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 그 기억과 반성-전쟁기념관 특별전(2-2)
(51) 임경업 서간문(林慶業 書簡文) -1612년 –忠州 忠烈祠 소장
仁祖 20년(1612) 12월 4일 林慶業 장군이 李大將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答信으로 親筆로 쓴
書簡文이며, 보기 드문 林慶業 장군의 遺筆이다.
李大將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편지내용은 겨울날 서로의 安危를 묻는 것이다.
*忠州 林忠愍公 忠烈祠 -사적 제189호- -소재지; 충북 忠州市 丹月洞
忠愍公 林慶業(1594~1646)장군의 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肅宗 23년(1679)에
건립, 1706년 장군에게 忠愍이라는 諡號를 내렸으며 英祖 3년(1727) 사당 이름을
‘忠烈祠’라고 했다.
임경업 장군은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 때 功을 세우고, 丙子胡亂 때 白馬山城과 義州城을
다시 쌓았다.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하던 遺品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大明忠臣朝鮮林將軍慶業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를 세웠다.
(52) 이시백 초상(李時白 肖像)
-17~18세기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釣巖 李時白(1581~1660)은 李适의 亂을 평정하고, 丙子胡亂 때
南漢山城 守禦使로 산성을 방어했다.
낮고 둥근 紗帽와 二品官이 착용하는 雲鶴胸背를 하고 있으며, 仁祖反正으로
靖社功臣 二等 延陽君에 책봉되어 二品官에 올랐을 때 모습으로 보인다.
(53) 별황자 총통(別黃字 銃筒) -조선시대 –전쟁기념관 소장
朝鮮 後期에 사용한 靑銅製 有筒式 火砲로 天∙地∙玄∙黃字銃筒 가운데 黃字銃筒에 해당되는
화포이나 원래의 황자총통보다 규모가 크고 製法에 차이가 있어 別黃字 銃筒이라고 한다.
總 길이 89.5㎝, 筒身길이 40.7㎝, 藥室 길이 30.6㎝, 柄部 길이 12.3㎝, 砲口지름 58mm이다.
*銃筒: 조선시대의 火砲로 別大碗口·대완구 등의 대포보다 약간 작은 天字·地字·玄字·
黃字銃筒이 있고, 小砲의 宇字·宙字·盈字·昃字 총통이 있었으며, 壬辰倭亂 때
李舜臣 장군이 주로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을 사용하여 이런 무기가 없었던 倭軍은
그 爆音과 火力에 놀랐다고 한다. (*碗: 사발 완 *盈: 찰 영 *昃: 기울 측)
(54) 신제총통(新製銃筒) (앞) - 승자총통(勝字銃筒)
=신제총통(新製銃筒)
조선초기에 개발한 指火式 點火器로 世祖 13년(1467) 왕이 臨瀛大君과 申叔舟 등에게
試驗 發射하게 했으며 전체길이는 6촌 5푼이다. (*瀛: 바다 영)
=승자총통(勝字銃筒)
불씨를 손으로 點火, 발사하는 靑銅製 有筒式火器로, 全羅左水使 金漬가 만든 휴대용
화기로 陸上戰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漬: 담글 지)
(55) 팔전총통(八箭銃筒) (앞) – 쌍자총통(雙字銃筒)
=팔전총통(八箭銃筒)
조선 초기에 사용했던 총통으로 細箭 8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총통이다.
<世宗實錄> 銃筒圖에 팔전총통의 그림이 처음 보이고, 기록상으로는 世宗 28년(1446)
1월에 처음 나타나 이 무렵부터 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자총통(雙字銃筒)
조선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소형화기의 일종으로 銃口에 화약과 실탄을 裝塡하고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有筒式火器로 일명 雙字勝字銃筒 또는 雙勝字銃筒이라고도 한다.
太宗시대 이래 연구해오던 一發多箭法을 적용한 것으로 銃身이 雙으로 이루어져 한쪽
총신에서 한번에 3발을 동시에 장전, 발사할 수 있어 동시에 6발을 목표에 집중사격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56) 질려포통[黎藜砲筒](왼쪽)-화약통(火藥桶) (*黎: 검을 려/여 *藜: 명아주 려)
=질려포통[黎藜砲筒] (*黎는 검을 여/려 인제 질이라고 하는지?)
