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2월 가장길고 추웠던 3일♧.
Monclar 將軍은 1,2차 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장 이며, 2차 대전시에는 동료 지휘관이
였던, Ridgway, Patton 장군과 함께 서부 전선에서 용맹을 날린 프랑스 최 정예 부대인
外人部隊, 사령관으로 독일군에게 최초로 불멸의 恥辱을 안겨준 Narvik 전투의 영웅이며,
프랑스가 독일군에 항복한 후에는 드골장군 휘하의 자유프랑스군에 편입되여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와 북 아프리카에서 레지스탕스로 독일군에 끈질기게 맞서 싸웠으며 전쟁이
끝 날때는 최고계급인 중장으로 개선하여 군 再建計劃에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 하였다.
Monclar 장군의 本名은 원래 Raoul C, Magrin Vernery 였으나 나치 점령하에서 게릴라로
활동시 악명높은 나치Gestapo의 암살표적이 되어 Code명으로 Monclar로 改名 하였으며
한국전에서도 본명, Vernery 대신 Monclar 로 알려저 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U N은 프랑스정부에 派兵을 요청하자, 당시 프랑스는
政情이 불안정 하고, 內閣이 빈번히 交替되면서,정규군 建制部隊를 파병하기에는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큰 負擔이 되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Monclar 장군이 豫備役과
現役中, 支援兵으로 부대를 編成, 자신이 指揮官으로 派兵案을 정부에 제안,1950, 10,1일
UN軍 프랑스 大隊가 편성 되어 1950,11,29일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國防部次官은 내가 알기에는 大隊級은 中領이 지휘하는데,將軍인 그것도
프랑스 최고 계급이라 할수있는, 三星將軍인, 중장이 어떻게 大隊級을 지휘할수 있습니까?
라고하자,Monclar장군은 계급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저는 아직 58세의 젊은 나이로,
장군 계급장을 떼고, 중령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 합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전우들과 함께 살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가길 원합니다,
저는 제가 프랑스 最初의 UN군으로 參戰, 2次大戰당시 저의 조국, 프랑스를 지킨 용사들과
함께 싸웠다는 自矜心과 연합군이 프랑스의 自由, 平和를 위해 나치와 싸워 피를 흘렸듯이
UN군 일원으서 共産主義와 맞서 人類平和라는 숭고한 가치실현을 위해 參戰했다는 긍지를
後世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決然한 意志로 국방차관을 說得, 承認을 얻어 냈다고 하며, 태어날때부터 準備된 軍人,
Moncla 將軍의 結心을 꺽기에는 준비 안된 국방차관의 說得力으로 부족 했던것 같습니다.
Monclar 中將은 UN군, 프랑스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將軍의 月桂樹대신 5개의 깃털이 달린
中領계급장을 生涯에 두번째로 다시 달고, 戰爭터로 달려 갑니다.
Monclar 장군은 1,2次大戰 거치면서 11번의 戰傷과 17차례의 무공훈장을 받은 풍부한 전쟁
경험의 소유자로,그가 지휘하는 프랑스 大隊가 바로 1951, 2월 中共軍의 春季大攻勢를 물리
치고 反擊의 계기를 마련한 砥平里 戰鬪의 英雄이 됩니다.
1951, 2월 중공군의 소위 春季 大攻勢로 守勢에 몰린 UN군은 중부전선의 美 9軍團 우측방을
掩護 하기위해 肩部陣地로 지평리에 美 10군단 예하,美 2사단, 23연대는 프랑스 보병대대를
配屬 받아 전투단으로 편성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전투단은 중공군 3개사단의 集中攻擊을 받게되자,美10군단장은 Ridgway 8군사령관에 撤收
를 建議 하자, 8군사령관은 陣地死守 명령을 하달, 23연대 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
진지를 構築하고 1951, 2,13일 - 2,15(3)일까지 死鬪를 벌이게 된다.
중공군 39군 예하 3개사단의 집중공격으로 전투단의 兩翼은 急速히 崩壞되어 갔으나 중앙을
지키고 있는 Monclar 대대만이 진지를 고수하여 이는, 마치 2차대전 당시 독일군 최후의
大攻勢를 막아낸 Bastogne의 突出部, Bulge 戰鬪를 연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눈덥힌 산하,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砥平里에 중공군은 끝도 없이
밀려와 적을 쓰러 트려도, 계속 몰려드는 人海의 波高는 멈출 줄을 몰랐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돌출된 Monclar대대만 섬멸시키면 전장의 주도권을 쥐고 美8軍의 中央을
突破하여 춘계공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수있다는 戰術的 잇점을 노려,프랑스 대대에 무려
3개 사단병력을 투입하여 집중공세를 취했다고 합니다.
