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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역사 탐방

(2-8-2)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京畿南部(水原 華城行宮-廣敎山)

작성자孤 山|작성시간21.02.11|조회수109 목록 댓글 0

           (2-8-2)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京畿南部(水原 華城行宮-廣敎山)

 

           (가)水原 華城行宮(사적 제478호)

            水原 華城行宮 -사적 제478호

          正祖 13년(1789) 水原邑을 華城市 安寧面에서 八達山 아래로 옮기면서 官廳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으며,

          王이水原에 내려오면 잠시 行宮으로도 사용했다. 朝鮮時代 行宮은 南漢山城∙北漢山城∙溫陽溫泉行宮 등 여러 곳에

          있었으나, 全國의 行宮 중에서 華城行宮은 規模나 格式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다.

          正祖는 1789년 父親 思悼世子의 墓所를 楊州 拜峰山(現 東大門區 典農洞)에서 옛 水原府 邑治자리로 옮기고,

          이듬해부터 13차례 顯隆園을 방문할 때마다 華城行宮에 머물렀다. 특히 正祖 19년(1795) 母親 惠慶宮 洪氏의

          回甲宴을 華城行宮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建立했다. 華城行宮은 567칸으로 正宮形態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1909년부터 水原住民을 위한 病院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이 撤去되어 落南軒만 남아

           있었으며, 華城築城 200주년인 1996년부터 復元工事를 시작해 2003년 482칸으로 1단계로 복원하고 一般에 公開했다.

         (01) 華城 西將臺에서 본 水原 華城行宮 (*行宮 사진은 12.05.22/14.07.28)

        (02) 水原 華城行宮 前面

         홍살문 바로 뒤에 禁川을 건너 新豊樓가, 홍살문 뒤로 華城 西將臺가 보인다.

            *禁川: 朝鮮時代 대부분의 宮闕 정문 안에 흐르는 물길인 明堂水로, 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官人들이

                     淸廉한 마음을 가지고 百姓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03) 華城行宮 新豊樓.

           1790년에 세운 2층 구조의 樓門으로 水原 華城行宮의 正門이다. 처음에는 鎭南樓라고 했으나 1795년 正祖의

           命으로 新豊樓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漢 高祖 劉邦의 故鄕 豊沛에서 따왔는데 正祖가 華城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新豊樓] 편액은 參判 曺允亨의 글씨이다. (*沛: 늪 패)

                          (04) 느티나무[槻木] -京畿保護樹 5-3(1982년), 樹高 30m, 줄기둘레 6m

                           600년이상 된 老巨樹로 華城城役 이전부터 水原을 지켜온 神靈스러운 나무로 靈木, 神木,

                           槻木이라고 불렸으며 옛날부터 잎을 따거나 가지를 꺾으면 木神의 노여움을 사 어려움을

                           겪으며, 所願紙에 소원을 적어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화재로 훼손되어 2003년 水原市에서 나무 살리기 작업을 펴 현재의 偉容을 보여주고 있다.

                                           (*槻: 느티나무 규)

        (05) 左翊門

         좌익문은 中陽門 앞에 있으며, '左翊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行宮을 지키는

         中三門이다. 扁額은 正祖의 命으로 鄭東浚이 썼다. (*翊: 도울 익)

         (06) 奉壽堂. 水原 華城行宮의 正殿

          奉壽堂은 임금이 行次할 때는 華城行宮의 正殿으로, 가운데 4칸을 王權을 象徵하는 正殿으로 건축했다.

          平常時에는 華城留守府의 東軒으로 壯南軒이라고 한다. 正祖 19년(1795) 乙卯園行 때 惠慶宮 洪氏의 回甲宴

          進饌禮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면서 ‘萬年의 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奉壽堂>이라는 堂號를 지어

          松下翁 曺允亨이 扁額을 쓰게 했다. 正祖 13년(1789)에 建立하고, 正祖 19년(1795)에 增築했으나 日帝强占期에

          파괴되어 1997년에 復元했다. (*軒: 집 헌 *饌: 반찬 찬)

         (07) 奉壽堂 御座,

             御座 뒤에 日月五峰圖(日月崑崙圖) 병풍을 둘렀다. (*崑: 산 이름 곤 *崙: 산 이름 륜)

        (08) 長樂堂

          奉壽堂의 지붕과 겹쳐 있는 華城行宮의 寢殿으로 正祖 19년(1795) 乙卯園行 때 惠慶宮 洪氏의 寢殿으로

          사용했으며 [長樂堂] 扁額은 正祖 御筆이라고 한다. ‘長樂堂’이라는 堂號는 中國 前漢의 都邑 長安城의

          太后宮이었던 長樂宮에서 따온 것이다.

         (09) 景龍館

          長樂堂의 바깥문으로 사용하던 부속건물로 2층은 누마루로, 1층을 문을 만들어 ‘至樂門’이라고 했다.

          ‘景龍’은 帝王을 상징하는 龍을 의미하며 唐 太宗이 居處한 宮闕에서 딴 이름이다.