둥근 나무통 속에 화약과 鐵로 네 끝을 뾰족하게 만든 마름쇠(菱鐵)를 넣어 폭발할 때
마름쇠가 날아가 오늘날의 700여개의 파편이 발사되는 클레이모아 지뢰처럼 破片이 적군을
殺傷하는 일종의 폭탄으로 大∙中∙小 세 가지가 있다.
=화약통(火藥桶)
화약을 담아 쓰는 통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하며, 휴대와 보관이 쉽게 만들었다.
거북머리모양의 뚜껑은 일종의 計量用器 역할을 하며 1발을 쏘는 화약의 量을
가늠할 수 있게 제작하였다.
(57) 南漢山城의 47일
(58) 斥和派와 主和派
(59) 斥和派 金尙憲
(60) 主和派 崔鳴吉
(61) 朝鮮을 구하라
(62) 여헌집(旅軒集)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원 소장처: 仁同 張氏 旅軒宗宅)
旅軒 張顯光의 文集으로 전시된 속집 敬遠錄은 丙子胡亂 당시 義兵을 모집한 張顯光의
활동을 金慶長이 기록한 것이다.
장현광의 일생뿐 아니라 그의 儒學者的 省察과 특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디.
(63) 장현광 영정(張顯光 影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원 소장처: 仁同 張氏 旅軒宗宅)
조선 중기의 학자 旅軒 張顯光(1554~1637)의 影幀으로 丁卯胡亂 당시
號召使로 義兵을 모집하였으며, 丙子胡亂 때도 의병을 모집하고 軍糧米를
모아서 보냈다.
理氣論, 心性論 등의 분야에서 빠짐없이 거론될 정도로 朝鮮 儒學의
巨木 중 한 명이다.
(64) 화산세가 필적(花山世家 筆蹟) -대전시문화재자료 23호-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花山은 安東의 옛 地名으로 병자호란 때 江華에서 殉節한 仙源 金尙容 이하 安東 金氏 門中
名賢들의 書翰, 詩文, 敬畏事 등을 기록하였다.
顯宗 초 안동 김씨의 후손인 海士 金聲根이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65) 仁祖, 降伏을 宣言하다
=仁祖 15년(1637) 丁丑 1월 7일 - <仁祖實錄> 33~35권 중에서
洪瑞鳳 등이 무릎을 꿇고 칸의 글을 받아 돌아오다. 그 글에”그대가 살고 싶다면 빨리
城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속히 一戰을 벌이도록 하라.
양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보면 하늘이 자연처분을 내릴 것이다”라고 써있다.
=仁祖 15년(1637) 丁丑 1월 18일
임금이 敵陣에 보낼 문서를 읽고 崔鳴吉에게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하게 하다.
최명길이 수정한 글을 보고 禮曹判書 金尙憲이 통곡하며 찢어버리고 “먼저 臣을 죽이고
다시 깊게 생각하라”고 아뢰다.
김상헌의 말뜻이 간절하고 측은해 世子가 목놓아 울다. 눈이 크게 오다.
(66) 仁祖의 降伏장면 浮彫碑, 三跪九叩頭 장면 浮彫
=仁祖 15년(1637) 丁丑 1월 30일
三田渡에서 임금이 세 번 크게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禮를 행하다.
임금이 밭 한가운데 앉아 進退를 기다리다 해질 무렵 드디어 都城에
돌아가게 되다.
임금이 松坡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百官들이 앞다투어 御衣를
잡아당기며 배에 오르다.
사로잡힌 婦女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며 울부짖었다.
人定 때(밤 10시경)가 되어 昌慶宮 養和堂으로 들어가다.
(67) 仁祖의 降伏장면 浮彫碑 (*2007.05.30 사진)
1982년 12월 김창희가 조각하여 文化財管理局(현재 文化財廳)이 松坡區 石村洞
어린이공원에 있는 三田渡碑 옆에 세웠으나 2010년 4월 三田渡碑를 원래 三田渡 자리인
蠶室洞 石村湖水 西湖로 옮기면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三跪九叩頭 (*跪: 꿇어앉을 궤 *叩: 두드릴 도)
중국 淸나라 때 시행한 황제에 대한 경례법으로 三拜九叩라고도 한다.
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한다.
(68) 三田渡碑(大淸皇帝 功德碑)
仁祖가 南漢山城에서 내려와 淸 太宗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碑로
몽골, 만주, 漢字 등 3개국의 문자로 새겼다.
