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34회 제60차 文化踏査(5-4); 漢城百濟博物館 常設展示(2-2)
(51) 금동신발[金銅 飾履], 백제5세기, 충남 公州 水村里 출토(복제)
(52) 백제지방 출토유물
(53) 뼈 갑옷[骨制 札甲]
서울 夢村土城 南門 가까운 저장구덩이에서 출토된 뼈 갑옷으로,
뼛조각[小札]의 크기는 길이 10cm, 폭 2~4cm로, 뼈 조각 이음이
모두 4단으로 구성되었으며 허리 아랫부분을 감싸는 역할을 했다.
출토상태를 바탕으로 복원해 보니 모두 185개의 뼛조각으로
만들 수 있었다(무게 3.3kg).
뼈 갑옷 위의 가슴∙배 부분은 쇠 찰갑에 천을 두르고 옻칠을 했으며
모두514개의 조각을 이어 갑옷을 만들었다(무게 6.4kg).
(54) 그릇 받침[器臺]
(55) 東明祠堂. 서울 風納土城(시작 제11호) 경당지구와 44호 대형건물 터
(56)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 44호건물 복원 모형
(57) 금동관모[金銅 冠帽]. 백제, 전남 高興 吉頭里 출토(복제)
(58) 금동신발[金銅 飾履. 백제, 전남 高興 吉頭里 출토(복제)
(59) (왼쪽) 금 귀걸이[金製 耳飾].
1 서울 石村洞 출토(복제). 2 충남 瑞山 富長里 출토(복제). 3 충남 天安 龍院里 출토(복제)
(오른쪽) 금 달개[金製 瓔珞]. 백제, 서울 石村洞 출토(복제).
(60) 백제의 꾸미개
(61) 文字와 精神世界
(62)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247호(복제)-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1974년 충남 公州市 儀當面 松亭里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보살상으로 높이 25㎝이며, 머리에는 三面寶冠을 쓰고 있고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觀音菩薩을 形象化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튀어나온 부분의 鍍金이 일부 벗겨졌을 뿐 金色이 우수하고 출토된 곳이
확실한 보살상으로 안정된 表現技法과 배꼽부분에서 교차된 구슬장식,
둥근 연꽃무늬 臺座 양식 등에서 중국 北齊 末~隋 나라 初 菩薩像에서
유행했던 양식으로, 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3) 놀이와 風俗, 바둑판 상자 - 바둑판
(64) 무덤[墳墓]
(65) 움무덤 - 흙무지무덤
*움무덤[土壙墓]: 長方形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로 屍身을 安置하거나 木板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하는 가장 간단한 구조의 무덤으로 서울 石村洞, 瑞山 明智里∙
唐津 소소리, 淸州 新鳳洞 등 百濟 全域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흙무지무덤[墳丘墓]: 미리 흙이나 돌로 封墳과 같은 墳丘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양식이다. 둘 이상의 매장시설이 추가로 설치할 때는 먼저 축조된
매장시설 위에 1겹 더 쌓고 또 다른 매장시설을 축조하는 경우도 있다.
흙무지무덤은 서울 石村洞 고분군에서 많이 드러나며 全南 지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흙무지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66) 돌무지무덤
*돌무지무덤[積石塚]: 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屍身을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묘역을 만든 무덤이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을 조성하여 왔는데, 초기에는 강가 모래 바닥에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뒤 다시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階段式으로 쌓았으며,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方臺形을 이룬다. 이것이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墓]의
영향을 받아 通溝縣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67) 돌덧널무덤-돌방무덤
*돌덧널무덤[石槨墓]: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不定形 割石 또는 덩이 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으로, 대체로 돌널무덤[石棺墓] 보다 늦은 鐵器時代에 유행하였다.
이 무덤을 통칭하여 돌널무덤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靑銅器時代에 板石을 석재로 한
무덤만을 돌널무덤이라고 한 것과는 구분된다. 石材로 판석 대신 자연 塊石이나 자갈돌을
사용하며, 널방을 깊게 만든 것이 돌널무덤과는 다르다.
