현재 종로구 淸雲洞과 孝子洞 일대를 가리키며, 조선 후기의 勢力家인
安東 金氏들이 世居해 이들을 ‘壯洞 金氏’라고도 한다.
*서울 彰義門(보물 제1881호)은 漢陽都城의 四小門 중 서북쪽에 있는 문으로
太祖 5년(1396) 都城 축조 때 건립되었으며, 1623년 仁祖反正 때 綾陽君(반정 후
仁祖)을 비롯한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反正에 성공했던
무대이다. (*서울 창의문은 2015.12월 보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門樓가 소실되어 英祖 18년(1742)에 重建되었는데,
이때 인조반정 功臣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문루에 걸어놓았다.
(48) 釣魚圖. 鄭敾 作/21.1 cm x 27.7cm, 원본: 겸재정선미술관 소장.
왼쪽에 절벽에서 뻗어 나와 있는 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자주색 옷을 입은 선비가 쪽배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저 멀리 어둠이 드리워져 오고 있는 가운데 近景에는 바람에 살랑대는
갈대와 그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두 마리 기러기 등에서 詩的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烟客 許佖의 품평이 적혀있다. (*烟: 연기 연)
紫衣垂釣(자의수조) 江雁背飛(강안배비) 烟客評(연객평) /
자주 빛 옷을 입고 낚시를 드리우니 강의 기러기가 등 뒤에서 나르네. 연객이 평하다.
(49) 淸河城邑圖. 鄭敾 작/종이에 먹 32.7×25.9cm, 원본; 겸재정선미술관 소장.
謙齋 鄭敾이 3년간(58세~60세) 지금의 포항시에 속하는 淸河縣監을 지내면서 그 곳
성읍의 경관을 그린 것이다.
官衙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遠景에는 呼鶴山을, 近景에는 갯벌과 솔밭을 그려 넣어
城邑의 경관이 한 눈에 보이도록 했다.
화면상단 畵題 옆에는 자손대대로 소중하게 전해지기를 바랬던 듯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는 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白文方印: 네모난 모양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옴폭하게 파내,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印章.
(50) 實景山水畵
(51) 鄭敾의 眞景山水畵風
(52) 畵壇의 상황과 鄭敾
鄭敾 以外 畵家들의 작품
(53)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溪上靜居圖는 鄭敾이 退溪 李滉 生存時의 건물인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山水를 담은
조선시대의 풍경화로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에 실려있다.
*退尤二先生眞蹟 -보물 제585호- (*삼성문화재단 소장)
퇴우이선생진적은 조선시대의 서화가들인 李滉, 宋時烈, 鄭敾과 아들 鄭萬遂, 李秉淵,
任憲晦, 金容鎭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年代順으로 묶어낸 書畵帖이다.
모두 명문장과 명화여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晦: 그믐 회)
(54) 楊州 松楸圖. 크기 36.1㎝×23.6㎝. 개인 소장.
양주 송추도는 조선후기의 화가 鄭榥(鄭敾의 손자)이 북한산과 도봉산의 일부를 배경으로
楊州에서 松楸로 넘어가는 길목의 경관을 재현한 진경산수화로 송추 쪽에서 바라본
北漢山과 道峰山의 일부를 寫經하고, 이어서 송추 즈음에 위치한 士大夫 집안의 墓域으로
추정되는 경관을 재현했는데 현재 道峰區 雙門洞 부근이다. (*榥: 책상 황)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의 모습과 좌측 상단에는 화제와 함께 ‘榥敬寫(황경사)’라고
써서 先祖의 묘역을 담기 위해 그렸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양주 송추도는 공간, 구성, 색채, 필치 등에서 鄭榥의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 주는 동시에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경 진경산수화의 면모를 전해 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55) 秋景山水圖. 之又齋 鄭遂榮 작, 원본: 호림박물관 소장.
秋景山水圖는 작품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北宋의 院體畵風이 加味된 암준(岩皴)을 보이고
있어 어느 정도는 정형상수를 따르고 있다. (*皴: 틀 준)
鄭遂榮은 진경산수화를 個性이 강한 文人畵風으로 발전시켜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를
담아낸 화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鄭敾·沈師正·李麟祥·姜世晃과 더불어
우리 나라 진경산수화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6) 말징 박기-윤두서 자화상
=말징 박기: 조영석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 작 해남 녹우당 소장
(57) 尹斗緖 自畵像. –국보 제240호- 20.5㎝x38.5㎝ , 孤山 尹善道展示館(海南)
恭齋 尹斗緖가 그린 자화상으로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고, 生動感 넘치는
筆力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형식이나 技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명품이다.
恭齋 尹斗緖는 孤山 尹善道의 曾孫子이자 茶山 丁若鏞의 外曾祖로 조선후기
文人이며 畵家로 謙齋 鄭敾, 玄齋 沈師正과 더불어 ‘朝鮮의 三齋’로 불렸다.
(58) 그림 속 陽川 縣衙
(59) 陽川 縣衙 배치도
(60) 양천현아(陽川縣衙)-종해청조(오른쪽)
=陽川縣衙: 저녁 무렵 官員들이 退廳한 후의 적막한 양천 현아의 전체 모습.
=宗海聽潮: 현아의 뒷산인 宮山에서 漢江을 내려다보며 그렸는데
宗海軒(縣令이 집무를 보던 東軒)과 부속 관아의 모습이 보인다.
(61) 양천현아(陽川縣衙)
(62) 사람의 표정이 재미있는데 그림 제목은?
(63) 豹菴 姜世晃 跋文 (*跋: 밟을 발)
謙翁(謙齋)의 그림은 우리나라 제일이다. 권 가운데 그림도 모두 得意作이다.
옹은 지금 늙어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더욱 보배로 삼을 만 하다.
감탄하며 감상한 나머지 한 마디 적는다. –표암-
(64) 겸재정선미술관 내부
(65) <붓> 조형물, 겸재정선미술관 앞 정원.
(66) <망동산 터> 표석
(67) 宮山近隣公園
宮山(75.8m)에 조성된 근린공원으로 1996년에 개원하였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의 성터인
서울 陽川古城址(사적 제372호)와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향교인
陽川鄕校址(서울시기념물 제8호),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던 小岳褸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義兵들의 集結地였다고 한다.
(68) 서울 陽川古城址 -사적 제 372호-
江西區 加陽洞 宮山의 정상부에서 동서로 뻗은 주능선과 남북으로 뻗은 지능선의 상단부를
에워싸고 축조한 三國時代의 테뫼식山城이다.
궁산은 安養川과 漢江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한강하류의 要塞地로
高陽 幸州山城(사적 제56호), 坡州 烏頭山城(사적 제351호)과 더불어 옛날부터
한강 河口를 지키던 중요한 시설이었다.
(69) <겸재정선미술관> 안내문,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構內
(70) <겸재정선미술관> 안내문,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構內
(71) <겸재정선미술관> 위치도,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構內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