         (10) 鳳壽堂과 長樂堂 뒤의 行閣

            行閣 壁(흰색 부분)에는 [正祖班次圖]를 그렸다.

          *正祖班次圖

           正祖가 母親 敬懿王后(惠慶宮 洪氏)의 還甲을 기념하여 父親 莊獻世子(思悼世子)의 華城 顯隆園으로 行次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또는 ‘華城行次圖’라고도 한다. 敬懿王后의 환갑잔치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園幸乙卯整理儀軌>에 檀園 金弘道의 責任下에 崔得賢, 金得臣, 李寅文, 張漢宗, 許寔 등의

           差備待令畵員들이 제작한 木版畵가 남아 있다. 正祖班次圖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했으며, 黑白木板그림으로 남아있던 것을 1994년에 彩色되어 奎章閣에서 所藏하고 있다.

                          (*懿: 아름다울 의 *寔: 이 식)

         (11) 正祖班次圖의 正祖大王(가마) 부분

           正祖班次圖의 일부로 正祖가 惠慶宮 洪氏의 還甲을 기념하여 父親 莊獻世子(思悼世子)가 묻힌 華城 顯隆園으로

           行次하는 모습으로, 그림 가운데 ‘座馬’가 임금의 위치인데 正祖임금은 그리지 않았다.

                 *班次圖: 宮中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12) 正祖班次圖의 惠慶宮 洪氏 가마部分

        (13) 華城行宮 洛南軒 -10.10.09

           正祖 18년(1794) 완공한 건물로 正祖 18년(1795년) 乙卯園行 때 特別科擧試驗·養老宴·軍士들의 會食 등 각종

           행사를 치른 곳이다. ‘洛南軒’이란 이름은 中國 後漢의 光武帝가 洛陽으로 都邑을 옮기고 宮闕 이름을

           ‘南宮’이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日帝强占期에 華城行宮이 모두 헐렸으나 唯一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14) 得中亭

          正祖가 활을 쏘던 亭子로, 정자에서 화살 4발을 쏴 모두 맞춘 기념으로 ‘得中亭’이라고 했다. 원래 落南軒 자리에

          있었으나 正祖 18년(1794) 移建하고 正祖御筆 [得中亭] 扁額을 걸었다. 현재 건물은 1998년에 復元했다.

         *[得中亭] 扁額은 正祖의 御筆로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고 한 [禮記 卷46 射義] 句節에서 '得'과 '中'字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15) 維與宅

          平素에는 華城留守가 寄居하다가 正祖가 行次時에 머물며 臣下들을 접견하는 건물로, 正祖 14년(1790)에 建立하고

          [隱若軒]이라고 했다가 1796년에 增築하면서 [維與宅]으로 바꾸었다. (*維: 벼리 유 *隱: 숨을 은)

         (16) 裨將廳

           華城留守府의 裨將들이 대기하거나 사무를 보던 건물이다. 裨將이란 조선시대 監司·留守·兵使·水使·遣外使臣을

           수행하고 보좌하던 武官 벼슬이다. (*裨: 도울 비)

         (17) 南軍營

            壯勇營 外營의 騎馬兵이었던 親軍衛 200명이 살면서 지키던 건물로, 正祖 13년(1789)에 처음 건립했으며,

            1794년에 增築했다. 반대쪽 新豊樓 북쪽에는 北軍營이 있다. (*騎: 말 탈 기)

         (18) 擧重機

            茶山 丁若鏞이 ‘奇器圖說’을 참고로 개발한 重量物을 들어올리는 기계로, 水原華城 築城에 사용했으며,

            ‘華城城役儀軌’에 조립된 모습과 分解圖가 收錄되어 있다고 한다.

                           (19) 轆轤(녹로)

                              水原華城을 축성할 때 사용한 기계로 擧重機보다 얼개가 조금 간단한 起重機이다.

                                   (*轆: 물건 달아 올리는 바퀴 녹 *轤: 두레박 틀 로)

         (20) 水原 華寧殿(사적 제115호)

          *水原 華寧殿 -사적 제115호

           華寧殿은 純祖 1년(1801) 先王인 正祖의 지극한 孝誠과 遺德을 길이 받들기 위해 水原府의 行宮 옆에 세운

           정면 5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正祖의 肖像畵를 奉安하고 해마다 祭祀지내던 건물이며, 華城에서 ‘華’를,

           詩經에서 ‘歸寧父母(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에서 ‘寧’을 따 [華寧殿]이라고 했다. [雲漢閣]이라는 扁額글씨는

           純祖의 親筆이다. 華寧殿은 正殿과 移安廳, 複道閣 및 齋室과 香大廳· 典祀廳 등을 갖추고 內∙外三門까지 具備되어

           朝鮮時代 國王의 肖像畵를 모신 影殿의 格式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殿閣이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當時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04년 純祖가 처음 華城에 와서 隆陵과

           健陵에서 祭를 올리고 華寧殿에서 酌獻禮를 치렀으며, 정기적으로 正祖의 誕辰日(음력 09. 22)에는 誕辰祭와

           臘享大祭를 지냈다. (*酌: 술 부을 작)

