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
龍山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는 특별기획전으로 <병자호란, 그 기억과 반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기간: 2017.06.21~11.19)
이번 특별기획전은 1. 조선의 山下, 戰雲이 감돌다 2. 뒤바뀐 천하, 병자호란
3. 北伐과 富國强兵의 꿈 4.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등 4개의 主題로 구성되었다.
전시된 遺物은 전쟁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박물관,
唐津 忠壯祠, 萬海記念館 등이 소장하고 있는 92점이다.
丙子胡亂
朝鮮이 壬辰倭亂(1592~1598)으로 想像을 초월할 정도로 입은 傷處가 채 아물기도 전인
1627년 丁卯胡亂으로 ‘兄弟之誼’를 맺고, 1636년 丙子胡亂을 맞아 淸과 ‘君臣之盟’의 나라,
즉 淸 皇帝를 받들어 모시는 臣下의 나라로 전락하였다.
병자호란을 맞기 전 조선의 정세를 잠깐 훑어 보기로 한다.
1567년 宣祖가 卽位하여 文定王后와 尹元衡의 專橫을 마감하고, 士大夫에 의한 정치가
펼쳐지면서 西人과 東人으로 갈라지고, 1591년 世子 책봉문제로 東人은 南人과 北人으로
갈라지면서 朋黨政治(黨爭)는 가속화되었다.
한편 明나라에서는 나라가 멋대로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怠政’이 시작되며(1586), 滿洲에서는
누르하치(努爾哈赤)가 建州女眞을 통일하고(1588), 日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하여 120년 동안의 ‘戰國時代’를 마감하고 ‘모모야마(桃山) 시대’를 열게 된다(1590).
일본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通信使 黃允吉과 副使 金誠一이
黨派의 이익을 앞세워 서로 다른 동향보고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세에 對備하지 못한 朝鮮은 1592년 4월 壬辰倭亂을 맞게 되고 申砬의
彈琴臺 敗戰소식을 접한 宣祖는 百姓과 漢陽都城을 버리고 황급히 義州로 피란했다.
李舜臣의 水軍과 전국 각지의 義兵, 明軍의 지원으로 壬辰倭亂(1592~1598)은 끝났으나
朝鮮의 인구는 1/3이 사라지고, 田畓의 면적도 1/3(三南 기준)로 줄어 들고 百姓들은 飢饉에
시달려 人肉까지 먹는 등 전쟁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했다.
또한 정신적, 정치적으로 조선이 더욱 硬直되는 계기가 되어 明나라에 대한 尊華意識은 더욱
짙어져, 明-淸 교체기에 현실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여 또 한 차례의 兵亂을 자초하였다.
倭亂 때 分朝活動을 하고, 제15대왕으로 등극한 光海君은 明-淸間에 중립외교로 마찰 없이
지냈으나 仁祖反正(1623)으로 廢位하고 옹립된 仁祖는 親明∙排金 정책으로 바꾸었으며,
後金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皇太極, 太宗]가 즉위하여 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仁祖 5년(1627) 丁卯胡亂(後金, 淸의 침입)으로 ‘兄弟之誼’를 맺고, 仁祖 14년(1636)
丙子胡亂으로 仁祖는 三田渡에서 치욕적인 三跪九叩頭의 禮로 淸 太宗에게 降伏하고
‘君臣之盟’의 나라가 되어 淸日戰爭으로 淸이 日本에 패할 때까지 ‘臣下의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역사의 고비를 보면 참으로 한심할 때가 많다. 특히 外敵이 侵略하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 防禦했으며 도움을 받지 못하면 屬國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新羅가 唐 나라의 도움을 받아 羅唐聯合軍이 百濟와 高句麗를 멸망시키고 三國을 통일한 것을
시작으로, 壬辰倭亂은 明의 도움으로, 丙子胡亂은 도움이 없어 屬國으로,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에서 승리한 日本은 朝鮮을 植民地로 만들었으며, 6∙25전쟁에서 大韓民國은 美軍과
UN군의 도움으로, 北韓은 中共軍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分斷狀態가 계속되고 있다.
地政學的인 觀點으로 半島에 살고 있는 나약한 韓民族의 運命인가 보다.
