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차 文化踏査; 公平都市遺蹟展示館(2-2) (5-2)
(48) 多樣한 商工業 物品들
(49) 남유백룡문 매병[藍釉白龍文 梅甁] -現代 -복제품
-중국 江蘇省 양저우[揚州]박물관 所藏
胴體에 龍 文樣이 있는 梅甁으로 龍文을 섬세하게 彫刻하고 문양의
윤곽선을 따라 外廓을 얕게 파내어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문양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청색 顔料를 발랐다.
(50) 백자청화 편[白磁靑畵 片]
① 白磁靑畵龍文 胴體部片 -16~17세기 -公平洞 42번지 出土 (*胴: 몸통 동)
② 白磁靑畵 草花文鉢 底部片 -16~17세기 -공평동 47번지 出土
③ 白磁靑畵 翼龍文鉢片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출토 (*鉢: 바리때 발)
④ 白磁靑畵 菊花文底部片 -17~18세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⑤ 白磁靑畵 波濤文搌 楪匙片 -16~17세기 -공평동 64번지 출토
(*搌: 펼 전 *楪: 마루 접 *匙: 숟가락 시)
⑥ 白磁靑畵 花唐草文 底部片 -17~18세기 -공평동 49번지 출토
⑦ 白磁靑畵 唐草文搌 楪匙片 -17~18세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⑧ 白磁靑畵 花唐草文 楪匙片 -16~17세기 -공평동 55번지 출토
(51) 참조기 이석[石首魚 耳石] -15~16세기 -공평동 56번지 출토
公平洞遺蹟의 朝鮮前期 層위에서 총 2,600여개의 참조기 뼈가 건물터의 한 편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다. 참조기의 귀 안쪽 뼈인 耳石의 個數(한 마리 당 2개)를 기준으로 참조기의 數를
추산하면 대략 1,300여 마리에 이른다. 18세기 조선시대의 農業書 <增補山林經濟>에는
조기를 石首魚라고 불렀으며 17세기를 지나면서 먹거리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公平洞에서 발굴된 침조기의 뼈를 통해서 많은 量의 참조기가 실제로 消費된 것을 알 수 있다.
(52) 生活用品
(53) 陶器 片 -16~17세기 -공평동 43번지 출토
一括 出土된 用途未詳의 陶器片이다. 도기항아리 등의 깨진 조각을 둥글게 갈아 다양한
형태의 圓板을 만들었다. 놀이에 쓰거나 물건을 셈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 가능했을 것이다.
(54) 장기[將棋]짝 -16~19세기 -淸進地區 출토
白磁와 玉石琉璃, 陶器, 차돌 등 다양한 材質로 만든 장기짝이다. 글자는 兩面에 陰刻으로
새기거나 墨書로 쓰는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琉: 유리 유 *璃: 유리 리)
(55) 陶製人物像(왼쪽) – 白磁陰刻鶴文 甁
=陶製人物像 -15~16세기 -공평동 44번지 출토
작은 粘土人形으로 사람이 ‘大’자로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했다.
얼굴에 짧은 陰刻線으로 눈과 입을 새겼다.
=白磁陰刻鶴文 甁 -15~16세기 -공평동 19번지 출토
口緣部가 깨진 白磁甁으로 몸통에 날개를 펴고 있는 鶴과 서있는 鶴을 간략한 陰刻線으로
새겼다.
(56) 백자 뚜껑[白磁 蓋](왼쪽부터) – 청자 돈편[靑磁 墩片] –
청자상감 투각문 돈편[靑磁象嵌 透刻文 墩片]
=백자 뚜껑[白磁 蓋] -16~17세기 -공평동 64번지 출토
큼직한 白磁뚜껑조각으로 중앙에는 손잡이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다.
=청자돈편[靑磁 墩片]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출토 (*墩: 돈대 돈)
청자로 만든 墩(*받침돌)으로 밑부분 일부만 남아있다. 草文을 透刻技法으로 새기고
蓮瓣文도 새겼다. (*瓣: 외씨 판)
=청자상감 투각문 돈편[靑磁象嵌 透刻文 墩片] -16~17세기 -공평동 58번지 출토
靑磁로 만든 墩으로 일부만 남아있다. 綠灰色 釉藥을 썼으며, 唐草文 무늬가 남아있다.
