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第十代 燕山君과 居昌郡夫人의 燕山君墓 -사적 제362호 -서울 道峰區 放鶴洞
燕山君墓는 朝鮮 제10대 燕山君과 居昌郡夫人 愼氏의 墓所로 大君墓制로 조성했다.
雙墳으로 屛風石과 欄干石을 설치하지 않고, 文人石 2쌍, 望柱石, 長明燈, 魂遊石을 배치했다.
앞에서 보아 왼쪽이 燕山君墓, 오른쪽이 居昌郡夫人墓所이며, 각 封墳 앞에는 墓標石을 세웠으며,
墓所 入口에는 齋室이 있다. 같은 墓域 안에는 太宗의 後宮 義貞宮主 趙氏의 墓所, 燕山君의 딸
徽順公主와 사위 綾陽尉 具文暻의 雙墳이 있다. (*暻: 볕 경)
中宗 1년(1506) 燕山君이 流配地 江華 喬桐에서 31세로 他界해 江華島에 묘를 조성했다.
이후 中宗 7년(1512) 居昌郡夫人 愼氏가 中宗에게 墓所移葬을 요청해
陽州 海村(現 道峰區 放鶴洞)에 太宗의 後宮 義貞宮主 趙氏의 墓所 위쪽으로 移葬했다.
그 후 中宗 32년(1537) 居昌郡夫人 愼氏가 66세로 他界하자 燕山君墓 왼쪽에 묘를 조성했다.
* 義貞宮主 趙氏의 墓가 燕山君墓域에 있는 理由
본래 燕山君墓域은 世宗의 四男 臨瀛大君의 땅이었다. 臨瀛大君은 王命으로 後嗣없이
세상을 떠난 두 後宮의 祭祀를 맡게 되었는데, 한 명은 太祖의 後宮 誠妃 元氏이고, 또 한 명은
太宗의 後宮 義貞宮主 趙氏이다. 世宗 31년(1449) 誠妃 元氏가 他界해 먼저 墓를 조성하고,
端宗 2년(1454) 義貞宮主 趙氏가 他界하자 현재 위치에 墓를 조성했다. 이후 臨瀛大君의
長子 烏山君 李澍의 묘가 조성되면서 烏山君派에서 墓域을 관리했다. 中宗 7년(1512)
居昌郡夫人 愼氏가 燕山君墓의 移葬을 요청해 臨瀛大君의 땅인 현재 위치에 移葬했다.
臨瀛大君은 居昌郡夫人의 外祖父로, 臨瀛大君의 첫째 사위가 居昌郡夫人의 父親 愼承善이다.
즉, 居昌郡夫人 愼氏는 外祖父인 臨瀛大君의 땅에 燕山君墓를 移葬한 것이다.
(*瀛: 바다 영 *澍: 단비 주)
*燕山君(1476~1506) -在位: 1494. (陰)12~1506.09
燕山君은 成宗과 廢妃 尹氏의 아들로 成宗 7년(1476)에 태어났다. 成宗에게는 長子인 燕山君은
成宗 10년(1479) 生母 尹氏가 廢妃되자 繼妃 貞顯王后 尹氏의 손에서 자랐으며, 貞顯王后를
生母로 알고 자랐다. 成宗 14년(1483) 王世子로 책봉되고, 成宗 25년(1494) 成宗이 昇遐해
王位에 올랐다. 卽位 初에 成宗의 墓誌文을 읽으면서 자신이 貞顯王后가 아닌 廢妃 尹氏의
蘇生임을 알고 衝擊을 받았으나, 왕으로서의 位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위 3년 동안은
별 문제 없이 國政을 운영했으나, 燕山君 4년(1498) 戊午士禍(金馹孫 등 新進士類가
柳子光 중심의 勳舊派에게 士林 사림이 禍를 입은 사건으로 金宗直의 <弔義帝文>이 원인이
되었다.)로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燕山君 10년(1504) 甲子士禍(生母 廢妃 尹氏의 賜死事件을
이용해 勳舊 및 士林派들이 任士洪 중심의 戚臣派를 제거한 사건)로 많은 사람들을 處刑했다.