半島國家는 大陸과 海洋勢力의 侵入을 받을 수 있는 위치인 반면, 대륙과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地理的 조건을 갖추고 있는 위치이다.
같은 半島에 있던 강대한 伊太利半島의 로마는 유럽과 地中海沿岸 국가를 지배한
古代 최대의 帝國을 건설했었는데. 같은 半島國家인 韓民族의 운명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을 2회로 올린다.
2017.07.17 孤 山 朴 春 慶
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전쟁기념관 특별전(2-1)
(01) <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 포스터
(02) 展示에 들어가며
(03) 丙子胡亂 直前의 상황(1608.02.02~1636.04.11)
(04) 丙子胡亂 (1636.12.02~1637.01.30)
(05) 事大와 北伐 (1637.02.03~1658)
(06) 丙子胡亂의 記憶(1662~1895)
(07) 時調 <가노라 三角山아>
斥和派 淸陰 金尙憲이 胡亂 後 淸의 瀋陽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時調.
1. 朝鮮의 山河, 戰雲이 감돌다.
(08) 朝鮮의 山河, 戰雲이 감돌다.
(09) 明이 지고 後金이 떠오르다.
(10) 明 - 後金 - 朝鮮
滿洲實錄 遼陽 함락-滿洲實錄 瀋陽 함락-누르하치 초상-平壤城 奪還圖
(11) 만주실록 遼陽陷落 -1621년 요양함락 장면-
(12) 누르하치 초상 -淸나라 初代 皇帝 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
중국 淸나라의 創建者, 初代 皇帝(재위 1616~1626). 女眞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汗의 지위에 올라 國號를 後金이라 했으며 이는 明나라에
큰 위협이었다.
명과의 戰鬪 中에 病死하였으나 그가 확립해 놓은 기초 위에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국호를 大淸으로 고치고 年號를
崇德이라고 했다.
(13) 平壤城 奪還圖
宣祖 26년(1593) 1월 6일~9일 壬辰倭亂 때 朝∙明聯合軍의 활약으로 승리한 平壤城
탈환전투 장면이다.
(14) 督戰旗 – 鬼刀 – 紀效新書
=督戰旗 -경남 忠武市 統營 忠烈祠 소장 보물 440호 복제
明나라 皇帝가 李舜臣에게 보낸 八賜品 중의 하나로 전투를 督勵하는 깃발이다.
가로 16cm, 세로 63cm, 깃대 길이 178㎝, 남색 비단으로 만들고, 한가운데에
'凡軍臨敵不用命者處斷(무릇 군사로서 적을 만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
이라 세로로 쓰고, 또 좌우로 붉은 비단으로 된 '督戰' 두 글자를 오려 붙여 배접하였으며,
깃대 끝에는 길이 45.5cm의 창을 꽂았다.
*統營 忠烈祠 八賜品 -보물 440호-
李舜臣 將軍의 祠堂 統營 忠烈祠에 보관되어 있는 遺物로 이순신 장군의 戰功을 높이
평가한 明나라 황제가 보내준 것으로 당시의 社會 歷史的 상황을 잘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八賜品은 都督印 1개, 虎頭令牌) 1쌍, 鬼刀 1쌍, 斬刀 1쌍, 督戰旗 1쌍, 紅小令旗 1쌍,
藍小令旗) 1쌍, 曲喇叭 1쌍이다.
(15) 鬼刀 – 紀效新書
=鬼刀 -경남 忠武 統營 忠烈祠 소장 보물 440호 복제
明나라 황제가 李舜臣 장군에게 下賜한 八賜品 중의 하나로 鬼刀는 대장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칼자루를 龍과 귀신의 머리로 장식한 칼이다.
원래는 귀신과 용 사이에 아기귀신이 있어 발로는 용의 이빨을 밟고, 손으로는 어미귀신의
귀고리를 잡고 있었으나, 아기귀신이 떨어져 없어지고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紀效新書 -전쟁기념관 소장
중국 明나라 장군 戚繼光이 지은 兵書로 浙江縣 參將으로 있을 때 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하였다.