(57) 祭器
(58) 흑유자 삼족향로[黑釉磁 三足香爐] -15~16세기 -공평동 46번지 출토
黑釉磁 香爐로 목의 안쪽에 ‘ㄴ’자로 꺾인 귀가 달려있다.
底部에는 3개의 다리가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다.
(59) 백자합 신[白磁盒 身](왼쪽) - 백자삼족향로[白磁三足香爐]
=백자합 신[白磁盒 身] -16~17세기 -공평동 33번지 출토 (*盒: 합 밥)
백자합의 몸통으로 뚜껑과 맞물리는 촉이 짧게 올라와 있다.
몸통은 曲線으로 좁아 들어 굽으로 연결된다.
= 백자삼족향로[白磁三足香爐] -16~17세기 -공평동 63번지 출토
그릇의 목과 다리가 대부분 사라진 백자향로이다. 목 아래에는 양쪽에 2개의 귀가
있었던 흔적이, 바깥에는 3개의 다리가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다.
(60) 청동접시[靑銅楪匙](왼쪽) - 청동접시[靑銅楪匙]
=청동접시[靑銅楪匙]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청동접시로 테두리가 짧게 수직으로 내려오고 높은 굽으로 연결되며 굽은 斜線으로
벌어진다.
=청동접시[靑銅楪匙]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몸체의 基軸線이 斜線으로 벌어진 높은 굽으로 연결된 청동접시이다.
굽의 안쪽에는 동그란 리벳(rivet) 자국이 있다.
(61) 청동향로[靑銅香爐]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장타원형의 胴體에 짧은 목이 달려있는 청동향로로, 3개의 다리가 부착되었으나 2개만
남아있다. ‘ㄷ’자형의 귀가 함께 출토되었다.
(62) 청동 합[靑銅 盒](왼쪽부터) – 청동 합 뚜껑[靑銅 盒 蓋] - 청동 합[靑銅 盒] –
청동 합 뚜껑[靑銅 盒 蓋]
=청동 합[靑銅 盒]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청동합의 몸통으로 뚜껑과 한 쌍을 이루는 그릇으로 몸체의 일부가 찌그러졌다.
=청동 합 뚜껑[靑銅 盒 蓋]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청동합의 뚜껑으로 몸통과 한 쌍을 이룬다. 그릇에 ‘千’, 壽’, 萬’, 歲’의 글자를 새겼다.
=청동 합[靑銅 盒]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몸통 아랫부분에서 곡선으로 줄어드는 청동그릇으로 몸통이 눌려 찌그러졌다.
=청동 합 뚜껑[靑銅 盒 蓋]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65번지 출토
청동뚜껑으로 윗면 중앙에 圓形의 테가 있고 基軸線은 그 外廓 斜線으로 벌어진다.
(63) 陶磁器
(64) 銘文 磁器
(65) 公平洞 遺蹟 출토 銘文磁器 -15~18세기
1. 內用, 用 2. 玄 3. 天 4. 셔 5. 西 6. 地 7. 地 8. 정그니 9. 막비 10. 은비
11. 덕향 12. 귀금 13. 香玉 14. 淑 15. 綾 16. 天 17. ⓧ 18. (부호) 19. 郞
20. 左, 癸未
(66) 도기 양이 호[陶器兩二壺] -18~19세기 -공평동 49번지 출토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陶器항아리이다. 안쪽에는 拍子痕이 있으며
外面은 높은 온도에서 구워 전체적으로 光澤이 감돈다.
(*拍: 칠 박 *痕: 흔적 흔)
*拍子: 土器를 만들 때 바탕 흙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는 데 쓰던 연장
(67) 도기시루 저부[陶器甑 底部](위→시계방향)-흑유자 호[黑釉磁壺]-도기호[陶器壺]-
도기양이호[陶器兩二壺]-도기호[陶器壺]-도기호[陶器壺]
=도기시루 저부[陶器甑 底部] -19세기~일제강점기 -공평동 19번지 출토
밑부분만 남은 陶器시루이다. 항아리를 구은 다음 실제로 쓰던 과정에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시루나 화분으로 사용하기 위해 바닥 면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었다. (*甑: 시루 증)
=흑유자 호[黑釉磁壺] -18~19세기 -공평동 44번지 출토
灰褐色 胎土에 黑褐色 釉藥을 입힌 흑유자 항아리이다. 굽이 제대로 제작되지 않아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釉: 광택 유)
=도기호[陶器壺] -15~16세기 -공평동 57번지 출토
작은 陶器항아리로 죽은 사람의 來世生活을 위하여 무덤에 副葬한 明器로 보인다.