(69) 서울 三田渡碑 -사적 101호- (*2017.02.14 사진)
丙子胡亂으로 淸에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淸 太宗의 요구로
그의 功德을 적어 仁祖 17년(1639)에 세운 비석으로 題額은 <大淸皇帝功德碑>이다
吏曹判書 白軒 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書藝家 吳竣이 楷書로 쓰고,
題額은 呂爾徵이 篆書體로 썼다. (*竣: 마칠 준)
碑身은 대리석, 龜趺는 화강암인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漢字로 쓰여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石村湖 주변에 세웠으나, 恥辱的인 비석이라고 高宗 32년(1895) 埋沒했던 것을
日帝强占期인 1913년 日本이 다시 세우고, 1956년 文敎部에서 國恥의 記錄이라고
다시 땅 속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漢江이 침식되면서 드러나 石村洞
어린이공원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2010년 4월 考證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蠶室洞 石村湖水 西湖 언덕으로 옮겼다
*白軒 李景奭(1595~1671)
仁祖 때 都承旨로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웠으며 胡亂 後, 仁祖의 간곡한 부탁으로
淸 太宗의 勝戰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三田渡碑의 碑文을 쓰고 白軒은 이 일로
글을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老論의 領袖 宋時烈 등 尊明事大의
명분을 앞세우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입으로만 斥和를 부르짖던 인물들에 의해
三田渡 碑文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宰相이었으며 일생 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淸白吏의 삶을 살았다.
文集에 <白軒集>이 있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전북 南原 方山書院 등에 祭享되었다.
그날을 기록하다
(70) 병자록(丙子錄)
仁祖 때 羅萬甲이 지은 병자호란 당시의 亂中日記로 仁祖 14년(1636) 12월 淸軍이
침입했다는 都元帥 金自謙의 狀啓를 받은 날로부터 이듬해 2월 8일 世子와 鳳林大君이
瀋陽으로 잡혀가기까지의 57일간을 담은 일기이다.
특히 南漢山城의 비참한 抗爭史와 仁祖의 굴욕적인 降伏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병자호란의
實相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71) 남한일기(南漢日記) -163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刑曹佐郞 등을 역임한 壽峴 石之珩이 仁祖 14년(1636) 丙子胡亂 당시 淸이 침입한 이후부터
45일간 南漢山城을 방어한 사실과 被侵狀況 등을 서술한 記錄物로 淸軍의 軍備狀況과
부대배치, 敵將의 人的 事項 등을 담았다. (*珩: 노리개 형)
오랫동안 세상에 보이지 않았으나 英祖 29년(1753) 廣州留守 李箕鎭이 한 책을 얻어
그 사실이 정확함을 알고 이것을 謄抄하여 세상에 알린 책이다.
(72) 난리일기(亂離日記)
南漢山城 入城 당시 仁祖를 護從한 司饔院 奉事 南礏의 기록으로 淸軍의 침입보고로부터
斥和派와 主和派의 상황인식, 戰後 處理에 이르기까지 丙子胡亂 전체에 걸친 관찰기록으로
萬海記念館이 소장하고 있다. (*饔: 아침밥 옹 *礏: 산 우뚝 솟을 급)
(73) 지천집(遲川集) -年代 未詳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主和論者 遲川 崔鳴吉의 詩文集으로 詩와 疏箚(上疏와 箚子), 啓辭와 雜著, 行狀과 碑誌 등을
수록하였다. (*疏: 소통할 소 *箚: 찌를 차)
卷3~5는 병자호란 終戰 後 瀋陽에 함께 억류되었던 金尙憲, 李敬輿 등과 나눈 詩들을
수록하였다.
전시된 卷11의 병자봉사는 主和論을 주장하는 이유와 대책에 대하여 실은
疏箚(상소와 차자)이다.
(74) 청음집(淸陰集) -1861년 –만해기념관 소장
斥和論者 淸陰 金尙憲의 詩文集으로 전시된 내용은 스승 尹根壽의 行狀이다.