이 兵法을 浙江지방에서 나왔다고 浙江兵法이라고도 하며, 명확한 指揮編制와 連帶責任을
강조하는 束伍法을 채택하고, 鳥銃 ·藤牌 ·狼筅 ·長槍 ·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筅: 솔 선)
이 책이 朝鮮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宣祖 26년(1593) 1월 平壤城戰鬪 後였는데,
宣祖는 明나라 李如松의 군대가 <紀效新書>의 戰法으로 倭軍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입수하여 그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壬辰倭亂 이후 軍制改編은 <紀效新書>에 준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6) 이중로 정사공신교서(李重老 靖社功臣 敎書) -보물 1174-1호
-개인 소장/경기도박물관(龍仁市 器興區) 관리
仁祖反正 功臣 李重老를 靖社功臣 二等에 錄勳하고 관직과 토지·노비 등으로 포상하는
내용의 功臣敎書로 1·2·3등의 공신명단이 실려 있다.
*(癸亥)靖社功臣: 仁祖反正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17)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161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光海君 2년(1610) 訓鍊都監의 都廳 崔起南이 <武藝諸譜飜譯續集>에 <日本考>를 덧붙여
펴낸 兵書이다.
武人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拳法, 武器인 靑龍偃月刀, 夾刀棍, 倭劍 등의 사용방법을 그
림으로 그리고 옆에 한글로 풀어 썼다.
전시한 내용은 夾刀棍의 사용법으로 鐵騎兵을 상대할 때 쓰던 武術이다.
조선 중기 무예와 병법,< 日本考>는 물론 17세기 초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武藝諸譜飜譯續集 -보물 1321호-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18) 자암집(紫巖集) -1741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光海君 11년(1619) 朝∙明聯合軍이 後金과 치른 사르후전투에 출정한 紫巖
李民寏(1573-1649)의 文集으로 敗戰 후 포로가 되어 1년 반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苦楚를
겪은 것을 기록한 <柵中日錄>을 文集 卷五에 수록하였다. (*寏: 둘러싼 담 환)
앞에 小山 李光庭과 星湖 李瀷의 序文이 있고, 뒤에 慵窩 柳升鉉의 跋文이 있다.(*窩: 움집 와)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
17세기 초반 女眞族을 통일하고 後金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明나라와 대결, 明은 邊境을 침범하는 後金軍에 대항하여 토벌군으로 맞서는 한편 朝鮮에
援兵을 청하였다.
朝鮮은 姜弘立을 五道元帥로 임명하여 1만 3,000여 군사를 파병하여 1619년 明나라 提督
劉綎의 군과 합류하였다.
朝∙明聯合軍은 1619년 3월 누르하치의 本據地인 허투알라(赫圖阿砬)로 진격하던 중
사르후(薩爾滸)에서 後金軍과 遭遇한 전투에서 大敗하였다.
이때 명나라 4개 군단 중 西路軍은 壞滅되고, 이 패배로 동아시아의 패권이 明에서 後金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 충렬록(忠烈錄) -1621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光海君 11년(1619) 사르후전투에서 戰死한 武將 金應河(1580~1619)의 武功을 기리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전시된 내용은 사르후전투의 參戰背景과 고달픈 行軍 과정을 담고 있다.
(20) 조천도(朝天圖) -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仁祖 2년(1624) 明나라에 奏聞使로 파견된 正使 竹泉 李德泂(1566~1645) 일행이 行路를
그린 25점의 그림을 18세기 후반에 模寫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泂: 멀 형)
明淸交替期에 後金이 滿洲를 장악하여 陸路로 가지 못하고 위험한 海路를 선택한 모습으로
당시의 時代相을 잘 보여주고 있다.
<朝天圖>는 후대에 그린 <航海朝天圖>의 模寫本으로 보이며, ‘此古畵 趙參奉宅古畫’라는
글이 있어 趙參奉 집안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최응일 진무공신교지(崔應一 振武功臣敎旨) -162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崔應一을 振武功臣에 봉하는 敎旨이다.
최응일은 李适의 亂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江東縣監으로 재직 중이던 仁祖 2년(1624)
振武功臣 三等으로 錄勳되었다. 忠州營將을 지내던 인조 6년(1628) 9월 嘉善大夫가 되고,
같은 해 11월 漢豊君에 책봉되었다.
