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 雲峴宮 특별전-서울歷史博物館
景福34回 戊戌年 두 번째 文化遺産踏査는 02.13(화) 10:30 23명(부인 6명 포함)이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 집결하여 企劃展示室에서 전시하고 있는 特別展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雲峴宮>을 관람하고 서울역사박물관 常設展示場을 관람한 후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향토음식점 ‘나무가 있는 집’ 光化門 本店에서 午餐으로 행사를 마감하였다.
이번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최대 컬렉션인 雲峴宮 遺物을 선보이는 자리로, 1993년부터
雲峴宮 所藏遺物을 10여 차례에 걸쳐 寄贈받아, 興宣大院君과 雲峴宮 관련 遺物 8,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雲峴宮 特別展示는 운현궁의 각 공간에 펼쳐진 興宣大院君의 政治와 藝術, 삶과 悔恨을 마음으로
感應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國王인 高宗보다 더 강력한 權威를 지녔던 시절의 老安堂, 高宗 妃 明成王后 閔氏가 嘉禮를
치른 老樂堂, 興宣大院君이 權力을 내려놓은 뒤 老年을 보낸 二老堂 등 운현궁의 공간을
興宣大院君의 回顧로 재구성하여 전시하였다.
특히 興宣大院君이 淸나라 保定府에 幽閉되었던 時期의 생활모습과 관련유품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이 시기 흥선대원군이 가족들에게 보낸 짧은 편지들, 孫子 李埈鎔의 생일선물로 그려 보낸
墨蘭畵, 幽閉生活記錄인 ‘石坡雜記’ 등을 볼 수 있으며, 成年이 된 맏손자 李埈鎔에게 보낸
‘石蘭圖’는 權力者가 아닌 평범한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埈: 높을 준 *鎔: 쇠 녹일 용)
또 展示에서는 雲峴宮의 財政狀況이 상세하게 기록된 장부 ‘統照須知’도 공개되어
1889~1892년 운현궁의 收入과 支出 등 세부 사항을 살펴볼 수 있다.
雲峴宮은 全國에 걸쳐 많은 莊土(*개인이 소유하는 논밭)를 보유하고 있어 상당한 地代收入을
올렸으며, 특히 貯水池나 洑를 가지고 있어 농민들로부터 매년 물稅를 받은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洑: 보 보)
이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부인 餘興府大夫人의 葬禮儀式과 절차 등이 기록된 ‘禮葬廳謄錄’도
선보이는데 禮葬廳은 高宗이 母后 사망직후 葬禮를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臨時官廳이다.
(*謄: 베낄 등)
또한 최근 운현궁으로부터 기증받은 ‘壬寅進宴圖屛風’은 1902년 望六旬(51세)이 된 高宗이
‘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해 새로운 皇宮인 慶運宮에서 열었던 宮中行事를 그린 병풍으로,
國立國樂院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과 同一本이나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雲峴宮 -사적 제257호-
雲峴宮은 興宣大院君이 살던 집으로, 高宗이 태어나 王位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潛邸)이기도
하다. 韓屋은 제일 앞 남쪽에 大院君의 사랑채인 老安堂이 자리잡고, 북쪽에 안채인 老樂堂은
高宗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興宣大院君이 정치를 하고, 宮闕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安東 金氏 勢道政治의 弊端을 제거하고 人事∙財政 등에서
대폭적인 改革을 단행하고, 壬辰倭亂으로 燒失된 景福宮을 重建하였다.
‘雲峴’은 당시 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世祖 때 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別號로 通用되어 書雲觀의 명칭인 ‘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雲峴[구름고개]’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雲峴宮’이라고 이름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興宣大院君이 즐겨 쓰던 我在堂을 비롯하여
대원군의 祖父 恩信君과 父親 南延君의 祠堂도 있었으며, 高宗이 昌德宮에서 雲峴宮으로
출입할 수 있는 敬覲門과 大院君 專用의 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覲: 뵐 근)
雲峴宮의 洋館은 본래 대원군의 孫子 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경에 건립되었으나 1917년
李埈 死後 純宗의 아우인 義親王의 둘째 아들 李鍝가 이어받았으나 生活苦에 시달린 이우의
後孫이 德成學院에 팔아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 (*鍝: 톱 우)
전시는 5부로 구성되었다.