         (21) 水原 華寧殿 雲漢閣

          雲漢閣은 水原 華寧殿의 正殿으로 正祖의 御眞을 奉安한 건물로, 雲漢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祈雨祭를

          올릴 때 불렀다는 <詩經>의 詩句에서 따 왔다. 앞에는 祭祀 때 樂工들이 音樂을 演奏할 수 있는 月臺가 있고,

          3개의 계단이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魂魄이 專用하는 계단이다. 1801년네 建立한 朝鮮後期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22) 雲漢閣에 봉안된 正祖의 御眞

           日月五岳圖(日月崑崙圖) 앞에 군복을 입은 모습이 특이하다. 正祖가 행차할 때는 매번 得中亭에서 활 쏘기를

           했는데 50발 중에 49발을 命中시키고 한발은 일부러 안 쏠 정도의 名射手였다고 한다. 顯隆園 齋室에 모셨던

           正祖 御眞과 昌德宮 宙合樓의 御眞을 함께 奉安했으나 1953년 正祖御眞이 燒失된 이후에 새로 만든 標準影幀이다.

         (23) 雲漢閣 月臺에 있는 香爐와 드므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으로,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火鬼의 얼굴이 비치면 놀라 숨거나 움츠려, 火氣가

            鎭壓된다고 생각해 설치한 火災豫防 象徵物로 木造建物의 脆弱點인 火災를 예방하기 위한 呪術的 의미의

            防火施設이다. (*脆: 연할 취)

         (24) 華寧殿 祭井

          華寧殿의 祭禮에 사용할 井華水를 뜨는 우물로 ‘御井’이라고도 한다. 華寧殿 祭井은 正方形으로, 各 方向에

          14개(四面 56개)의 長臺石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으며, 깊이 5.4m, 물이 고인 깊이는 바닥에서 약 4m이다.

         (25) 與民閣

          行宮廣場 길 건너에 있는 與民閣은 水原華城의 中心部에 있는 鐘閣으로, 조선 22代 正祖가 實學과 孝의 精神으로

          만든 水原을 首都와 같은 地位의 都市로 만들기 위해 설치했으며, 日帝强占期에 燒失되어 '水原華城' 復元事業의

          일환으로 2008년에 重建했다. 鐘의 4면에는 人人和樂(인인화락), 戶戶富實(호호부실), 水原爲本(수원위본),

          世邦昌華(세방창화)를 새겼으며, 鐘閣의 이름은 ‘더불어 사는 幸福한 都市’의 의미로 [與民覺]이라고 했다

                           (26) 與民閣 銅鐘

                                鐘은 朱錫靑銅으로 높이 3.86m, 지름 2.21m, 무게 21.5톤이다.

 

          (나) 光敎山(△582m)

         水原市와 龍仁市의 境界에 있는 水原의 鎭山으로, 원래 이름은 光嶽山이었으나 高麗太祖 王建이 後百濟 甄萱을

         물리치고 이 산의 行宮에 머물고 있을 때 山頂上에서 光彩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고 '光敎'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하며, <龍仁郡地圖邑誌>에는 '瑞峯山'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최고봉인 시루봉(△582m)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白雲山(△566m), 남쪽에 兄弟峰(△448m)이 있다.

          (01) 光敎山 시루봉(△582m) 頂上標石

         (02) 廣敎山에서 본 水原市內

         (03) 金俊龍將軍 戰勝地 및 碑 -경기도기념물 제38호

          丙子胡亂 때 廣敎山에서 淸나라 軍隊를 물리친 金俊龍(1586~1642)將軍의 戰勝地를 기념하기 위해 岩盤에 새긴

          글자이다. 金俊龍은 光海君 元年(1609) 武科에 及第한 뒤 여러 官職을 거쳐 全羅道 兵馬節度使에 在任中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軍士를 이끌고 廣敎山에 이르러 激戰 끝에 淸 太祖(누르하치)의 사위인 敵將 揚古利 등을 處斷하고

          對淸戰鬪에서 大勝했다. 金俊龍 死後 領議政으로 追贈되고, 忠襄이라는 諡號도 내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여

          正祖 때 華城 築城에 필요한 石材를 구하러 廣敎山에 간 사람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築城責任者 蔡濟恭이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암반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금준룡전승지)]라 새기고, 그 좌우에 작은

          글씨로 ‘丙子淸乱公提湖南兵, 覲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청란공제호남병, 근왕지차살청삼대장)’이라는 戰勝內容을

          새겼다. (*揚: 날릴 양 *襄: 도울 양 *提: 끌 제 *覲: 뵐 근)

          (04) 6∙25戰爭 無名勇士 遺骸와 遺物發見地 標石 (*骸: 뼈 해)

         (05) 龍仁市 水枝區 新鳳洞에서 본 兄弟峰

         (06) 兄弟峰(△448m) 頂上

        (07) 兄弟峰 데크登山路

             -총 길이 212m -階段數 380개 -休憩데크 2개소 (*憩: 쉴 게)

         (08) 廣敎貯水池

 

 

                     - (2-8-3)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京畿南部 華城 隆∙健陵, 龍珠寺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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