尹根壽는 壬辰倭亂 때 왕을 護從하고 問安使, 奏請使 등으로 明 나라와의 외교를 여러 차례
담당한 인물로, 金尙憲의 大明義理와 척화론은 이 같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北伐과 富國强兵의 꿈
(75) 북벌과 부국강병의 꿈
*丙子胡亂은 비록 두 달 남짓한 짧은 전쟁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未曾有의 國難이라고
일컫는 壬辰倭亂에 버금가는 것이었고,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屈辱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明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淸나라에 服屬되어 1895년 淸日戰爭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歷史學者 E.H.카는 “歷史에는 假定이 없다”고 했지만, 만약 西人과 仁祖가 明나라에 대해
지나친 事大主義에 빠지지 않고 光海君이 추구했던 實利主義 노선을 이어갔다면 두 번에
걸친 戰亂뿐 아니라 오랫동안 중국과 맺어온 君臣關係를 청산하고 兄弟關係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76) 환향녀(還鄕女)
丙子胡亂의 後遺症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 수많은 孤兒들이 생기고 淸軍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女性의 문제도 심각하였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贖價를 받기 위함이었는데,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貧民으로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還鄕女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祖上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離婚문제가 조선의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으며 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指導層 남자들이 잘못하여 전쟁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환향녀들에게 자기들의 잘못으로
생긴 환향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없이 그녀들을 내치는 것이 조선 사회 지도층
양반들의 소행이었다.
*호로(胡虜)자식: 還鄕女들 중에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을
‘호로새끼’, ‘호로자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청나라에 아첨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들을 낮추어 ‘호로새끼’, ‘호로자식’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77) 김상헌 송별 시(金尙憲 詩) -1609년 –個人 김모현 소장
斥和를 주장한 金尙憲의 親筆 送別詩로 佐郞 竹溪 金存敬이 聖節使로 明에 조회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는 내용이다.
내용은 ‘추부 낭관 지내고 옥서 관원 자태인데 / 국서 높이 떠 받들고 황제궁궐 향해 가네
–후략-’ 등 성절사의 충절을 높이 사고 무사귀환을 바라는 내용이다.
*聖節使: 조선시대 明·淸의 皇帝와 皇后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使節.
*玉署: 弘文館 *樞府: 中樞院
(78) 윤집 간찰(尹集 簡札) -1636년 –만해기념관 소장
尹集의 친필로 仁祖 13년(1635) 7월 2일 父親 尹衡甲에게 쓴 편지로 과거시험 성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尹集은 南原 출신으로 字는 成伯, 호는 林溪, 仁祖 9년에 文科에 及第하고 說書, 校理를
역임하였으며 洪翼漢, 吳達濟와 함께 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諡號는 忠貞이다.
(79) 설교 시첩(雪窖 詩帖) -대전시유형문화재 27호- (*窖: 움 교)
-1641년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淸陰 金尙憲이 병자호란 때 斥和를 주장하다가 瀋陽에 4년동안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지은
紀行 漢文 詩帖으로 함께 잡혀갔던 晦谷 曺漢英이 한 질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시첩은 文集 淸陰을 보충하고, 병자호란과 관련 있는 역사자료일 뿐만 아니라
淸陰 金尙憲의 자필 원고 원본으로 書藝史의 귀중한 자료이다.
(80) 백헌집(百軒集) -1700년 –경기도박물관
三田渡碑의 碑文을 쓴 百軒 李景奭의 문집으로 온화하고 淳厚한 그의 詩에서 萬世의 치욕에
남을 비문작성의 짐을 짊어졌던 百軒의 悲哀를 짐작할 수 있다.
長孫 李羽成이 편집하고, 아들 眞養과 眞望이 肅宗 26년(1700)에 간행했다.
卷四의 ‘元孫大君 發行以西…’는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가는 元孫의 모습을 보고
비분강개하는 심정을 읊은 詩이다.
*<廣陵有感>에서는 丙子胡亂 당시 南漢山城의 치욕과 三田渡碑의 碑文을 지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하는 뜻을 읊었다
山城直北廣陵津 丁丑年中屬上春 忍復追言當日事 秖今空泣舊時臣 遙瞻金粟悲秋柏
誰挽銀河洗戰塵 終日雨霑成獨坐 百憂纏繞膽輪囷(산성의 북쪽 광릉 나루터에서 쳐들어 온 일
바로 정축년 초봄이었네. 어찌 차마 그때의 일을 되새기리오? 다만 지금 헛되이 눈물 뿌리는
옛 臣下인걸! 멀리 보이는 산은 金粟山(당나라 玄宗의 무덤이 있는 곳)인 듯 구슬픈 가을 속에
잣나무만 보일 뿐이니 그 누가 은하수를 끌어다가 전쟁의 티끌을 씻어 줄거나. 온종일 빗속에
홀로 앉아서 온갖 근심에 가슴 속이 뒤틀어지네.)