1부 興宣大院君의 생애와 시선을 통해 본 雲峴宮
2부 壬午軍亂 이후 淸 나라 유폐시기 흥선대원군 생활상 최초 공개
3부 운현궁의 회계장부를 통해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4부 禮葬廳謄錄을 통해 부대부인과 대원군의 마지막 길을 따라간다.
5부 壬寅進宴圖屛風 소개
‘雲峴宮, 하늘과의 거리 한자 다섯 치’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기간; 2017.12.08~2018.03.4), 展示名 [雲峴宮, 하늘과의 거리 한자 다섯 치]는
<老樂堂記>에 있는 ‘去天尺五/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雲峴宮(興宣大院君)의 權勢가 하늘을 찌를 듯 莫强하여 ‘去天尺五’라고 표현했나 보다.
사진은 雲峴宮 특별전(4회)과 서울역사박물관(4회) 등 8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8.02.19 孤 山 朴 春 慶
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1); 雲峴宮 특별전(4-1)
(01) 서울역사박물관
(02)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 집결
(03)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雲峴宮’ 포스터
(04)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05) 展示를 열며
(06) 興宣大院君과 雲峴宮
(07) 雲峴宮의 옛모습
(08) 수선전도[首善全圖] -서울유형문화재 제296호 -1892년경
-延世大學校博物館 所藏 (複製)
‘雲峴宮’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지도로 古山子 金正浩의
<首善全圖>를 기초로 펜으로 筆寫하였다.
제목만 漢字로 쓴 뒤 한글로 ‘슈션젼도’라고 표기하였다.
1892년경에 제작했으며 下端 餘白에 門, 山 등을 英文으로 번역해
놓은 것으로 보아 美國人 宣敎師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首善’은 ‘首都’라는 의미로, 首善全圖는 곧 漢陽地圖(서울지도)를
가리킨다.
*首善全圖 木板 -보물 제853호-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19세기 한양의 지도인 <首善全圖>를 찍어 내기 위해 사용한 목판으로
목판의 제작은 1824~1834년에 古山子 金正浩가 참여했다고 한다.
(09)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 -1910년경
興宣大院君의 私邸를 ‘雲峴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高宗 즉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 전에는 ‘興宣君 집’, ‘大院君 宮’이라고 했다.
‘雲峴宮’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高宗實錄으로 “雲峴宮과 禁衛營 사이에
특별히 門을 세우라”고 기록하였다.
(10) 백자청화모란문’운현’명호[白瓷靑畵牡丹文’雲峴’銘壺] -19세기 (*銘: 새길 명 *壺: 병 호)
운현궁에서 사용하던 白瓷항아리로 牡丹 文樣을 靑畵 顔料로 그려 넣었다.
굽 안 바닥 중앙에 靑畵로 ‘雲峴’이라고 글씨를 새겼다.
(11) 매천야록[梅泉野錄] -1955년
憂國之士 梅泉 黃玹(1855~1910)이 高宗 元年(1864) 興宣大院君의 執政으로부터
1910년(純宗 4) 國權被奪에 이르기까지의 47년간의 한국 最近世 史實을 기술한
編年體로 서술한 韓末의 秘史이다.
첫 장에 高宗이 登極하고 興宣大院君이 執政하는 과정과 雲峴宮의 由來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특히, 興宣大院君을 비롯하여 韓末에 亂政을 主導했던 安東 金氏 勢道의 몰락 등
爲政者들의 行步와 혼란한 政局과 변천하는 社會相 및 內政∙外交의 중요한 사실을
時代順으로 거의 빠짐 없이 기록하여 舊韓末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12) 興宣大院君 肖像
(13) 興宣大院君의 家系
(14) 연령군 신도비명[延齡君 神道碑銘] -1720년
延齡君(1699~1719)의 神道碑銘이다.