한반도의 돌덧널무덤은 좁은놋단검을 부장한 채, 韓半島 서부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돌방무덤[石室墳]: 널길[羨道]을 갖춘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판돌∙깬돌을 이용하여
半地下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한 무덤으로 널방[玄室]을 만들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진흙∙숯∙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 일반적이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
한반도에서는 遼東半島에 있던 중국계 封土墳의 영향을 받았으며, 돌무지무덤[積石塚]
전통의 고구려가 樂浪이 멸망한 뒤부터 封土돌방무덤을 짓기 시작하여 平壤으로 遷都 이후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백제에서는 서울 可樂洞과 芳荑洞 등에 돌방무덤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구려식의 ‘가’
또는 ‘모’자형의 널길이 남벽의 동쪽 또는 중앙에 딸린 돌방무덤이다. 熊津으로 遷都
이후에도 널길이 딸린 돌방무덤은 계속 만드는데, 처음의 사각형 어울무덤[合葬墓]에서
직사각형 單葬墓로 바뀌어 그것이 扶餘시대로 넘어간다.
(68) 무덤 껴묻거리[墳墓 副葬品]
*副葬品은 被葬者를 장식하거나 死後世界를 위해 물품을 껴묻어주는 행위로 남게 된 것으로,
피장자에게 옷을 입히거나 裝身具를 달아주는 행위로부터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을 함께
묻어 주기도 하며,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 또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물품을
따로 만들어 묻어주는 행위들이 考古學 자료로 남은 것이다.
부장품의 종류와 양이 類型化되고 무덤의 등급이나 시기에 따라 규칙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靑銅器時代부터이며, 5세기에 들어서면 金·銀·金銅으로 장식된
武器·馬具·裝身具 등 신분을 상징하는 호사스런 유물이 古墳에 집중된다.
(69) (왼쪽) 계란 모양 토기-항아리[壺]
(오른쪽) 겹아가리토기[重口緣土器] –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뒤쪽) 굽다리접시[高杯] –칠기[漆器]-검은간토기 잔[黑色磨硏土器 盞]. 서울 石村洞 출토
(70) 항아리 –서울 가락동유적-
(71) 쇠투겁창[鐵鉾]. 백제시대, 1~3 서울 可樂洞 출토. 4 서울 牛眠洞 출토.
*鐵, 强靭한 나라를 만들다.
백제는 매우 우수한 製鐵技術을 바탕으로 多樣한 鐵器를 만들었다.
특히 수준 높은 象嵌技術을 이용하여 七支刀를 만들어 倭王에게 주었으며, 고리자루큰칼 등
각종 裝身具 등을 만들었다.
삽∙괭이∙낫을 비롯한 鐵製 農器具는 농업생산력을 增大시켜 國家體制 안정에 도움을 주었으며, 칼∙화살촉∙창 등의 철제 무기는 전쟁할 때 쓸모가 컸다.
*象嵌: 금속, 瓷器, 나무 등으로 만든 器物에 홈을 파거나 무늬를 깊이 새겨 그 속에 금·은·
구리 등의 금속이나 자토(赭土: 산화철을 많이 함유하여 빛이 붉은 흙)·白土 그리고
색깔이 있는 먹감나무 등을 넣어서 무늬를 나타내는 技法.
(72) (위) 고리자루 큰칼[鐵製環頭大刀]. 백제시대, 충남 扶餘 출토.
(가운데) 쇠칼. 경기 加平 출토
(아래) 쇠창[鐵鉾]. 경기 加平 達田里 출토.
(73) 쇠낫 – 쇠삽날. 백제시대.
(왼쪽) 쇠낫[鐵鎌]: 1~4 서울 牛眠洞 출토, 4 경기 金浦 陽村洞 출토, 6 서울 風納土城 출토.
(오른쪽) 쇠삽날. 백제 3~4세기, 서울 風納土城 출토.
(74) 쇠도끼[鐵斧]. 백제시대.
1 경기 金浦 陽村洞. 2 서울 牛眠洞. 3 서울 風納土城. 4 서울 牛眠洞. 5 서울 風納土城.
6 서울 牛眠洞 출토.
(75) 백제의 4~5세기 戰爭 年表
(76) 발걸이[橙子]. 백제시대, 충남 天安 龍院里 출토.