(22) 장만 영정(張晩 影幀)
洛西 張晩은 宣祖 24년(1591) 別試文科에 급제하고, 鳳山郡守, 都承旨,
咸鏡道觀察使, 仁祖反正으로 八道都元帥, 李适의 亂을 진압하여 振武功臣으로
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玉城府院君이 되었다.
(23) 남이흥 추증교지(南以興 追贈敎旨)
城隱 南以興은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 때 都元帥 張晩의 휘하에서
亂을 평정, 延安府使가 되고 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平安道 兵馬節度使 兼 寧邊府使로 1627년 丁卯胡亂 때 安州城에서 後金의
3만여 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무기가 떨어져 城이 함락되었다.
그는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恨이로다.”라며
적을 유인한 뒤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自決하였다.
領議政에 追贈, 府院君에 追封되고 安州의 忠愍祠에 배향되었다.
(24) 선사진 지도(宣沙鎭 地圖)
平北 鐵山郡에 있던 宣沙鎭을 그린 것으로 明나라 毛文龍이 주둔해 있던
街道를 그렸다.
*宣沙鎭은 鐵山郡 雲山面 仙岩里 남쪽에 있던 옛날 선암부락으로 <東山志>에
선사진에 1,000여 명의 군사 외에 兵船, 渡江船, 給水船들을 갖추어 놓고
국방과 해상수송을 보장했다고 하며, 西北海岸防禦의 要衝地였다.
(25) 갈림길에 선 朝鮮
(26) 丁卯胡亂이 일어나다
(27) 丁卯胡亂의 經過
(28) 충민사 자수(忠愍祠 刺繡)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일제강점기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丁卯胡亂 때 平南 安州에서 平安兵使 南以興 장군 등 3,000여 將卒들을
祭享하기 위하여 肅宗 때 건립한 賜額 祠堂 忠愍祠를 본떠 만든 刺繡그림이다.
충민사는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740호로 지정되었으며, 唐津의 忠壯祠와 더불어
高宗 8년(1871)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 때에도 보존된 不遷位 祠堂이다.
*唐津 忠壯祠
조선 중기의 武臣 忠壯公 南以興(1540~1627)과 그의 부친 南瑜의 神位를 모시는
사당으로, 충남 唐津市 大湖芝面 桃李里의 야산 중턱에 있다. (*瑜: 이름다운 옥 유)
(29)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27년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仁祖가 殉節한 振武原從一等功臣 南以興에게 특별히 奴婢를 下賜하는 敎書로
振武原從功臣은 1624년 李适의 亂을 평정한 공신이다.
*李适의 亂
仁祖反正 때 洪濟院에 反正兵力을 집결시킬 때 金瑬가 계획이 누설되었다고 나타나지 않아
李适이 대장으로 선출되어 군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여 反正을 성공시켰으나 늦게 나타난
김류와 심각한 葛藤을 빚었다. (*瑬: 드리울 류)
이괄은 反正 이후 左捕盜大將으로 漢城府의 치안유지를 담당했으나 金瑬, 李貴 등
西人 功臣들은 이괄을 배척하고 견제하였으며, 論功行賞 과정에서도 이괄은 김류와 이귀,
金自點 등보다 한 등급 아래인 靖社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反正 2개월 후 後金이 침입할 우려가 있다고 平安兵使 겸 副元帥로 임명되어 關西지방으로
파견되어 寧邊에 주둔하면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는데, 1624.03.06 李适이 逆謀를
꾀한다고 고발되어 그의 아들을 押送하러 오자 반란을 일으켰다.
03.26 이괄의 군대가 禮成江을 건너 南下하자 仁祖는 明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漢陽을
떠나 公州로 피란하였다
반군이 漢陽이 점령한 이괄의 난은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 國王護衛를 위한 御營廳이
漢陽의 방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으로 확대되고,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대가 반란 진압에
동원되면서 關西地方의 防禦體制가 크게 약화되어 丁卯胡亂과 丙子胡亂 때 조선이
後金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李适의 亂에 가담했던 韓明璉의 아들 韓潤 등은 建州衛로 도망하여 後金에 투항한
姜弘立의 휘하로 들어가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대와 함께 남하하기도 하였다.
(30) 활집[弓袋]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27년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이 사용하던 弓袋로 활을 담아 보관하던 활집이다.