연령군은 肅宗 15년(1719) 嘉會坊 집에서 사망하여 衿川縣 樊塘里에 장사 지내고 後嗣가
없어 昭顯世子의 曾孫子 密豊君 坦의 아들 商原君 糿으로 後嗣를 삼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衿: 옷깃 금 *樊: 울타리 번 *塘: 못 당 *坦: 평탄할 탄 *糿: 공 공)
그러나 商原君은 死後 부친과 형이 李麟佐의 亂에 참여했다는 罪目으로 英祖가 罷養하여
洛川君 縕이 系譜를 잇게 되었다. (*縕: 헌솜 온)
*延齡君 李昍 神道碑 -서울유형문화재 제43호 -높이 3.83m -花崗石碑
延齡君 李昍 神道碑는 肅宗 46년(1720)에 세웠으며 安國洞別宮碑라고도 불렀다.
(*昍: 밝을 훤)
연령군은 肅宗 25년(1699)에 제19대 肅宗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21세에 夭折하였으며
母親은 䄙嬪 朴氏이며 諡號는 孝憲이다. (*䄙: 복 명)
死後 京畿道 衿川縣 樊塘里(현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대방초등학교) 명빈 박씨의 묘소
근처에 묻혔으나 1935년 京城府 구획정리 때 묘소는 忠南 禮山郡 德山面
伽倻寺터(南延君墓) 근처에 어머니 명빈 박씨의 묘소와 함께 移葬되고 비석만 남아
있었으며, 神道碑는 1967년 8월 蘆原區 孔陵洞 陸軍士官學校로 移建 되었다.
碑文은 숙종 때 右議政을 지낸 李頤命이 짓고, 楷書體 碑文 글씨는 趙泰耉가 썼으며,
篆額은 丹岩 閔鎭遠이 썼다. (*頤: 턱 이 *耉: 늙을 구 *篆: 전자 전)
(15)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1850년 (*璿: 구슬 선 *譜: 족보 보)
조선시대 王室의 族譜로, 肅宗 때 처음 간행했으며 王이 卽位할 때마다 重校∙補刊하였다.
恩信君, 南延君으로 이어지는 興宣大院君 家門의 系譜를 확인할 수 있다.
(16) 백자청화 낙천군묘지[白瓷靑華 洛川君墓誌] -1737년
英祖 13년(1737)에 제작된 延齡君의 아들 洛川君 縕의 墓誌石으로 2枚의 靑華白瓷이다.
(*縕: 헌솜 온)
墓誌文은 2매에 걸쳐 本人의 先代, 生年, 一生, 死亡 年度와 葬禮에 대하여 썼다.
肅宗 즉위년(1710)에 태어나 長成해서는 英祖의 命으로 延齡君의 養子가 되어 洛川君으로
封해졌다.
(17) 완흥군책봉흥친왕 금책[完興君冊封興親王 金冊] -1910년
興宣大院君의 장남인 完興君 李載冕(1845~1912)을 興親王에 封한다는 내용의 金冊이다.
(*冕: 면류관 면)
紅色의 金寶 紋緞으로 금책의 앞∙뒷면을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간략한 線으로 龍紋을
새겼다. 내부의 글씨는 陰刻하고 붉은색 顔料로 채웠다.
(18) 은신군신도비탁본[恩信君神道碑拓本] -朝鮮 後期
興宣大院君의 祖父 恩信君의 神道碑 拓本으로 恩信君神道碑는 正祖 7년(1783)에
건립되었다.
恩信君은 정치적인 이유로 17세의 나이에 濟州島로 귀양가서 죽었다.
夭折한 그를 위해 正祖는 卽位 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으며, 純祖는 麟坪大君의 자손
南延君이 그의 家系를 잇게 하였다.
*恩信君(1755~1771) -본명; 李禛 (*禛: 복 받을 진)
莊獻世子(思悼世子)의 庶子로 正祖의 異腹동생이며 興宣大院君의 祖父로 어머니는
肅嬪 林氏이다.
앞서 英祖를 충동질하여 장헌세자를 굶어 죽게 한 金龜柱 일당의 誣告로, 恩彦君과 함께
官爵을 박탈, 英祖 47년(1771) 濟州로 유배되어 죽었다. 뒤에 追復되고, 延齡君 헌(昍)에게
嫡統 入籍되었다. (*昍: 밝을 헌)
1779년 楊州郡 金村(현 南楊州市 二牌洞)으로, 이후 楊州郡 和道面(南楊州市 和道邑)으로
移葬 되었으며, 2000년 이후 南延君의 6대손 李淸이 가족묘지를 화장하여
興宣大院君 墓所 좌측에 납골묘에 봉안할 때 납골묘로 봉안되었다.