=도기 양이호[陶器 兩二壺] -16~17세기 -공평동 33번지 출토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도기항아리이다. 胴體는 둥글 납작하고 口緣部는 외반한다.
=도기호[陶器壺] -15~16세기 -공평동 63번지 출토
몸통이 둥근 도기항아리로 구연부 일부가 缺失되었다.
=도기호[陶器壺] -15~16세기 -공평동 63번지 출토
여러 줄의 線紋, 波狀紋을 개긴 도기항아리이다.
(68) 이문 안길 작은 집
(69) 이문(里門) 안길 작은 집
*里門: 동네 어귀에 세운 문, 일명 閭門
(70) 청동국자[靑銅棘匕](1) ~ 백자접시[白磁 楪匙](8)
① 청동국자[靑銅 棘匕] -15~16세가 -공평동 55-1번지 (*棘: 가시 극 *匕: 비수 비)
② 청동 숟가락[靑銅 匙] -16~17세가 -공평동 64번지 (*匙: 숟가락 시)
③ 칠기 잔[漆器 盞] -16~17세기 -공평동 65번지
④ 백자장군[白磁 橫缶] -15~16세기 -공평동 55-1번지 (*缶: 장군 부)
⑤ 백자 호[白磁 壺] -16~17세기 -공평동 55-1번지
⑥ 분청자상감 초문접시[粉靑磁象嵌 草文楪匙] -15~16세기 -공평동 55-1번지
⑦ 백자 접시[白磁 楪匙] -15~16세기 -공평동 57번지
⑧ 백자 잔[白磁 盞] -15~16세기 -공평동 56번지
(71) 청동 솥[靑銅 鍑](왼쪽) – 청동 동이[靑銅 盎]
=청동 솥[靑銅 鍑] -18~19세기 -공평동 38번지 (*鍑: 솥 복)
胴體의 일부가 결실된 청동 솥이다.
=청동 동이[靑銅 盎]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盎: 동이 앙)
동이는 주로 물을 긷는데 사용하는 그릇이다. 손잡이와 연결된 부분은 三葉形으로
장식하였다.
(72) 청동접시[靑銅 楪匙](왼쪽) – 청동 전접시[靑銅 搌楪匙] (*搌: 펼 전)
=청동접시[白磁 楪匙](왼쪽) -16~17세기 -공평동 55-1번지
창동접시 굽 안쪽에 ‘下’자를 새겼다.
=청동 전접시[白磁 搌楪匙]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搌: 펼 전)
동체가 낮고 평평하며 넓은 전모양의 테두리가 있다.
(73) 청동거울[靑銅鏡](1) - 청동거울[靑銅鏡](2)
=청동거울[靑銅鏡](1)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청동으로 제작한 거울로 뒷면 중앙에 꼭지가 달려있으며 ‘梵’자를 새겼다.
=청동거울[靑銅鏡](2)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청동으로 제작한 거울로 뒷면 중앙에 꼭지가 달려있으며 주위에 菊花文樣을 배치하였다.
(74) 청동거울[靑銅鏡](3) – 철제가위 편[鐵製 剪刀片(4) – 청동 담뱃대[靑銅 煙竹](5)
=청동거울[靑銅鏡](3)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손잡이가 있는 청동거울로 뒷면에는 文樣이 없고, 앞면은 약간 볼록하다.
=철제가위 편[鐵製 剪刀片(4) -16~17세기 -공평동 37번지 (*剪: 자를 전)
鐵로 만든 가위로 동체의 절반만 날의 중앙은 圓頭釘으로 고정되었었다. (*釘: 못 정)
=청동 담뱃대[靑銅 煙竹](5) -18~19세기 -공평동 55-1번지
담뱃잎을 넣는 대통 부분과 설대가 남아있다.
(75) 백자연적[白磁硯滴](6) – 목제 등잔받침대[木製燈盞臺](7) – 청동 초받침[靑銅 燭臺](8)
=백자연적[白磁硯滴](6)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蓮峯形의 백자연적으로 하단부에 出水口가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으며 용량은 30cc이다.
=목제 등잔받침대[木製燈盞臺](7) -16~17세기 -공평동 18번지
양쪽 가장자리에 2개의 方形구멍이 있어 등잔대를 거치할 수 있게 했다
=청동 초 받침[靑銅 燭臺](8) -16~17세기 -공평동 49번지
청동으로 만든 촛대 받침이다.