戊午士禍 이후 政事에 관심을 두지 않아 經筵을 폐지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國庫가 바닥 났으며,
잔혹한 刑罰로 포악한 性情을 보여 王의 資質을 잃었다. 결국 燕山君 12년(1506) 勳舊勢力들이
成宗의 次男 晉城大君을 王으로 추대하는 中宗反正으로 廢位되었다. 이 후 江華 喬桐 扶芹堂에
圍籬安置되었다가 中宗 1년(1506) 31세로 他界했다.(*筵: 대자리 연 *芹: 미나리 근 *籬: 울타리 리)
*燕山君에 대한 認識
‘燕山君’하면 ‘暴君’을 聯想하는데 두 번의 士禍와 暴政으로 初期의 業績은 묻히고 後期의
暴政만 부각되었는데 이는 中宗反正 勢力이 ‘反正을 正當化하기 위하여’ 中宗 4년에 편찬되어
反正勢力들의 영향으로 보는 視覺도 있다.
卽位 初에는 成宗末期의 사치풍조를 단속하기 위해 禁制節目을 만들었으며, 賜暇讀書制度를
부활시키고, <國朝寶鑑>을 편찬하여 後代 王들의 帝王修業에 龜鑑이 되게 했다. 常平倉을 설치해
物價를 안정시키고 戶籍式年 改正으로 백성의 불편을 해소하고 女眞族의 침입이 잦은 邊方地域을
안정시키고 備戎司를 설치하는 등 國防에도 힘을 쏟았다. 燕山君은 7세에 世子로 冊封되어
12년간 世子修業을 받고 붓글씨도 잘 쓰고 實錄에 130여 편의 詩가 실릴 정도로 詩도 잘 지었다고
한다. 成宗 때 三司(司憲府∙司諫院∙弘文館)의 권한이 肥大해져 王權과 충돌하게 되는데 연산군은
凌上(윗사람을 업신여김)으로 생각하고 이를 剔抉하는데 盡力하였다.
(*凌: 업신여길 능 *剔: 바를 척 *抉: 도려낼 결)
燕山君 4년(1498) 戊午士禍로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고 王權을 國家經營이 아닌 개인적인
慾望充足으로 혼동하여 戊午史禍 때 國王便이었던 大臣들도 등을 돌리자 燕山君 10년
甲子士禍에서는 大臣들도 피해를 입었는데 母后 賜死事件으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으며
甲子士禍갑 이후 暴政은 더욱 加速되었다.
물론 燕山君은 朝鮮朝 최고의 暴君이지만 몇 가지 애매한 점들이 있다고 한다.
戊午士禍가 연산군이 母后의 賜死 사실을 알고 보복했다고 하나 이는 小說에서 起因했으며
연산군은 즉위 직후에 賜死 사실을 알았다. 中宗反正의 결정적 契機가 된 큰어머니를 겁탈했다는
사건도, 燕山君 12년 기록에 ‘承平府夫人(月山大君의 妻) 朴氏가 王의 총애를 받아 胎氣가 있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카더라 통신’인 셈인데, 당시 朴氏가
52세였으니 壽命도 짧던 시대에 ‘姙娠할 수 있었을까?’하는 疑問도 있다.
燕山君은 죽을 때 마지막 남긴 말은 “居昌郡夫人 愼氏가 보고 싶다(欲見愼氏)”였다고 한다.
또 연산군이 1506년 9월 2일 中宗反正으로 廢位된 두달쯤 뒤(실제는11월 8일) 疫疾로
病死했다(因疫疾而死)고 하는데 31세의 청년이 그것도 동짓달에 疫疾로, 그것도 두어 달 뒤에
죽었다고 기록했으니 일부에서는 毒殺로 의심하게 하는 이유이다. 在位 12년간의 기록이
<燕山君實錄>이 아닌 <燕山君日記>로 기록되고 조금 애매하고 客觀性과 公正性이 조금
缺如된 것은 反正 4년 후 反正功臣들의 亞類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하는 ‘勝者의 記錄’이라고도
하는데, 어차피 ‘歷史는 勝者의 記錄’인 것을…. 공정하게 다시 평가하면 燕山君에 대한 평가는
功過를 구분하여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居昌郡夫人(1476~1537) -本貫; 居昌 -姓氏: 愼氏
居昌郡夫人은 居昌府院君 愼承善과 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成宗 7년(1476) 出生했다.