일반적인 형태로 보아 멜방끈이나 刺繡 등 장식이 遺失된 것으로 보인다.
(31) 녹피방령포(鹿皮方領袍)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세기 말~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남이흥 장군이 입었던 갑옷받침(內甲)으로 사슴가죽으로 만들었으며 깃의 형태가
方形이므로 方領袍라고 한다.
왼쪽 앞섭 중앙부에 장군이 활에 찔려 묻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32) 활[弓]-화살[弓矢]-화살통[箭筒]
=활[弓]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세기 말~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이 사용하던 활로, 일반적인 활보다 매우 작고 대나무로 만든 것이 특징이며,
크기로 보아 실제 전투용이 아닌 護身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살[弓矢]/화살통[箭筒]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세기 말~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이 사용하던 화살과 화살통이다.
화살통에는 마디와 마디 사이를 구분 지어 牡丹文樣의 烙을 놓았다. (*烙: 지질 낙)
세밀하고 정교하게 새긴 烙竹畵의 문양이나 기능이 매우 세련되고 정밀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烙: 지질 낙)
(33) 곤룡포 답호(袞龍袍 褡穫)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세기 말~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褡: 옷 해질 답 *穫: 땅이름 호)
安州城에서 南以興이 殉國했다는 소식을 듣고 國葬을 지시한 仁祖가
葬禮에 참석하여 장군의 棺위에 덮어준 곤룡포로 보존처리를 통해 바탕 천에
殘存部를 덧대었다.
1991년 답호(옆 트임이 있는 있는 반소매 포)로 문화재명칭이 변경되었다.
*褡穫(褡護):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입었던 옆 트임이 있는 반소매 포.
(34) 추증교지(追贈敎旨)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1627년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安州에서 남이흥 장군이 殉節한 직후 내린 추증교지로 贈職은
‘大光報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經筵事 宜春府院君’이다.
(35) 남이흥 호패(南以興 號牌)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조선 중기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의 호패이다. 號牌는 신분증명서로 고려시대 恭愍王 3년(1354)에 시작된
戶籍法의 보조역할을 하며, 조선시대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身分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民丁의 수를 파악하는 技能도 있었다.
(36) 지휘봉[藤策]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藤: 등나무 등)
–16세기 말~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이 사용하던 지휘봉으로 등채, 등편이라고도 하며, 지휘봉은 軍이나 官僚들의
장신구, 護身具 등으로 사용하였다.
대나무 손잡이부분과 끝부분에 朱錫장식을 달아 마감하고, 20cm 크기의 붉은 헝겊으로
장식하고, 鹿皮로 꼰 끈을 동여매 터짐을 방지하였다.
(37) 김장생 초상(傳 金長生 肖像)
–조선시대 -국리붕앙박물관 소장(복제)
丁卯胡亂 때 兩湖號召使로 활약한 沙溪 金長生의 半身像으로 紗帽와
單鶴 胸背를 부착한 짙은 녹색의 團領을 입고 오른쪽을 향하여 拱手하였다.
金長生은 양호호소사로서 勤王兵을 모집하여 公州로 피란 온 世子를 호위하였다.
栗谷 李珥의 門下에서 修學하여 조선 中期 性理學과 禮學의 巨頭가 되었으며,
그의 예학은 아들 愼獨齋 金集에게 계승되고 尤庵 宋時烈에게 전해져
畿湖學派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38) 淸軍의 進軍路와 激戰地
2. 뒤바뀐 天下, 丙子胡亂
(39) 뒤바뀐 天下, 丙子胡亂
(40) 丙子胡亂
(41) 淸軍이 침입하다.
(42) 淸軍의 侵入과 仁祖의 南漢山城 入城
(43) 交涉의 시작과 主和-斥和의 葛藤
(44) 和議交涉의 絶頂
(45) 南漢山城 總攻擊과 降伏
(46) 마름쇠[鐵蒺藜] -조선시대 -전쟁기념관 소장 (*蒺: 남가새 질 *藜: 명아주 려)
4개의 가시가 4방으로 나와있는 뾰족한 쇠로, 적이 공격해 오기 전에 설치하거나 적이
다가왔을 때 던져 敵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용했다.