(76) 청동삼족화로[靑銅三足火爐]와 철제인두[鐵製 熨斗]
=청동삼족화로[靑銅三足火爐] -16~17세기 -공평동 63번지
청동화로 3개의 다리 중에서 1개만 남아있었으나 보존처리를 거쳐 2개를 復元하였다.
=철제인두[鐵製 熨斗] -16~17세기 -공평동 63번지 (*熨: 다릴 울)
철제 인두 머리의 평면 모습은 長方形이고 斷面은 5각형으로 코가 뾰족하다.
끝에는 나무손잡이를 끼우기 위해 기다란 촉이 있다.
(77) 목제 나막신[木履] -16~17세기 -공평동 45번지(좌), 55번지(우) 출토
목재 나막신의 평면모습은 타원형과 장방형이다. 밑면에는 2개의 굽이 부착되었으나
磨耗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履: 신 리/밟을 리)
(78) 里門안길과 石築
(79) 里門안길과 石築
(80) 綾城 具氏 家屋과 里門
(81) 綾城 具氏 家屋의 變遷
(82) ‘구수영’명 패찰[‘具壽永’銘 牌札] -15~16세기 -淸進 12-16地區 출토
上部가 사라진 패찰로 材質은 石灰質 계통의 石材로 추정된다.
앞면에 ‘臣 具壽永’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앞면을 金으로 칠했다.
패찰의 주인공인 具壽永의 家屋이 公平洞 遺蹟의 북동쪽에 있고
그 隣近인 淸進洞 遺蹟에서 그의 패찰이 발견되었다.
*具壽永(1456~1524) -朝鮮 前期의 武臣 -綾川府院君 (*綾: 비단 능)
中樞府知事 具致洪의 아들로 世祖의 동생 永膺大君의 사위이다.
折衝將軍, 中樞府知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敦寧府知事, 掌樂院 提調,
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中宗反正 後 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綾川府院君에 봉해졌으나 燕山君의 忠僕이라는 彈劾으로 中宗 4년(1409)
罷職되었다.
(83) 近代 公平洞 市廛 거리의 변화
(84) 典洞 골목길
(85) 10호 建物 趾
北東-南西 방향으로 배치된 긴 一字形 집으로 측면이 3칸이다. 礎石을 설치하기 위해
地面을 圓形으로 파고 모래를 채운 立砂獨立基礎가 남아있고 그 위로 積心石이 발견되었다.
건물터 북동쪽 내부에서 지름 130cm 내외의 구덩이에서 祭祀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그릇과 청동거울, 正方形 창살의 窓戶 등이 출토되었다.
*積心石: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86) 입사지정[立砂地定]
(87) 立砂地定
(88) 壁體基礎 石列
(89) 14호 建物 趾
가운데 마당이 있는 ‘ㄷ’자 집으로 雜石獨立基礎가 남아있고 礎石, 基礎 石列 등과 건물터의
北東-南西쪽으로 연결되는 排水路가 확인되었다. 남동쪽에서는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1칸규모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道具를 만들 덩이쇠로 추정되는 圓形 鐵製片이 출토되었다.
(90) 15호 建物 趾 (오른쪽)
一字形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터와 그 동쪽에 2칸 x 1칸의 附屬 건물터가 나란히 있다.
건물터 동쪽의 바깥쪽 경계를 따라 方形石材로 바깥쪽 면을 맞춘 벽체의 基礎 石列이
확인되었다. 북쪽과 서쪽에는 排水路가 있으며, 건물터 외부 북서쪽에는 조사 때 드러난
앞선 時期의 건물터 礎石을 복원하였다.
(91) 17호 建物 趾
정면 2칸, 측면 1칸의 一字形 집으로 건물의 동쪽 앞면에 마당이 있고, 垈地의 동쪽과 북쪽
경계에서 담장이 확인되었다. 북쪽 칸은 木炭과 함께 고래둑이 확인되어 온돌방으로 추정된다.
건물터와 담장 일부를 복원하였다.
(92) 公平빌딩이 남긴 課題
(93) 公平빌딩이 남긴 課題
(94) 近代消費文化
(95) 近代消費文化
(96) 近代消費文化
- 제81차 文化踏査; 피맛골-大韓民國歷史博物館 (05-3)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