高宗 8년(1871) 墓碑가 건립되어 養曾孫子 李載元이 墓碑文을 짓고, 양증손자 李載冕이
글씨를 썼다.
2005년 養父 洛川君, 養曾孫 興親王 등의 묘비와 함께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9) 雲峴宮의 空間變化
(20) 高宗 卽位 以前
(21) 도성도, <동여도> [都城圖,< 東輿圖>] -1856~1872년
<東輿圖> 제1첩에 수록된 都城圖로, 1856~187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雲峴宮이 있던 곳은 ‘니동(泥洞)’ 또는 ‘진골’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도에는 泥洞이라는
地名을 확인할 수 있다.
*都城圖 -보물 제1560호- -18세기 말 -91.5㎝ X 67.3㎝ -奎章閣 소장
道峯山과 北漢山을 배경으로 하면서 白岳山·仁王山·木覓山·駝駱山의 內四山을 중심으로
漢陽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山水畵처럼 그렸다. (*駝: 낙타 타 *駱: 낙타 락)
지도는 남쪽을 바라보며 政事를 살피는 國王의 視角에 맞추어 남쪽을 지도 상단에,
북쪽릏 지도 하단에 배치하였다.
餘白에는 행정구역, 都城의 크기와 도로상황 등을 기록했으며, 당시 法宮이던 昌德宮의
敦化門을 基點으로 삼았다.
*東輿圖 -보물 1358-1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보물 1358-2호(규장각 소장)
哲宗∙高宗 때 古山子 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筆寫本의 전국 채색지도로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分疊折帖式 형태이다. (*疊: 거듭 첩)
총 23첩으로 맨 앞 첩은 목록집,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地理를 그렸으며,
<大東輿地圖>와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東輿圖는 <大東輿地圖>의 筆寫本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그린 지도첩으로 뛰어난 그림과
글씨, 채색 등이 18세기 후반기 조선지도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22) 덕수궁 국장화첩[德壽宮 國葬畵帖] -1919년
덕수궁 국장화첩에 수록된 雲峴宮 慶松 사진으로, 사진첩에 ‘李太王 殿下가 어릴 때
木馬 삼아 타고 노시던 雲峴宮 李鍝公 저택 내의 二品松’으로 소개하고 있다. (*鍝: 톱 우)
慶松의 위치를 통해 舊 雲峴宮의 위치를 比定해 보면 洋館 뒤쪽인 것을 알 수 있다.
*德壽宮國葬畵帖; 高宗皇帝의 國葬 모습을 담은 화첩(1918년 간행)
(23) 高宗 卽位 以後
(24) 其他建物과 別墅 (*墅: 농막 서)
(25) <희죽헌> 편액[<戱竹軒> 扁額]
운현궁에 전해 내려오던 高宗의 御筆로 추정되는 <戱竹軒> 편액이다.
戱竹軒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承政院日記>에 高宗이 雲峴宮에
거둥했을 때 戱竹軒을 거쳐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운현궁 내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글씨의 書風이 운현궁에 전해오는 다른 高宗 御筆들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王으로 즉위한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藥房 提調 金世均과 副提調 洪兢周가 앞으로 나아가 안부를 묻고 나자, 이어 協陽門∙
肅章門∙進善門∙敦化門을 나와 禁衛營 大門을 거쳐 敬覲門과 恭覲門으로 들어와
戱竹軒에 이르렀다. –<承政院日記> 高宗 4년(1867) 4월 6일- (*覲: 뵐 근)
(26) 수작루기[壽酌樓記] 현판
壽酌樓記는 운현궁에 있던 壽酌樓에 걸려있던 懸板으로 수작루는 1865년 景福宮 重建이
한창이던 무렵 石瓊樓에서 ‘壽進寶酌’이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작은 樓閣으로,
興宣大院君이 운현궁 내 자신의 居處 옆에 건립했다고 한다. (*瓊: 구슬 경 *酌: 술 부을 작)
<壽酌樓記>는 領議政 등을 지낸 經山 鄭元容이 짓고 썼으며, 筆致는 松雪體의 筆意가
돋보이는 수려한 楷書이다.