(81) 삼학사전(三學士傳)
尤庵 宋時烈이 편찬한 三學士의 傳記이다.
斥和論을 주장하다 瀋陽으로 잡혀가 죽은 三學士 洪翼漢∙吳達濟∙尹集의 約傳과 言行을
기록하고 그들이 올린 斥和疏의 주요부분과 瀋陽에서의 심문과정을 기록하였다.
*南漢山城에는 三學士의 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한 祠堂 顯節祠(경기유형문화재 4호)가 있다.
(82) 문정공 왕고간독(文正公 王考簡牘) -대전시문화재자료 22호- (*牘: 서찰 독)
淸陰 金尙憲과 조카 광찬의 편지 글을 淸陰의 손자가 粧帖 하였으며, 金尙憲이 72세 때
瀋陽 獄中에서 쓴 것도 있다.
文正公은 淸陰 金尙憲의 諡號이며, 청음의 글씨는 書藝史的으로 가치가 높다.
(83) 戰亂의 傷痕
(84) 오달제 묵매도(吳達濟 墨梅圖) -연대 미상 –만해기념관 소장 복제본
三學士의 한 명인 秋潭 吳達濟의 墨梅圖로, 吳達濟는 병자호란 때 淸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하다 포로로 瀋陽으로 끌려가 29세의 나이로 夭折하였다.
이 書畵에서 부드럽고 능숙한 淡墨 처리는 그의 높고 깨끗한 忠節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 하다.
妙筆吾東豈有二(묘필오동기유이)/오묘한 필체가 동방에 어찌 둘이 있으랴
觀圖仍忽感前事(관도잉홀감전사)/그림을 보니 문득 옛 일이 생각나네.
辭君不暫心忘國(사군부잠심망국)/임금을 떠났어도 잠시도 나라를 잊지 않았으니
對虜何嘗口絶詈(대로하상구절리)/오랑캐를 마주하고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네.
節義昭昭三子同(절의소소삼자동)/빛나는 절개와 의리는 세 사람이 같으며
孝忠炳炳一身備(효충병병일신비)/충효는 온전하게 한 몸에 다 갖추었네.
誰知嗣續終無傳(수지사속종무전)/끝내 후손이 없을 줄 누가 알았으리오
於此難諶福善理(어차난심복선리)/선행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치를 믿기 어렵네.
-乙酉臘月下澣題(을유납월하한제)/을유년 섣달 하순에 지음-
(85) 이완 지석(李莞 誌石) -17세기말 –경기도박물관 소장
丙子胡亂에 참전하고 孝宗의 北伐計劃에 깊이 관여한 李浣(1579~1627) 장군의 誌石으로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는 板石이나 圖板이다.
이 誌石은 靑華白瓷 材質로 총 23장 중 앞장 8장을 전시하였다.
(86) 송자대전판(宋子大全板) -대전시유형문화재 1호- -1787년 –우암사적공원 소장
尤庵 宋時烈의 文集木板으로 총 11,023판이다.
전시된 목판은 卷五의 <己丑封事> 내용의 일부로 北伐政策 실현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修政事以 攘夷狄者(수정사이 양이적자)/정사를 닦아 이적을 물리치라’는 句節은
對明義理를 지키고 北伐을 시행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드러난다.
(87)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국보 239호- (복제본)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北伐論者이며 老論의 領袖 尤庵 宋時烈의 초상이다.
*송시열은 金長生의 門人으로 畿湖學派를 正統으로 계승하였으며, 朱子의
가르침을 信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業으로 삼았다.
大同法을 반대하고, 朱子에 대한 절대적 신임이 지나쳐 그와 다른 사상이나
經典의 해석을 경계하고 주자와 다른 사상은 斯文亂賊으로 내몰았다.
(88) 雪辱을 꿈꾸다, 北伐
(89) 富國强兵의 꿈
(90) 병학지남(兵學指南)
明나라 장군 戚繼光의 <紀效新書>(18편) 중에서 군사훈련에 필요한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正祖 11년(1787) 王命으로 편찬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兵書이다.
군대의 調練, 陣法, 行軍, 호령 등에 대한 규정과 설명이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17세기 이후 朝鮮 練兵의 기본지침서로 활용하였다.