(47)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왼쪽) – 진무원종록권(振武原從錄券)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 –1721년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의 玄孫(孫子의 손자) 平淑 南益華가 남이흥 장군이 남긴 자료 등을 모아
만든 책으로, 치열한 安州城戰鬪의 奮鬪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진무원종록권(振武原從錄券) –17세기 초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南以興 장군의 아들 南斗極이 부친을 대신하여 받은 振武原從錄券이다.
錄券은 功臣에 책봉된 사람에게 지급하는 문서로 직함과 이름, 공신으로 책봉된 경위,
이에 따른 제반 特權 등을 기록하였다.
(48) 사패절목(賜牌節目) –1856년 -唐津 忠壯祠(宜寧 南氏 忠壯公派 大宗中) 소장
哲宗 7년(1856) 漢城府에서 발급한 完文으로 海美縣 西面의 13개 마을이 南以興 家門에
分給된 賜牌地임을 명시하고 이들 마을에 대한 侵奪을 방지하기 위하여 내린 문서이다.
*海美縣: 貞海縣과 餘美縣을 합한 충남 瑞山 지역의 옛 지명.
*完文: 조선시대 官府에서 학교, 書院, 村, 개인 등에게 발급하는 문서
(49) 사전 장총통(四箭 長銃筒) (앞)– 대승자 총통(大勝字 銃筒)
=사전 장총통(四箭 長銃筒) -조선시대 –전쟁기념관 소장
화살을 발사하는 銃筒의 하나로 世宗 29년(1447)~세종 30년(1448)에 개발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火藥兵器로∙藥筒∙激木筒∙觜∙冒柄으로 구성되었다. (*觜: 부리 취)
길이 430.5mm, 약통 길이 81.2mm, 外徑 38.2mm, 內徑 23.1mm, 두께 7.2mm이며,
발사 때 불을 붙이는 구멍 藥線穴이 뚫려 있다.
世宗 30년(1448) 12월 초6일의 <世宗實錄>에 처음으로 이름이 보이는 銃筒으로
<國朝五禮序禮>의 ‘兵器圖說’에 그림과 설명이 있다.
*激木筒: 화약이 폭발할 때 가스의 유출을 방지하고, 폭발력을 크게 하기 위해 약통의
앞부분에 끼우는 나무 격목
*취(觜): 격목통의 앞에 발사물인 화살(箭)이나 금속 등으로 만든 총알(銃丸)을 넣는 곳.
*모병(冒柄): 약통 뒷부분에 손잡이용 나무를 끼우는 곳.
=대승자 총통(大勝字 銃筒 -조선시대 –전쟁기념관 소장
勝字銃筒 가운데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승자총통으로 宣祖 12년(1572)
全羅左水使 등을 지낸 金遲가 개발한 것으로 휴대하기 편하여 陸上戰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遲: 더딜 지)
*勝字銃筒: 조선시대에 만든 휴대용 小火器.
(50) 임경업 추련도(林慶業 秋蓮刀) -충북유형문화재 300호-
-17세기 -忠烈祠(충북 충주시 단월동) 소장
추련도는 林慶業 장군의 寶劍으로 龍泉劍과 秋蓮刀가 있었으며, 용천검은 전쟁 시 직접 쓰던
검이었으나 6.25전쟁 때 분실되고, 추련도만 남아 있다.
총 길이 101.4cm, 칼날길이 86.7cm, 폭 6cm로 刀身은 鐵,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黃銅과 銅이다.
秋蓮刀라는 칼 이름은 이 검에 새긴 詩句에서 따온 것으로, 秋蓮(가을 연꽃)은 다른 연꽃이
피지 않을 때 의연하게 핀 꽃 즉 志操 있는 大丈夫를 상징한다.
秋蓮刀 양날에는 다음과 같은 劒銘詩 28자를 새겼다.
林慶業 秋蓮刀 劒銘詩
時呼時來 否在來(시호시래 부재래) / 시절이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 都在筵(일생일사 도재영연) /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 것이 모두 여기 있도다.
平生丈夫 報國心(평생장부 보국심) / 대장부 한평생 조국을 위한 마음뿐이니
三尺秋蓮 磨十年(삼척추련 마십년) / 석자 추련검을 십 년 동안 갈고 갈았도다.
-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전쟁기념관 특별전(2-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