陰刻한 글씨에는 푸른색 안료를 칠했다.
(27) 은파재 편액[銀波齋 扁額]
雲峴宮에 전해 내려오는 편액 중 하나이며, 銀波齋라는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銀波란 ‘天子(王)의 은혜가 百姓에게 널리 미치는 것이 물결과 같다’는 뜻으로 杜甫의
<八愛詩>의 詩句에서 引用한 것이다.
落款에 쓴 ‘明新齋’는 高宗의 일곱째 아들로 마지막 皇太子였던 英親王
李垠(1897~1970)의 雅號이다.
端雅한 行書로 <銀波齋>를 쓰고 ‘明新齋’라는 朱文方印을 찍었으며, 頭印으로 白文의
‘德潤身’을 찍었다.
*德潤身: 德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람이 덕이 있으면 그 인격이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나 보임을 이르는 말.
*八愛詩 -杜甫-
哀贈竟蕭條(애증경소조) /슬피 여겨 증직하는 것이 끝내 쓸쓸하나,
恩波延揭厲(은파연게려) / 은혜의 물결은 깊고 얕은 데에 뻐쳤다. (*厲: 갈 려)
*朱文方印: 글자나 그림 따위를 陽刻으로 새겨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붉게 나오는
四角 모양의 도장.
(28) 하토지식영언효사 유유천옹생상하서 편액[下土之式永言孝思 惟有天翁生祥下瑞 扁額]
-高宗御筆
下土之式 永言孝思(하토지식 영언효사)/아래로는 세상사람들의 본이 되고 오래도록 효도를
다하니 -<詩經> [大雅編]-
이 扁額은 高宗 元年(1864) 父親 興宣大院君 李昰應을 위해 쓴 글씨로 蓮堂에 걸었다고
한다. <詩經> [大雅編]의 句節을 따서 ‘아래로는 세상사람들의 본이 되고 오래도록 孝道를
다하니, 하늘이 感服하여 福을 내려준다.’는 내용이다.
款書에 ‘元年甲子夏 敬揭父主蓮堂(원년갑자하 경게부주연당)/원년에 아버님을 공경하여
삼가 연단에 써서 건다’라고 적었다. (*揭: 높이들 게/걸 게)
(29) <우석> 현판[<又石> 懸板] -純宗 御筆
純宗이 在位할 때 큰아버지인 李載冕의 雅號 <又石>을 써준 현판이다.
李載冕은 純宗이 世子일 때 교육을 담당하는 侍講院의 賓客(正二品)으로 있을 때 세자가
홍역에 걸리자 돌봐주었던 적이 있다. (*冕: 면류관 면)
이런 특별한 인연으로 純宗이 써준 현판으로 보인다. 글씨의 획이 적은 ‘又石’ 두 글자를
천진한 筆意로 썼다.
純宗의 雅號 ‘正軒’이 왼쪽 아래에 있고, 오른쪽 위에는 부드러운 篆書로 ‘御筆’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는 ‘萬幾餘暇’印을 찍었다.
(30) [完興君 李載冕]
*완흥군 이재면
이재종친/위덛이창/특서대훈/사이화대수장 –순종실록- (*邇: 가까울 이)
(31) 아소당명 병서[我笑堂銘 竝書]
麻浦區 孔德洞에 있던 興宣大院君의 별장인 我笑堂에 걸었던 현판이다.
我笑堂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경위와 이 터의 내력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 터는 당시 山勢가 매우 秀麗하고 鄭遂初 公의 齋室로 썼던 明堂이다. (*遂: 따를 수)
(32) 아소당기 현판[我笑堂記 懸板]
孔德洞에 있던 興宣大院君의 별장인 我笑堂에 걸었던 懸板으로 아소당을 짓게 된 동기와
규모, 위치 등에 대하여 적었다.
我笑堂은 我笑亭이라고도 부르는데 山勢가 秀麗한 明堂자리로, 大院君이 일찍이 자신의
묏자리로 쓰고자 별장 옆에 假墓를 만들어 놓았던 곳이다.