(77) 쇠 화살촉[鐵鏃]. 백제시대. (*鏃: 화살촉 촉)
서울 牛眠洞 출토 - 서울 風納土城 출토 - 경기 金浦 陽村洞 출토,
(78) 판갑[板甲]
*삼국시대에 武士들이 上半身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던 쇠로 만든 갑옷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작은 철판을 못이나 가죽으로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판갑 옷은 큰 철판으로 만들어
단단하여 防護에는 우수하나 활동하기에는 무겁고 불편하였다.
(79) 伽倻 池山洞 古墳群 출토유물
*高靈 池山洞 古墳群 -사적 제79호-
경북 高靈郡 大伽倻邑 池山洞 主山 남쪽 기슭에 있는 大伽倻의 200여 基릐 圓形封土墳으로
대형분(직경 20m 이상) ∙중형분(직경 10m 내외) ∙소형분(봉토 미확인)으로 구분되며,
대형분 72호분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구덩이식 돌방무덤에 주인공이 안치되고, 그 주위로 주인공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殉葬된
돌덧널무덤이 배치되어 있어 大形墳의 被葬者는 5세기 말 이전 大伽倻國의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有蓋高杯]를 비롯하여 목항아리[長頸壺], 구멍 있는
아가리 넓은 항아리[有孔廣口小壺] 등의 土器流와 창 ∙화살촉 ∙칼 ∙도끼 등의 철제 武器類,
伏鉢形 鬪具, 말 안장 ∙발걸이, 타원형 재갈멈추개 등의 馬具類, 대롱옥[管玉] ∙곱은옥[曲玉] ∙瑪碯製多面玉 ∙要佩砥石 ∙귀고리 등의 裝身具類, 金銅製冠形裝飾 ∙
세잎고리자루긴칼[三葉環頭大刀] ∙金銅冠 등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瑪: 차돌 마 *碯: 마노 뇌 *佩: 찰 퍠 *砥: 숫돌 지)
(80) 百濟, 바다로
(81) 부안 죽막동 유적[扶安竹幕洞祭祀遺蹟]
배 모양토기 - 접시 달린 병. 백제 5~6세기.
(82) 굽다리접시[高杯], 백제시대, 扶安 竹幕洞祭祀遺蹟.
(83) 금 귀걸이[金製 耳飾]. 백제시대, 충남 天安 龍院里 출토(복제)
(84) 칠지도[七支刀]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 (복제)
*일본 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 오는 철제 칼로 제작 연대와
銘文 해석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학설이 있다.
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 74.9cm이며, 칼날 길이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七支刀라고 부르며,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銘文이 金象嵌 技法으로 새겨져 있다.
武器로서의 실용성보다는 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銘文은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
□□□□作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敵兵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제작 시기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268년, 369년 또는 6세기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한국학자들은 백제 近肖古王(재위 346~375) 때나
408년, 太和 4년(480)을 제작 연대로 보는 학설이 있다
七支刀의 전달은 일본학자는 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하였으나 한국학자들은 銘文의 ‘供侯王’은 侯王에게 提供∙供給되었다는
뜻이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제작하여 諸侯王인 왜왕에게 下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85) 금동신발]金銅 飾履].
백제시대, 日本 구마모도[態本]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古墳 출토(복제)
(86) 그림 속의 百濟使臣(가운데). 梁職貢圖에 있는 그림(복사)
*양직공도[梁職貢圖]. 중국 南京博物館 소장.
梁 나라 때인 6세기에 제작된 使臣圖로, 중국을 찾은 百濟∙倭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풍습 등을 소개한 畵帖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6세기에 제작된
원본을 1077년 北宋 시대에 模寫한 것이다. 당초 原本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국 사신들 모습만 남아 있다. 특히 ‘百濟國使’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과 여기에 대한 敍述은 6세기 초 熊津時代의 百濟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87) 교류지[廣輪寺] 彌勒半跏菩薩思惟像 -일본 國寶 지정-
삼국시대 木造佛像. 전체 높이 147㎝, 불상 높이 125㎝.
이 불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93.5㎝)과
거의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반가좌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손끝을 오른쪽 뺨에 댄 思惟의 자세를 보인다. 머리에는 간단한
형태의 三山冠을 쓰고 상체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裸形이다.