이을 看破한 Ridgway사령관은 2차대전시 동료 지휘관이 였던, Monclar 중령에게 砥平里 死守
命令을 내렸으며, 이것은 마치 Bulge전투시 독일 기갑부대에 포위되였던 101공수사단장,
맥컬리프 장군에게 Bastogne를 사수 하라고, 당시 군단장이 였던 Ridgway 장군, 자신이 명령
했던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였다고 하며,이렇게 포위된 상태에서 프랑스대대는 不屈의 鬪魂을
발휘,중공군의 銳鋒을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 합니다.
중공군은 미군들과 전투할때 晝間에는 痕跡도 없이 살아 졌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꽹가리,
북,피리,등을 동원하여 波狀적 파도 타기식으로 美軍을 공격하면 미군들은 心理的인 恐怖感에
戰意를 喪失 하고 퇴각하고 만다.
그러나 전장경험이 풍부한 Monclar 중령은 미군과 달리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잔뜩 움추려
들었다가 자기를 물려는 적을 가시로 쏘아 물리치는 고슴도치처럼 특유의 유인작전과 중공군이
心理作戰인 꽹가리 피리등을 동원 공격해 오면 역 심리전으로 프랑스군은 手動式싸이렌을 동원
하여,중공군의 꽹가리 소리등을 제압하므로,오히려 중공군을 心理的수세로 몰아너 혼돈에 빠지
게하여, 와해 시키므로 전세를 반전시킨 위대한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Monclar 중령이 적을 3일간 지평리에 묶어두고 있을때,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특수임무
부대을 투입, Monclar 대대와 연결작전에 성공하므로 6배가 넘은 병력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던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프랑스군의 불굴의 투혼에 굴복, 35000 여구의 전상자를 남긴채 중공군은
비참하게 괴멸 되여 퇴각 하므로 3일간의 대 장정은 끝나지만,砥平里戰鬪는 후일 용문산 大捷과
백마고지 전투로 연결 되게 됩니다.
砥平里전투는 중공군 참전후 승승 장구하던 중공군에 최초의 패배를 안겨 주므로 미군은 퇴각을
끝내고 재반격으로 전환하는 Turning point로 전장의 主導權을 되 찾아올수 있었으므로 美合參과
영국에서 당시 論議되던,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패배론을 일축 시킬수 있는
계기가 되였다.
砥平里전투에서 보여준 Monclar 중령의 대승리는 2차대전시 독일군에게 6주만에 붕괴된 프랑스
군의 치욕스러운 不名譽를 나폴레옹시대 전유럽을 恐怖로 몰아 넣었던 최강 군대로서의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라고 전세계 언론들이 극찬 했다고 하며,이는 한국 전쟁기간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과 견줄만한 중요한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한다.
Monclar장군이 月桂樹대신 중령으로 계급장을 바꿔달고 한국전에 UN군으로 參戰한것은 人爲에
의한 것이지만 共産主義라는 야만성을 징벌하도록 섭리된 歷史의 예정된 純理 였을 것이다.
퓰리처 수상작,The coldest winter 에서 著者,David Halberstam은 砥平里戰鬪에서 Monclar 중령의
승리가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을 포기했을 것이다, 퇴각을 거듭하던 미군은 지평리 전투을 통해
중공군의 취약점을 알게 되고 자신감과 사기를 되찾아 反擊의 계기를 마련 할수 있었다고 한다.
UN군의 6,25 韓國戰爭 戰史중 가장 대표적이고 ,劇的인 戰鬪는 장진호전투와 지평리전투를 들수
있다고 한다, 왜야 하면 壞滅, 崩壞될수 밖에 없었던 戰鬪를 不屈의 人間意志로, 狀況을 反轉시킨
戰場이였기 때문 이며 ,장진호전투가 美海兵이 主役이 였다면, 砥平里 戰鬪에는 Monclar 中領의
役活이 中心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51, 2월 가장 길고, 추웠던 3일 (13-15일간) 간 Monclar 중령이 지휘한 프랑스군이 대한민국을
共産主義 늪에서 구하기위해 어떻게 싸웠으며,어떻게 죽어 갔는 가를 뒤 돌아보아야 하며, 그들이
흘린 유혈이 낭자한 피의 意味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61년전,砥平里戰鬪를 회상하며,전쟁영웅 Monclar장군의 想念에 잠겨,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2012-02-12,창문을 열고,곽상하씀.