我笑堂記는 興宣大院君의 命으로 당시 左議政을 지낸 桂田 申應朝(1804~1899)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33) [石坡山莊] 편액 -高宗 御筆
鍾路區 付岩洞 仁王山자락에 있는 興宣大院君의 別莊 石坡山莊에 걸었던 扁額이다.
石坡亭(石坡山莊)은 원래 安東 金氏 勢道家인 游觀 金興根의 別墅인 ‘三溪洞精舍’였으나
후에 李昰應의 소유가 되면서 ‘石坡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昰: 여름 하)
‘甲子仲春 敬書以揭 鹿洞之室(갑자중춘 경서이게 녹동지실)’이라고 款書되어있어
高宗 元年(1864) 13세이던 高宗이 부친 興宣大院君을 위해 별장의 堂號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老安堂
(34) 老安堂 -2009.03.31 雲峴宮에서 촬영한 사진-
雲峴宮의 사랑채인 老安堂은 石坡 李昰應이 主로 사용하던 건물로 高宗 즉위 직후인
1864년에 건립하였다.
‘老安堂’ 堂號는 ‘老者를 安之하며’라는 論語의 글귀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되고
좋은 집에서 老年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다’라는 뜻이다.
老安堂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몸체 동쪽에 전면으로 양칸[樑間] 1칸, 도리칸[道理間]
4칸의 누마루와 背面으로 양칸 3칸, 도리칸 3칸의 온돌방과 툇마루가 연결된 ‘ㅓ’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35) [老安堂] 편액 -若阮 金正喜 글씨 集字 (*阮: 성씨 완)
款署에는 ‘書爲石坡先生 老阮(석파선생에게 써주다. 노완)’이라고 되어있어 秋史 金正喜가
직접 써준 것으로 보이나 老安堂은 秋史가 他界하고 10년 후에 건립된 건물이므로 秋史의
글씨를 集字하여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글씨는 木板에 직접 새긴 것이 아니고 종이를 여러 겹 붙인 두꺼운 板에 여러 겹의 종이를
붙여 만든 壯紙工藝 형식으로 제작하였다.
(36) 興宣大院君과 老安堂
(37) 노안당 상량문[老安堂 上樑文] -1864년
高宗 元年(1864년)에 제작된 老安堂의 上樑文으로 1994년 雲峴宮 補修工事 때 老安堂의
대들보에서 발견되었다.
상량문에 興宣大院君의 호칭을 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閤下라고 칭하고 있어 당시
흥선대원군의 地位를 알 수 있다. (*閤: 도장 합)
이 상량문은 발견 당시 ‘億年无彊’이라고 陽刻된 눌림쇠에 눌려 있었다.
(38) 노안당 눌림쇠[老安堂 鎭子] -<億年无疆> -1864년
(*无: 없을 무 *疆: 지경 강)
운현궁 보수 공사할 때 老安堂 上樑文과 함께 발견된 눌림쇠이다.
‘億年无彊’을 祝願하는 네 글자를 陽刻으로 새겼으며, 글씨는 秋史體
특유의 隸書로 특히 ‘无’字는 지금도 老安堂에 걸려있는 秋史의
海南 頭輪山 大興寺(사적 508호) ‘无量壽閣’ 模刻 扁額의 ‘无’字와
字形이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重修工事 때 老樂堂의 上樑文 눌림쇠도 같이 발견되었으며 모양은
같으나 크기는 老安堂 것보다 작은 세로 17.5cm, 가로 4.7cm이다.
*추사글씨를 集字해 만든 老安堂과 二老堂 편액을 비롯하여 이 눌림쇠의
글씨에서도 雲峴宮의 주인 興宣大院君이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얼마나
選好했는지 알 수 있다.
(39) 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에 대한 評 -호머 헐버트[大韓帝國滅亡史]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1886년 來韓하여 朝鮮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乙巳條約 후 高宗의 密書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國務長官과 大統領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韓國評論>을 통해 日本을 규탄하고, 高宗에게 헤이그密使 파견을 건의하는 등 한국의
國權回復 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40)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
-黑團領袍本] -1869년 (*袍: 도포 포)
興宣大院君이 50세 되는 해에 金冠朝服本과 함께 제작한 全身 肖像畵이다.
畵面 오른쪽에는 금관조복본과 동일한 親筆의 畵題가 있어 이 작품도
希園 李漢喆과 蕙山 劉淑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官服의 胸背에 麒麟 文樣을 확인할 수 있다.