(91) 구포(臼砲) (*臼: 절구 구)
조선 후기에 사용한 청동제 碗口형태의 火砲이다.
砲身이 장방형의 목제 砲架 위에 고정되고, 목제 포가도 4면으로 고정시키는 철제
걸이장치를 부착하여 별도의 선박이나 城郭 또는 수레 위에 장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92)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 중기에 사용한 砲彈의 하나로 宣祖 때 軍器寺의 火砲匠 李長孫이 발명하였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憑鐵 등을 장전하고 碗口에 의하여 목표물에
발사하는 人馬殺傷用 폭탄이다. (*憑: 기댈 빙)
*宣祖 25년(1592) 임진왜란 때 경북 安康으로 진을 옮긴 慶尙左兵使 朴晋이 慶州싸움 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해군의 艦砲에도 이용하여 많은 적의 함선을
파괴했다.
(93) 사전총통(四箭銃筒)
指火式 點火法으로 발사되는 火器로 世宗 28년 1월 22일조에 `常時四箭銃筒 쓰는 것을
연습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초에는 실탄보다는 주로 화살(箭)을 발사하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4.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94)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95) 임경업전(林慶業傳)
仁祖 때의 명장 林慶業의 생애를 傳記體로 엮은 작품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뒤의 斥外思想, 특히 排淸思想이 全篇을 통해 그 심층에 깔려있다.
조선시대에 저작된 대부분의 軍談小說이 史實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하거나
虛構化한 데 비하여, 이 작품은 비교적 正史의 사실에 충실한 古代小說이다.
소설 속의 임경업은 李時白과 함께 南京에 使臣으로 가 內亂의 위기에 처한
明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朴氏夫人(道士 朴公의 딸)에게 大敗하여 退軍하는
龍骨大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기도 한다.
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던 林慶業은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를 推仰한 백성들은
그의 畵像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에 관한 說話도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일제강점기에 李輔相이 1930년부터 11여년에 걸쳐 林慶業傳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96) 서포만필(西浦漫筆)
조선 후기 肅宗 때의 文人 西浦 金萬重의 수필 및 詩畵評論集이다.
江華島가 淸軍에게 함락될 때 金萬重의 부친 金益兼은 殉節하고 滿朔의 어머니 尹氏가
배 안에서 그를 출산하여 어릴 때 이름을 ‘船上’이라고 했다.
책에는 <병자호란 때 尹履之의 절개>를 수록했는데 秋峯 尹履之는 丙子胡亂 때
廟社(종묘와 사직)를 따라 江華島로 피란했다가 적군이 침입하자 金尙容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는 “死國의 두 글자는 男兒로서 정해진 바이니,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는데 살기를 원
하지 않는다.”라는 유서를 奴僕에게 주어 妻에게 전하게 하고 김상용과 함께
江華城 南樓에서 焚死하였다.
(97) 박씨전(朴氏傳)
조선시대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소설로 朴氏夫人傳이라고도 하며, 병자호란의 國恥에 대한
反感에서 쓴 역사소설로 肅宗 年間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丙子胡亂을 배경으로 당시의 실존인물인 李時白과 가공인물인 그의 부인 朴氏夫人을
등장시켜 조국에 대한 충성과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 치욕적인 항복에 대한 정신적인
복수 등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였다.
주인공 박씨부인이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쳐 나라를 구한다는 줄거리로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내용을 담은 軍談小說이다.
(98) 유충렬전(劉忠烈傳)
作者·年代 미상의 고전소설로 조선 후기에 民間에서 널리 읽은 대표적인 영웅소설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劉忠烈이라는 영웅을 내세워 淸에 대한 敗北意識을 소설을 통해 解消,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奸臣 정한담과 오랑캐의 협공으로 皇帝가 오랑캐에게 항복할 위기에 처했을 때,
明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神的인 능력을 발휘하는 유충렬의 行績을 통해 병자호란의
울분을 설욕하고자 한 民衆의 염원을 담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淸나라에 대한 강한 민족적 敵愾心을 표현한 작품이다.
(99) 어린이 병자호란
어린이들에게 병자호란의 의미와 교훈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구성하였다.
(100) 전시실 입구의 현수막
言路杜塞(언로두새) – 用舍失宜(용사실의) – ‘閭閻愁歎(여염사탄) – 刑賞不信(형상불신) –
私謁之昌(사알지창)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