樣式上 우리의 半跏思惟像 계통과 가까우며 재료와 제작기법 면에서도
우리나라의 三國時代에 제작되어 전래된 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일본의 초기 佛像들이 모두 老松나무를 사용한 것에 비하여 이 불상은
赤松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산출되는 목재이다.
廣輪寺 彌勒半跏菩薩思惟像이 삼국 중 어느 나라의 佛像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像과 가장 가깝게 비교되는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에
대하여 신라제작설과 백제제작설이 대립되고 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가운데
어느 나라 작품인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제작설이 多數說 이다.
다만 이 상이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일본에 傳來되어 아스카시대[飛鳥時代]의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쳐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國寶로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88) 公州 武寧王陵 출토 유물(복제)
(위) 무령왕 금제 뒤꽂이[武寧王 金製釵] -국보 제159호- 진품; 국립공주박물관 소장(복제).
(*釵: 비녀 챼)
(가운데) 무령왕 금제 관 꾸미개[武寧王 金製 冠飾] -국보 154호- 높이 30.7cm.
진품; 국립공주박물관 소장(복제)
(아래) 무령왕 금제 귀걸이[武寧王 金製 耳飾] -국보 156호- 진품; 국립공주박물관 소장(복제)
(89) 금동 신발[金製 飾履]. (복제)
(90) 무덤을 지키는 돌 짐승[石獸]
(91) 고리자루 큰칼[環頭大刀], 백제 6세기, 公州 武寧王陵 출토 유물(복제)
(92)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복제)
*扶餘 羅城(사적 제58호)과 陵山里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 香爐로 높이 61.8㎝, 무게 11.8㎏의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鳳凰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향로는 중국 漢 나라에서 유행한 博山香爐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山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創意性과
造形性이 뛰어나고 佛敎와 道敎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工藝와 美術文化,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93)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 국립부여박물관 소장(복제).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의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으며,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金石文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年代와
供養者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創建 年代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94) (왼쪽) 남성용 변기[男性用 便器]
(오른쪽) 여성용 변기[女性用 便器]. 백제시대. 충남 扶餘 軍守里 출토(복제).
(95) 백자 벼루[白磁硯]. 백제시대. 충남 扶餘 離宮趾 출토(복제)
(96) 부여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 -보물 제1845호-
백제시대(654년), 국립부여박물관 소장(복제).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義慈王 때의 大佐平 沙宅智積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1948년 扶餘邑 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된 碑의 일부로서, 높이 102cm, 너비 38cm, 두께 29cm이다.
碑石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며,
특히 백제 大姓 八族의 하나인 沙宅氏 출신의 沙宅智積은 <日本書紀>에서
大佐平의 지위로 倭國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로
사찰의 殿閣과 塔像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官等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격조 높은 文體와 書法은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
(97) 산수무늬 벽돌-연꽃무늬 수막새-상자모양 벽돌
(위) 산수무늬 벽돌; 扶餘 外里 文樣塼 一括(보물 제343호)의 일부
*扶餘 外里 文樣塼 一括: 충남 扶餘 窺岩面 外里에 있는 옛 절터에서 출토된, 다양한
문양과 형상을 새긴 후 구워서 만든 백제 때 벽돌[塼]이다.
벽돌의 성격이나 만든 방법이 중국 南朝의 영향을 받았고, 日本 오사카[大阪]에서
출토된 鳳凰文塼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문양전의 모습은 백제 시대 繪畵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래 왼쪽) 연꽃무늬 수막새[蓮花文圓瓦當]
(아래 오른쪽) 상자모양 벽돌[箱子形塼]. 백제 7세기. 충남 扶餘 軍守里 출토(복제)
(98) 백제는 어떻게 文化强國이 되었을까
(99) 한성백제박물관 屋上展望臺에서 본 서울 夢村土城(사적 제297호)
(100) 소수레
百濟의 王과 貴族들이 탔던 소수레를 복원한 것으로 古代 東洋에서는 身分이 높은 사랑들만
소수레를 탔다.
수레는 기원전 3,000년경 서아시아에서 처음 발명되었으며, 기원전 2,5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는 바퀴판에 구리를 덧씌운 戰車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300년경 殷나라에서 전차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景福34회 제60차 文化踏査(5-5); 서울 石村洞古墳群-서울 三田渡碑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