(41) 기린흉배[麒麟文繡胸背] -조선 후기 (*繡: 수놓을 수)
흥선대원군이 常服 團領에 달았던 기린을 수놓은 흉배이다.
<經國大典> ‘禮典’에 麒麟 胸背는 大君의 禮遇로 사용한다고 기록하였다.
1882년 大院君 尊奉儀節 이후에는 거북 흉배로 바꾸었기 때문에 1882년 이전에
사용한 것으로 推定된다.
(42) 老安堂, 執權과 隱居의 空間
(43) 興宣大院君의 一次 執權期(1864~1873)
(44) 統治體制의 再整備
壯洞 金氏의 先祖 金祖淳은 글을 잘 짓고 일을 잘 처리하여 厚德하다고 칭찬의 말을
들었으나, 그 子孫들이 탐욕스럽고 완고하며 교만하고 奢侈하여 참으로 外戚이 나라를
망치는 禍의 시작이 되었다. -黃玹 <梅泉野錄>-
*壯洞 金氏: 安東 金氏 중에서 漢陽의 壯洞(壯義洞; 현 종로구 通義洞∙孝子洞)에 世居하여
壯洞 金氏라고 한다.
(45) 사례찬설[四禮簒說] -1867년 (*簒: 빼앗을 찬)
肅宗 때 學者인 興宣大院君의 五代祖 李爀이 纂述한 禮法書였으나 高宗 4년(1867)
흥선대원군이 다시 간행하였다. (*爀: 불빛 혁)
冠婚喪祭에 관하여 각종 禮書와 先賢들의 말씀을 다양하게 册錄하였다.
(46) 대전회통[大典會通] -1865년
高宗 2년(1865) 王命에 따라 領議政 趙斗淳, 左議政 金炳學 등이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法典이다.
<大典通編>을 底本으로 그 이후에 있었던 修交, 각종 條例들을 補完하여 정리하였다.
興宣大院君은 <六典條例>와 함께 <大典會通>을 편찬하여 법령체계를 정리함으로써
政治紀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47) 육전조례[六典條例] -1866년
조선시대의 唯一한 체계적인 行政法令 事例集이다. 大典會通을 편찬한 후 실제 시행되고
있는 行政法規集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행정법규와 慣例를 일괄 정리하여 高宗 3년(1866)에 완성하고, 다음 해에
頒布하였다.
興宣大院君이 統治體制 정비를 위해 실시한 政策 중 하나이다.
*吏·戶·禮·兵·刑·工의 六典을 綱으로 하여 그 밑에 해당 각 관청을 分屬시키고, 所掌事目·
條例·施行細則 등을 규정한 일종의 행정법규집이다. (*掌: 손바닥 장)
(48) 삼반예식[三班禮式] -1866년
大君과 王子, 그리고 官員들이 서로 지켜야 할 儀式法度에 대하여 興宣大院君이 편집한
上∙下卷 1책이다.
文官이나 蔭官이 武官을 만나면 자신보다 品階가 아무리 높아도 格式에 맞는 禮儀를 차리지
않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上卷에는 大君∙王子들과 正一品으로부터 從九品까지의 內職
文官들이 지켜야 할 儀式法度에 관한 내용과 蔭職의 文官 및 武官들이 지켜야 할 儀式法度,
모든 官員들의 座席에서의 의식절차, 말을 탈 수 있는 곳과 내려야 할 곳에 관한 條例,
사람을 만났을 때의 인사절차, 전형과 벌칙에 관한 조항 등이 실려 있다.
下卷에는 外職官員이 지켜야 할 의식법도에 관한 조항, 官員이 공무로 행차할 때의
의식절차에 관한 조항 등이 있다.
이 책 앞에는 高宗이 직접 “이 禮式을 따르되 영원히 고치지 말라”는 경계의 文句를 적어
놓았다.
*蔭官: 功臣 및 고위 官員의 子弟로서 蔭職이 제수된 자.
*蔭職: 科擧試驗에 의하지 않고 父祖의 功으로 얻어 하던 벼슬.
- 景福34 제69차 文化遺産踏査)8-2); 雲峴宮 특별전(4-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