成宗 19년(1488) 王世子嬪에, 1494년 燕山君이 王位에 올라 王妃로 冊封되었다. 그러나
1506년 中宗反正으로 燕山君이 廢位되자 居昌郡夫人으로 降封되어 宮 밖 貞淸宮에서 寄居하다
中宗 32년(1537) 61세로 他界했다. (*牟: 소 우는소리 모)
*義貞宮主(? ~ 1454) -本貫; 漢陽 -姓氏; 趙氏
義貞宮主는 知敦寧府事 趙賚의 딸로 世宗 4년(1422) 上王 太宗의 後宮으로 揀擇되었으나 곧
太宗이 昇遐해 嬪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 후 世宗은 趙氏를 嬪에 冊封하고자 했으나 婚禮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특별히 義貞宮主라는 爵號를 내렸으며, 端宗 2년(1454) 他界했다. (*賚: 줄 뢰)
*燕山君의 딸 徽順公主와 사위 綾陽尉 具文暻
徽順公主는 燕山君과 居昌郡夫人 愼氏의 長女로 燕山君 7년(1501) 具文璟과 결혼했으며,
出嫁 後 徽愼公主로 封號를 개칭했으며, 1506년 中宗反正으로 燕山君이 廢位되자 爵號가
削奪되었다. 燕山君의 사위 綾陽尉 具文暻은 本貫이 綾城인 具壽永과 吉安縣主(世宗의 八男
永膺大君의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綾陽尉가 되었다. 1506년 中宗反正으로 燕山君이
廢位되자 爵號가 삭탈되었으며, 反正 以後 具壽永이 中宗에게 具文暻과 徽順公主의 離婚을
奏請했으나 大臣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燕山君墓 사진
(01) 燕山君 墓域 入口
[사적 제362호, 연산군 묘] 표석이 있으며, 뒤쪽 언덕에 墓域이 보인다.
(02) 燕山君 墓域 全景 -사적 제362호
앞에서부터 燕山君의 딸과 駙馬의 雙墳 - 義貞宮主 趙氏 墓 單墳 - 燕山君과 居昌郡夫人
申氏의 墓, 雙墳이다. (*駙: 곁마 부)
(03) 燕山君 墓(왼쪽)와 居昌郡夫人 愼氏의 墓
東洋의 禮節 方位는 앞에서 보았을 때 ‘左女右男’이나 사람이 죽으면 陰∙陽의 方位가 바뀌어
‘左男右女’가 된다고 한다.
(04) 燕山君 墓
(05) 燕山君 墓碑
碑文은 [燕山君之墓]라고 楷書體로 刻字했다.
(06) 燕山君墓 床石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상석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1991년 史蹟(제362호)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放置되어 있었다고 한다.
(07) 燕山君 墓 長明燈
(08) 居昌郡夫人 愼氏 墓
(09) 居昌郡夫人 愼氏 墓碑
碑石의 表面 일부가 떨어져나가고, 심하게 損傷되었다.
(10) 居昌郡夫人 愼氏墓의 床石
(11) 居昌郡夫人 愼氏 墓의 長明燈
(12) 燕山君 墓의 石物과 曲墻(왼쪽), 文人石 1쌍과 望柱石, 武人石은 없다.
(13) 燕山君 墓의 石物과 曲墻(오른쪽), 居昌郡夫人 愼氏 墓 쪽.
(14) 義貞宮主 趙氏 墓
墓碑에는 [義貞宮主 趙氏 墓]라고 陰刻했다.
趙氏는 太宗의 後宮으로 揀擇되었으나 婚禮 前에 太宗의 昇遐로 嬪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宮主의 爵號를 받았다. (*爵: 벼슬 작)
(15) 燕山君의 駙馬 具文暻의 묘(왼쪽)와 딸 徽順公主의 墓 (*駙: 곁마 부)
(16) 燕山君의 駙馬 具文暻의 墓碑
碑文은 [綾城具公之墓]라고 楷書體로 刻字했다.
(17) 燕山君의 딸 徽順公主의 墓와 墓碑
墓碑에는 [全州李氏之墓]라고 楷書體로 刻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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